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여전히 애도하며, 유토피아를 꿈꾼다
[Interview] 여전히 애도하며, 유토피아를 꿈꾼다
  • 이지영
  • 승인 2022.12.1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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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 그리고 씨네필로서 감독 윤단비를 만나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애도 일기』에서 내면에서 벌어지는 삶과 죽음의 싸움을 자기 안에 갇힌 폐쇄적인 삶이 아니라, 어떤 예지적인 삶으로 흘러들게 만들 것인가. 이것이 '애도의 변증법'이 풀어야 하는 문제라고 말한다.1)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예측하지 못하는 순간에 삶과 죽음이 갈리는 일이 벌어진다. 우리는 그 순간을 미처 예비하지 못해서 뒤늦은 후회를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정체 모를 막연한 불길한 예감 속에서 삶의 결정적인 장면의 어귀를 서성이기도 한다. 마치 <남매의 여름밤>의 옥주가 할아버지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계단 위에서 함께 '미련'을 듣고 있었던 것처럼.

어릴 때 조부모의 죽음을 겪고, 때로는 더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을 겪고, 서투른 10대의 사랑에 인사를 고하며,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은 기억 깊은 곳에 축적된다. 하지만 삶의 중요한 근간이 되는 이 기억들은 충분히 조망될 권리를 확보하지 못하고, 생계를 위한 분투와 사회로의 치열한 편입 싸움에 묻혀버리고 만다. 

윤단비 감독은 그 폐쇄된 기억을 펼쳐 놓을 영화적인 시공간을 만들어낸다. 그가 창조해낸 시공간만큼은―아직까지는―사회적인 경쟁으로부터, 디스토피아와 인간성의 말살, 폭력으로부터도 안전하다. 그렇다고 하여 이것이 현실도피성 픽션이 아닌 것은, 그 감정이 집요할 정도로 땅에 단단히 발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윤단비 감독의 장르적 상상력은 한계를 보이지 않지만, 그가 천착하는 것은 늘 돌아갈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애도'다. 아주 구체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감정으로 타인의 삶에 대화를 요청하는 이 영화들(이미 만들어졌고, 앞으로도 만들어질)을 통해 우리가 각자의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애도하고, 바르트가 말했듯 다른 '예지적인 삶으로 흘러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끝내 그것이 가능하리라는, 혹자에게는 순진해 보일 수 있을 이 희망적인 믿음은, 이 시대에 되려 중요해 보인다.

11월 말미에 시나리오 마감을 한차례 마친 윤단비 감독을 만났다. 창작자인 동시에 씨네필로서 솔직하고 거침없이 나눈 3시간 동안의 대화를 최대한 각색 없이 담고자 했다. 대화의 들뜬 온기가 독자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지기를 바란다.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 윤단비는 단편영화 <생활의 길잡이>(2012)를 시작으로 단편 <불꽃놀이>(2015)를 연출해 16회 대구단편영화제 단편경쟁섹션, 제15회 대한민국청소년영화제 본선에서 상영됐다. 2017년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에 입학해 첫 장편 데뷔작 <남매의 여름밤>을 연출했다. 이 작품은 2019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영화진흥기구(NETPAC)상, KTH상, 한국영화감독조합상, 시민평론가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했으며, 2019 서울독립영화제 새로운선택상, 2020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등 유수의 영화제를 휩쓸며 화제를 모았다. ⓒ 무비스트=윤단비 감독

이지영

가벼운 질문으로 시작하자면, 요즘 일상을 특별히 즐겁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윤단비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고, 위로를 많이 받는다. 그리고 공연을 즐겨본다.

최근 빈 필하모닉(Vienna Philharmonic) 공연을 보았고, 특히 처음 내한한 마리아 조앙 피레스(Maria João Pires) 피아노 리사이틀 공연이 인상 깊었다. 예컨대 쇼팽 콩쿨이라든가, 자신의 기량을 보여주기 위해 테크닉적으로 접근하는 연주자들도 있는데, 피레스는 그게 아니라 순수하게 즐기는 느낌이었다. 마치 인공 부화기 안에 놓여있는 계란 같은 느낌처럼 아늑하고 따뜻했다. 음악도 드뷔시나 슈베르트처럼 따뜻하고 온화한 음악들을 연주했고, 그래서 이 부화기 안에서 영영 깨어나고 싶지 않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피레스의 편안한 의상도 좋았고, 인사도 너무 격식 있게 안 하고 바로 피아노에 앉아서 연주하는 등, 담백한 느낌이었다. 보여주기식 퍼포먼스를 하는 일부 유명 연주자들도 있는데, 본질에 집중하는 연주라서 마음에 더 와닿았다.

이지영

우연이지만, 그 공연에 갔다.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원래도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나. 아니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듣는 편인가.

윤단비

원래는 루도비코 에이나우디(Ludovico Einaudi)나 현대 음악을 좋아하다가, 최근에 클래식을 조금씩 듣기 시작했다. 음악도 영화와 비슷한 것 같다. 연주자가 연주하는 동안에는 어떤 개입 없이 그 사람을 온전히 따라가야 한다. 결이 비슷하고, 물성이 비슷하다 보니 연주를 듣는 동안 생각이 많아졌다. 백그라운드 음악이 되고 인물들이 움직이는, 마치 영화 장면이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그런 느낌이다.

