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BEST] 폭풍이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며
[2022 BEST] 폭풍이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며
  • 김민세
  • 승인 2022.12.2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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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세 영화전문기자

폭풍이 지나가고, 폐허의 광경을 마주하고 나서야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할 수 있게 된다.

다사다난한 한 해를 정신없게 보낸 뒤에야, 재작년 즈음부터 막연하게 해왔던 '왜 영화여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차분하게 돌아보며 개인적인 재정비를 할 수 있었다. 질문이 '우리는 왜 영화를 보는가' 또는 '나는 왜 영화를 써야만 하는가'라는 다소 과격한 회의로 변할 때마저도, 어김없이 수많은 영화는 나를 놀라게 했다. 특히, 올해 본 영화들은 내가 생각하던 '영화가 할 수 있는 것'의 관습을 도전적으로 깨고 스스로 영역을 확장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각 영화는 전에 본 적 없는 과감한 형식으로 영화의 개념에 도전했고, 시대의 풍경과 지각을 아카이브할 방법론을 끈질기게 탐구했으며, 영화가 포착할 수 있는 것은 몸의 순간들, 기억의 파편들, 마음의 풍경들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끊임없는 배움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한 영화들에 항상 감사하다. 난 이 배움의 과정이 세상을 배우는 또 다른 방법이 될 수 있음을 믿는다. 

 

1. <우연과 상상 Wheel of Fortune and Fantasy> 하마구치 류스케 Hamaguchi Ryusuke | 2021

ⓒ 그린나래미디어

뛰어난 이야기꾼으로서 하마구치 류스케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고 흡입력이 있다. <우연과 상상>의 세 단편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연과 상상>의 서사는 과연 시네마틱한가? <우연과 상상>은 왜 소설이 아니라 영화가 되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이 질문을 던져야만 '이 영화가 만드는 기적 같은 영화적 순간'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다. 그 순간을 만드는 것은 수많은 존재와 기억들이 소환되고 수많은 상호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 배우라는 몸이다. 연기라는 방법론을 통해 배우의 몸 안에서 발생하는 진실의 몸짓과 얼굴(특히 오즈 야스지로를 상기시키는 특유의 정면 얼굴), 미세한 몸의 각도와 걸음의 리듬을 보고 있다 보면,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카메라의 존재(그리고 카메라 뒤의 존재)를 불현듯 느끼게 되면, 하마구치의 이야기가 왜 펜이 아닌 카메라로 써져야만 하는지 실감하게 된다. 하마구치의 영화를 본다는 건, 그리고 <우연과 상상>을 본다는 건, 카메라 앞에 선 한 사람 안에 있는 몸의 역사와 그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를 본다는 것이고, 알 수 없는 타자를 마주한다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카메라의 섬세하고도 사려 깊은 응시를 체험한다는 것이다.

 

2. <썬다운 Sundown> 미셸 프랑코 Michel Franco | 2021

ⓒ 엠엔엠인터내셔널

프랑코는 이번에도 바다로 돌아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해변으로. 프랑코의 영화를 움직이는 핵심적인 동력은 언제나 미스터리였으며 그 주변에는 인상적인 바다(또는 물)의 랜드 스케이프가 있었다. <썬다운>은 카뮈의 구절을 따라 적듯이 뜨거운 햇살 아래 『이방인』의 해변을 폭력과 죽음, 부조리와 미스터리가 섞여있는 프랑코의 영화적 랜드 스케이프로 만들어간다. 이 미스터리는 카뮈가 묘사한 '이방인(뫼르소)'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급전하며, 그 끝에 다다라서는 한 사람의 실존적 회의를 넘어선 사회적 메시지로 확장된다. 프랑코의 초기작에서 볼 수 있던 차갑고 관조적인 리얼리즘의 태도를 넘어서 회화적, 건축적, 초현실적 이미지로 나아가는 듯한 <썬다운>은 "영화는 정치와 가장 멀리 있을 때 가장 정치적일 수 있다"는 말 아래에서 작동하고 있다.

