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우리는 모두 사람'이라는 당연한 말
[Interview] '우리는 모두 사람'이라는 당연한 말
  • 홍상현
  • 승인 2022.12.05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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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국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수상작 <도쿄의 쿠루드족> 휴가 후미아리 감독
「도쿄의 쿠르드족」은 휴가 후미아리 감독의 2019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초청작 「도쿄의 쿠르드 청년」을 장편화한 것이다. (C)2021 DOCUMENTARY JAPAN INC.
「도쿄의 쿠르드족」은 휴가 후미아리 감독의 2019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초청작 「도쿄의 쿠르드 청년」을 장편화한 것이다. (C)2021 DOCUMENTARY JAPAN INC.

일찍이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영화이론의 태두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는 1947년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 독일영화의 심리학적 역사』를 통해 현대영화비평의 토대를 세웠다. 그리고 13년 뒤 옥스퍼드대 출판부에서 또 한 권의 기념비적 저술인 『영화의 이론: 물리적 현실의 구원』을 펴내는데 그 요지가 의미심장하다. 영화를 현실을 재발견하고 보존하는 수단으로 보았다.

이 대목에서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와 더불어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단편 다큐멘터리 <도쿄의 쿠르드 청년>(2018)으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초청되었다가 그 장편버전인 <도쿄의 쿠르드족>(2021)이 다시 전주국제영화제 국제경쟁부문에 초청, 심사위원 특별상을 거머쥔 휴가 후미아리 감독의 연출론이다. 여기서 그는 "다큐멘터리는 '선물'"이라는 정의(definition)로 운을 뗀다. 이 말만으로는 선뜻 감이 오지 않을 수 있겠지만 실천을 위한 두 가지 원칙을 들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먼저 '주인공(취재원)에 대해 겸허해라.'

다큐멘터리는 배우가 아닌 생활인과의 촬영으로 만들어진다. 자택, 일터 등 주인공의 삶의 터전으로 들어가야 하며 기간도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몇 년까지 걸릴 수 있다. 그러니 주인공의 소중한 시간과 생각을 작품을 위해 '선물' 받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상식이 있던 날 밤. 휴가 감독은 “초청해 주신 것만 해도 영광인데 큰 상까지 받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C)2022 JIFF
시상식이 있던 날 밤. 휴가 감독은 필자에게 "초청해 주신 것만 해도 영광인데 큰 상까지 받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C)2022 JIFF

다음은 '눈앞의 현실을 소중히 하라.'

누구나 나름의 테마나 구성을 염두에 두고 다큐멘터리의 촬영(취재)에 뛰어들지만 막상 생각대로 진행되는 현장은 거의 없다는 것. 그러니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 보면 상상을 넘어서는 '선물'을 받을 수 있다.

러닝 타임 105분, 하지만 촬영에는 5년에 걸린 <도쿄의 쿠르드족>에서 휴가 감독은 이런 자신의 연출론을 철저히 관철하며 부모를 따라 낯선 땅에 와서 남들처럼 학교도 다니고 이런저런 꿈도 가져보지만 서류상으로 어떤 허가도 받은 적 없는, 심지어 나이 스물을 넘기고 나면 구금의 불안에까지 시달려야 하는 두 친구의 순탄치 않은 일상에 다가간다. 그들에게 휴가 감독은 다큐멘터리스트라기보다 조용히 곁을 지키는 좋은 형 같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쿠르드족 난민은 터키의 인종 탄압을 피해 1990년대부터 도쿄 근교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오늘날까지 2천 명이 넘는 규모의 커뮤니티를 형성했지만 아직도 불법체류자 신분이다. 여섯 살 때 부모와 함께 일본으로 온 오잔은 건물 철거 일을 하며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지만 미래가 불투명하다. 한편, 라마잔은 일본 사회에 동화해서 안정적인 난민 신분을 보장받기 위해 친구 오잔에 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역시 만만치가 않다. 그런가 하면 라마잔의 사촌 메흐메트는 몸이 아픈데도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는다고 항의하다 1년 반 동안 구금되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하는 이방인이지만, 1퍼센트 미만의 적은 수만이 난민 지위를 얻을 수 있는 현실에서 이들이 삶은 퍽퍽하기만 하다.

