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즈 앤 올' 아이들은 생존의 밤에 산다
'본즈 앤 올' 아이들은 생존의 밤에 산다
  • 김경수
  • 승인 2022.12.0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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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불화하는 보편적인 이야기 혹은 정치적인 소수자 이야기"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지금껏 여러 감독이 '티모시 샬라메'를 도화지로 저마다의 '제임스 딘'을 그려내고 싶어 했다.

우수에 젖은 듯한 퇴폐미가 서린 눈과 연약하고도 꼿꼿한 육체,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떨리는 목소리가 한 데에 어우러진 그의 아우라는 스타 시스템이 종말하고 있다는 진단 아래서 존재감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물론, 그 아우라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과 <작은 아씨들>(2020), <레이니 데이 인 뉴욕>(2019), <헨리 5세>(2020) 등의 영화에서 미성숙한 귀족의 뉘앙스로 드러나기도 했다. 필자에게는 <레이디 버드>(2017), <뷰티풀 보이>(2019), <듄>(2021)의 티모테 샬라메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이방인이지만 거부할 수가 없는 매력을 지닌, 반항아로 스스로 정체화하고 있으나 속은 병들어 있는 모순적인 캐릭터로 드러나는 이중성을 그려내기에 이만한 배우가 없어서다. 이는 그의 창백한 낯빛에 더 눈길이 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티모시 샬라메가 시대의 아이콘으로 조명되고 있는 것은, 제임스 딘이 그러했듯 잘생겨서이기도 하지만, 그가 지니는 이미지가 시대의 청년상을 무의식적으로 반영하고 있기도 해서다. 1995년생인 그는 어느덧 서른에 가까워지고 있는데도, 여전히 소년미를 간직한 비성년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신작 <본즈 앤 올>(2022)은 전작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와는 정반대로 샬라메를 미국 곳곳을 방랑하는 열아홉살로 그려낸다. 원작부터가 청소년을 독자로 하는 영 어덜트 소설이기에 각본에 틴에이지의 정서가 담겨 있는 데다가, 열아홉은 우리가 흔히들 청소년에서 성년으로 진입하는 나이로 보는 나이이기에 이러한 설정은 샬라메의 비성년의 이미지를 다루기에 탁월하다. 구아다니노는 티모시 샬라메를 자신의 제임스 딘으로 그려내고자 하며, 그의 표정을 포착하는 여러 씬에서 드러난다. 트럭에 비스듬히 걸쳐 있는 샬라메의 초상은 제임스 딘의 시그니처인 장면들과 비슷하게 연출된다. 샬라메를 잘생긴 배우에서 어떠한 아이콘으로 격상시키고자 하는 시도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본즈 앤 올>은 카니발리즘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혈통을 지닌 '이터'(eater)를 소재로 하는 로맨스라는 파격적 소재로 화제를 모았다. 실상은 익숙한 이야기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두 청소년이 우연히 만나 곳곳을 방랑하며 친해지고 마음 깊숙한 곳의 상처를 공유하며 사랑에 빠지는 플롯 구조는 『트와일라잇』을 비롯한 미국의 영 어덜트 소설에서 익히 반복된 것이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아버지의 억압 아래서 산 '매런'(테일러 러셀)은 고등학교 친구 파티에 몰래 갔다가 친구의 약지를 먹어버린다. 아버지는 서둘러 메런을 데리고 도망친다. 다음날 아버지는 매런이 식인 본능을 지니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카세트와 함께 그녀의 어머니 이름이 적혀 있는 출생증명서를 두고 떠난다. 그녀는 어머니를 보고 출생의 비밀을 밝히려 한다. 여정 중에 그녀는 의문의 노인이면서 동족인 '설리번'(마크 라이런스)에게서 자신이 이터라는 것을 듣고 그에게 냄새로 이터를 발견하는 법을 배운다. 그녀는 설리번으로부터 도망쳐 나오는 중에 우연히 이터인 '리'(티모시 샬라메)를 만나서 함께 어머니를 만나러 여정을 떠난다. 한편으로 설리번은 이 둘을 미행한다.

