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노이즈' 데자뷔로서 죽음을 염탐하다
'화이트 노이즈' 데자뷔로서 죽음을 염탐하다
  • 변해빈
  • 승인 2022.12.15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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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마(나보다 먼저), 죽일 거야(그것이 죽음이래도), 죽어도 좋다(죽지 않을 수 있다면)"
ⓒ 넷플릭스

세상은 가정과 잠재, 임의의 암시로 차고 넘친다. 1968년 잭(아담 드라이버)과 바벳(그레타 거윅) 부부가 고뇌하는 세상은 그렇다. 죽음은 어느 때고 당면하는 사실이 아니라 심신 안으로 숨어든 의식이고, 그것을 심고 자라나게 하는 두려움이 그림자처럼 도사린다. <화이트 노이즈>의 3장 시작부에서 잭은 동료 교수 머레이(돈 치들)로부터 서핑 사고를 당한 어느 사내의 부고를 듣는다. "그 거대한 사람이 죽다니. 모습이 이토록 생생한데.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나?" 잠시간 혼이 나간 잭은 대답 없는 물음들을 읊조린다. '그리도 거대한 몸집이 흩어지는 파도 아래 가려졌다'는 지극히 간단하고 불가피한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던 것이다. 이윽고 하얗게 질린 잭의 얼굴 위로, 그것을 품은 스크린 속으로, 사내의 죽음의 순간이 마치 누구라도 본 적 있던 광경처럼 천진하게 데자뷔(디졸브) 된다.

대답 없는 물음들은 영화의 도처에서 뒤죽박죽 연쇄적으로 생성된다.

잭과 바벳은 네 아이의 쏟아지는 '물음'을 일방적으로 차단하거나 대답의 의무를 다른 이에게로 거듭 넘긴다. 아이들이 제기한 세상의 불운한 예언은 결국 음모로 불어난다. 다른 게 아니라 '알 수 없음'이란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린 상태가 괴팍한 음모론으로 진화한다. 잭과 바벳은 죽음 자체보다 그들 자신이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필연적인 가정과 잠재적인 진실, 임의적인 결론 앞에서 그 간극을 해소하기 위해 무분별한 소비행위에 전전한다. 공기 중 독성물질에 2분 30초간 노출된 잭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간 또는 그 자신이 죽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을 독성에 영혼을 점령당한 상태다. 영화의 또 다른 재앙인 바벳의 불안증은 그것을 증감한다던 미지의 약(다일라)에 대한 과잉 복용과 부작용(기억력 감퇴)을 발병한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죽음의 두려움이 공기 중으로, 일정한 속도로 정밀하게, 소리 없이 일상을 덮친다.

'물음'은 결국 유령에게 던져진다. 또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물음이 유령을 소환한다. 관능적인 어둠이 내린 밤, 잭과 바벳은 서로보다 그 자신이 먼저 죽고 싶다고 소망한다. "내가 먼저 죽고 싶어. 당신 없는 삶이 외로우므로." "당신이 죽으면 심연보다 깊고 큰 수렁이 생길 거야." 죽음보다 더한 고립감에서 벗어나려는 이 은밀한 폭력을, 랠리되는 사랑의 눈빛으로 상쇄하는 가운데 잭이 문득, 어두컴컴한 벽면을 향해 물음을 던진다. "당신은 누구지?" 얼핏 잠든 바벳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마저 소진하려는 것 같지만, 허공의 어둠을 가리키는 그의 음침한 눈빛에 죽음의 사제를 소환하려는 영화의 저주가 깃들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없다.

 

ⓒ 넷플릭스

<화이트 노이즈>의 이 모든 광적인 혼란은 죽음의 일방적인 훼방일까? 대학에서 히틀러의 심화 나치즘을 강연하는 잭은 참사와 고통, 나치의 폭압적인 염탐 체계에 불온한 경외심을 품고 있다. 잭이 오를로크 백작(<노스페라투>의 흡혈귀)을 떠올리게 하는 차림새로 강의실에 군림하던 장면은 마을 인근 철로에서 꿈틀대는 사고 조짐과 절묘하게 뒤섞인다. 유독성 물질을 실은 열차와 화물 탱크가 충돌을 향해 질주한다. 잭은 그로부터 관객의 시선을 앗아오려는 기세로 악몽처럼 거칠게 어미를 늘어트리며 외친다. "죽음…."

