[2022 BEST] 마침내 취향의 문제
[2022 BEST] 마침내 취향의 문제
  • 이현동
  • 승인 2023.01.1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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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아르CoAR 이현동 영화평론가

지난해를 마무리하며 쓴 글(「[2021 BEST 10] 완전한 영화, 완전한 대중. 그 불가해함속에서)에서 '영화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면, 올해는 '영화를 보는 내 시선의 정체가 무엇인지' 골똘히 고민했다. 올해 영화 관람기록을 쭉 관망하며 기억을 더듬어 나열한 영화를 살펴보니, 대중들의 관심에는 무관한 작품들이 대다수였다. 혼자 보거나 소수의 인원만 관객석에 남아 자리를 지켰던 영화, 그 고독한 장소에서도 자연스럽게 반짝이는 영화. 왜 나는 이 영화들을 베스트로 채택한 걸까.

결론적으로, 단번에 규정할 수 없는 '개인의 문제이자 취향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좋은 영화를 판명하는 기준이 단순히 취향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면, 궁극적으로 좋은 영화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좋다!'라는 기준은 본질주의자들처럼 규범이 될 수 없다. 마침내 의식의 운동을 취향의 문제로 포착한 시선만이 남을 뿐이다. 그래서 기억을 회상하고 나름의 순서를 조정하고 조합하여 결정한 '좋다'라는 개념을 말하기는 늘 어렵다.

 

1. <헤어질 결심Decision to Leave> 박찬욱 | 2021

ⓒ CJ ENM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의 필모그래피에서 친절한 이야기로 손꼽힐 법한 영화다. 전작 <아가씨>(2016)가 일정한 챕터를 두고 각각의 인물들의 시선으로 관객들에게 영화 진행을 친절하게 안내하는 이례적인(?) 방식이었다면 박찬욱의 이번 영화도 장소의 변화로부터 이 방식을 공유한다. 이전부터 히치콕의 팬임을 공공연히 고백하던 박찬욱 감독의 이번 영화는 <현기증>(1958)의 오마주처럼 보인다. 형사라는 설정을 시작으로 색감, 캐릭터의 변화(1부, 2부)는 <현기증>을 경유하면서 인종, 한국이란 장소, 촬영방식을 통해 현대물로 치환된다. 또한 고경표, 김신영을 캐스팅하여 캐릭터가 가진 무게감을 줄이고, 핸드폰 번역기와 같은 장치를 통해 변주하는 지점 또한 유쾌하다. 15세(?)라는 파격적인 선택을 한 이 영화의 대중성은 감독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인물의 감정선을 공감할 수 있도록 잘 설계되었다.

 

2. <어거스트 버진The August Virgin> 호나스 트루에바Jonas Trueba, Jonás Trueba|2020

ⓒ 엠엔엠인터내셔널

이 영화는 2022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누가 우릴 막으리>(2021)의 전 작품이며, 2020년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10위를 차지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계절을 잘 다루는 감독이라는 것에서 에릭 로메르(Éric Rohmer)의 후예라고 칭해진다. 여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그녀가 주절거리는 문장은 결국 '진정한 자신이 된다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여기서 출발해 다시금 조명하는 여름이 가진 특수한 정동(情動)은 단순히 유흥으로 소비되지 않는다. 주체를 찾는 모험이자 마리아 잉태로 착안하는 신화적 은유로 이행되는 이 이야기는 에릭 로메르의 것과는 분명 다르다. 대화에 머물러 있는 에릭 로메르를 조금 넘어가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할까. 작년에 기욤 브락 <다함께 여름>(2020)이 있었다면, 올해는 단연 이 작품이 여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카우Cow> 안드레아 아놀드Andrea Arnold|2021

ⓒ 그린나래미디어

안드레아 아놀드의 시선은 대체로 냉랭하고 해소되지 못한 채로 머문다.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레드 로드>(2006)에서 남편의 복수를 할 계획을 포기하고 무상하게 어디론가 걷는 여성의 마지막은, 앞으로 연장될 상황에 대한 예언과도 같은 것이다. 미뤄보아 일관적으로 여성의 주연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여전히 해갈하지 못한 냉담한 여성의 시선일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암소가 등장하는 <카우>도 마찬가지다. 첫 번째 다큐멘터리 장르를 선보인 이 영화에서 핸드 헬드와 클로즈업은 처참한 죽음의 실제를 공포한다. 기계로 착유를 실행하고, 주사를 통해 억지로 건강을 부여받고, 임신과 잉태의 과정도 절대 자유롭지 않다. 그저 인간을 위한 구조의 희생양일 뿐인 동물농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행진을 계속한다.