이지영

같은 공연을 봤지만, 역시 영화감독 다운 감상법인 것 같다. (웃음)

윤단비

계속 시나리오가 머릿속 한편에 있어서 어떻게든 끄집어내게 되는 것 같다. 이런 방법이 개인적으로 환기가 잘 된다. 예전에는 몇 시간을 시나리오 말고 다른 일에 쓸 때 마음이 조급해졌는데, 이제 오히려 예술가들의 공연이나 연주를 들으며 환기를 하는 게 도움이 많이 된다. 엊그제 있었던 프랑스의 아크로바터이자 안무가 요안 부르주아(Yoann Bourgeois)의 공연은 보지 못했지만.

 

ⓒ 영화 <동경 이야기>(1953)

이지영

다소 진부한 질문일 수 있으나, 어떻게 영화를 시작했는지, 무엇이 영화를 찍도록 이끌었는지.

윤단비

오즈 야스지로(小津 安二郎, Ozu Yasujiro)의 영화를 보고, '이런 세계가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때까지 진로를 못 정한 상태였는데, 학교 선생님들이 글쓰기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 하셔서 부랴부랴 문예창작과에 원서를 썼다. 입학 후에는 사실 많이 당황스러웠다. 학원을 다니다 입학한 동기들도 많아서, <시민 케인(1941)>을 볼 때도 교수님이 '무슨 쇼트인지 아는 사람?' 하면 다들 손 들고 말하는 분위기였다. 트래킹 숏, 이런 영화 용어들도 잘 모르겠고. 그래서 초반에 영화를 많이 보고, 암기식으로 외우기도 했다. <시민 케인>(1941)은 이런 쇼트, 오즈 50mm 렌즈, 다다미 쇼트, 이런 식으로.

그러다 필모 리스트를 쭉 보면서 감독들의 세계관과 연출적인 비전, 형식들도 보이면서 어떤 언어로 이야기를 하는지가 보였다. 이들이 각자의 언어로 말하는 게 매력적이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는 다른 길을 갈 것 같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지 않고, 이 길로 간 것 같다. 실패할 수도 있지만 계속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싫어하는 건 이유가 많은데 좋아하는 데는 이유를 찾기 힘들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어떻게 시작했다는 게 모호하지만, 구원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원래 나는 삶의 동력이 많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만약 내년에 영화를 찍으면 내후년까지는 목표라든가, 다음 깃발이 꽂히는 느낌이 들었다.

이지영

작가주의 창작자로 거듭나는 데 있어서 오즈의 영화가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던 것 같다. 오즈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윤단비

이상하게도, 나는 동아시아 영화들을 무척 좋아한다. 그게 영화에서도 느껴진다는 평을 많이 받았는데 당시에는 그게 느껴질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 가까이는 소마이 신지(相米慎二, Somai Shinji)라든지, 오즈 야스지로라든지, 그 시절의 나루세 미키오(成瀬 巳喜男, Naruse Mikio), 대만의 에드워드 양(楊德昌, Edward Yang)과 허우 샤오시엔(侯孝賢, Hsiao-hsien Hou), 이안(李安, Ang Lee)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경우엔, 장편을 찍기 전까지는 그의 영화가 내 피부에 가깝게 느껴져서 좋았다. 오즈가 인물을 바라보는 태도를 특히 좋아하는데, <동경 이야기>(1953)에서도 엄마가 죽는 모습을 안 보여주고 바로 장례식으로 전환되거나, 노인 두 명이 앉아있다가 장례식장으로 전환되는 장면이라든가. 이렇게 그는 필요한 시퀀스와 생략해야 할 시퀀스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연출을 준비하면서는 오즈의 영화에서 두드러진 형식에 좀 더 주목하게 되었다. 오즈의 영화를 보면 아주 단정하고 정갈하며 형식이 뚜렷하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경우에는 측면에서 대문과, 집 외경도 보여주고 인물의 동선을 파악할 수 있게 영화를 만든 반면에 오즈의 영화를 보면 집 동선이 잘 파악 안 되고 외관은 거의 비춰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 리듬감이 시적이었다. <부초>(1959) 같은 경우에도, 아이들이 2명 지나가고, 몽타주 씬에서 등대를 찍을 때 맥주병을 놓는다거나. 그런 홈드라마에서의 리듬감을 굉장히 잘 구사하고 구축해내는 감독이다.

또 오즈 영화 중 흥미로운 것은, <부초 이야기>(1934)와 <부초>(1959)가 있는데 전자는 무성으로 찍은 흑백영화고, 후자는 그것을 오즈가 자기 영화를 컬러로 리메이크한 것이다. 그 사이를 확장하는 것을 보면서, 필적을 남기듯이 자신만의 스타일을 투영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고, 따라가고 싶은 자세라고 생각했다.

이지영

올해 10월 금지옥엽 영화상영회 '씨네 북 살롱'에서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2014)를 상영한 후에 관객과의 대화가 있었다. 이때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영화가 저평가되고 있다는 언급을 한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해 부연하여 설명해 줄 수 있는지? 그리고 여전히 '슬로우 시네마'를 지지하는 이유를 듣고 싶다.

윤단비

내가 받은 인상으로는, 영화계에서는 초기에 '어떤 새로운 시도로 주목을 받은 감독' 이런 식으로 평가를 하는 추세인 것 같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2004)와 비슷한 기획으로 보일 만큼, 다큐멘터리와 픽션 사이의 모호한 형태로 영화가 많이 만들어졌지만, 가와세 나오미의 영화에서는 다큐멘터리 느낌이 강렬하게 느껴지면서 다큐 쪽으로 치중되어 있다. 영화 속에서 그런 강렬함을 포착하는 것이 어려운 지점이라고 생각하는데, 가와세 나오미 감독은 이걸 잘 캐치해내는 사람이다.