그리고 남는 것은 엘비스의 자살이니 히틀러가 겪은 요절이니 그런 선뜩하고 꺼림칙하며 일상에서 금기시되던 단어와 이미지를 기념비적으로 승격하는 영화의 선동, 잭의 선동에 뒤따르는 군중 행렬이다. 마치 죽음으로 빠져들듯이 잭의 주문을 따라 학생들이 그 주변으로 ('히틀러식') 군중을 이루며 몰려든다. 그 사이로, 그 독재적인 운동성을 이어받아 열차와 트럭이 충돌한다. 열차 한 칸의 파괴로 전체 얼개가 무너진다. 유독성 물질이 유혈처럼 흘러 깊고 큰 심연의 수렁 저 너머로 추락한다. 독성 입자가 구름 떼를 이룬다. 잿빛 연기 기둥이 허공으로 솟아오르면 그것의 그림자가 <화이트 노이즈>의 땅 위로 올라선다. 잭을 물리칠 재앙이 소환된 이 비범한 찰나를 누리고 있자면, 일순간 이런 번뇌에 사로잡히고 만다.

잭과 바벳, 영화(대중 미디어)는 죽음에 매료되었다. 더 파괴적이고 헛되고 간사하며 자비 없이 외로운 죽음을 실은 원한다. 두려움 없는 죽음은 시시할 만큼 너무 흔하다.

돈 드릴로의 열차 표면에 생긴 구멍은 노아 바움백의 둥근 카메라 렌즈로 이어진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각종 이동 수단의 충돌 사고 장면을 기록한 영상들이 몽타주 된다. 으스러지고 폭파되고 형체가 존재하지 않던 것처럼 사라진다. 머레이는 극장같이 조성된 강의실에서 '기념비적인' 이 영상을 학생들에게 보여준다. 그는 같은 차량 충돌 사고를 이전보다 더 근사하게 묘사하는 '미디어의 악의 없는 즐거움'에 대해 누설한다(스크린과 그 좁은 표면에 홀린 듯이 집중한 학생들의 시선(들)과 잭의 '히들러식' 군중 행렬은 공명한다). 스크린을 향해 돌진하는 열차 이미지는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1896)을 연상케 한다. 영상 속 허구와 스크린이 충돌하던 사건에서부터 참사와 파괴, 겁에 질린 얼굴과 고통에 겨운 도시, 혼비백산에의 참을 수 없는 도취를 영화는 일찍이 유희한 바 있다.

 

ⓒ 넷플릭스

'노아 바움백의 인물들'은 종종 브라운관 모니터 화면 속에서 발견된다. 비행기 추락을 보도하는 뉴스가 방송될 때, 대피소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남자의 연설 뒤, 무엇보다 외도를 고백하는 바벳이 단서처럼 던진 '(모텔) 침대를 내려다보듯 천장에 달린 TV' 모니터는 프레임 내부의 '참사'를 '시청'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담아 보여준다. 부연하면 이들은 TV를 통해 송출되는 독자적인 이미지라기보다 브라운관 유리 면에 반사된 상으로 오버랩된다. 실제 TV 속 참사 또는 상상된 참사와 대면하는 인물들의 초상은 나치즘의 폭압적 감시로 전락한 죽음의 염탐 아래 (반) 자발적으로 노출되며 미디어의 계획의 끝은 대중들로 하여금 참사를 끊임없이 욕망해내는 것임을 암시한다. 참사-이미지와 겹쳐진 노아 바움백의 살아있는 유령들은 미디어 속 저 너머의 세계가 나와 분리되어 있다는 우매한 우월감을 자기의 고통을 시청하는 행태로 박탈당한다.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를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화이트 노이즈>에서 죽음의 공포는 무언가를 비(非)존재하도록 지워내면서가 아니라 과잉 이미지의 충돌과 소비로 현실감(reality)을 제거하는 것임을 인지할 때 벌어진다. 영화는 걸핏하면 죽음의 단절감을 꺼내 들지만 죽음이야말로 제대로 벌어지진 않는다. 세 번의 불발된 죽음(잭, 바벳, 그레이)은 두말할 것도 없는데, 이들의 죽음의 공포는 이미지로 실현되기보다 불현듯 무의식으로부터 데자뷔 된다. 언어와 미디어를 통해 가볍게 소비되고 간접 체험된 참사와 죽음의 이미지는 그들 자신의 무의식 너머 내면의 그림자, 희뿌연 영혼을 스크린 삼아 죽음을 상영한다. 서핑 사내의 죽음 이미지의 소환이 자연스럽다면 실재이기보다 잭과 관객이 언젠가 보았던 어떤 죽음에서 비롯된 기시감, 그것에 홀린 탓이다.

이것이 잭의 동료 교수들이 말하던 자기 죽음을 상상할 때의 유아기적 자기 연민일 수 있다면, 독성물질 방사에 의한 주된 부작용이 데자뷔인 것은 달리 말하면 재앙 이전은 어떤 죽음과 그에 대한 기억 감퇴의 능력을 갖춘 세상이었을 것이다(그래서 데자뷔를 앓던 잭이 "(죽어가는) 나 자신을 잊고 싶다"라고 이뤄질 수 없는 소망처럼 몰래 중얼거렸나 보다). 그렇다면 '다일라' 부작용으로 기억 감퇴를 겪는 바벳이 죽는다는 사실만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에 의문이 생긴다. 우리가 끝내 죽는다는 것은 세간의 거대한 음모일 순 없을까? 그럴 수 없다면 언제 어떻게 죽을지 또 죽은 다음은 어떤 일이 파생될지 알 수는 없는 것인가? 죽어서 유령 되어 볼 수는 있을까? 나보다 먼저 떠난 그 사람은 유령 된 몸을 이끌고 남은 내 빈곤한 마음을 달래줄까? 이미 분명한 사실을 의도된 망각으로 해소하며 사는 것도 우스운 일 아니던가?