 

3. <헤어질 결심 Decision to Leave> 박찬욱 | 2021

ⓒ CJ ENM

많은 사람이 <헤어질 결심>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표현하는 절절하고도 아름다운 '대사'들에 대해서 언급하곤 한다. 해당 영화의 각본집이 인기리에 팔리고 대사를 인용한 다양한 밈(meme)이 생겨나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하나,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흔들어 놓는 <헤어질 결심>의 사랑의 풍경은 무엇보다 처절하리만큼 아름다운 자연, 산과 바다의 미장센에서부터 시작함을 무시할 수는 없다. 1부의 '산'이 서래의 정체와 살인사건의 진실을 둘러싼 위태로운 미스터리의 풍경이라면, 2부의 '바다(와 안개)'는 서래에게서 빠져나올 수 없는 허망하고도 무한한 해준의 마음의 풍경이다. 마치 동양의 산수화와 일본의 우키요에를 그려내는 듯한 탁월한 촬영이 이를 뒷받침한다.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詩作 메모>, 1988.11.)'는 기형도의 구절처럼 <헤어질 결심>은 예술의 가장 뛰어난 비유가 자연에서 나올 수 있음을, 그리고 그 풍경을 정확히 써 내릴 수 있는 것은 영화 이미지임을 올해의 그 어떤 영화보다 치열하게 증명해내고 있다.

 

4. <소설가의 영화 Novelist's Film> 홍상수 | 2021

ⓒ 영화제작전원사

<도망친 여자>를 처음 보았을 때의 정체 모를 난감함을 기억한다. 김민희가 하염없이 쳐다보는 스크린. 영화라는 바다. 그곳은 '도망'의 출발지일까, 도착지일까. 김민희 자신도 자신이 어디에 놓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 넘실대는 스크린은 이상한 불안으로 나에게 남아 있었다. 이렇게 '김민희가 보는 영화'(<도망친 여자>, 또는 <도망친 여자> 속의 영화)가 의문의 형태로 멈추었을 때,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던 <당신얼굴 앞에서>의 이혜영은 <소설가의 영화>에서 다시 살아나 '김민희가 보는 영화(<소설가의 영화>, 또는 <소설가의 영화> 속의 영화)'를 찍는다. 그리고 김민희는 다시 스크린을 올려다본다. 나는 의도적으로 <도망친 여자>의 감희, <소설가의 영화>의 길수를 각자의 이름이 아닌 '김민희'로 호명했다. (<당신얼굴 앞에서>의 상옥, <소설가의 영화>의 준희를 연기한 이혜영 또한 마찬가지다.) <소설가의 영화>까지 이른 홍상수의 영화에서 김민희의 존재는, 특히 '무언가(영화)를 유심히 응시하는 김민희', 그리고 '그만의 리듬으로 걸어가는 김민희'의 존재는 더는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그저 '김민희' 그 자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소설가의 영화>는 영화라는 매체와 김민희라는 세상에 대한 홍상수의 가장 솔직한 고백이자 진심 어린 홈비디오다. <소설가의 영화>를 보면서 또다시 자세를 고쳐 앉지 않을 수 없었다. 홍상수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여전히 새롭고, 그는 나에게 아직도 미지의 존재이다. 그렇기에 나에게 홍상수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나의 존재와 나를 둘러싼 세상을 단언하지 않고, 계속해서 문답하고, 반복해서 질문을 변경하고 수정하며, 벅참인지 회한인지 모르는 마음으로 스크린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는 일이다.

 