<본즈앤 올>의 각본가는 티모시 샬라메의 캐릭터인 리와 매런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의 보니 앤 클라이드로 보이기를 바라며 소설을 각색했다고 한다. 한편으로 구아다니노는 두 배우에게 연기를 디렉팅할 때, 니콜라스 레이의 영화 <그들은 밤에 산다>(1959)를 보게끔 했다. 이는 구아나디노가 1960년대의 할리우드에서 재생산된 청년에게 지니는 애정을 드러낸다. 그들은 억압적인 사회와 불화하며 계속 탈주하며, 당시에 대량 생산된 자동차나 오토바이, 트럭 등을 제집으로 여긴다. 한편으로 이터는 구아다니노의 필모에서 반복되는 이방인 이미지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는 그가 그려온 이방인이 성 정체성을 물색해나가는 퀘스쳐너리(Questionary)로 직접 정체성을 드러낸다면, <본즈 앤 올>에서는 식인이라는 알레고리로 드러난다.

아울러 <본즈 앤 올>은 부모와 불화하는 보편성을 지니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 그가 애정을 지니고 보는 정치적인 소수자의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이는 지난해 개봉한 <티탄>(2021)의 자동차와 섹스하는 여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녀는 시대와 불화하는 소수자성을 압축한 캐릭터로 그려졌다. 소수자와 불화하는 세계라는 이야기의 뼈대만 남긴 이 영화의 플롯은 이는 어떤 소수자가 보더라도 본인의 삶과 닮아 있다고 해석하게끔 하는 욕망을 자극한다. 이터가 서로를 눈치채고 발견해나가는 과정은 소수자가 어떻게 서로 만나는지를 선명히 드러낸다. 다만, <본즈 앤 올>은 동화적인 색채가 강한 나머지 이러한 정치적 주제를 날카로이 밀고 나가지는 못한다. 이 영화의 장단점은 모두 이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감독은 전작처럼 실험을 택하기보다는 그들을 그저 감싸 안는 편을 택한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본즈 앤 올>은 중간까지는 로드무비로 그려진다. 둘이 정처 없이 미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같은 이터를 만나는 에피소드를 반복한다. 첫 번째로 만난 이터인 설리번은 막 죽은 시체만 먹고 이터는 먹지 않는다는 규칙을 내세운다. 두 번째 만난 이터는 리이며, 그는 가족이 없는 독거 남성만을 먹어 치우는 규칙을 내세운다. 세 번째 이터는 쾌락에 따라 사람을 뼈까지 먹어 치우는 탐식가로 그려진다. 그의 친구는 이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터의 광팬이라 식인을 자행한다. 둘에게는 규칙이 없다.

마지막으로 조우하는 이터 메런의 어머니는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서는 혼자서 갇혀 살기를 선택한다. 각각의 규칙에 따라서 세계를 살아가는 어른들을 아이가 만나서 대화하기에 이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연상하게 하기도 한다. 리는 메런을 만나는 순간부터 시비를 건 남성을 먹고는 그의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다닌다. 이윽고 그의 집에 가서는 키스 등의 1970년대 록 음악을 틀며 논다. 세계에 대한 냉소와 아버지에의 갈등으로 인한 상처 등을 곳곳에 드러내면서 말이다. 이러한 설정은 록이라는 저항문화를 기반으로 기성세대로부터 탈주하기를 욕망한 1960-70년대의 청년들과 비슷하다. 

<본즈 앤 올>은 탈주할 대상이 없는 시대의 탈주를 다룬다. 