특히 <수자쿠>(1997)라든지, <사라소주>(2003)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이걸 연출했는지 궁금해서 현장에 가서 보고 싶을 정도이다. 대상을 지켜보다가 어떤 순간을 결정적으로 포착해낸 느낌이 드는데, 지금에 와서는 이걸 모방하거나 따라 하기 쉽지 않은 작업이다. 앞으로의 행보가 어떨지 모르겠으나,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 단순히 '팬시한 감독이다' 이런 식의 평가를 받기엔 저평가되어있는 게 아닌가 싶다. 최근작들이 산업 안으로 들어오면서 예전 색깔과 달라지긴 했지만, 내 나름대로는 차기작으로 어떤 작품을 만들지 기대를 갖고 있다.

이지영

작년 8월에는 '재팬 필름 페스티벌(JFF)'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대담을 나누었다. 당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가족을 그리는 작가라고 인식되고 싶지 않다'라고 인터뷰한 내용이 인상 깊었다.

윤단비

그때의 맥락을 다시 돌아보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20대, 30대, 40대로 가면서 자기 시각의 변화를 담다 보니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화자의 시간도 계속 바뀐다고 이야기했다. 만약 다음 영화도 가족영화로 한다면, 또다시 10대 주인공으로 할 수도 있겠지만, 나이가 더 들고 나서는 엄마의 시선으로 영화를 만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둘을 같은 가족 영화의 범주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물론 큰 틀에서는 같은 범주지만,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조금씩 달라지게 되니까. 자기 삶을 그렇게 투영하고, 시각을 영화에 접목시킬 수 있다는 좋은 것 같다.

이지영

최근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Alejandro González Iñárritu) 감독도 그렇고, 나이가 들면 자전적이고 회고적인 이야기를 하는 등, 확실히 나이가 들면서 그 나이대의 시각이 반영되는 것 같다.

윤단비

이냐리투 감독도 그렇고, 알폰소 쿠아론(Alfonso Cuarón),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óvar) 감독도 그랬던 것 같다. 노스탤지어에 빠지는… 신기한 점은 에릭 로메르(Eric Rohmer)는 계속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그 시선이 중년으로 가기도 하지만, 주로 청춘에 머물러있다. 그럼에도 시간이 갈수록 시선이 점점 완숙해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대상이 바뀔 뿐 시선은 동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나, 홍상수 감독이 나이가 들어가며 주인공이라든가, 시각이 점차 바뀌는 게 눈에 보여서 흥미로웠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 ⓒ 그린나래미디어

이지영

<남매의 여름밤>을 스크린으로 만난 지도 벌써 3년이 되었다. 첫 장편 연출작으로 부산국제영화제, 로테르담 영화제, 뉴욕 아시안 영화제 등 유수의 국내외 영화제의 큰 관심과 호응을 받으며 데뷔를 했다. 창작활동을 하는 중요한 발단이나 계기가 된 만큼 각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차기작으로 나아가기 위해 떠나보내는 과정도 그만큼 많은 노력을 요했을 것 같다. 시간이 흘러 이 작품을 돌아보는 심정은 어땠나.

윤단비

사주팔자 같은 이야기 일수도 있지만, <남매의 여름밤>을 또한 자기 팔자소관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터뷰하거나 GV를 할 때도 영화의 단점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웬만하면 잘 안 하고 싶다. 내 자식을 욕하는 것 같기도 하고, 스태프들과 배우들도 다 있는데 아쉬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영화가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다시 돌아가더라도 그 이상으로 못 해내겠다 싶다. 우연도 많이 작용했고, 운 좋게 찍은 것도 있기 때문이다. '할 만큼 했다' 이런 심정이다.

이지영

이후 <어나더 레코드>로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에 도전했다.

윤단비

<어나더 레코드>는 이제훈 배우가 먼저 섭외된 상태에서, 듣기로는 이제훈 배우가 여성 감독과 한 번도 작업해 본 적이 없었다 한다. 그래서 동년배 여성 감독과 영화를 찍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쇼박스에서 연락을 받아서 작품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제훈 배우는 배우 일을 시작한 이래로 쉼 없이 연기와 작품 활동을 했기 때문에, 쉬는 시간이나 다른 일을 해본 경험이 아주 적었다. 그래서 연기 외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 없으니까, '만약 배우가 되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을 했을 것 같은지' 혹은 '어떤 작업을 한번 해보고 싶은지' 등 이루지 못한 것들이나 앞으로 이루고 싶은 것들을 픽션으로나마 실현해 보고자 했다. 사전 인터뷰를 몇 번 하고, 이를 토대로 짧은 픽션을 연출했다.

<남매의 여름밤>에 비해서, 배우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점이라든가, 카메라 뒤에 있는 감독의 존재감을 좀 더 드러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옥주의 시점이나 철저히 극 중 인물의 입장으로 상황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감독 윤단비 자신으로서, 이제훈이라는 인물을 집중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전작과 비교하여 어떠했나?

윤단비

무조건 배우에게 포커싱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래는 아녜스 바르다(Agnès Varda)처럼 감독이 배우와 동행하는 식으로 하고 싶었는데, 얼굴을 모르는 사람을 관객들이 보면 안 된다고 하더라. 이런 제약이 많았다.

