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덴버 죽이기' 인터넷이 삭제한 한 소년의 현재 시제
'존 덴버 죽이기' 인터넷이 삭제한 한 소년의 현재 시제
  • 김경수
  • 승인 2022.12.1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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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을 인터넷의 감각으로 다룬 시대착오적 연출"
ⓒ 트리플픽쳐스

〈존 덴버 죽이기〉의 서사는 단순하다. 존 덴버가 아이패드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평소 그를 괴롭히던 한 아이가 그의 가방을 훔친다. 존 덴버는 그에게서 가방을 되찾으려고 다투게 된다. 싸움을 지켜보던 한 아이가 존 덴버가 괴롭히던 아이를 발길질하는 것을 찍어서 페이스북에 올린다. 그 영상은 전국구로 퍼져나갔고 존 덴버는 사이버불링을 당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실정인데도 진범은 등장하지 않는다. 어머니를 제외한 누구도 그를 감싸지 않고, 아이패드를 훔친 범인이 나타나지 않으면서 존 덴버는 음모론과 가짜뉴스의 희생자가 되기에 이른다. 학교는 사건을 덮기에 급급해하더니 그를 퇴학시키며, 자신을 지켜주겠다던 경찰은 그에게 자백을 강요한다. 언론은 그가 하지도 않은 잘못으로 그를 비방하기까지 한다. 존 덴버는 경찰이 자신에게 윽박지르는 것을 듣고는 집으로 되돌아와서는 목을 맨다.

충분히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야기라서 기시감이 느껴지기까지 한 이야기다. 이러한 기시감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존 덴버 죽이기〉는 필리핀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다. 이 실화는 충분히 한국 뉴스에서도 유사 사례를 접할 수 있을 정도로 흔한 것이다. 이른바 왕따 문제는 오랜 문제지만 해결되기는커녕 시대에 따라 그 수법이 진화하는 중이다. 다만, 소재가 친숙하다는 것만으로 이 영화가 전형적이라고 평가절하하는 것은 과한 처사다. 문제는 이 영화가 '플롯을 구성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스마트폰으로 인한 비극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정작 영화에서 스마트폰은 인터넷으로 대체하더라도 어색하지 않다. 스마트폰이라는 매체의 감각을 영화가 체현해내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이전의 인터넷 매체를 다루듯 다루기에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 모든 소통이 실시간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느리고 끊기기까지 한다. 이는 5G 세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리듬이다.

 

ⓒ 트리플픽쳐스

스마트폰은 고도로 발달한 무선 인터넷 환경에서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데에서 고유성을 지니는 매체다. 그만큼이나 문제가 있는 게시물이 확산되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만한 것이다.

〈존 덴버 죽이기〉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길어야 나흘, 짧으면 하루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다. 영화는 이를 지나칠 정도로 느리게 그리고 있다. 두 가지 이유로 이를 추측할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안일하고 도덕적인 태도와 결부되어 있다.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한들 그것을 반드시 정적이고 건조한 태도로만, 그리고 캐릭터의 감정선이 폭발하기까지의 과정을 축적하게 그리라는 법은 없다. 이 영화는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연상하게끔 하는 핸드헬드와 인물이 지나가는 동선의 추적하는 카메라를 채택한다. 또한, 존 덴버의 존재감을 뚜렷이 드러내되 존 덴버를 둘러싼 학생을 포커싱 아웃으로 흐리게 만드는 연출을 반복하거나 하면서, 존 덴버라는 캐릭터를 고전적인 방식으로 구축하고 있다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는 두 번째 이유로 이어진다. 〈존 덴버 죽이기〉는 실화를 고발하려는, 정확히는 사법 체계와 사회에 내재된 부조리를 고발하고자 했던 여러 영화와 놀라우리만치 똑같은 플롯 구조를 공유한다. 오해로 인해서 누명을 쓴 선량한 개인이 있고, 그 개인은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누명을 벗고자 하지만 가족을 제외한 이들은 이미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 관객은 이미 사건의 전말을 공유하고 있는데도 그에게 연달아 닥치는 고난을 마주하게 된다. 단적인 예로는 토마스 빈터베르의 〈더 헌트〉(2013)이 있다. 이 영화에도 거짓말을 한 여자 학생으로 인해 성폭행범으로 마녀사냥을 당하는 선생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러한 이야기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부조리가 아닌 그 부조리를 올곧은 신념으로 견뎌야 하는 캐릭터의 비극적인 운명'이다. 인물이 견뎌야 하는 고통은 단계별로 심화된다. 존 덴버에게 부조리가 다가오는 타이밍과 폭력의 상승폭이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친구들끼리의 문제가 가족의 문제로 번지고, 이윽고 시장과 촌장이 문제에 개입하기에 이른다. 결말에서는 TV뉴스를 타더니 온 국민이 그에게 비난을 가한다. 사건이 단계적으로 확장되어야만 한다는 서사적인 개연성이 생긴다는 불안은 실시간으로 가속화되는 마녀사냥의 속도와 그 파급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피해자를 밈화하고 조롱하는 등 악성 댓글이 달리지만, 그것이 오프라인으로 오기까지의 시간은 생각보다 느리며, 그것이 물리적 제약을 가하지 않기에 영화에 긴장감이 사라져버리기에 이른다.

