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먼저 등장하는 그림, 뒤돌아보는 시선
[Critique] 먼저 등장하는 그림, 뒤돌아보는 시선
  • 이상용
  • 승인 2022.12.09 11: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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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둘러싼 변증법적 목소리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과 같은 해에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소개가 되었다. 그 해 <기생충>은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각본상을 수상했다.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결과였지만 시상 직전까지 황금종려상 후보로 주목받는 작품이었다. 셀린 시아마의 장편 데뷔작 <워터 릴리스>(2007)나 <톰보이>(2011), <걸후드>(2014)와 같은 작품은 국내에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았고, 2020년 1월에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개봉되면서 뒤늦게 선보이기 시작했다. 국내의 영화 소비문화에서 이러한 현상은 최근 들어 도드라진 편인데, <드라이브 마이 카>(2021)로 국내에서 주목받게 된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들도 데뷔작 <열정>(2008)을 비롯한 일련의 작품들이 뒤늦게 개봉되거나 재개봉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현상에는 한 작가의 전반적인 것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일부의 요소나 특정한 이슈를 소비하는 경향이 깔려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을 트렌드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작가 영화나 예술 영화에 따라붙는 트렌드는 주목해야 하는 점을 지나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매년 연말에 열리는 프랑스 문화원이 주최하는 「프랑스 영화주간 프로그램」에서 올해는 '프랑스의 얼굴들'의 작품으로 몇 작품을 선정하였고, 그중에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작품을 다시 꺼내 든 것은 2020년의 유행 속에서 여전히 소진되지 않은 이 영화의 잉여의 지점을 응시해 보기 위해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둘러싼 젠더적 이슈와 사회적 관심은 어느 정도 풍성하게 기록되었다. 오히려 이 영화가 지닌 고전적이고 형식적인 탐구는 이슈에 묻힌 측면이 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형식은 이 영화가 들려주고자 하는 회화적 이미지, 목소리 그리고 시선의 간극들을 통해 이미 논의된 이슈를 더욱 날카롭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 피라미드 필름스, 네온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두 여성의 성애적 장면이나 사랑의 욕망에 눈뜨는 과정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려는 노력보다는 영화 전체를 채우는 여러 '그림'을 매개로 끊임없이 간섭하고 메타포를 형성한다. 이 영화의 태도를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도 있다. 같은 해 선보였던 <기생충>이 계급적 대립은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냉정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저택에서 벌어지는 계급 차이의 가족사를 다루고 있다면, 17세기 브르타뉴의 한 섬에 있는 저택에서 전개되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계급을 초월하는 개인 간의 연대 가능성과 이상적인 화해의 순간을 보여준다. 두 영화 모두 집을 중심으로 전개가 되고, 그 안에 거주하는 인물을 주목해서 보여주지만, <기생충>의 경우 지하로 내려가는 후반전을 통해 새로운 반전을 꾀하고 있다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백작 부인(발레리아 골리노)이 집을 비운 5일 동안 하녀와 화가와 아가씨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녀 소피(루아나 바야미)가 자수를 놓고,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가 잔에 와인을 따르고, 아가씨 엘로이즈(아델 에넬)가 음식을 준비한다. 수직이 아니라 수평적인 화면으로 채워진 이들의 모습은 하나의 프레임 안에 담긴 회화와도 같다. 이 장면을 통해 셀린 시아마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그림이, 진정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회화가 여기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 그린나래미디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화가 마리안느가 브르타뉴 지역의 한 섬에서 엘로이즈라는 여성의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야기도 단순하고, 인물의 관계도 단조롭지만 이러한 설정은 오히려 인물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이끈다. 마리안느가 배를 타고 브르타뉴 지역의 한 섬을 향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프랑스 북서부에 대서양과 접한 브르타뉴 반도는 8백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있다. 그중 어느 섬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섬으로 가던 중 바다에 빠진 캔버스를 건져내기 위해 과감하게 물에 뛰어드는 그녀의 모습에는 어딘가 대담함이 서려 있다. 젖은 몸으로 저택에 도착한 마리안느는 벽난로 옆에서 젖은 캔버스를 꺼내어 말리며 일을 시작한다. 마리안느가 이곳에 온 것은 이 집의 딸인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였다. 마리안느는 방을 둘러보던 중 한쪽에 놓인 미완의 초상화를 발견한다. 그것은 마리안느 이전에 다녀간 화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초상화를 거부하는 엘로이즈에게 다가가기 위해 마리안느는 화가가 아니라 고용된 말동무 행세를 하며 함께 산책을 하고 대화를 나눈다. 그녀는 끊임없이 엘로이즈를 관찰한다. 엘로이즈 또한 마리안느의 시선을 느낀다. 그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되지만 어쩌면 이 시선이 엘로이즈에게 오해를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마리안느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엘로이즈 앞에 초상화를 내놓는다. 하지만 이 그림은 어딘가 엘로이즈를 닮아 있지 않았다. 이렇게 첫 번째 초상화는 실패로 돌아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처지가 되지만, 엘로이즈가 태세를 전환하여 초상화의 포즈를 취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두 번째 기회를 얻게 된다. 마리안느는 백작부인이 집을 비운 5일 동안 초상화를 완성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이 시간은 엘로이즈와 더욱 가까워지기 위한 시간이었다. 