이지영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7)을 보여줬어야 하는데! (탄식의 한숨)

윤단비

뒤통수 조차도 나올 수가 없다. 그렇다고 딱히 출연을 원한 것도 아니지만. 어려웠던 점이라면, 영화는 내가 만든 캐릭터를 연출하면 되는 건데, 다큐는 인물에 기대서 갈 수밖에 없어서 이 인물을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이었다.

 

ⓒ OTT seezn(시즌) 오리지널 영화 <어나더 레코드: 이제훈>

이지영

연기 경험이 거의 없는 비전문 배우들을 연기 디렉팅하는 것과, 노련하고 숙련된 이제훈 배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는 것, 각각의 즐거움과 고충이 있었다면.

윤단비

둘 다 내가 예상하지 못하는 것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남매의 여름밤>에서는 물론 박승준 배우가 비전문 배우는 아니지만 연기 경력이 많지 않았고, 김상동 선생님은 오히려 비전문배우에 가까우셨다. 승준 배우 같은 경우는 어렸기 때문에 디렉팅을 거의 행동 위주로 줬다. '나무 기둥에서 안 떨어졌으면 좋겠다', '누나한테서 책가방을 무조건 지켰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했는데 예상하지 못한 어떤 지점들이 있었다. 

아빠가 동주를 깨울 때, 짜증을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웃는다든가, 가족들끼리 심각하게 할아버지 요양원 얘기를 하고 있을 때도 혼자서 포도를 열심히 먹고 있다든가. (사실 그때 그 포도가 정말 맛있기는 했다.) 그렇다고 심각하게 경청하고 있기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이 편이 훨씬 더 자연스러웠다. 김상동 배우님 같은 경우는, 승준 또래의 손자가 있으셔서, 자연스럽게 의자를 빼주신다거나, 애정이 느껴지는 미세한 것들이 계속 보였다. 생일 케이크를 할 때도 계속 승준 배우를 보고 계신다거나. 이런 빈 틈과 여백에서 오는 것들이 참 좋았다. 이런 디테일들이 녹아들면서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었고, 영화 안에서도 그것이 큰 동력이 되었다.

이제훈 배우 같은 경우는, 이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끌고 갈 것인지 큰 구성은 있어도 촬영을 하고 이들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내가 개입을 할 수 없으니, 예측 밖의 어떤 것들을 얻는 순간이 있었다.

 

윤단비 감독 ⓒ 포토그래퍼 장성용 촬영

이지영

어제까지 시나리오 마감 작업을 했다고 들었다. 최근의 근황이 궁금하다.

윤단비

최근에 제작사 미팅을 많이 했다. 미팅 때마다 "올림픽 감독이 되면 안 된다. 4년에 한 번 영화를 찍으면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웃음) <남매의 여름밤>이 2020년에 개봉을 했으니, 내년에 만 3년이 되어간다. 내년 8월이 3년이라고 우기면서 최대한 뒤로 미루는 중이다.

<남매의 여름밤> 개봉 때는 PD가 따로 없다 보니, 마케팅도 같이 하고 GV에도 참여하느라 생각보다 다른 작업을 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1년은 이 영화에 완전히 매진하며 보냈다. 그다음 해 제작사에서 들어오는 기획안은 주로 리메이크 작품들이 많았다. 굳이 잘 만들어진 영화를 리메이크를 할 이유가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로맨틱 코미디 제안도 많이 받았는데, 나는 생각보다 그런 말랑말랑한 것을 못 견디는 편이어서 어렵겠다 싶었다.

<남매의 여름밤> 때까지만 해도 차기작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영화제 GV에서는 늘 차기작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올해 <어나더 레코드>를 찍은 이후에, 독립영화 시나리오 한편과, 제안이 들어온 크리처물 드라마 한 편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드라마도 애도에 대한 이야기다. <남매의 여름밤>에서 애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소하였지만 여전히 애도의 감정을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 같다.

이지영

크리처물이라니, 정말 기대된다.

윤단비

원작이 있는 작품이고, 산호 작가의 웹툰 《장례식 케이크 전문점 연옥당》을 기반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웹툰보다 그래픽 노블 형태에 가깝긴 하다. 사실 지금 쓰고 있는 작품에서 크리처들이 서로 공격하고 싸우는 이야기는 아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2017)같은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적절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소수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세눈박이 뱀파이어가 사회의 소수자로 존재하는 것이다.

드라마는 트리트먼트까지 나왔고, 독립영화는 시놉시스까지 나왔는데 둘 중 어떤 게 먼저 촬영에 들어가게 될지는 모르겠다. 제작사는 당연히 드라마를 생각하고 있겠지만, 캐스팅 때문에 시간이 더 걸리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다.

이지영

2개 시나리오를 동시에 작업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남매 >의 성공적인 데뷔 이후 차기작에 대한 고민, 혹은 부담감이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했다. 새로운 작업 과정은 어땠나.

윤단비

<남매의 여름밤>을 이후에, 차기작과 관련된 조언들을 많이 들었다. <남매의 여름밤>에서의 장기를 살려서 연속성을 가진 영화를 만드는 게 어떻겠냐는 평도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돌을 더 멀리 놔두고, 찾아가 보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래서 고민이 많았다. 지금 쓰는 영화는 가족 이야기는 아니지만 <남매의 여름밤>와 정서가 비슷하다.

