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어 수업' 관계의 발명
'페르시아어 수업' 관계의 발명
  • 이현동
  • 승인 2022.12.20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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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페르시아어와 이름과의 상관관계"
ⓒ 영화사 진진

가장 먼저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파딤 피얼먼 감독의 <페르시아어 수업>(2020)을 보며 상기할 수 있는 의문은 '이 영화가 과연 윤리적이거나 교훈적인 여지를 얼마나 갖고 있느냐'일 것이다.

역사적 기록이나 이 영화에서처럼 암울한 유대인의 죽음을 다룬 영화에서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건, 잔혹한 이 사건에서 윤리적인 교훈을 도출하려는 강제적인 집착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이 주제와 유사한 작품으로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한 라즐로 네메스 감독의 <사울의 아들>(2015)은 카메라를 통해 발휘했던 실제성(핸드헬드, 롱 테이크 등의 활용)과는 다른 방향성을 택한다. 라즐로 감독이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그 시기에 발생한 음울했던 과거를 그저 반성적으로 사유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있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서사'에 관심이 많았다. 즉, '관객들에게 흥미를 가져다줄 수 있는 서사인지'가 그에게 더 중요했다.

이와 동일하게 파딤 피얼먼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영화가 특정 국적을 대상으로 하거나 영토, 종교에 관한 것이 아니며 이것은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밝혔다. 보편적인 이야기가 되기 위해선 시대와 배경의 묘사보다 사건과 관계가 조명되어야 한다. 이는 감독이 자신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고백하는 비토리아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1950)에서 그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분명 데시카가 노동자들의 삶을 다뤘다고 할지언정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야기의 구성이 관객들에게 어떤 감응으로 도달할 수 있는지'이다. '자전거'가 물리적인 도구로 영화의 의미를 총체하고 있다면,

<페르시아어 수업>은 '언어'를 통해 생존과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동시에 딜레마를 겪는 인물의 감정을 추출한다.

ⓒ 영화사 진진

<페르시아어 수업>은 군인과 포로라는 신분의 위계가 차츰 붕괴하는 과정을 다룬다. 벨기에 유대인인 질(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은 포로로 끌려가 총살을 당하기 전, 우연히 옆 유대인의 요청으로 샌드위치와 페르시아 역사를 다룬 책을 교환하고 운명이 뒤바뀌게 된다. 마침 자기 여동생이 있다고 추정되는 테헤란에서 레스토랑을 개업하고 싶었던 코흐(라르스 아이딩어)는 질에게 조리사로 편의를 봐주고 밤에는 페르시아어를 가르치게 한다. 질은 생존을 위해 매일 어휘를 만드는 수고를 해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포로 연명부에 기록된 이름을 토대로 새로운 어휘를 만들어 그에게 매일 언어를 전수하게 되면서 둘의 연대는 더욱 깊어지게 된다. 여기서 이들의 질서를 굴절시키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설정으로 도입되는 '언어'는 존재론적이든 사회과학적이든 모종의 담론을 이끌어냄과 동시에 서스펜스 장르를 설계하는 데 있어 유용한 도구로 활용된다.

질이 만들어내는 언어는 마치 영화가 사실이 될 수 없듯 속임수에 불과하지만, 엄밀히 말해 중의적으로 코흐와의 거리와 유대인의 거리를 나타내는 요소이자 이미지를 나타내는 기능적인 시도와도 결합되어 있다. 질과 코흐와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당면할 파멸은, 결국 유령처럼 버려진 포로들의 이름으로 귀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볼프강 콜하세(Wolfgang Kohlhaase) 소설 원작 『언어의 발명』의 제목과도 그 의미를 공유할 수 있지만, 모순적일지언정 연대가 불능한 그들에게 이는 관계의 발명이라 치환할 수 있을 것이다. 전체를 보았을 때, 영화에서 거리감을 나타내는 이미지들은 많은 부분 정서를 내포하는 요소로 사용된다. 프레임 안에 필요한 정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므로 발생하는 일관적인 운용은 서사의 연속성과 감정을 증폭하는 도구로 꽤 매력적으로 작용한다.

 