 

두 개의 초상화

그런데 이야기(story)의 시작과 영화의 시작은 다르다. 영화는 '초상화 수업'을 하는 마리안느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자신을 모델로 삼아 여학생들에게 윤곽선을 먼저 그리고, 다음은 실루엣을 그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물을 관찰하는 법을 말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학생들 뒤에 놓인 그림이 그녀의 눈에 들어온다. 마리안느가 묻는다. "누가 저걸 꺼냈지?" 학생 한 명이 자신이 그랬다고 답한다. 선생과 학생 사이의 대화가 오고 간다. 마리안느는 그림을 꺼내서는 안 된다고, 자신이 오래전에 그린 거라고 답을 한다. 학생이 묻는다. "제목은요?" 마리안느가 답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영화 제목은 마리안느가 그린 그림의 제목이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브르타뉴의 한 섬에 간 마리안느의 이야기이지만, 실상 마리안느가 어떻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라는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가(어떻게 엘로이즈와 사랑에 빠졌는가)를 고백하는 이야기임을 첫 장면에서 명확히 선언한다. 그런데 여러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영화 속 어디에도 마리안느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그리는 장면은 없다. 영화를 통해 비로소, 두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이 그림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짐작하게 된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는 두 개의 초상화가 등장하는 셈이다. 하나는 마리안느가 완수해야 하는 엘로이즈의 초상화고(그림을 완성한 이후 마리안느는 그림의 대가로 돈을 받는다), 다른 하나는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엘로이즈와 헤어진 후 마리안느가 기억을 통해 재생시킨 그림일 것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단 한 번도 그리는 장면을 등장시키지 않았던, 수업을 듣는 학생에게 함부로 꺼내지 말라고 했던, 화랑 한쪽에 간직해 둔 그림을 영화의 시작이자 제목으로 내세웠다.

그러니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엘로이즈를 향한 마리안느의 마음이자 내밀한 초상화이며, 이 영화의 타이틀이 된다.

 

ⓒ 그린나래미디어

마리안느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그리는 장면은 없지만 엘로이즈의 옷에 불이 붙은 모습은 정확히 영화 속에 등장한다. 백작 부인이 집을 떠나 있는 동안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그리고 하녀 소피는 함께 다닌다. 마을 축제도 함께 동참한다. 축제 한쪽에 여인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 중 하나다. 그러던 중 불길 사이를 오가던 엘로이즈의 옷에 불이 붙는 소동이 일어난다. 마리안느는 이 장면을 목격한다. 이 모습은 하나의 영감이 되었고, 다음날 두 사람은 평소처럼 해변을 거닐다가 키스를 나눈다. 그것은 억눌린 서로를 향한 감정이 폭발하는 작용이 되고,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기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라는 그림을 기억 속에 저장한 시점은 두 사람의 사랑이 불타오르기 시작한 때다. 그림의 제목처럼, 혹은 영화의 제목처럼 타오르는 것은 엘로이즈인가? 아니면 마리안느인가? 원초적 이미지로 던져진 이 장면은 마리안느의 화폭 위에서 재현된다. 엘로이즈의 옷에 불이 붙은 한 장면(타오르는 엘로이즈)을 붙잡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림으로 붙잡고자 한 것은 마리안느다. 

영화를 유심히 본 관객이라면 한밤중에 마을의 들판에서 옷에 불이 붙어 당혹스럽던 엘로이즈의 모습과 마리안느에 의해 그려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다른 이미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리안느의 그림은 한밤중보다는 하늘이 더 또렷하고 넓게 보이는, 짙은 파란색이 감도는 가운데 그녀의 발을 감싸는 작은 불길이 피어오르는 그림이다. 옷을 불을 붙는 장면을 보았을 때 엘로이즈의 정면이 보였다면, 그림 속 엘로이즈는 뒷모습이다. 그것은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처음 보았을 때 나타난 뒷모습이기도 하다. 실상 축제의 현장에서 엘로이즈의 옷에 불이 붙은 것은 사건은 타오르는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마리안느의 기억 속에서는 타오르는 엘로이즈였다. 그렇다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엘로이즈의 타오름이 아니라 타오르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마리안느의 '눈동자 속 이미지'일 수 있다.

 

먼저 등장하는 그림의 형식

마리안느가 그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또 다른 흥미로움은 '먼저 나타난다'는 것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장소에서 갑작스럽게 이 그림이 나타날 때, 이 그림이 영화의 제목을 가리키고 있음을 듣게 될 때 관객의 마음에는 수수께끼가 일어난다. 그림을 그린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장면이 언제 비롯되었는지는'는 영화가 한참 동안 흘러서야,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이 본격화되서야 알게 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이처럼 그림을 먼저 던져놓고(보여주고), 이야기를 전개하며 사연을 풀어주는 형식이다. 비단 이 그림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 전체를 통해 이러한 형식은 반복된다.

마리안느가 집에 도착한 다음 날 백작 부인을 만나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은 한 초상화를 보고 있다. 백작 부인의 뒷모습이 보인다. 백작 부인의 얼굴은 초상화로 먼저 등장한다.