5. <축복의 집 Dust and Ashes> 박희권 | 2019

ⓒ 필름다빈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 만들어진 죽음에 관한 영화들이 21세기 이후 한 국가가 겪은 몇 번의 참사와 그에 대한 공동체적 무의식을 건드는 텍스트로써 작동했다면, 반면 <축복의 집>은 그렇게 쌓아온 기억과 죄의식의 퇴적물들을 철저히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죽음을 이야기한다. 엄마의 죽음 이후에 이어지는 노동과 장례, 그리고 보험 사기와 관련한 사건들에 휘말리는 어린 남매의 사흘을 뒤쫓는 이 영화는 소재와 형식적인 면에서 흡사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떠올리게 만들지만, 시스템에 대해 고발적인 리얼리즘의 태도를 갖기보다는 죽음이라는 원형적인 관념을 그 어떠한 의미도 볼 수 없는 시간의 절차에 놓인 유물로 그려낸다는 점에 확실한 차별점을 지닌다. 끔찍하고도 무심하게 놓여있는 방바닥의 시체, 화장과 발인의 절차까지 끈질기게 쫓아가는 무의미의 이미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짊어지고 있는 안소요의 무표정한 얼굴. <축복의 집>은 죽음부터 애도까지의 절차를 멈추지 않고 지속함으로써 도리어 죽음 끝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또 다른 숨으로 영화를 닫는다. <축복의 집>은 죽음에 한없이 가까워지다가도, 희망과 치유의 순간까지 나아가는 기묘한 영화이다.

 

6. <실종 Missing> 가타야마 신조 Katayama Shinzo | 2021

ⓒ 디스테이션

가타야마 신조의 첫 상업연출작인 <실종>은 예측할 수 없는 미스터리와 반전으로 가득 찬 각본과 사회문제의 핵심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이 돋보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여겨볼 지점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 특히 '여자 없는 남자들'의 뒤틀린 욕망과 그 트라우마로부터 빠져나오려는 잔혹한 수난기를 그려내는 유려한 연출이다. 그것은 때론 매우 자극적이고, 소리조차 지를 수 없게 소름 끼친다. 하나, 만약 이것이 오로지 단순한 남성들의 수난기로 끝났으면 나는 결국 이 영화를 긍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위험해 보일 수도 있는 <실종>의 이미지와 서사에서 윤리적 계획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결국 그것들이 사건의 주변을 맴돌고 있던 여성의 서사, 그리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가능성의 세계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해의 가장 인상적인 엔딩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는 끝내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이 변화하고 변장하고 실재와 환상 사이를 미끄럽게 빠져나가는 이미지와 트라우마의 세계 속에서, 영화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정확히 마주하고, 또 다른 세대와 함께 주고받고 고민하며,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이라고.

 

7. <아틀란티스 Atlantide> 유리 안카라니 Yuri Ancarani | 2021

ⓒ Dugong Films, Luxbox

논픽션과 픽션의 경계를 허무는 가장 도발적인 질문. 이제는 낡은 수식어가 되었지만, <아틀란티스>는 이 말을 다시 반복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모터보트 하나에 의지한 채 수중도시 베니스를 질주하고 떠도는 폭주족 무리를 담고 있는 <아틀란티스>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미디어 아트와 뮤직비디오의 형식을 넘나드는 형식적 실험이다.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마약과 폭행, 섹스 등은 형형색색의 조명과 강렬한 사운드트랙과 어우러져 그 표현 자체로 충격을 주며, 카메라가 그것을 모두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실제와 인위에 대한 혼란스러운 의문을 낳는다. 이러한 과감한 시도와 스타일은 카메라와 스크린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극한의 시네마적 순간, 심지어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떠한 영적 체험의 순간을 경험하게 하며, 다큐멘터리의 형식과 서사가 갖는 관습을 일제히 무너뜨린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구체적인 질문은 아직 가늠할 수 없으나, 물 위를 역동적이고 매끄럽게 질주하는 모터보트처럼, 동시대 시네마의 전선에서 가장 빠르게 질주하며 시네마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8. <미증유 Unpresented> 쿠도 마사아키 Kudo Masaaki | 2021