 

휴가 감독은 부모를 따라 낯선 땅에 와서 남들처럼 학교도 다니고 이런저런 꿈도 가져보지만 서류상으로 어떤 허가도 받은 적 없는, 게다가 나이 스물을 넘기고 나면 강제수용의 불안에까지 시달려야 하는 두 친구의 ‘순탄치 않은’ 일상을 다룬다. (C)2021 DOCUMENTARY JAPAN INC.
휴가 감독은 부모를 따라 낯선 땅에 와서 남들처럼 학교도 다니고 이런저런 꿈도 가져보지만 서류상으로 어떤 허가도 받은 적 없는, 게다가 나이 스물을 넘기고 나면 강제수용의 불안에까지 시달려야 하는 두 친구의 순탄치 않은 일상을 다룬다. (C)2021 DOCUMENTARY JAPAN INC.

홍상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와 Hot Docs등에서 호평받은 <도쿄의 쿠르드 청년>의 장편버전, <도쿄의 쿠르드족>으로 전주국제영화제 국제경쟁부문에 초청되셨습니다. 게다가 심사위원특별상까지 수상하셨으니 정말 감회가 특별하실 것 같은데요.

휴가 후미아리

다큐멘터리뿐만 아니라 픽션도 함께 기량을 뽐내는, 게다가 국제적인 권위와 명성을 자랑하는 전주국제영화제 제 작품이 초청되어 너무나 기쁘고 영광입니다.

거기에 개최지가 대단히 가까운 정서와 깊은 인연을 가진 한국이잖아요. 제 영화인생에서 의미 있는 기회인데 큰 상까지 받게 되니 꿈만 같습니다.

전주국제영화제 관계자 여러분과 한국 관객 여러분께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홍상현

"홍상현의 인터뷰"를 통해 만나는 분들께 매번 드리는 질문입니다. 한국영화를 즐겨보시나요? 특히 좋아하는 작품이나 감독, 배우가 있으시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휴가 후미아리

세계적인 거장 봉준호 감독의 팬이고 <오징어 게임>(2021), <사랑의 불시착>(2019) 같은 드라마들도 즐겨봅니다.

또 제가 다큐멘터리 감독인 만큼 한국 다큐멘터리도 좋아해요. 최승호 감독의 <공범자들>(2017)이나 이승준 감독의 <달팽이의 별>(2012) 같은. 특히 <달팽이의 별>의 경우, 비 오는 날 집 난간에 묻어있는 빗방울을 손바닥으로 만지는 컷이 나오거든요? 섬세한 건 말할 것도 없거니와 냄새나 촉감, 그 장소의 공기마저도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기적적인 컷이었습니다.

 

쿠르드족은 터키의 인종 탄압을 피해 1990년부터 도쿄 근교에 정착하기 시작, 어느덧 2천 명이 넘는 규모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지만 다들 불법 체류자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C)2021 DOCUMENTARY JAPAN INC.
쿠르드족은 터키의 인종 탄압을 피해 1990년부터 도쿄 근교에 정착하기 시작, 어느덧 2천 명이 넘는 규모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지만 모두 불법 체류자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C)2021 DOCUMENTARY JAPAN INC.

홍상현

우선은 감독의 이력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죠.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셨지만 프로덕션에 입사, 다큐멘터리스트의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다만, 법학이라는 교육적 배경을 가지신 분답게 필모그래피의 키워드가 공정과 정의라는 테마에 집중되어 있는 느낌도 받는데요.