백작 부인 "이 그림을 알아요?"

마리안느 "아버지 작품이네요."

백작 부인 "초기작이죠. 밀라노에서 그린 거예요. 내 결혼식 전에. (사이) 딸 정혼자가 밀라노 사람이라 초상화가 흡족하면 그리 갈 거예요."

마리안느 "가시겠네요."

백작 부인 "알아 둘 게 있어요. 그쪽 전에도 화가가 있었는데 실패한 원인은 간단해요. 포즈 잡는 게 싫대요. 애 얼굴도 못 보고 갔죠."

마리안느 "왜 그럴까요?"

백작 부인 "결혼하기 싫으니까요. 그러니 딸이 모르게 그려야 해요. 딸한테는 당신을 산책 친구라고 해 놨어요. 기뻐하더군요. 여기 온 이후로 외출 금지였으니까."

마리안느 "왜요?"

백작 부인 "첫째 때는 실패했으니까요."

마리안느 "절 감시꾼이라 여기겠네요."

백작 부인 "산책하면서 그 애를 관찰해요. 조건이 이런 데 그릴 수 있겠어요?"

마리안느 "단순한 산책 친구보단 낫네요."

백작 부인 "초상화가 이곳에 먼저 왔어요. 이 방에 들어오던 순간 벽에 걸려 있던 내 초상화를 발견했죠. 날 기다리고 있었어요."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듯 젊은 백작 부인의 초상화를 그린 것은 마리안느의 아버지다. 백작부인은 이 초상화 덕분에 결혼을 할 수 있었음을 은연중에 강조한다. 이 운명은 딸들에게도 전달될 것이다. 

먼저 이 장면은 몇 가지 호기심을 부른다. 백작부인은 딸의 초상화가로 마리안느의 아버지가 아니라 마리안느를 부른 것일까? 원래 아버지를 불렀지만 어떤 이유로(살롱전에 참석한 마리안느의 후반부 장면을 보면 아버지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마리안느가 온 것일까? 마리안느 이전에 또 다른 화가가 있었다. 그렇다면 마리안느 혹은 아버지가 첫 번째 화가가 아니라 어째서 두 번째로 지목되었을까. 우연한 결과일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등장하는 그림이 호기심을 일으키는 것은 영화 내에서 완전하게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림은 강력한 이미지로 등장하면서 화면을 가득 채우지만 그림을 둘러싼 맥락들은 생략되거나 비어 있을 때도 많다. 이를 메우려는 것은 관객의 몫이고, 노력을 필요로 한다. 첫째 딸의 죽음, 엘로이즈의 선택 그리고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헤어진 후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지에 대한 여러 서사들은 생략되어 있거나 압축된 채 지나가 버린다. 이러한 스타일은 감독의 의도이기도 하다. 이미지를 둘러싼 공백을 채우려 할 때, 자연스럽게 관객은 영화의 이미지를 둘러싼 사연과 내밀한 심리의 긴장감에 뛰어들 수 있다(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충분히 생길 수 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그려내는 서로를 향한 감정을 최대한으로 절제하고, 두 사람의 욕망을 지연시킴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두 사람을 따라가도록 만든다. 생략과 지연 그리고 이를 채우려는 관객(독자)의 노력을 이끌어 내는 방식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고전적인 수수께끼를 제공하면서도 꽤나 현대적으로 압축하는 스타일을 보여준다. 

 

ⓒ 피라미드 필름스, 네온

다시 등장한 그림으로 돌아가 보다. 백작 부인이 등장할 때 먼저 나타나는 초상화는 이 영화가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 뒤이어 설명하거나 부연하는 방식으로 짜여져 있음을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마리안느가 저택에 도착했을 때 천으로 가려진 그림을 통해 발견하는 것은 얼굴이 뭉개진 채 미완성으로 남겨진 엘로이즈의 초상화였다. 엘로이즈 또한 그림으로 먼저 등장한다. 그것은 이전에 온 것으로 짐작되는 화가의 실패일 수도 있지만 조만간 실패하게 될 마리안느의 첫 번째 초상화를 예견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엘로이즈가 엉화에서 처음으로 등장할 때도 후드를 입은 채 뒷모습을 먼저 보여준다. 그림이 먼저 등장하고 실체의 등장은 이처럼 지연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인물의 감정이나 욕망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림으로 먼저 보여주고, 인물이 뒤에 등장한다. 사연을 담은 그림(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먼저 등장하고, 뒤이어 그림의 사연이 등장한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 그림이 사람보다 강력하고, 어떤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백작부인은 마리안느에게 초상화를 보여주면서 자신이 이곳으로 올 당시 초상화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고 말한다. "초상화가 이곳에 먼저 왔어요. 이 방에 들어오던 순간 벽에 걸려 있던 내 초상화를 발견했죠. 날 기다리고 있었어요."