드라마 작업을 할 때는 접근 방식이 좀 달라졌다. 전에는 내가 완전히 알고 있는 캐릭터를 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드라마에서는 점점 알아가는 과정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원작이 있다 보니, 나의 해석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시간도 필요했다. 드라마가 안 풀릴 때는 영화를 조금 쓰고, 이런 식으로 돌아가며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시나리오가 솔솔 잘 풀리냐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다. 지금은 윤곽이 어느 정도 나왔는데, 그전까지는 번갈아 가면서 다시 엎고, 수정하는 과정들이 있었다.

이지영

원래도 TV작업에 호기심을 가지거나, 시리즈·드라마 등의 작업에 본인이 가진 것을 펼쳐보고 싶은 가능성을 느낀 적이 있었는지.

윤단비

<남매의 여름밤>을 연출한 이후에 점차 관심을 갖게 되었다. 드라마 중에서는 프랜시스 맥도먼드(Frances McDormand)가 주연한 HBO 드라마 <올리브 키터리지>(2014)를 정말 좋아한다. 책도 집에 가지고 있다. 드라마를 먼저 보고 책을 나중에 봤는데도 정말 좋았다. 드라마에서만 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을 했고, 이런 작품이라면 어쩌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그런 비슷한 결을 따라가는 이야기는 아니다.

시대가 계속 변하고 있는데, 나도 사실은 보수적인 편인지라, 지금보다 더 시간이 흘렀을 때 새로운 도전을 하기 두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어떤 재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드라마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이지영

창작 과정에서 당신만이 가지는 특별한 습관 혹은 강박증이 있을까?

윤단비

아직까지 루틴하게 쓰지는 못하고 있는데 이걸 잡으려 하고는 있다. 그 외에 유의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실제 삶이 있고 드라마에서 모방된 삶이 있는데, 보통 단편 영화를 찍는 학생들이나 이런 경우에 미디어가 하도 익숙하다 보니, 드라마가 진짜 삶이라고 생각하고 영화에 투영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지상파 드라마에서는 'ㄷ'자로 열려 있는 세트에서 아침 먹을 때 '아버님 오셨어요' 같은, 평소라면 절대 안 할 것 같은 대사를 한다. 동선도 실제 삶에선 그렇게 움직일 것 같지가 않고.

그런 걸 따라가고 싶지 않다. '이게 진짜 감정인가' 계속 고민하는 것 같다. 드라마를 쓰기 위해 만들어낸 감정인지, 실제 이 인물이 느낄 감정인지를 생각하기도 하고. 대사를 쓸 때도 일반적이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늘 있다. 예를 들어 연애 이야기를 쓴다 하면, 실제 상황에서는 그냥 넘어갈 일이기도 하고, 오히려 별것 아닌 걸로 싸우는 것처럼 경우들이 다 다르다.

전에도 몇 번 언급했지만, 봉준호 감독의 <옥자>(2017)에 나오는 미자(안서현)의 대사를 가장 좋아한다. 박문도 역할의 윤제문 배우가 올라가면서 컴퓨터를 꺼낼 때 미자가 "맥북이에요?"하고 물어도 대단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레티나 디스플레이?"라고 묻는 게 아닌가! 이처럼, 예상보다 한걸음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는 것이 좀 더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 같다. 두리뭉실한 대사를 전달할 때보다, 디테일하게 얘기할수록 감정이 확장된다고 해야 할까, 이입이 잘 된다. 오히려 인물들이 자기들만 아는 은어를 쓰더라도, 예상 가능한 걸 보여주는 것보다 그런 식으로 깊게 들어갈 때 대사가 훨씬 풍성해지는 느낌이다.

 

ⓒ 영화 <믹의 지름길>(2010)

이지영

그럼 요즘 끌리는 장르는 어떤 쪽인가.

윤단비

SF도 제안을 받지만, 이상하게 SF보다는 서부극에 더 끌린다. 켈리 라이카트(Kelly Reichardt) 감독의 영화라든가. 오히려 SF에서 그리는 감정이 확 와닿지 않아서 반대로 서부극으로 가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은, 만주 외에 서부극을 찍을 만한 장소가 없긴 하지만. 

켈리 라이카트 감독 영화 중에서 <믹의 지름길>(2010)이라는 영화가 있다. 굉장히 흥미로운 서부극인데, 여성 서사로 그린 웨스턴 영화이다. 지도를 가진 남자 길잡이가 있고, 가족들의 무리가 서부를 횡단하기 위해 이 남자를 따라간다. 그런데 남자가 하는 말의 진위를 믿을 수 있는 지, 돈만 받고 도망가는 게 아닌지 점점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남자들만 회의에 참여하고 총을 갖고 있으면서 남자들이 주도권을 갖지만, 나중으로 갈수록 여자들이 주축이 되어 그 길잡이를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해 , 미묘하게 머리싸움을 하면서 갈등을 벌이는 내용이다. 이제 여자들도 함께 그 결정을 하겠다는 것, 주체성을 갖겠다는 것인데, 같은 이야기를 다른 시각과 다른 대상으로 바꾸었는데도 마치 새로운 연기처럼 느껴지게 하는 연출력이 놀라웠다. 폭력적으로 누군가에게 복수하거나, '여자들의 반란' 이런 식으로, 엄청난 카타르시스가 있는 것도 아닌데, 2010년에 만들어진 영화라고 감안해도 정말 세련된 지점이 많다.