 

4. <탑WALK UP> 홍상수|2021

ⓒ (주) 영화제작전원사 , 콘텐츠판다

올해 <소설가의 영화>(2022)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무엇이 더 좋았냐고 묻는다면 아주 근소한 차이로 <탑>(2022)을 뽑고 싶다. 의도는 모르겠지만 흑백 영화와 컬러 영화를 한편씩 출품하는 패턴을 보이다가 이번에는 흑백을 연달아 선보였다. 탑은 각각의 층위에 관한 영화다. 의도가 식별되지 않는 <탑>은 수평이 아닌 수직적인 영화이며 곧 층계에 따라 그 각기 다른 가능성의 농도가 짙어지는 방식을 표명한다. 이전의 영화 중에 <그 후>(2017)와 레퍼런스(몇몇 인물의 변용)가 유사하긴 해도, 이 영화가 가진 특성은 캐릭터의 성질뿐만 아니라 공간이란 차원 또한 형식화하는 대범함을 보여준다. 영화가 끝나고 이렇게 외치고 싶어졌다. 이것이 과연 "홍상수식 메타버스!?"

 

5. <애프터 양After Yang> 코고나다 Kogonada | 2021

ⓒ (주)영화특별시SMC , (주)왓챠

만약 이 시대에 오즈 야스지로가 살아남아 SF영화를 만든다면 바로, 이 영화가 아닐까 싶었다. 자연, 특정한 설정 숏(복도, 자동차 안, 집), 그 공간 안과 밖의 반복이 제시하는 미적 탐구와 안드로이드 로봇인 양의 기억으로 특정지어진다. 전작 <콜롬버스>(2017)가 건물과 공간에 증류된 기억을 다루듯이 <애프터양>도 문명의 산물인 양을 통해 물리적으론 죽어있지만, 관념적인 기억을 생생하게 소환하여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그가 고백하듯 '시간의 예술'로 정착하는 이 영화는 이전 클래식한 영화를 경유한다. 영화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다시금 귀환하려는 <애프터양>의 미학적 태도에는 산업화된 영화가 끼어들 틈이 전혀 없다.

 

6. <파리, 13구Paris, 13th District> 자크 오디아드Jacques Audiard|2021

ⓒ 찬란

<파리, 13구>는 이민자의 도시인 파리 13구를 배경으로 다룬 작품인데, 감독은 파리 시민들과 이민자들의 격차를 다루려는 의지가 없다. 그는 인물들의 멜로가 어떻게 이 도시의 분위기와 적절히 배합될 수 있을지에 관심이 있다. 그러다보니 모더니즘과 고전주의가 동시에 교직 된 장소인 파리 13구를 영화적 감각으로 도출하기 위해 흑백이란 색감을 도입하거나 EDM 사운드트랙을 추가한다. 그래픽 노블 원작인 이 작품에서 장르 기법을 적용하기 위해 삽입된 분활 숏은, 영화의 매력을 한 컷 발휘하기 위한 장치다. 이 숏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핸드폰과 같은 통신시스템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이런 편재성은 감정을 연동시켜 모더니즘과 고전주의가 결합한 하이브리드형 영화를 탄생시킨다.