초상화는 집안의 지배력이자 상징적 권력이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엘로이즈 이전에 초상화를 그려야 했던, 이로 인해 자살로 짐작되는 엘로이즈의 언니는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어쩌면 마리안느가 발견한 얼굴이 지워진 초록색 옷을 입은 여인의 초상화는 언니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백작 부인은 이전에 왔던 화가가 엘로이즈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갔다고 했지만, 그래서 얼굴만을 미완인 채 남겨둔 것인지도 모르지만, 남겨진 미스테리한 초록색 옷을 입은 여인의 그림은 이 집안에 감도는 결혼으로 인한 죽음을 가리킨다. 

언니의 죽음으로 수녀원에 있던 엘로이즈에게 차례가 왔다. 그녀 또한 언니처럼 밀라노에 초상화를 보내야 한다. 초상화의 성패에 따라 결혼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그것은 어머니의 초상화로부터 이어져 온 관습이다. 초상화는 '먼저 나타나는 그림'일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 '먼저 형성되어 있는 지배력(전통, 결혼, 관습)'을 가리키고, '먼저 가버린 죽음(언니)'을 가리킨다 이 세계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지배력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만 '먼저 가버린 죽음'이 초상화 혹은 이미지와 관련을 맺는다는 것은 또 다른 이미지를 통해 부연된다. 

엘로이즈와 사랑에 빠진 마리안느 앞에 흰옷을 입은 엘로이즈가 두 번 등장한다. 한 번은 해변에서 첫 키스를 나눈 후 뒤따라 집으로 온 마리안느가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엘로이즈가 있는 방으로 향해 계단으로 올라갔을 때다. 복도 끝에 흰옷을 입은 엘로이즈가 등장했다고 사라진다. 환영과도 같이, 흡사 유령처럼 등장하는 이 이미지는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사이가 된 후에도 물을 가지로 부엌에 왔다가 돌아설 때 마리안느의 뒤쪽으로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등장한다. 마리안느가 뒤를 돌아보자 유령과도 같은 이 이미지는 사라진다. 

흰옷을 입은 엘로이즈의 모습은 현실에서도 변주된다. 나중에 전시회에서 다른 화가가 그렸을 엘로이즈의 초상화(아이와 함께 있는)를 볼 때 입고 있는 옷의 색깔이기도 하고, 초상화를 끝낼 무렵 도착한 백작부인이 흡족해하며 비용을 지불한 후 엘로이즈에게 입혀보는 예복이기도 하다. 흰옷을 입은 엘로이즈는 결혼에 성공할 것임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이다. 이 이미지는 유령처럼 마리안느에게 먼저 나타나 지배하고 알려준다. 

엘로이즈에게는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언니의 길을 따라 결혼을 거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리안느 앞에 포즈(포즈는 곧 결혼 준비가 된다)를 취하기로 하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결혼을 결심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불안한 것은 마리안느다. 유령과도 같이 나타난 엘로이즈의 이미지는 마리안느의 불안과 근심을 대변하면서 뒤따라오는 엘로이즈의 유령적 이미지를 향해 눈길을 보낼지를 두고 긴장한다. 이 긴장은 영화의 거대한 메타포를 이룬다. 그것은 오르페우스의 신화를 재해석하는, 엘로이즈의 목소리가 담긴 뒤를 향한 시선으로 이어진다. 

아무려나 마리안느가 완성한 초상화는 엘로이즈보다 먼저 밀라노로 보내져 그림을 보고 혼인 여부를 판단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대의 결혼 풍습은 사람보다 그림이 먼저 도착하여 판단의 기준이 된다. 초록색 옷을 입은 여인의 초상화는 밀라노 어딘가에 엘로이즈보다 먼저 걸려 그 집안의 또 다른 상징이 될 것이다.

 

ⓒ 그린나래미디어

뒤돌아봐요!

엘로이즈가 포즈를 취하겠다고 말하는 바람에 마리안느에게는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 그런데 두 번째 기간 동안 다루는 사건은 초상화를 그리기가 아니다. 엘로이즈가 포즈를 취하겠다고 말하는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초상화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중요해 보이는 사건은 하녀 소피의 낙태 시술이다. 그녀를 임신시킨 것이 누구인지, 어떤 남성적 위압이 있었는지 묘사되거나 언급되지는 않는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해야 했던 여성의 고통을 담고 있지만, 수난사를 설명하기보다는 세 사람의 연대를 통해 소피가 벗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세 사람이 함께 축제에 참여한 장면 또한 여기에 부합한다. 그리고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한 침대에 누워 사랑을 나누는 장면들, 그림을 그리는 일련의 장면이 있다. 두 사람의 깊은 유대, 육체적 유대는 백작 부인이 집안을 비운 5일간의 허락된 시간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세 사람이 함께하는 여러 장면 중 엘로이즈가 책을 읽고 이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다. 엘로이즈가 읽는 것은 그리스의 '오르페우스 신화'다. 오르페우스는 뱀에게 물려 죽음을 맞이한 아내 에우리디케를 그리워한다. 그는 당대 최고의 시인(가객)답게 연인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노래를 부르며 산천초목을 시들어 버리게 만든다. 이 사태를 지켜만 볼 수 없었던 신들은 오르페우스를 도와 지옥에서 연인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올 기회를 부여한다. 그런데 지옥을 빠져나올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한 채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고 만다. 에우리디케는 지상으로 나오는 문턱에서 다시 지옥으로 끌려들어 가 버린다.

