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 '피노키오'로 다시 쓰는 예수의 수난기
[NETFLIX] '피노키오'로 다시 쓰는 예수의 수난기
  • 김경수
  • 승인 2022.12.01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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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 토로가 그려내고자 하는 모든 것이 담긴 영화"

〈피노키오〉(2022)가 넷플릭스에서 영화화된다는 뉴스를 접했을 당시 기예르모 델 토로 팬으로 그의 숙원 중 하나가 마침내 풀렸다는 사실에 더없이 기뻐했다. 그는 2008년부터 〈피노키오〉를 제작하고자 했으나, 마땅한 제작사를 발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H.P. 러브크래프트 「광기의 산맥」 영화화와 마찬가지로 그는 십 년 가까이 캐릭터를 디자인하고, 이야기를 짜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창작자를 아낌없이 지원하는 제작 시스템을 지닌 넷플릭스의 손을 잡고서야 마침내 제작되었다.

 

ⓒ 넷플릭스

〈피노키오〉는 델 토로의 필모에서 두 가지 이유로 '의미심장한 영화'다.

유년기와 전쟁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판의 미로〉(2006), 〈악마의 등뼈〉(2001)와 (비공식적인) 삼부작을 이루고 있으며, 특수효과 감독으로 경력을 시작한 그가 마침내 찍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에서다. 앞선 두 이유는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다. 그가 〈판의 미로〉의 세계관을 되살리고자 하는 의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피노키오〉가 개봉하기를 기다린 이유도 여기 있다. 델 토로는 거장의 내공이 담긴 유려한 연출, 호러와 동화, 희비극적인 뮤지컬과 모험담, 파시즘을 선망하는 남성성에 대한 강렬한 풍자 등 온갖 장르를 횡단하는 극작술로 원작을 어두운 색채로 각색하는 작업에 성공한다. 델 토로는 피노키오를 복종하는 순수한 아이가 아니라 체제에 불복종하는 악동으로 그리되 제페토도 마냥 선량한 인간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원작의 이분법을 도려낸 자리를 차지한 것은 그로테스크와 아이러니가 가득한 민담에 가까운 세계관이다.

〈피노키오〉는 세계 2차 대전 당시 무솔리니가 집권한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다. 세계 1차 대전 당시 예기치 않은 폭격으로 아들 카를로를 상실한 제페토는 술김에 무작정 아들의 무덤 옆에 자라난 소나무를 베어다가 나무인형을 만들기 시작한다. 막 거기에 자리를 튼 작가 귀뚜라미인 크리켓은 도끼를 막 휘두르는 제페토를 보고는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지른다. 이때의 제페토는 슬래셔 장르의 악당이 그러하듯 실루엣으로만 그려진다. 제페토의 이층집은 히치콕의 〈싸이코〉(1964)의 이층집처럼 그로테스크하고 음산한 에너지로 가득하다. 나무인형을 만들고 제풀에 지쳐 쓰러진 제페토가 잠든 사이에 수호신이 제페토를 위로하라며 나무 인형에 영혼을 주며 피노키오라 이야기한다. 크리켓에게는 피노키오가 착한 아이가 되도록 보살피는 대신에 소원을 하나 이루어준다고 약속한다.

피노키오가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본 제페토는 혼란스러워하며 오히려 피노키오를 가두기에 이른다. 피노키오는 가만히 있으라는 제페토의 말을 거슬러 성당에 동행하지만, 파시스트 군인과 성직자에게 악마로 낙인찍힌다. 제페토는 피노키오를 학교에 보내기로 하지만, 망해가는 서커스단을 되살리고자 하는 자본주의자 볼페 백작이 피노키오더러 스타로 성공하게 만들겠다며 부당한 계약서를 써서 그를 납치한다. 제페토가 피노키오와의 재회에 성공하는 순간에 군인의 차에 피노키오가 부딪힌다. 피노키오는 진짜 소년이 아니기에 죽을 수 없는 운명이기에 부활한다. 제페토는 피노키오가 쓴 부당한 계약서로 인해서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고, 불멸의 피노키오를 징집하고자 하는 파시스트 군인의 속셈에 피로해져서 피노키오와 다툰다. 피노키오는 가출해 거듭 부활하면서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무법의 공간인 서커스와 파시즘이 지배하는 법의 공간인 전쟁터를 오가기에 이른다. 제페토는 그와 화해하고자 여정을 떠난다.