아무튼 이런 웨스턴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주변에 이야기하면 대부분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을 떠올린다.

이지영

SF라는 장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윤단비

SF 제안을 몇 번 받기도 했는데, 테드 창(Ted Chang)처럼 클래식한 SF 장르문학을 좋아한다. 

SF 제안이 전보다 더 들어오는 이유는, 요즘 소설들이 거의 SF 장르가 주축으로 되어서 나오고 있어서 영화도 그쪽을 따라가는 것 같다. 많은 SF 영화들이 디스토피아 세계관만 다루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아직도 유토피아를 꿈꾼다. 예를 들면 아파트가 무너지고 좀비가 출몰하고, 사람들은 각자의 이기심으로 처절하게 싸우게 되는 이야기가 흔히 펼쳐진다. 이런 서사도 당연히 필요하기는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낙관적인 어떤 것, 유머 코드, 그리고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싶다.

결국, SF에서도 그리려고 하는 건 '감정'이다. <인터스텔라>(2014)도 부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고, <그래비티>(2013)도 그렇고. 다만, 요즘 유행하는 SF의 변주를 보며 내 마음이 안 채워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아직은 유토피아를 꿈꿨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무엇이 있을까 찾아보다가, SF라고 부르기는 어렵겠지만 <아기 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1996)이 떠올랐다. 우주에서 무엇인가를 격추시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결국 엄마를 만나고 보내주는 이야기니까. SF라 하더라도 광범위하게 가지 않고, 지금 이곳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우주에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줄 게 아니라면, 나중에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게 있긴 하지만 너무 허황되어서 말해도 될지 모르겠다. 

이지영

무척 궁금하다.

윤단비

사실 제작사에 농담처럼 한 얘기인데, 빌 머레이(Bill Murray)와 아담 드라이버(Adam Driver)가 나오는 <아기 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리메이크작이다. 일단 둘리는 실사에서 민둥하게 나오면 기괴해지니까, 부숭부숭한 느낌의 털이 무조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주선에서 빌 머레이와 아담 드라이버가 초반에 '스페이스 오디티'를 꼭 불러야 한다. 밖에는 뼈다귀랑 물고기가 지나가고, 얼음별 해골들이랑 싸우는 그런 장면을 상상해보라.

아담 드라이버가 '마이콜' 역할을 해서 노래를 열심히 부른 다음, 빌 머레이가 비굴하게 자기도 불러보겠다고 하면서, 빨간 비니 같은 것을 쓰고 열심히 열창하는 모습을 다들 보고 싶지 않을까? 단, 한국화 했을 때는 어떤 느낌일지 잘 모르겠다.

이지영

큰 스케일의 영화를 제작할 기회가 생긴다면 어떤 새로운 장르에 도전해보고 싶은지? 줄리아 뒤쿠르노(Julia Ducournau) 감독의 <로우>(2016) 같은 장르에도 도전해보고 싶다고 한 것을 기억한다.

윤단비

물론 있다. 그런데 뭘 하고 싶은지는 항상 생각이 바뀐다. 그 당시에는 차분하게 시나리오를 작업하다 보니, 루카 구아다니노(Luca Guadagnino) 감독의 <본즈 앤 올>(2022)은 아직 못 봤지만 인육을 먹는 영화나, 카타르시스가 폭발하고 살육의 페스티벌이 펼쳐지는 영화로 무언가를 분출하거나 환기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크리처물을 쓰면서 어느 정도는 해소가 된 것 같다.

이제는 '얼마나 멀리 가 볼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중이다. 조지 밀러(George Miller) 감독이 <해피 피트>(2006) 시리즈를 만든 이후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를 찍었는데, 그 행보가 참 멋있다고 느꼈다. 자기가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라고 할까. 그래서 나도 조금은 극단적으로 <로우>를 얘기했던 것도 있다. 항상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자 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이지영

최근 한 인터뷰에서 관심사 중 하나로 '기후변화'를 언급했다. 기후변화 하면 헐리우드 재난 영화처럼 거시적인 입장으로 구현하는 큰 스케일의 영화들이 생각난다. 시네마에서, 우리 일상에서 마주하는 기후변화를 미시적인 시각으로 담아낼 수 있을까.

윤단비

한 작품을 만들고 이런 지론을 펼치는 게 좀 민망하기도 하지만, 영화가 유행에 편승하는 순간, 구시대적인 것으로 전락한다.

예를 들어 예전에 조폭 영화가 한창 성행할 때가 있었는데, 그런 흐름에 편승하는 순간 사람들은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주제를 한마디로 압축하여 전달하는 이야기보다는 구현이 필요한, 약간은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를 다루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점에 있어서 우리의 시각도 변하고 있고, 시대도 변하고 있으니, 영화가 그것을 흡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영화에서 교조적으로 '분리수거해야 돼!' 이런 식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대상이나 기류들을 반영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아사코>(2018)라든가, <드라이브 마이카>(2021)에도, 항상 일본 지진에 대한 것들이 나오긴 한다. 이미 겪은 트라우마에 대한 것들이지만, 앞으로 다가오는 것들도 녹여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후변화는 체감이 잘 안 되기도 하고,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조금씩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보니, 오히려 기후변화 자체가 초점이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춰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영화 <남매의 여름밤> ⓒ 그린나래미디어

이지영

차기작 독립영화는 10대 청소년들의 사랑 이야기라고 들었다. <남매의 여름밤>에서도 옥주의 시점과 그 시절을 지나온 감독의 시점이 차이가 있었던 것처럼, 이번 작품에서도 마찬가지 일지 궁금하다. 아무래도 10대들의 사랑 이야기를 하다 보면 스스로 10대에 겪었을 경험들을 투영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데. 이번에도 이런 '시점의 차이'를 통해 어느 정도 인물과 감독 스스로의 심리적 거리를 둔 상태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했을까?