휴가 후미아리

법이라는 게, 결국 '룰(rule)'이잖아요? 솔직히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굳이 따져보면 오히려 그 '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이 저죠. (웃음) '정의(justice)'라는 말도 그래요. 정의에도 여러 가지 각도가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신들만의 정의를 말하기 마련이니 뭔가를 단호하게 판단할 수 있다기보다 그저 혼란스러울 따름이죠. 오히려 저는 개인과 어떤 거대한 것과의 관계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것이 예컨대 국가나 사회가 되었든, 혹은 가치가 되었든 간에 말이죠. 이는 <도쿄의 쿠르드족>에서 다루는 내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오잔과 라마잔이라는 두 주인공들을 통해 쿠르드족의 정체성과 개인의 거리는 물론, 일본의 이민법에 대한 이야기까지 끌어내니까요.

 

홍상현

<도쿄의 쿠르드 청년>을 인상 깊게 본 사람으로서 <도쿄의 쿠르드족>을 단지 그 '장편버전'이라고 규정하기 주저되는 면이 많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도쿄의 쿠르드족>이 단지 <도쿄의 쿠르드 청년>의 러닝 타임을 길게 편집하기만 한 작품이 아니잖아요.

휴가 후미이라

<도쿄의 쿠르드 청년>의 경우, 일본 특유의 상황에 대해서도 다루지만, 아무래도 당시가 이슬람 국가(ISIL)가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던 시기였던 까닭에 그들에 맞서는 쿠르드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그리는데 더 초점을 맞췄습니다. 다큐멘터리를 찍기 시작했을 무렵, 아랍의 봄 이후 시리아 분쟁이 발생하고 유럽으로 피난하는 이들이 폭증한다는 뉴스가 국제사회에 확산되는 상황이기도 했고요. 저도 일본에서 그런 소식을 접하고 '일본의 난민 수용 시스템은 어떨까' 막연하게 흥미를 느꼈지요.

처음부터 쿠르드족을 만났던 것도 아니에요. 미얀마의 로힝야족이나 시리아인들도 만났는데 터키에서 온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쿠르드족을 만나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던 게 <도쿄의 쿠르드족> 제작의 계기였습니다.

 

분명 범죄자가 아니라 난민인정 신청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뿐인데도 일본의 쿠르드족은 스무 살을 넘기면서부터 구금의 위협에 본격적으로 노출된다. (C)2021 DOCUMENTARY JAPAN INC.
분명 범죄자가 아니라 난민 인정 신청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뿐인데도 일본의 쿠르드족은 스무 살을 넘기면서부터 구금의 위협에 본격적으로 노출된다. (C)2021 DOCUMENTARY JAPAN INC.

홍상현

어떤 경험이었나요?

휴가 후미아리

이야기를 나누면서 '앞으로 뭘 하고 싶으냐'라고 물으니까 대뜸 '일본에 있고 싶지 않다', '이라크에 가서 이슬람 국가를 무너뜨리고 싶다'는 거예요. 충격이었죠. 어렵게 터키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이 안전한 환경을 벗어나 전쟁터에 가고 싶다니. 그래서 이유를 물었더니 '어차피 일본에 있어도 설 자리가 없다.' '미래가 없다.' '이곳에서는 내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다'라고 하더라고요.

도대체 일본의 무엇이 그런 말을 하게 만드는지 궁금해서 취재를 진행했습니다. 당시 이슬람 국가는 쿠르드족 거주지를 습격하거나 학살 등을 저지르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그들에게 저항하는 쿠르드족이 더욱 영웅시되는 면이 있었어요. 미국과 유럽에서 무기를 지원한다는 소식까지 전해졌고요. 세계가 그들에게 큰 빚을 진 셈인데, 쿠르드족으로서는 모처럼 세계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기도 했죠.

 

홍상현

확실히 그랬습니다. 종교적으로도 기독교인이 많아서 도드라지는 면이 있었죠.

휴가 후미아리

네. 실제 당시 젊은이들도 이슬람 국가와 싸우는 쿠르드족 병사를 동경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저로서도 그들의 쿠르드족으로서의 정체성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고요.