ⓒ 영화사 진진

이미지와 언어가 가까워지면 질수록

영화 처음 두 개의 시퀀스가 등장한다. 먼저, 철길을 걷는 벨기에 유대인인 질은 상기된 얼굴로 카메라 앞에 등장한다. 이때 고정된 프레임 앞에 점차 다가오는 그의 모습은 자신의 이야기를 호소하기 위한 결단과 의지를 위압적으로 기술하기 위한 장치로 작동한다. 곧이어 유대인의 이름이 적힌 기록이 태워지는 모습도 유사한 방식인데, 관객이 이름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시점에서 프레임은 계속해서 이 구도를 유지한다. 여기서 엔딩 시퀀스가 오프닝 시퀀스와 대조되는 것은 처음 장면에서는 질의 모습을 정면으로 응시한다는 것이고, 마지막은 이를 리버스 숏으로 하여 점점 멀어지는 후면을 강조한다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가까움과 멀어짐이란 '거리감'은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인 동시에 앞으로도 발생할 사건이 끝이 아닌 현재에도 이어지는 연장선임을 '철길'이란 이미지로 부연 설명한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질과 코흐를 담는 각각의 프레임에서 시점 숏은 어느 순간 축약되고, 그들을 한 프레임에 잡는 장면들이 증가한다. 그들의 물리적인 거리를 기술하는 이미지는 시간이 경과하면 할수록 그들의 말과 함께 비례한다. 코흐는 페르시아어를 배우는 동기에 관해 질에게 유일하게 털어놓을 정도로 그를 향한 믿음이 있다. 일정한 시간이 경과한 다음 유대인들이 다른 수용소로 이동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는데, 통상적인 관례에도 불구하고 코흐는 2번씩이나 질을 보호해 줄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이끌어내는 건 바로 '언어'다. 이처럼 둘 사이에 축적된 소통은 '언어'적인 것이자 '거리'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페르시아어 수업>의 전반적인 이미지는 거리의 형태를 물리적, 관념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주력한다. 영화에서 이탈리아 청년의 죽음을 슬프게 다루는 후반부 지점은 질과 코흐와의 분열을 예고하고, 이 전쟁의 기간이 단순히 유대인의 죽음으로 제한하지 않는 이야기임을 분명히 한다. 이후 다른 수용소를 향해 죽음을 각오하며 이동하던 질에게 코흐가 자신이 "난 살인자가 아니야"는 말은 "살인자를 먹일 뿐"이라는 단호하게 응수되면서 영화는 더 이상 둘을 한 프레임에 담지 않는다. 종국에 서로 자신의 길을 찾아 두 갈래로 갈라지는 장면은 둘의 관계, 즉 거리의 종국을 나타낸다.

 

ⓒ 영화사 진진

규율은 무엇으로 환원되고 있는가

영화에서 규율은 언젠간 붕괴할 것처럼 보인다. 코흐(간부)와 질(포로)의 관계도 그러하지만, 사령관과 여자 군인인 엘자(레오니 베네스치)와의 스캔들, 타의지만 수용소 밖에 나갔다 온 질의 행방 등은 강력한 규율 아래 크게 조처되지 않고 있으며, 느슨하기 짝이 없이 보이는 질을 향한 검증은 관료주의의 조롱으로도 취급된다. 히틀러의 사망 이후, 전쟁 패배를 예감한 사령관이 유대인을 비롯한 병사들의 기록을 불태우며 함께했던 병사를 행해 누구냐고 묻는 장면은 질과는 다른 모습을 취한다. 그렇다면, 모든 규율이 소멸하고 남은 것은 무엇인가. 바로 질이 수용소 인원들의 이름을 다시금 창조하고 암기했던 기억의 소산들만 남았고, 질은 독일과 대립하던 타국의 막사로 찾아가 죽은 이들의 이름 2,840개를 보고한다. 여기서 규율을 벗어난 질이 흘리는 눈물은 이전엔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타자의 얼굴에 대한 호소다.

질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사실 이전부터 그의 기능은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었다. 맨 처음 샌드위치와 책을 바꾸자는 어느 유대인의 제안과 그가 질의 아버지 직업을 묻을 때의 대답은 질이 얼마나 생존에 최적화된 존재인지를 암시한다. 무조건 규율을 따르지 않는 '랍비'인 아버지였다고 고백하는 질은 그 유연함을 물려받아 생존의 비결을 본능적으로 체득하고 있는 캐릭터이다. 질을 잡고 통조림이 포상이라고 흥겨워하는 독일 병사의 모습은 샌드위치와 책을 교환했던 그 유대인의 운명과 별다른 것이 없다. 종말의 기운 속에 삶을 연명하는 그들의 '하일 히틀러'란 구호는 참으로 공허하다. 규율은 병사들에게 통용되지 않고 오로지 포로들에게만 적용된다. 가슴팍에 별 모양으로 된 자수를 받기 위해 줄을 서는 포로들의 모습과 손 씻기를 비롯한 식당의 수많은 내부 규정을 포로들에게 설파하는 병사가 있지만, 이러한 내부 규정에 영향을 받는 건 그들뿐만 아니라 위계로 설정된 아이러니하게 군대의 구성원들이다.

분명 규율은 독일 군이 독점하지만, 그들을 제외하고 그 혜택을 유일하게 받는 대상은 질이다. 질은 코흐와의 유대를 통해 규율에서 자유 할뿐더러 이탈리아 형제에게 음식까지 베풀어 주는 여유까지 갖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혜택을 누리기보다 그가 선택한 건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가짜 페르시아어가 아니라 진짜 이름을 부르는 것에서 모든 규율은 파기된다. 테헤란 공항에서 결국 이 언어 사용으로 붙잡혀간 코흐의 행방이 그곳에서 끝나듯이 가짜 규율로 살던 삶은 그렇게 소멸할 것임을 감독은 말하고 있다. 늘 그렇듯 규율은 영원하지 않지만, '이름과 기억'은 그렇게 각인되고 소환되고 있음을 영화는 지시하고 있다.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 영화사 진진

페르시아어 수업 
Persian Lessons
감독
바딤 피얼먼
Vadim Perelman

 

출연
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
Nahuel Perez Biscayart
라르스 아이딩어Lars Eidinger
레오니 베네쉬Leonie Benesch
요나스 나이Jonas Nay
알렉산더 보이어Alexander Beyer

 

배급|수입 영화사 진진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128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2.12.15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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