하녀 소피가 흥분하여 말한다. "끔찍해라. 남자는 왜 돌아봤대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잖아요." 소피는 오르페우스의 행동에 화를 낸다(그것은 낙태 시술을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와 슬쩍 겹친다.) 그러자 화가 마리안느는 "이유야 있죠."라고 말한다. 이유가 있다는 말에 소피는 그 대목을 다시 읽어달라고 청한다. "이승과 그리 멀지 않은 저승 끝에 다다랐을 때 아내를 잃을까 봐 겁났던 오르페우스는 못 참고 고개를 돌려서…" 내용을 듣고 있던 소피는 "잃을까 봐 겁났다는 건 이유가 안 돼요! 하지 말라고 했는데."라며 재차 행동을 문제 삼는다. 소피의 말을 들은 엘로이즈는 "사랑에 미쳤던 거지. 어쩔 수 없었던 거야."라며 오르페우스를 옹호한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마리안느가 소피의 말도 맞다며 "참았어야죠. 이유야 어찌 됐든."이라고 말한 후 잠시 후 새로운 입장을 내놓는다. 오르페우스가 "선택을 했을 수도 있고요."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녀와의 추억을요. 그래서 뒤돌아본 거예요. 연인이 아닌 시인을 선택한 거죠." 마리안느는 예술가로서의 오르페우스를 옹호한다. 이 해석은 화가라는 자신(예술가)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한데,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와의 추억을 노래하기 위해 뒤돌아보았다는, 어떤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관찰해야 하는 예술가의 본성을 옹호하는 꼴이다.

신화의 해석은 세 사람의 입장을 간명하게 드러낸다. 소피의 지극히 서민적이면서도 일반적인 반응(뒤돌아보지 말았어야지!), 마리안느의 예술가적 반응(시인으로서의 운명을 선택한 거예요. 뒤돌아봐야 이 순간을 시로 노래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엘로이즈의 입장을 마지막에 등장시킨다. 엘로이즈의 첫 해석은 '사랑에 미쳐 참을 수 없었다.'는 진술이었다. 그것은 흡사 엘로이즈 자신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혼을 위한 초상화 작업을 앞두고, 그토록 거부하던 초상화 작업 앞에서, 화가 마리안느에게 직접 포즈를 서겠다며 두 번째 기회를 부여해 준 것은 "사랑에 미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의 미침은 이어지는 해석을 통해 강조된다. 엘로이즈는 "그녀는 그에게 닿을 수 없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다시 저승으로 내려갔다."를 읽은 후 이어서 두 사람에게 자신의 해석을 내놓는다. "여자가 말했을 수도 있죠 "뒤돌아봐요!""라고 말한다.

이 말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엘로이즈의 해석은 오르페우스가 못 참고 본 것이 아니라 오르페우스를 사랑했고, 오르페우스를 보고 싶어 했던 엘로이즈가 오히려 못 참고 "뒤돌아봐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사랑을, 연인을, 이 순간을 못 참은 것은 오르페우스가 아니라 에우리디케이고, 오르페우스가 돌아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랑하는 연인이 "뒤돌아봐요"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뒤돌아본다는 것은 '금기'를 어기는 일이지만 만일 에우리디케가 "뒤돌아봐요"라고 말했다면 금기보다 강한 사랑을 믿고, 그들의 사랑에 영원성을 부여하며, 지금 당장 보고 싶고 봐야 한다는, 금기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오르페우스가 따랐기 때문이다.

 

ⓒ 그린나래미디어

이러한 해석은 영화의 절정과 정확히 연결된다.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완성하고, 백작 부인으로부터 사례비를 받은 마리안느가 황급히 집을 나선다. 그때 단 하나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황급히 집을 벗어나려고 하는, 그녀가 결혼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던 마리안느를 향해 엘로이즈가 외친다. "뒤돌아봐요!" 이 장면은 정확히 엘로이즈가 해석한 오르페우스 신화를 재현하는 것이다. 마리안느는 시인이자 예술가인 오르페우스다. 그는 지옥의 신과의 약속대로 앞을 보며 나아간다. 뒤를 쫓아가야 했던 엘로이즈 혹은 에우리디케는 그렇게 앞으로만 가지 말고 자신을 보라고 말한다. "뒤돌아봐요!"

여기에도 생략된 것이 있다. 백작 부인은 이 광경을 보고 놀랐을 것이다. 딸과 화가가 무슨 관계이길래 이토록 애절하게 이별하는 것일까. 딸은 어째서 뒤를 돌아보라고 외쳤을까. 백작 부인은 지옥의 신이고, 두 사람이 각각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라면, 그리고 이 외침의 결과 영원히 이승과 저승으로 이별해야 했다면 이것은 그리스 신화의 17세기적, 레즈비언적 재탄생이 아니겠는가.

"뒤돌아봐요"라는 엘로이즈의 말은 신화의 재해석만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커밍아웃하는 외침이 아니겠는가.