윤단비

이것도 어떤 구체적인 경험이 투영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이 사람을 짝사랑했을 때의 어떤 감정이라든가, 그 나이대 남자아이들이 갖는 무뚝뚝함이라든가. 지금이라면 편하게 대할 것들도 그 당시에는 서툴고… 이런 보편적인 감정들은 누구나 이해하지 않겠나. 그렇지만 특별한 에피소드가 투영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지영

멜로를 풀어내는 방식이 감독마다 다를 텐데, 윤단비 감독이라면 어떻게 풀어내고 싶은 지 궁금하다. 사석에서 들은 일화로, 허진호 감독과 박찬욱 감독이 영화 스타일은 극과 극이지만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고 들었다. <봄날은 간다(2001)> 엔딩 장면에 이영애 배우가 화분을 다시 갖고 가지 않나. 박찬욱 감독이 그 부분에서, 자기 같으면 화분으로 머리를 쳤을 거라고 했다던데. 멜로를 해석하는 방식이 감독마다 이렇게 다르다는 점이 재밌다.

윤단비

이영애 배우가 화분으로 때리면 안 될 것 같은데... 아니, 때릴 수 있을 것 같다. 듣고 보니 이해가 된다. 나이가 들수록 은수(이영애)의 입장에 공감이 많이 간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를 봤을 때 재미있었던 점이, 유지태 배우 눈썹이 다듬어져 있지 않다. 별것 아니지만 그런 자연스러움이 있다. 사실 지금은 깎은 듯이 잘생긴 사람도 너무 많다.

그리고 연인들에게 장벽이 많이 사라졌다. 핸드폰으로 바로 연락도 되고, 병 치료도 전보다 잘 되고. 예전에는 <8월의 크리스마스>(1998)처럼 말기암에 걸리면 무조건 시한부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요즘은 의학기술도 발달해서 항암치료도 할 수 있다. 이런 많은 장벽들이 무너지다 보니, 퀴어로 가는 등, 다른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던 것 같다. 멜로란 장애물이 필요하니까. 

그리고 요즘은 사랑이 최우선인 시대가 아니라는 점도 있다. 먹고 살기 바쁘고, 이 인물들이 생계를 내팽개치면서 '너 없으면 안 돼'라고 외치는 걸 관객들이 원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할까. 그래서 시대극으로 많이 가버리는 것 같다. 현시대에는 멜로가 정말 드물어졌다. 로맨틱 코미디로 더 가볍게 가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시기만의 아름다움을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미묘한 감정들은 여전히 유효하니까. 아주 러프하긴 하지만 배경에 현재와 과거가 있고, 과거 얘기가 될 수 있긴 한데 확실하지는 않다.

이지영

그럼 이 캐릭터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큰 사건이나 장애물은 없을까. 혹시 중간고사라든가? (웃음)

윤단비

그렇지는 않다. 정말 거칠게 표현하자면 '불행 포르노'라고도 하는데, 조심스럽긴 하지만 요즘 시대의 멜로를 만들어 내기 위해 고시생이나, 장수생, 취준생을 많이 그리는 것 같다. 현실적인 문제와 척박한 환경 안에서, 사랑을 어떻게 지켜내야 할지를 보여주는 식의 서사가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들이 사랑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난관을 극복하려고 분투하는 것이 아니라, 이때의 순간이나 감정 자체에 더 집중하고 싶다. 나는 고시생의 마음을 사실 모르니까. 그렇다고 모르는 것에 대해 못 쓴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을 이용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만드는 사람에게 이런 경험이 거의 없기도 하고.

이지영

성인들의 사랑 이야기는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았나.

윤단비

그것은 아니다. 어디까지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성인들의 사랑 이야기도 가지고 있는데 지금은 첫사랑이라는 감정에 집중하다 보니 나이를 10대로 설정을 하긴 했다. 성인 멜로도 너무 좋고, 멜로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아사코>도 정말 좋아한다. 그런데 현시점에서 성인들의 멜로 영화를 한다고 했을 때 어딘가 무거워지는 감정이 드는 것 같다. 현실의 무게감을 완전히 타파할 방법을 아직 못 찾았다.

좋아하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중에,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1989)가 있다. 이 영화를 보면, 취업 준비라든가, 현실의 무거운 부분이 없고, 세월을 거슬러 해리(빌리 크리스탈)와 샐리(멕 라이언)가 만나는 시퀀스들의 연속이다. 그렇게 감정에 집중하는 영화를 좋아한다. 만약 지금 성인들의 사랑 이야기를 한다면, <결혼 이야기>(2019) 같은 영화를 하고 싶다. 사랑을 보내주는 성숙한 태도 같은… 그래서 성인 멜로를 아직 구체화 못 시킨 것 같다.

이지영

서로 진흙탕에 빠지는 것보다는 원숙한 상태에서 아름답게 보내줄 수 있는 사랑을 그리고 싶은 것인가.