 

ⓒ 넷플릭스

델 토로의 야심

〈피노키오〉는 델 토로가 그려내고자 하는 모든 것이 담긴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화의 색채가 담긴 마술적인 세계관, 그로테스크한 괴물과 인간군상, 폭력적인 아버지와 그에 저항하는 루저 아이 등 주제와 모티프에서든 연출에서든 곳곳에 델 토로의 인장이 선명히 남아 있는 영화다. 이에 대해서 자기복제로 점철된 작품이라는 비판도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영화를 보는 동안 기시감을 느끼게끔 하는 장면이 여럿 있어서다. 예로 제페토가 볼페에게로 떠난 피노키오와 재회하고자 버스에 오르는 시퀀스는 〈셰이프 오브 워터〉(2015)에서 엘라이자(샐리 호킨스)가 퇴근 버스에 올라서 창밖을 보는 시퀀스의 장면 구성과 유사하다. 상대방을 그리워하는 인물의 심정이 창문에 어려 있는 성에로 외면화되고, 카메라가 감상에 잠겨 있는 캐릭터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포착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레 <피노키오>를 옹호하고 싶은 이유는 영화에 필모를 종합하고자 하는 감독의 '야심'이 드러나서다. 그는 느와르이며 초자연적인 존재가 등장하지 않기에 그의 필모에서 다소 이질적으로 보이는 〈나이트메어 엘리〉(2020)의 색채를 유지하면서도, 초기의 환상적인 세계관을 성공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자본주의의 공간인 〈나이트메어 엘리〉의 서커스와 파시즘의 공간인 〈판의 미로〉의 군대가 공존하는 데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나이트메어 엘리〉가 가난을 벗어나려 애쓰지만 끝내 가난에 갇힐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비극을 그려낸다면, 〈판의 미로〉는 전쟁과 남성성, 그것에 저항할 수 없는 유년기의 무기력을 다루는 우화다. 둘을 봉합하는 것은 매력적인 나레이터 '크리켓'의 존재다.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를 들고 다니며 염세주의자를 자처하지만, 누구보다 삶을 사랑하는 19세기 소설에나 나올 법한 아이러니한 화자의 존재는,

델 토로의 유머 감각을 한껏 드러내며 자본주의와 파시즘 아래에서 고전적 가치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아울러 영화의 뮤지컬 시퀀스들은 우울하고 그로테스크한 영화의 톤을 중화한다. <피노키오>는 델 토로의 첫 뮤지컬 영화지만, 그의 필모에서 뮤지컬을 오마주한 장면이 처음 등장한 것은 〈셰이프 오브 워터〉의 후반부다. 이때 뮤지컬 시퀀스는 영화에나 나올 법한 꿈같은 사랑과 억압당할 수밖에 없는 소수자들의 지난한 사랑의 차이를 극대화하는 비극적인 장면이었다. 반면 〈피노키오〉의 뮤지컬 시퀀스는 그로테스크하다고 느낄 장면마저도 사랑스럽게 느끼게 한다. 이는 뮤지컬이 지니는 고전적인 의미를 위반하고 그 균열을 극대화하면서 독창성을 발한다. 특히, 뮤지컬은 선전 음악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쇼 비즈니스의 음악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 둘을 하나로 매개하는 것은 '대중음악'이다. (한편으로 델 토로는 뮤지컬을 제페토와 피노키오의 사랑을 매개하는 장치로 쓰기도 한다.)

 

ⓒ 넷플릭스

신과 괴물

기예르모 델 토로의 세계관에서 신과 괴물은 구분되지 않는다. 특히, 〈셰이프 오브 워터〉와 〈판의 미로〉에서의 괴물은 수호신이면서도 괴물로 등장하며 〈헬보이〉에서 악마의 아들인 헬보이는 인류를 제거하고자 탄생한 존재이지만 슈퍼히어로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어인은 고양이를 생채로 먹기도 한다. 괴물의 어원은 드러내다monstrare라는 라틴어에서 비롯되었다. 시대에 따라서 단어의 정의가 달라지기는 했지만, 중세에 상식에서 벗어나는 괴생명체의 등장은 곧 세계가 망해가고 있다는 신의 징조이기도 했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괴물과 신이 동일선상에 있는 타자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이 둘을 의도적으로 동일시한다. 그 타자를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것이 그의 윤리적인 태도로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난민과 성소수자 등을 차별하는 트럼프 집권기와 맞물려 〈셰이프 오브 워터〉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타는 데에 어느 정도 일조했다.