 

7. <프랑스France> 브루노 뒤몽Bruno Dumont|2021

ⓒ 엠엔엠인터내셔널

브루노 뒤몽의 작품 하면 가장 먼저 <휴머니티>(1999)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것은 감독의 특유의 절제된 톤이 가진 스타일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 비결에는 비전문 배우 사용에 관한 방법론도 그 결을 같이 한다. 그러나 이후에 <까미유 끌로델>(2013)에서 대중적인 배우인 줄리엣 비노쉬를 캐스팅하여 감정의 보폭이 확장하는 선택을 한다. 이를 고려한다면 그 맥락 속에 <프랑스>는 뒤몽이 강조하고 싶은 인간의 실존이 레아 세이두의 '얼굴'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나는 전략을 취한다. 그녀가 화면 밖에서나 안에서나 인지도 높은 배우, 대통령도 인식할 정도의 유명 기자라는 것을 염두하고 그 이면의 허상을 감별해보면 '취재'가 아닌 '자신'이 주축이 되어 모든 것을 조정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프랑스>는 단순히 사회적 담론이라기보다 보편적인 욕망의 세계를 뚜렷하게 관망하는 영화가 된다.

 

8.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다니엘 콴Daniel Kwan, 다니엘 쉐이너트Daniel Scheinert|2022

ⓒ 워터홀컴퍼니(주)

나의 확고한 기준(?)을 뚫고 '장르' 영화로 유일하게 선정한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의 메시지가 너무나도 단순해서이다. 연출로 인해 사뭇 복잡한 영화처럼 독해될 여지가 있다고 할지언정 가족 서사가 가진 돌파력은 이 영화의 진입장벽과 접근성을 낮추며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 작품으로 변모한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 <화양연화>(2000) 등을 오마주하는 몇몇 시퀀스는 단지 사적인 이야기로 치환한 메타버스가 아닌 영화사적 맥락을 망라한 과거 현재를 총체한 메타버스로 위치한다. <놉>도 이런 특성을 공유하는데, <놉>이 카메라 기능성에 관한 역사적 맥락에 주력했다면 <에에올>은 작품으로 그 넓이를 확대해 가장 원초적인 주제인 가족 서사로 회귀하며 모든 면에서 뛰어난 앙상블을 선보인다.

 

9.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The Apartment with Two Women> 김세인KIM Sein|2021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서사를 풀어나가는 방식도 훌륭하지만, 감정을 증폭시키는 몇 가지 포인트들로 풍성함을 느낄 수 있었던 영화이다. '빨간색'이 주제를 형상화하는 기호로 언표됨은 그들이 여성이기 때문인데, 이는 계속해서 유전되는 세계관으로 그들의 배경 안에 반복하여 지시된다. 대표적으로 엄마 수경(양말복)의 진홍색 염색 머리와 빨간색 모닝이 그 예다. 딸 이전(임지호)은 엄마에게 종속된 세계에서 탈출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녀는 엄마가 자신을 친 모닝을 타고 다니며 매번 집을 떠난다고 말하지만, 다시 돌아와 엄마와 마주한다. 단편 <컨테이너>(2018)를 우연히 보고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는데, 속도감 있는 리듬과 연출의 밀도, 그리고 두 배우의 연기가 잘 배합된 작품이며 진실로 군더더기 없이 140분가량의 시간을 잠재우는 영화다.

 

10. <오마주Hommage> 신수원Shin Su-won|2021

ⓒ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올해 상영된 영화 중에 '필름'에 관련된 영화 두 가지가 있었다. 장이머우의 <원 세컨드>, 그리고 이 작품이다. '필름'은 불가항력적으로 '과거'를 회고하기 마련이다. 내게 '필름'하면, 빅토르 에리세의 <벌집의 정령>(1973)에서 필름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이 이를 반갑게 맞이하는 모습이 불현듯 떠올른다.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집에서 각자 의자를 가져와 관람을 시작할 때, 보이는 마을 주민들의 반짝이는 눈들.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본다'라는 가치는, 다시금 영화라는 매개와 같이 갱신되는 셈일 테다. 자신을 모티브로 삼은 <레인보우>(2010)를 개봉할 당시 불안에 떨었다던 신수원 감독은, 이제 '필름'을 관통하여 과거를 여유롭게 응시할 힘이 생겼다.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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