〈존 덴버 죽이기〉는 더 부조리해야만 했다.

영화는 존 덴버가 죽기까지의 과정을 플래시백 없이 현재형으로 그려낸다. 이러한 시제 선택은 이 영화의 유일한 미덕이다. 물론 캐릭터 입장으로만 보자면, 한 번 일이 저질러졌기에 이를 되돌릴 수가 없어서 계속 앞으로만 나아가도록 강제된 환경에 의한 것에 가깝다. 이 영화는 시제로 인해 영화 안 영화와 유비성을 지닌다. 존 덴버가 친구를 폭행하는 영상이 바로 그것이다. 존 덴버가 친구를 폭행하는 영상은 앞뒤가 사라져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마찬가지로 그 영상으로 인해서 존 덴버가 마녀 사냥당하는 과정을 다루는 이 영화는 앞뒤가 사라져 있는 폭행 영상의 구조와 유사하다. 플래시백 없이 전개되기에 존 덴버와 그를 보고 있는 관객은 그저 앞으로 다가오는 부조리한 일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된다. 심지어 그가 물소를 죽여서 빚지고 있다는 진실은 느닷없이 드러난다.

이러한 정보값은 미래에 생길 일의 정보값과 같다. 관객은 그의 과거든 그에게 생길 일이든 모든 일을 부조리하게 느끼게 된다. 인터넷은 존 덴버의 현재를 삭제해버린 셈이다. 그러나 앞으로 생길 일이 더 커질 것이라는 단계적 설정은 어떠한 재난이 닥칠지 모른다는 긴장이 사라지니, 현재형의 효과는 한층 반감되어서 개성이 되지 못한다.

 

ⓒ 트리플픽쳐스
ⓒ 트리플픽쳐스

〈존 덴버 죽이기〉에서 눈여겨 볼만한 것은 에드워드 양의 영화 속 대만 학교를 연상하게 하는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단체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이 설정은 다소 작위적인데 두 번이나 쓰인다. 이는 '필리핀 국가가 공유하는 문제가 존 덴버에 대한 악행을 구성했는가'라는 정치적인 의심이 생기게 한다. 실제로 이 영화는 필리핀 국가의 빈부 격차를 드러내기는 한다. 특히, 존 덴버를 음해하는 무리와 존 덴버의 차이에서 잘 느껴진다. 존 덴버를 음해하는 무리는 실시간으로 인터넷에 접속해 존 덴버가 없는 사이에 그를 비난한다. 존 덴버는 한참 뒤에야 식당에 있는 와이파이로 그 소식을 접하고 불쾌해한다. 존 덴버는 아버지가 없는 데다가 가난하기까지 하기에 인터넷에 접속하는 데에도 제약이 생기는 셈이다. 한편으로 아이패드를 살 만큼의 여력이 있는 이에게 인터넷은 언제나 열린 세계다. 이와 같은 정보 격차는 존 덴버가 마녀사냥에 제때 대비하지 못하는 제약을 지니게 한다. 한편으로 존 덴버가 처음으로 인터넷상에서 마녀사냥을 당할 즈음에 신부가 와서는 그의 집에서 “악령은 물렀거라”라는 식의 샤머니즘적인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TV에서는 가짜 뉴스를 생산하는 언론인이 추앙되기도 한다.

이렇듯 〈존 덴버 죽이기〉는 필리핀 사회에 만연해 있는 여러 문제적인 요소를 풍경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이것이 풍경에 머무른다는 데에서 이 영화의 문제점이 발생한다. 풍경은 사건에 직접 영향을 끼치지는 않으나 그 공간이 구성되는 미장센을 이야기한다. 이 영화는 존 덴버가 뉴스에서 다루어지기까지의 과정에 국가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고 이야기 하나 그것이 사건에 개입하지는 않게끔 설정한다. 이는 필리핀 사회가 존 덴버를 자살하게 만든 공모자라고 지목하기보다는 존 덴버 사건을 필리핀 사회의 모순을 마주하는 통로로 설정하는 셈이다. 존 덴버로 인해서 필리핀 사회의 부조리가 폭로된다기에 그 이미지는 존 덴버에게 생긴 사건에 비해서 눈에 띄지를 않는다. 엔딩 시퀀스에서 아이들은 존 덴버의 존재가 처음부터 없기라도 한 듯이 존 덴버가 올라야 했던 무대를 즐긴다. 존 덴버는 그저 필리핀 사회를 한 번 들추는 수단으로 쓰이고 버려지기라도 한 듯이 너무 쉬이 잊히고야 만다. 영화는 그 어떠한 희망도, 대안도 드러내지 않으며 그저 누군가가 아파하고 있다고 관조할 뿐이다. 이 관조야말로 가해자들이 더 생기게 만드는 가장 최악의 태도이지 않을까.

[글 김경수, rohmereric123@ccoart.com]

 

ⓒ 트리플픽쳐스

존 덴버 죽이기
John Denver Trending
감독
아덴 로즈 콘데즈
Arden Rod Condez

 

출연
쟌센 막프사오
Jansen Magpusao
메릴 소리아노Meryll Soriano

 

수입 시네마 뉴원
배급 트리플픽쳐스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96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2.11.23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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