당연한 사실이 당연하다는 것에 심오한 의문을 품게 될 때 조소를 띠지 않을 수 없다. 심오한 진실이 우스꽝스러워지는 순간, 그것은 재앙이 아닐 수 없다. 선뜻 웃어넘길 수 없는 <화이트 노이즈>의 재앙 속에서 웃지 않을수록 이 세계와 외따로 동떨어지는 기분. 우리는 이미 나 자신의 '특별한' 죽음을 탐욕스럽고도 부도덕하게 염탐하고 있기 때문이다.

 

ⓒ 넷플릭스

잭은 쓰레기 더미에 둘러싸여 아내가 복용하던 '다일라' 공급처를 찾기 시작한다. 이내 신문에서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를 해결해준다는 괴이한 광고 문구 곧, 바벳의 영혼을 사로잡았다는 약 공급자 그레이의 흔적을 발견하고선 감격에 빠진다. 그동안 잭의 주변을 어지럽게 회전하던 카메라가 서서히 그의 머리 꼭대기 위로 상승곡선을 그린다. 잭을 염탐하던 영화의 유령(카메라)은 잠시 후 바벳과의 사랑을 무너트린 재앙적 존재, 그레이를 염탐한다. 잭은 죽음의 무작위적인 만행에 시달리기보다 기어이 죽음을 역으로 또는 상호적으로 염탐하면서 (다시 '히틀러식'으로) "죽음을 죽이겠다"라고 결심한다.

그러나 그토록 '더 격렬한' 죽음을 연설하던 영화는 세 번이나 주어진 절호의 기회를 어느 때보다 정교한 몸짓으로 허술하게 놓치고 만다. 죽음의 환경을 조성하는 영화와 거기서 "죽음을 죽이겠다"라는 가당치도 않은 잭의 상이한 목표가 충돌한 것일지도 모른다. 냉혹하게는 데자뷔 되는 각종 죽음보다 자기 죽음의 참혹함을 우월하게 과시하려다 실패했다는 의심까지 심어볼 수 있다. 세 번 연달아 벌어진 허무한 안도와 아주 단순한 속임수로 정체성을 탈바꿈하는 죽음 없는 죽음의 밤은 영화의 좌절된 꿈만은 아닐 것이다. 도리어 노아 바움백은 데자뷔를 느낄 틈조차 주지 않는 한없이 단순한 진실에 다가서기로 한 것 같다.

죽음을 죽이려면? 죽음과 맞닥뜨려야 한다. 그러나 영화와 매개된 누구도 살아생전 죽어본 적 없다. 죽음을 사실로 수용하지 못하는 감퇴한 기억력과 누구도 염탐하지 못할 내 죽음의 순간마저 생생히 데자뷔 되는 우리의 가장 먼 미래로서의 기념비적 죽음만이 세상의 불안증과 충족되지 않은 이 탐욕의 거북함을 화려하게 넘치는 비애감으로 속여갈 수 있을 뿐이다. 그림자처럼 곳곳에 숨어있다 우스꽝스러운 물음을 받아먹고 자란 죽음의 사제가 도저히 몸집이 감출 수 없을 때 데자뷔라는 유령으로 나타나고야 말지 않던가.

그리고 무인의 프레임 속에서 유령을 위해 기다리는 소비시장(슈퍼마켓과 영화)의 문. 과거의 어느 시점, 주변의 소음과 정신없이 뒤엉켜 잭을 교란하던 데자뷔 된 목소리는 다시금 데자뷔 되어 바람직하다. "죽음이 그저 소리라면 내 안의 영원한 소리. 단순한 백색 소음을…."

[글 변해빈, limbohb@ccoart.com]

 

ⓒ 넷플릭스

화이트 노이즈
White Noise
감독
노아 바움백Noah Baumbach

 

출연
아담 드라이버Adam Driver
그레타 거윅Greta Gerwig
돈 치들Don Cheadle
래피 캐시디Raffey Cassidy
샘 니볼라Sam Nivola
메이 니볼라May Nivola
조디 터너-스미스Jodie Turner-Smith
안드레 3000Andre 3000
라르스 아이딩어Lars Eidinger
알렉산드로 니볼라Alessandro Nivola
마이크 개서웨이Mike Gassaway
매튜 쉬어Matthew Shear
프랜시스 쥬Francis Jue

 

제작|제공 넷플릭스(NETFLIX)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35분
등급 15세 관람가
공개 2022.12.30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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