마찬가지로 〈피노키오〉에서 델 토로는 피노키오를 '예수'와 비슷하게 그려내는 듯하다. 제페토가 카를로가 죽은 성당에 있는 미완성된 예수상을 피노키오의 도움으로 완성하는 장면은 노골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때 제페토의 예수상이 하나로 이어진 육체로 조각된 오브제가 아니라 여러 부품을 조립해서 만든 작품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예수와 피노키오는 같은 육체를 공유하고 있고, 델 토로는 둘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중첩한다. 피노키오를 처음 마주한 순간에 마을 사람은 그를 사탄으로 몰아세운다. 델 토로는 그들과 같은 입장에 이입할 관객을 감화하게 해 괴물이 곧 메시아임을 방증하고자 하는 과정을 그려내고자 한다. 이는 성소수자, 가난한 이들, 사회에 적법하지 않은 이들은 물론, 비-인간 생명체까지 모두를 아우른다.

문제는 괴물의 초상이다. 한 인터뷰에서 유년기에 매혹된 이미지로 프랑켄슈타인과 피노키오를 이야기한 적 있다. 감히 그의 필모를 두 모티프의 반복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켄슈타인과 피노키오는 둘 다 상처받은 장인의 광기 어린 집념으로 탄생한 피조물로 인간의 영혼을 지니고 있다. 전자는 여러 시체를 짜깁기한 하이브리드한 신체를, 후자는 피부가 없는 기계적인 신체를 지니기에 인간의 육체로부터 조화와 황금률을 발견하고자 한 고전미에서 다소 어긋나는 추한 존재다. 둘 다 인간으로 거듭나기를 욕망하지만, 전자는 살인으로 후자는 시스템에 철저히 복종해서 인간으로 거듭나는 데에 성공한다. 이 둘은 닮아있으면서도 정반대인 서로에게 부정적인 거울상이다. 감독이 그려내는 피노키오는 복종을 통해서 인간이 되는 디즈니의 피노키오와는 다르다.

 

ⓒ 넷플릭스

지금까지 델 토로의 영화에서 '프랑켄슈타인의 초상'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델 토로 영화에 재현된 프랑켄슈타인의 초상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다소 다른 방식으로 그려진다. 그의 프랑켄슈타인은 〈판의 미로〉, 〈악마의 등뼈〉에서 반영하기도 한 빅토르 에리세의 〈벌집의 정령〉(1973)과 할리우드 유니버설 픽처스와 영국의 해머사가 프랜차이즈로 재생산했던 『프랑켄슈타인』 시리즈의 프랑켄슈타인 이미지와 닮아있다. 이를테면 〈벌집의 정령〉은 프랑코 독재의 검열을 피하는 한에서, 독재정권에 저항할 힘을 상실한 지식인의 가정을 그려내고자 은유의 어법을 적극 영화에다가 반영한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마을의 아이들은 마을회관에서 함께 프랑켄슈타인이 등장하는 영화를 단체로 관람한다. 프랑켄슈타인은 프랑코를 은유하는 존재로 드러난다.

델 토로는 한 인터뷰에서 "'피노키오'가 가진 남성성에 대한 반감이 담겨 있으며, 파시즘은 남성성의 한 갈래로 드러난다"고 보았다. 그는 10대 시절부터 피노키오의 말을 빌리자면 하라는 대로 하는 파시즘의 문제를 고민했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영화에서는 불완전한 신체를 지닌 남성이 남성성을 지키려 하는 행위를 파시즘으로 보고 있다. 다만 독재자 정권 아래에서 가능했던 에리세의 은유는 델 토로가 살아 있는 시대와는 어떠한 접점도 지니지 않는다. 델 토로는 〈벌집의 정령〉의 스타일을 모방해 남성성에 대한 은유를 다룬다. 〈쉐이프 오브 워터〉의 '스트릭랜드', 〈피노키오〉의 '포데스타', 그리고 그의 아들 '캔들윅'은 프랑켄슈타인과 다소 닮아있다. 여기에 시기에 따라 프랜차이즈로 재생산된 프랑켄슈타인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제작된 시기의 공포를 반영하고 있다. 프랑켄슈타인의 세계는 미끄러운 기표들로 이루어진 유기적인 변형체이다. 여기에서는 빅토리아 시대 의복과 자동차가 공존하고, 신화적 상상 깊은 곳에서 히틀러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를 만난다.