그렇게 <도쿄의 쿠르드 청년>의 제작을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의 이민제도에 부딪쳐 상처받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와중에 입국관리국 시설에 수용돼있던 라마잔의 사촌 메흐메트 씨를 만나면서 '이 사람들, 앞으로 어떻게 걸까'걱정이 들기도 했고요. 이렇듯 시선과 관점이 좀 더 넓고 입체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준비한 게 <도쿄의 쿠르드족>이니까 앞서 말씀하신 것처럼 전혀 다른 작품이라고 느끼시는 것도 무리는 아닐 거란 생각이 드네요.

 

재류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대학진학의 꿈을 접어야 했던 라마잔.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자동차직업전문학교에 도전했다. (C)2021 DOCUMENTARY JAPAN INC.
재류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대학 진학의 꿈을 접어야 했던 라마잔.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자동차직업전문학교에 도전했다. (C)2021 DOCUMENTARY JAPAN INC.

홍상현

오잔과 라마잔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해 보죠. 두 사람을 처음 만났던 순간을 기억하고 계신가요? (웃음) 그들의 어떤 면을 보고 이들이 이 작품의 주인공으로 해야겠다고 확신하셨는지요?

휴가 후미아리

라마잔과 만난 건 2015년의 일입니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터키 대사관 앞에서 터키인들과 쿠르드족들 간에 난투극이 벌어졌는데 당시 열일곱 나이로 앞에 나서서 원인에 대해 해명하는 모습을 보고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쿠르드문화협회 분들에게 젊은이들을 열 명 정도 소개받았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더라고요. 외모도 워낙 멋지지만요. (웃음)

오잔의 경우는 그의 집에서 처음 만난 날, 문을 열고 저를 반겨주는데 '참 매력적이구나'싶더라고요. 그리고 한 세 시간 정도 대화를 하는데 자신의 일이나 현재 처해있는 상황, 앞으로의 꿈, 호감이 있는 이성 친구는 물론 싸움을 했던 이야기까지 너무나 진솔하고 재미있게 대화를 끌어가는 거예요. 표정도 다양하면서 캐릭터 자체도 워낙 입체적이고요.

게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 두 친구가 일본에 오기 전, 그러니까 터키에 살던 시절부터 소꿉친구였더군요. 더 망설일 것 없이 오잔과 라마잔을 주인공으로 결정했습니다.

 

홍상현

몇 년에 걸쳐 다큐멘터리의 촬영을 하다 보면 어려운 일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특별히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휴가 후미아리

촬영을 시작할 당시 두 사람 모두 10대였고, 특히 오잔은 비자가 없는 비정규직임에도 불구하고 일하는 장면이나 이미지, 음성 등이 계속 노출되었습니다. 영화를 통해 이를 보여주는 건 위험한 일이었고, 지금까지도 신경이 쓰이긴 해요. 특히 단편 버전 같은 경우는 TV는 물론 대략 스무 군데의 영화제에 초청됐거든요. 게다가 스무 살을 넘기고 나면 입국관리국 시설에 구금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오잔에게 언제든 말하면 삭제하겠노라고 다짐을 해 둔 상태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오잔이 더 용기를 내더라고요. 일본에서 있었던 관객과의 대화에서 앞서 언급한 내용 때문에 걱정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위축되고 싶지 않다'고 답하더라고요. 한 발 더 나가 제가 오잔 이용한다고 느끼는 적은 없느냐는, 상당히 껄끄러운 질문도 있었는데 다큐멘터리 감독과 주인공 사이의 특별한 유대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것도 모르면서 비판부터 하는 사람에게는 입을 다무시라고 말하고 싶다'고까지 말해주었습니다. 대단한 각오죠. 뿐만 아니에요. 설령 <도쿄의 쿠르드족> 때문에 입국관리국에 붙들려 6개월 내지 1년쯤 수용되더라도 괜찮다는 이야기도 했는데요. 이 작품의 성취가 오잔의 삶에서도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닌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도쿄의 쿠르드족」에서는 오잔이 비정규 노동자로 일하는 장면이 몇 번이나 등장한다. 난민신청 후 기약 없는 기다림이 이어지는 생활 속에 직업조차 가질 수 없는 쿠르드족의 상황을 알리려는 의지에 따른 것이다. (C)2021 DOCUMENTARY JAPAN INC.
「도쿄의 쿠르드족」에서는 오잔이 비정규 노동자로 일하는 장면이 몇 번이나 등장한다. 난민신청 후 기약 없는 기다림이 이어지는 생활 속에 직업조차 가질 수 없는 쿠르드족의 상황을 알리려는 의지에 따른 것이다. (C)2021 DOCUMENTARY JAPAN INC.