마리안느가 저택을 떠난 후 이어지는 장면은 후일담처럼 처리되어 있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뒤돌아본 엘로이즈의 모습이다. 전시회에서 엘로이즈와 그의 아이가 있는 초상화를 보게 되고, 영화 속에서 모티브로 쓰였던 비발디의 사계 연주회에 참석한 엘로이즈를 보게 되는 마리안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후일담과도 같이 처리된 일련의 장면들은 오르페우스의 '뒤돌아 봄'에 해당하는, 마리안느의 '돌아봄'이다. 전시회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놓은 마리안느가 '오르페우스 신화'의 그림 또한 정확히 여기에 해당한다. 더 이상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의 뒤돌아보는 행위를 시인의, 예술가의 작업을 위한 순간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림을 감상하던 노인이 말한다. "보통 뒤돌아보기 전이나 아내의 사후를 그리는데 여기서는 작별하는 것 같군요." 이 그림은 두 사람이 작별하는 순간을, 신화에 빗대어 그린 그림이다. 예술의 역사에서는 종종 기존에 있던 시나 신화에 빗대어 자신의 심경을 전할 때가 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두려움과 떨림』은 로마 황제의 일화를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타르키니우스 수페르부스가 그의 뜰에서 양귀비꽃 열매로 암시한 것을 그의 아들은 이해하였으나 사자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 이야기는 로마의 황제 타르키니우스 앞에 아들이 보낸 밀사가 왔을 때 지팡이로 양귀비꽃을 따버린 행위를 의미한다. 황제는 밀사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밀사로부터 황제가 했던 행동을 들은 아들은 아버지가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지도자들의 목을 베어버렸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책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평범하게 다가갈지 몰라도 자신의 연인이었던 레기나 올젠에게는 정확하게 메시지가 전달될 거라고 확신하며 일화를 인용한다. 

마리안느가 그린 오르페우스 신화의 그림의 수신자는 정확히 엘로이즈이다. 그리고 마리안느 또한 그림을 통한 편지를 받는다. 전시된 그림을 둘러보던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와 그의 아이를 그린 초상화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림 속에 엘로이즈의 한 손을 아이의 손을 잡고 있지만 또 다른 손은 책을 집고 검지 손가락으로 책을 가리키고 있다. 책 속 어딘가에 마리안느의 누드 자화상이 그려져 있을 것이다.

이제 '그림'은 먼저 나타나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내밀한 마음을 나중에 전달하는 '매개물'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뒤돌아보라고 외치는 그림 속 에우리디케와 '뒤돌아보라'며 외쳤던 엘로이즈의 새로운 초상화는 자신이 사랑했던 존재를 은밀하게 가리키고 있다. 외침은 기존의 오르페우스 신화의 그림들을 재해석하고 저항하는 '새로운 그림'이 될 뿐만 아니라 내밀한 사연이 된다. 앞서 있고, 지배하고, 먼저 눈을 사로잡는 이미지들에 대해 '뒤돌아보는 시선'을 만드는 행위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뒤돌아보라는 요청과 그에 호응하는 시선만이, 지배적인 이 세계의 이미지를 뒤집을 수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를 통해 영화 처음에 등장한 그림인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엘로이즈의 뒷모습을 그린 이유도 명확히 알 수 있게 된다. 이 그림은 나중에 그려진, 뒤돌아 보여진 그림이며, 정확히 엘로이즈가 뒤돌아보고 있는 그림이다. 나중에, 뒤돌아서서, 바라보는 이 시선이야말로 결혼, 제도, 관습, 규율에 얽힌 여성의 삶을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이다. 또한 '먼저 나타나는 그림'에서 언급한 유령적 이미지, 즉 흰 옷을 입은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의 뒤쪽에서 등장할 때 마리안느가 돌아보면 사라지는 장면은 오르페우스 신화의 재현이자 불길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음을 연결하여 사유할 수 있다. 이 유령적 이미지에 빠져 있는 것은 목소리다. "뒤돌아봐요!"라는 연인의 목소리. 이 목소리만이 그리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가 저지른 실패와 금기의 위반을, 실패가 아니라 저항이자 사랑의 확인으로 재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림을 통한 역전, 그림을 통해 탈관습화, 그림을 통한 저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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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예술가의 초상

마리안느의 첫 번째 초상화는 왜 실패했을까. 영화 속에서 첫 번째로 완성한 초상화가 등장할 때의 그림은 아무리 보아도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고, 그것은 차이를 드러낸다.

엘로이즈 "나예요? 당신이 본 내가 이랬나요?"

마리안느 "그게 다는 아니에요."

엘로이즈 "그게 무슨 말이죠?"

마리안느 "그림에는 규칙과 관습 그리고 이념이 있어요."

엘로이즈 "생명력은 없나요? 존재감도?

마리안느 "존재감이란 그저 진실하지 않은 순간들로 이뤄지는 거예요."

엘로이즈 "그렇지 않아요. 어떤 감정들은 아주 깊어요. 나랑 이 초상화는 비슷하지 않아요. 당신을 닮지도 않아서 슬프네요."

마리안느 "나와 닮지 않은 건 어떻게 알죠? 미술 비평가인지 몰랐네요."

엘로이즈 "당신이 화가인 줄도 몰랐으니까요."