윤단비

진흙탕에 빠지는 것도 너무 좋다. 요아킴 트리에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2021)도 좋아하는데, 이런 시나리오가 지금의 한국에서 통용될지는 모르겠다. 주인공이 계속 직업을 바꾸고 하는데, 지금의 사회 분위기 상, 이 사람은 그래도 여유가 있으니까 이런 선택을 한 것이라고 곡해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 부분이 좀 조심스러운 것 같다.

결함이 있더라도 고깝게는 안 보였으면 좋겠는데, 현실의 문제들이 영화에 투영될까 봐 우려된다. 겉보기엔 나쁜 여자이더라도 그냥 '이 사람은 이런 캐릭터구나' 이런 식으로 받아들여지면 좋겠다. 외국 영화 주인공에 대해서는, 이런 문화권이라서 이해받는 지점이 있는데, 한국 영화에서도 이해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물론 <헤어질 결심>(2022)처럼 그런 식의 돌파구를 찾아낸 영화들이 분명 있고, 시도할 만하다고는 생각한다.

 

영화 <남매의 여름밤> ⓒ 그린나래미디어

이지영

준비하고 있는 작품에서도 <남매의 여름밤>에서의 애도의 테마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마치 돌아가신 옥주와 동주의 할아버지를 이제 연옥으로 모시고 가는 느낌이랄까? '죽음'과 '연옥'이라는 테마에 천착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윤단비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첫사랑도, 그때의 미숙했던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있는 것처럼, 정말 소중한 사람이 죽었을 때 어떤 이유에서든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운명처럼, 관문처럼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것이 나에게 아직도 제일 두려운 어떤 것이다.

이지영

이런 부분은 개인적인 경험에서도 기인하는 것일까.

윤단비

경험도 있는 것 같다. 일찍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겪기도 했고, 그래서 그때는 죄책감 같은 게 항상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미드90>(2018)을 연출한 조나 힐(Jonah Hill)이 본인을 심리 상담해준 테라피스트와 <스터츠: 마음을 다스리는 마스터>(2022)라는 다큐를 찍었다. '결국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그림자가 그 사람의 원동력이다. 그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는데 공감이 많이 갔다. 단편 작업을 했을 때는 당시엔 최선을 다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핵심 주제가 따로 있는데 우회해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 굳이 증명하고 싶지도 않았고, 자신도 있었는데, 이제는 직면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어찌 보면 가장 보편적인 경험들이다 보니, 아직까지도 해소되지 않은 어떤 것들이 있다.

어릴 적 내 꿈은 파수꾼이었다. 어릴 적에는 성장소설을 많이 읽었는데, 그중 하나가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주인공이 홀든 콜필드가, '나는 꿈이 없고 단지 아이들이 호밀밭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정도의 어떤 걸 하고 싶다.' 이렇게 말했는데 당시에 나도 꿈이 없었고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지금 스스로를 너무 착하게 포장하고 있는 것 같은데… (웃음) 대의적으로 그렇다기보다는, 누군가의 죽음을 겪고 싶지 않으니 방어 기제로 먼저 누구를 보호하고 싶고, 그런 존재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애도라는 테마에 매달리는 이유는 그 연장선이라고 생각한다.

이지영

마지막 질문이다. 향후의 일정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은지도.

윤단비

일단 지금은 계속 글 작업을 하고 있다. 내년에는 둘 중 무엇이든 프로덕션에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2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잊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확실히 있는 것 같다. 시간이 많이 지나면, '예전의 누군가'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아녜스 바르다가 존경스러운 점은, 말년까지 필모를 계속 쌓아갔던 그런 자세이다. 그분처럼 꾸준하게 영화를 하고 싶고, 필모를 쌓아갔으면 좋겠다. 옛날에는 단 하나의 마스터피스를 남기고 유명을 달리해도 된다는 생각도 했다. 아니면 어딘가 오점이 있더라도 이 부분에서만큼은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 그리고 나도 좋아하는 영화를 찍으면, 더 이상 여한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 시기도 있었다. 이제 그렇지는 않고 그저 꾸준히 찍고 싶다.

<코끼리는 그곳에 있어>(2018)를 유작으로 남기고 작고한 후보(胡波, Hu Bo) 감독이 연출권이나 편집권 때문에 자살을 했는데, 그 마음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것이 작품의 끝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 같다. 작품을 지키기 위해 인생의 많은 부분을 희생한다는 것은… 창작자가 받는 평가는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즈를 정말 좋아하지만, 그 시기에 가능했던 어떤 필모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행착오가 생기더라도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게 맞지 않나 이런 생각도 한다. 나중에 내가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 어떻게 비춰질 것인지 알 수 없겠지만, 내 삶에서 최선이라고 믿는 것을 계속해나가고 싶다.

[인터뷰 이지영, karenine@ccoart.com]

1) 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 김진영 역, <걷는나무>, 161p.

"안에서는 싸움을 멈추지 않는 삶과 죽음 (애도의 이중적 의미처럼 자주 중단되면서) (누가 이 싸움에서 이길까?) – 그런데 밖에서는 그런 순간에도 이어지는 멍청이 같은 삶(쓰잘 데 없는 일들, 치졸한 관심사들, 그렇고 그런 만남들. 어떻게 이 싸움을 자기 안에 갇힌 폐쇄적인 삶이 아니라, 그 어떤 예지적인 삶으로 흘러들게 만들 것인가. 이것이 애도의 변증법이 풀어야 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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