영화 속 '이터'는 '생존주의 시대의 인간'에 대한 은유로도 드러난다. 영화 원작인 『본즈 앤 올』 직전 유행한 영 어덜트 소설 장르는 『헝거 게임』 등과 같은 서바이벌 게임 위주였다. 이 장르에서 청년은 서로를 죽고 죽여야 하는 지옥도 아래서 연대와 희망으로 저마다의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동기로 움직인다. 우노 츠네히로가 제로년대의 상상력이라 이야기한 <배틀로얄> 등의 서바이벌 장르는 서로를 먹어 치우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는, 무한경쟁이 삶의 윤리가 된 신자유주의 사회의 잔혹성을 담아낸다. 다만, 서바이벌 게임은 어른이 아이들이 싸우게끔 틀을 마련했다는 정치적 상상력 아래에 움직인다. 이는 정신분석학의 차원으로는 상징적인 아버지가 아이들을 싸우게 만들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본즈 앤 올>에서 아이들은 그러한 상상력마저 소거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들은 아버지도 없이 서로를 먹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에서 자신들만의 윤리적 규칙을 세우려 애쓴다. 이는 똑같은 소재를 공유하는 클레르 드니의 <트러블 에브리 데이>(2001)와 비교할 수가 있다. 두 영화 다 어떻게든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한에서 일상을 견뎌 나가는 그들의 처절한 윤리적 투쟁을 기반으로 한다. <트러블 에브리 데이>가 모든 사람이 사회인으로 거듭나고자 매일 행하고 있는 실존적 투쟁을 다룬다면, <본즈 앤 올>은 공동체의 윤리를 탐색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본즈 앤 올>은 어리석은 어른들을 경유해서 그들 세대만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둘 사이의 규칙이 완전히 성립될 때에야 일상을 누리는 것이 가능해지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 영화에는 후반까지 노동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이 평범하게 살기로 결정하는 순간부터 메런은 대학 서점에 취직하고 리는 일한다. 그제야 그들은 사회인으로 살아간다. 평범하게 살려던 둘에게 설리번이 들이닥치는 순간에 그들은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것이냐, 아니냐'의 위기에 처한다. 설리번은 이들이 언제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공포를 남기며 리를 죽이기에 이른다. 이러한 위험이 도사리는 세계에서 이들이 살아나갈 수 있는 터전은 엔딩의 환상뿐이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구아다니노는 식인을 소재로 하면서도 <서스페리아>(2018)에서의 피로 뒤범벅된 미장센을 자제한다. 이는 <서스페리아 2019>의 세계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나름의 방식으로 조화해내고자 한 감독의 시도일 것이다. 구아다니노다운 환한 조명으로 가득 차 있는 분위기, 본인이 이야기했듯 테렌스 멜릭의 <황무지>(1980)를 차용한 이름다운 자연의 정경을 비추는 명상조의 카메라는 인물을 둘러싼 자연의 정서를 한껏 두드러지게 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금목걸이와 복숭아 등 사물을 클로즈업하며 온 신경이 올리버에게로 향하고 있는 엘리오의 무의식을 외면화하는 연출은, <본즈 앤 올>에서도 충분히 두드러진다.

한편으로 실내극인 <서스페리아>의 잔혹성은 언제 폭발할지도 모르는 긴장으로 가득 차 있으며, 잔혹성이 들끓는다. <서스페리아>는 나치의 잔재가 남은 독일의 발레학교에서 언제 수지(다코타 존슨)의 본능이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는 긴장으로 극을 전개한다. 이 영화에서 정상을 차지하고자 하는 수지는 1977년 당시 테러리즘을 무기로 삼은 독일의 급진좌파 세력이었던 적군파 바더 마인호프의 알레고리로 등장한다. 수지는 기성세대와 반목하면서 그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키려 한다. 수지의 분노가 한 번에 폭발하는 시퀀스는 혁명을 연상하게끔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쏟아지는 피와 그로 인한 스펙터클은 <본즈 앤 올>에서는 사라져 있다. 이들에게는 혁명을 일으킬 힘조차 없어서다.

제각기 다른 두 영화의 세계관이 한 데에 어우러지는 장면은 <본즈 앤 올>의 키스씬이다. 식인하는 둘이 키스하는 순간에 둘이 서로를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생긴다. 이처럼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그들의 에너지가 섬찟하며 드러난 순간들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서스페리아>의 수지가 그러하듯 모든 것을 터뜨리거나 혁명을 일으킬 에너지마저 제거된 아이는 생존주의를 애써 망각하려는 리와 메런과 같은 삶을 영위하고자 한다. 그러한 삶은 잠시뿐이다.

구아다니노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엔딩에서 꿈결 같은 첫사랑을 떠나보내는 엘리오가 모닥불을 보고는 상실감을 견디려 하듯이, 메런이 리의 유언에 따라서 리의 시체를 뼈까지 다 먹으며, 상실감을 견디려 하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비춘다. 이때 카메라는 식인 행위를 비추지 않는다. 그저 리의 상처에다가 키스하는 장면에서 멈추고 이윽고 메런의 환상을 드러낸다. 그 환상 아래서 둘은 행복할 수 있으나 현실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는 정반대로 영원하게 불행하게 진행될 것이다. 아이들은 생존주의의 밤에 산다. 그러나 잠시의 꿈은 용서된다. 그것이 바로 영화의 몫이어서다.

[글 김경수, rohmereric123@ccoart.com]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본즈 앤 올
BONES AND ALL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Luca Guadagnino

 

출연
티모시 샬라메
Timothee Chalamet
테일러 러셀Taylor Russell
마크 라이런스Mark Rylance
안드레 홀랜드Andre Holland
클로에 세비니Chloe Sevigny
제시카 하퍼Jessica Harper
마이클 스털버그Michael Stuhlbarg
데이빗 고든 그린David Gordon Green

 

배급|수입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30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022.11.30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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