두 사람의 대화는 마리안느의 완패로 끝난다. 어머니를 모셔 오겠다며 엘로이즈가 나가자 마리안느는 천을 들어 초상화의 얼굴 부분을 지운다. 그것은 초상화의 실패를 자인하는 꼴이다.

엘로이즈에게 항변하는 마리안느의 입장은 서구 회화의 역사에서 꽤 보편적이었다. 대상(엘로이즈)을 재현하는 회화에서 중요한 문제는 그려야 하는 대상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이 대상의 존재성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가 관건이었다. 기본적으로 존재는 시간 속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변화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존재가 아닐 것이다. 회화의 목표는 변하지 않는 존재의 영원성, 즉 존재성을 끄집어내야 하는데, 이를 표현해 내기 위해 규칙, 관습, 이념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마리안느가 "존재감이란 그저 진실하지 않은 순간들로 이뤄지는 거예요"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에는 플라톤의 이데아(이념)로부터 출발하는 관념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음을 알려준다. 존재의 불변성을, 불변하는 존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존재가 아니라 이상적인 존재, 즉 이데아의 세계를 창조하여 그 속에 존재를 두어야 한다, 화가들은 이러한 이데아를 표현하기 위해 규칙과 관습을 만들어 냈다. 그것이 서구 형이상학의 토대이자 오랫동안 서구를 지배해 온 관념이었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나 같지 않다"며, 존재에 담긴 생명력, 변화, 생성의 중요성을 말한다. 이것은 서구의 형이상학이 놓쳐버린 문제였다. 이것이 철학의 중심 무대에 오르는 것은 19세기의 니체, 하이데어, 베르그송 그리고 20세기의 들뢰즈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서다. 엘로이즈의 생각은 몇 세기가 지나서야 회화에서 담기 시작한 변화와 생성의 문제다. 인상주의가 시작될 때야 비로소 엘로이즈의 생각은 회화에 적극적으로 수용된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샘》(1856) ⓒ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시대(17세기)에 속해 있고, 시대를 벗어날 수 없었던 화가 마리안느의 성장담이다. 그녀는 엘로이즈의 초상화에 실패함으로써 그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그녀가 교육받았던 방식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녀가 당대의 회화적 관습에 속해있다는 것은 엘로이즈의 포즈를 잡아주는 장면을 통해 잘 드러난다. 마리안느는 일일이 자세를 교정해 주고, 손의 모양을 잡아준다. 서구 초상화의 역사는 포즈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것은 신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한 인위적인 몸짓의 역사였다. 오늘날 인위적인 포즈나 표정은 '포토샵'의 시대가 열리면서 희미해졌지만, 포토샵을 포함하여 인물의 그림이나 사진에 있어 포즈는 시선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19세기 화가인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샘》(1856)을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파리에 있는 오르세이유 미술관에 들어가면 감상을 위해 오른쪽으로 향해 걸어갈 때 초입에 있는 대표적 그림이다. 작품명 '샘'보다는 '물동이를 든 여인'이 더 자연스럽게 보이는데, 한 여성이 물동이를 거꾸로 들고 서 있는 유명한 그림이다. 아무리 보아도 현실적이기보다는 여인의 신체적 포즈를 강조하기 위해 뒤틀린 동작을 취하고 있고, 덕분에 여성의 신체 부위가 강조되어 나타난다. 작품의 제목인 '샘'도 여성적 혹은 성적이다. 여성을 샘에 비유했다고 할 수 있는데 자연의 샘과 여성의 신체를 대비시켰다고 아름답게 말하면 좋겠지만, 물동이에서 물이 쏟아지는 순간을 포착한 장면에는 생명의 기원으로의 여성뿐만 아니라 여성의 성적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노골적인 응시가 깔려있다. 

물론, 엘로이즈의 초상화가 이러한 수준의 그림은 아니지만, 결혼을 위한 증명사진으로써 남성 상대(밀라노의 귀족으로 짐작되는 인물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를 만족시킬만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는 남성 시선의 응시적 대상이라는 앵그르의 그림과 일맥상통한다.

 

ⓒ 그린나래미디어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는 이러한 이미지(회화)의 역사, 남성 중심의 시선의 역사를 전복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침대에서 마리안느는 소장을 목적으로 엘로이즈의 작은 초상화를 그린다. 이 모습을 보던 엘로이즈 또한 마리안느의 현재 모습을 그려달라고 한다. 당시 여성 화가의 누드는 금기시되었지만, 개인을 위해서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마리안느는 옷을 벗은 채로 있었고, 엘로이즈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누드화를 그린다. 사적인 허용 속에 가능한 누드화를 연인을 위해 그려준다. 이 또한 시대 저항이다.

캔버스나 다른 곳에 그릴 수 없기에 마리안느는 28이라는 숫자를 고른 엘로이즈의 말에 따라 건네받은 책의 28쪽에 자신의 누드를 그린다. 건네받은 책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으로 짐작된다. 오르페우스의 신화도 이 책에 수록되어 있다. 로마의 시인이자 작가인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로마 시대에 그리스 신화를 재해석하고 수록하여 후대에 남겨졌다.