홍상현

이미 느끼고 계시겠지만 제가 오늘 인터뷰는 '인물'에 관한 내용에 상당히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요. 이는 제가 <도쿄의 쿠르드족>이 단순한 사회고발성 작품을 넘어 영화적 가치를 갖게 되는 요소로 주인공들의 캐릭터에 대한 역동적이고도 입체적인 표현을 꼽기 때문입니다.

휴가 후미아리

이 부분에 관한 제 대답은 조금 추상적으로 들리실 수도 있겠는데요. 주인공인 두 사람의 균형에 대해 언급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본인들도 이야기하지만 오잔과 라마잔은 빛과 그림자 같은 존재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두 캐릭터가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제가 촬영을 시작한 2015년부터 2017년까지는 둘 다 똑같이 힘들어하면서도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달라서 두 사람을 대조적으로 그리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그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고 나면 나중에 누군가는 상처를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방향을 수정했죠.

물론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캐릭터의 차이야 있을 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로서는 마지막까지 둘을 대비시키는 연출을 지양하려고 노력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홍상현

실은 <도쿄의 쿠르드족>을 세 번 봤습니다. 물론 주제의 중요성과 두 주인공에 대한 애정 때문이기도 했습니다만, 첫 장면부터 몰입되는 편집의 뛰어남이 작품에 매력을 배가시켜주었다고 생각하는데요.

휴가 후미아리

감사합니다! (웃음)

말씀하시는 부분은 편집을 맡은 하타 다케시 씨의 힘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 대단히 유명한 편집자인데요. 단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오잔의 모노로그를 장편에서는 다 빼버리자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5년 걸려 찍은 촬영 분량을 한 서너 달 동안 빠짐없이 검토하더니 전혀 새로운 구성을 보여주었습니다.

한편, 장편도 단편과 마찬가지로 볼링 장면에서 시작되기는 하는데요.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제 의도가 반영돼있어요. 관객에게 일단 두 사람의 관계성을 확인시키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었거든요. 아울러 이 시퀀스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컷은 오잔과 라마잔이 서로를 힐끗 쳐다보며 웃는 장면입니다. 단편에서는 편집되어있었는데 장편을 만들면서 추가했죠.

 

사진 왼쪽의 메흐메트는 라마잔의 사촌. 몸이 아픈데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는다고 항의하다 무려 1년 반 동안 입국관리국 시설에 구금되기도 했다. (C)2021 DOCUMENTARY JAPAN INC.
사진 왼쪽의 메흐메트는 라마잔의 사촌. 몸이 아픈데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는다고 항의하다 무려 1년 반 동안 입국관리국 시설에 구금되기도 했다. (C)2021 DOCUMENTARY JAPAN INC.

홍상현

다음은 영화의 음악과 사운드 연출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구태의연한 배경음악으로 어떤 분위기의 감정을 강요하는 전형성을 뛰어넘고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휴가 후미아리

단편으로 여러 영화제를 돌며 느낀 바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음악을 담당해주신 사운드 디자이너 마스코 아키라 씨와 믹싱을 맡은 도미나가 켄이치 씨에게 공을 돌리고 싶습니다. 두 분 모두 저랑 10년 넘게 같이 일한 분들인데요. <도쿄의 쿠르드족>에서는 작위적인 배경음악보다 현장에서 녹음한 사운드를 활용해보자고 제안했더니 흔쾌히 동의해주시더라고요. 그 결과에 대해서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해주시니 정말 기쁩니다.