ⓒ 영화 <미증유> 스틸컷

코로나 이후의 영화는 시대를 아카이브할 것인가. 이런 질문 앞에서 몇 년간 우리는 크고 작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영화들을 만나왔다. 그중, 올해 부천에서 만났던 쿠도 마사아키의 <미증유>는 이 시대의 시네마를 읽어내는 데에서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 반짝이는 작품이다. 팬데믹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도쿄의 청년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 영화는 몸과 몸, 대상과 카메라, 서사와 서사 사이에 있는 인력과 척력, 그리고 서늘한 진공상태의 순간을 응시한다. 이 기이한 시선은 영화는 결국 만남의 장소임을 상기시키며, '거리두기'라는 접촉이 부재한 상황과 맞물려 영화라는 만남이 깨어지고 실패하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맥락을 절묘하게 짚어낸다. 또한 도쿄 곳곳에서 일어나는 성매매와 포르노 촬영에 관한 에피소드들은 디지털 시대에 카메라가 작동하는 방식과 그 윤리까지 생각을 이어가게 한다. 어쩌면 촬영조차 불가능할 수 있던 사회적 거리두기의 상황 속에서 일주일 만에 구상과 촬영을 마친 이 영화의 대담한 내외적 시도와 동시대를 향한 냉철한 시각에 감탄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9. <애프터 양 After Yang> 코고나다 Kogonada | 2021

ⓒ (주)영화특별시SMC , (주)왓챠

SF 영화가 세계를 이야기하는 태도는 그만의 '세계관'에서부터 시작한다. 감독이자 비디오 에세이 아티스트인 코고나다는 <애프터 양>의 SF적 세계관을 인간과 비인간, 백인과 흑인, 동양과 서양의 정체성이, 그리고 서로 다른 세대가 공존할 수 있는 일종의 '샐러드 볼(Salad Bowl)'로 인식한다. 특히 그의 장편 데뷔작인 <콜럼버스>를 통해 이미 현대 건축을 영화적으로 뛰어나게 해석한 만큼 <애프터 양>에서는 서양식의 유리창과 입식 가구, 자연과의 경계를 지우는 동양식의 넓은 창이 어우러지는 건축적 미장센과, '차(茶)'라는 소재, 자연 친화적인 소품 등, 사려 깊고 시적인 프로덕션 디자인이 돋보인다. 또한 '기억의 파편'을 마치 지도를 그리듯이 돌아보는 이 영화는 때로 오즈 야스지로의 형식을 반복하고 이와이 슌지의 감성을 떠올리게 하며, 미래를 배경으로 한 영화임에도 과거의 것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존경을 표한다. 이렇게 옛것의 '기억'에 기반을 두어 재창조한다는 점에서는 좋은 방법론적 태도가, 나아가 미래의 세계관이라는 가능성의 세계에서 진심 어린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깊고 반짝이는 정서가 엿보인다. 나는 미래를 그리고 있는 SF 영화에서 이런 기이한 노스탤지어를 느끼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10. <군다 Gunda> 빅토르 코사코프스키 Victor Kossakovsky | 2020

ⓒ 영화사 진진

모더니티의 산물인 영화 예술이 근대인의 지각상태를 가장 정확히 아카이브 한다는 벤야민의 이론은 아직까지 유효하다. 즉, 영화는 근대인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동시에 반대로 변화한 세상(근대적 대도시)을 정확히 지각할 수 있게 한다. <군다>는 이런 명제를 뒤집는 듯한 영화다. 농장 속의 돼지와 소, 닭의 일상을 그 어떤 전사와 내레이션 없이 포착하고 있는 이 영화는 동물의 몸을 위한 새로운 영화적 프레임을 창조하며 우리가 프레임 안의 피사체를 인간 중심적으로 보길 거부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90분의 시간 동안 모더니티로부터 탈피하는 새로운 영화적 교육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또한 <군다>는 가장 극적인 마지막 장면에서 그전까지의 형식적 실험을 모두 내려놓으며, '우리가 예술에서 체험하고 이해한 모든 것이 삶에서 무위로 남게 하지 않게 우리 자신의 삶으로써 책임을 질 것(미하일 바흐친, 「예술과 책임」)'을 요청하는 강력한 환경영화, 정치영화가 된다. 영화 예술의 새로운 등장을 마주하고 그 미래에 대해 끈질기게 고민했던 벤야민의 사유(「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는 '예술은 세상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세상은 예술이 될 수 있는가'라고 변경할 가르침을 주었다. 영화가 도리어 세상을 보는 우리의 지각을 변화시키고 확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 <군다>는 지금에 와서 그런 가르침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수작이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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