아무려나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성기 부분에 거울을 놓고 자신을 그려 나간다. 많은 이들이 지적했듯이 이 장면은 프랑스 19세기의 대표적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1866)을 뒤집은 것이다. 쿠르베의 그림이 여성의 몸과 성기만을 그려놓고, 그 부분을 응시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셀린 시야마는 성기 부분에 거울을 놓는 영화적 이미지를 연출한다. 이를 통해 남성적 시선을 반사(저항)하고, 반사된 거울에 비춰진 화가의 모습을 그리는 장면을 새겨 넣는다. 이 장면은 남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을 위한 기록이자 기억이다.

마리안느가 한 명의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엘로이즈와의 사랑, 엘로이즈를 통한 경험과 깨달음 그리고 새로운 그림에 대한 도전과 해석이 있었다. 이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그림이 바로 소피의 낙태 시술을 연출하고 재현하는 그림이다. 한 농가에서 낙태 시술을 받는 소피를 지켜보던 마리안느는 그녀의 고통을 응시하지 못하고 시선을 외면한다. 그러자 엘로이즈는 제대로 보라며 고개를 돌린다. 집으로 돌아온 세 여인은 빠르게 이 장면을 재현한다. 그것은 엘로이즈의 주도 이래 이뤄졌고, 마리안느는 시술을 하는 모습을 빠르게 스케치하고 색을 칠한다.

17세기 회화에서 절대 시도되지 않았을(기껏해야 이전의 서구의 회화에서 출산과 관련된 장면은 마리아의 수태고지 정도였다) 낙태 장면을 그리는 마리안느의 손길에는 새로운 이미지를 향한 여성적 시선이 있다. 그것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여러 장면이나 그림들을 17세기를 벗어나는 한 여성 화가의 시도와 시선 그리고 성장담으로 이끌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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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레르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쓴 『회화 속의 진리』에는 칸트가 사용했던 '파레르곤'에 대한 재해석이 등장한다. 파레르곤은 주변을 뜻하는 '파라'(para)와 작품을 뜻하는 '에르곤'(ergon)을 합성한 말로 작품의 주변, 즉 회화에 있어서는 액자와 같은 틀을 가리킨다. 이 파레르곤은 작품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지시하지는 않지만, 그림을 규정해 준다. 벽에 걸린 그림을 떠올리면 도움이 될 것이다. 액자와 틀은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작품이고, 어디서부터 벽인지의 경계를 알려주며 동시에 작품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한정시킨다. 파레르곤은 작품의 주변부에 불과하지만, 역설적으로 작품의 경계를 정하는 역할을 한다.

데리다의 파레르곤으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재정립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그린 두 번째 초상화(초록색 옷을 입은 여인)와 개인의 내밀한 초상화(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와 자신이 소장하기 위해 그린 작은 초상화와 마리안느가 그리지 않은 엘로이즈와 아이가 있는 초상화를 영화 속에서 보았다. 네 개의 초상화는 모두 엘로이즈를 담고 있지만 그 경계를 한정 짓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회화에 있어서, 이미지의 영역에 있어서, 의미를 한정 짓는 데 있어서 개인, 사회, 시대, 역사, 시선이라는 파레르곤이 있다. 그리고 이 파레르곤은 작품을 둘러싼 맥락들을 가리키면서 작품이 어디에 속하고, 어떻게 의미를 지어야 하는지 결정해 준다. 이것은 새로운 파레르곤의 개입에 의해 얼마든지 깨어지거나 재결정 될 수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단지 17세기의 파레르곤을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다. 비록 옛시대를 빌어 두 여인 혹은 세 여인의 사랑과 연대를 다루고 있지만, 이 세계의 가능성을 검토하는 파레르곤은 동시대와 연결된다. 우리는 이렇게 다시 질문할 수 있다.

'17세기의 여인들보다 과연 누가 더 오래 기억에 남을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누가 더 내밀한 사랑의 기억을 작품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시대의 파레르곤, 저마다의 파레르곤 속에서 경계는 중첩되고, 의미는 재확정되며, 영화를 읽는 방식은 새롭게 피어난다. 최소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그렇다. 이 작품은 불확정의 경계 속에서 새로운 지향점들을 욕망하는 영화다. 꽤 고전적이면서도 그 안에 얼마든지 흔들리는 수 있는 프레임의 경계들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셀린 시아마가 17세기의 여인들을 통해 재발견해 낸, 17세기의 이미지들을 통해 재독해 한 새로운 가능성이자 이 작품이 지속해서 읽혀져야 하는 이유를 제공한다. 프레임에 대한 깐깐한 성찰과 고찰만으로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하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 추신

ⓒ 더숲 아트시네마

이 글의 기초는 11월 26일 더숲 아트시네마에서 열린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하였고, 이때 강연한 초안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그린나래미디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Portrait of a Lady on Fire
감독
셀린 시아마
Celine Sciamma

 

출연
아델 에넬
Adele Haenel
노에미 메를랑Noemie Merlant
루아나 바야미Luana Bajrami
발레리아 골리노Valeria Golino
크리스텔 바라스Christel Baras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작연도 2019
상영시간 121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0.01.16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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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 2022-12-09 22:00:12
동성애 글만 보다가 그림이나 파르레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영화였다는게 신기해요. 좋은그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