 

홍상현

<도쿄의 쿠르드족>은 일체의 내레이션이 없이, 다양하고 인상적인 영상 표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히, 라스트신의 경우는 정말 놀라웠고요. 취재한 영상을 하나의 작품으로 재구성하면서 어떤 비주얼 플랜을 세우셨는지요.

휴가 후미아리

아마 오잔이 저를 태우고 거칠게 차를 몰아가는 게 인상적이었던 것 같은데요. 실제로도 갈등이 있었습니다. 찍는 저도 무서웠어요. (웃음) 머릿속이 온통 하얘져서 말없이 카메라만 돌렸죠. 어떤 일로 의견차가 생기면서 오잔이 화를 냈는데, 그 장면을 다 찍더니 '더 이상 취재를 하지 마라', '내 인생에 관여하지 마라'면서 핸드폰까지 바꿔버렸어요. 1년 남짓 연락이 안 됐지요. 마지막 장면을 스케줄상으로도 맨 나중에 찍었거든요. 재회를 한 게 입국관리국에서였는데 제가 며칠 전부터 나가서 숨어 있다가 오잔을 보자마자 영화 개봉 소식을 알렸습니다.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그리고 비주얼 플랜은, 제 경우, 촬영에 들어가기 전이 아니라 촬영을 어느 정도 진행해보고 나서 세우는 편이에요. 일단 지금 눈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부터 파악하고 나서 어떻게 찍으면 좋을지를 고민하기 시작하는 거죠. 현실을 부각시키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비주얼을 만들려면 일단 '현실'이 있어야 하겠죠? (웃음) 당연히 이번 작품에서도 그랬습니다.

 

라마잔은 어렵사리 들어간 자동차직업전문학교를 마친 뒤 무사히 정비사 자격을 취득, 결혼해서 거주비자까지 취득했다. 그리고 오잔에게도 드디어 일본인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소식. 그러나 일본 내 쿠르드족의 불안정한 상황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C)2021 DOCUMENTARY JAPAN INC.
라마잔은 어렵사리 들어간 자동차직업전문학교를 마친 뒤 무사히 정비사 자격을 취득, 결혼해서 거주비자까지 취득했다. 그리고 오잔에게도 드디어 일본인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소식. 그러나 일본 내 쿠르드족의 불안정한 상황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C)2021 DOCUMENTARY JAPAN INC.

"영화제 상영이 끝난 뒤 관객과의 대화를 하는데 사회자께서 '한국과 일본 모두 난민 인정 비율이 1퍼센트 이하'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외국인을 향하는 눈과 그들을 어떻게 대할지, 그리고 어떻게 마주 할지에 대한 의문은 결국 나와 타인ㆍ타자가 일반적으로 어떻게 관계를 맺어갈지에 대한 의문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사실 같은 나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죠. 살면서 어떤 혐오표현을 쓸 때, 상대가 외국인이면 더 거침없어지는 사람들을 종종 봐요. 아무쪼록 그런 분들이 아무렇지 않게 가하는 차별이나 배제가 언젠가 본인들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인터뷰 내내, 모든 질문에 공들여 답하는 얼굴이 유난히 밝아 보이던 휴가 감독.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라고 물으니 두 주인공의 근황 때문이란다.

라마잔은 어렵사리 들어간 자동차직업전문학교를 마친 후 무사히 정비사 자격증을 따고 결혼, 거주비자까지 취득했다. 난민 인정이야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구금의 위협에서 자유로워진 게 어딘가. 그리고 내내 쓸쓸해 보이던 오잔에게도 끝내 일본인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소식. <도쿄의 쿠르드족> 출연진과 휴가 감독의 인연이 앞으로도 오래도록 이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선한 미소를 보면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인터뷰 홍상현, krpopper@ccoart.com]

홍상현
홍상현
 《코아르》 운영위원, 고토부키홈빌더 영화영상사업부 프로듀서.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일 양국 매체에 분석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 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지부인 일본영화펜클럽 회원.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 주최 디지콘 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및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심사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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