델 토로가 보고 자란 텍스트에서 괴물 프랑켄슈타인은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로 드러난다.

델 토로는 피노키오를 한 번도 다룬 적이 없다. 피노키오가 탄생할 당시에 제페토가 프랑켄슈타인을 창조한 박사와 같은 매드 사이언티스트로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는 아이가 백치인 나무 인형이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라 피노키오로 성장하는 과정을 다루되, 단순히 우화로 두지 않는다. 그는 볼페로 스타는 물론, 스타의 이면에 있는 스파라찌오와 같은 존재를 착취하는 방식으로 지탱되는 자본주의와 결탁한 남성성을 갈망하는 극우화된 사회의 풍경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같은 과정에서 피노키오는 예수 같은 존재로 세속의 수난을 견뎌내기에 이른다. 그래서 이 영화는 기예르모 델 토로가 다시 쓰는 예수의 수난기로도 보인다. 이데올로기와 자본 어디에도 물들지 않은 피노키오는 "나로 살겠다"라는 불복종으로 저항한다. 이때 델 토로는 피노키오가 저항에 실패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특히나 무솔리니 앞에서 상대를 똥으로 풍자하는 뮤지컬 시퀀스는 프로파간다가 사실은 똥에 대한 부정인 키치에 불과하다는 밀란 쿤데라의 시선과도 맞닿아 있다. 이 저항은 곧장 징집으로 인해서 무산되고 만다. 이처럼 자유인으로 있기를 바라는 불복종이 불가능하다는 과정을 러닝타임 내내 비춘다.

피노키오의 기나긴 여정에서 눈여겨 볼만한 장면은 피노키오가 명계에 가는 장면이다. 그는 명계에 도착해서도 죽지 않기에 죽음의 사자와 계속 대면해야 한다. 명계에서 죽음의 개념을 피노키오에게 알려주는 죽음의 사자는 판의 미로의 정령들과 닮아있다. 죽음의 사자를 대면하러 문을 여는 장면은 그의 영화에서 매번 반복되는 문의 모티프와 이어져 있다. 문을 열자 환한 빛이 들어오는 장면은 아이가 독재자가 죽은 시대를 마주하는 〈벌집의 정령〉의 엔딩과 유사하다. 〈악마의 등뼈〉와 〈판의 미로〉 등에서도 반복되는 이 장면은 델 토로의 영화에서도 남성성 바깥의 세계가 열리는 순간을 드러낸다. 피노키오는 문을 여는데도 새로운 세계를 마주할 수 없다. 그가 영생의 존재이기에 인간성을 지니고 있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이는 피노키오가 생명을 포기할 만큼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아서다. 자본주의도 파시즘도 피노키오에게는 사랑과 죽음을 알려줄 수 없다. 델 토로는 남성성과 자본주의라는 굴레에서 사랑과 죽음 등 인간의 실존적인 상황마저 사라지고야 마는 현실을 직면하되 신파로 빠지지 않으려 애쓴다. 제페토가 죽은 뒤의 피노키오의 미래를 미지로 남겨둔 채로 말이다.

[글 김경수, rohmereric123@ccoart.com]

 

ⓒ 넷플릭스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Pinocchio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Guillermo Del Toro

 

출연(목소리)
이완 맥그리거Ewan McGregor
데이빗 브래들리David Bradley
크리스토프 왈츠Christoph Waltz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
핀 울프하드Finn Wolfhard
케이트 블란쳇Cate Blanchett
론 펄먼Ron Perlman

 

제공 넷플릭스(NETFLIX)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17분
등급 전체 관람가
공개 2022.12.09

김경수
김경수
《코아르》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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