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보고 있어도 내다 버리고 싶은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모두가 보고 있어도 내다 버리고 싶은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 배명현
  • 승인 2022.11.2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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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적의에 대해"

영화는 세면대에서 속옷을 세탁하는 딸 '이정'(임지호)의 손으로 시작한다. 잠시 뒤, 엄마 '수경'(양말복)이 나타나 입고 있던 속옷을 벗으며, 세면대 위로 아무렇지 않게 던져 놓는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소변을 본다. 딸은 얼굴을 구기며 체온이 식지도 않았을 속옷을 세탁한다. 엄마는 통화를 하며 속옷을 달라는 제스처를 취하고, 딸은 거품이 가득한 속옷을 헹구지도 않은 채 손으로 주욱 짜 건넨다.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축축한 속옷을 받아 입고 밖으로 나간다.

 

ⓒ 찬란

한국에서 '가족'이란 존재의 의미는 유독 긍정적으로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하다못해 관계의 회복 내지는 사랑의 재발견의 형상으로 다루어지는 주제이다. 하지만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그렇지 않다. 말 그대로 파괴적인 관계를 가진 모녀를 보여준다. 영화는 어떤 서사 대신 두 사람의 관계를 중심에 놓고 진행한다. 폭력적 성향과 인격장애를 지닌 엄마와 그런 엄마에게 학대받고 자라 사회성이 낮은 딸.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에 대한 어쩔 도리 없는 적의로 관계하고 있다. 키운 소임에 대한 보답을 요구하는 걸로도 모자라 영원히 분노를 받아 달라고 요구하는 엄마와 무리한 요구를 더 이상 버텨낼 재간이 없는 딸. 이 모녀의 충돌은 '집'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반복되기만 할 뿐 막을 수가 없다. 이들의 집에는 휴식과 안식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아무렇지 않음'이 대신 자리하고 있다. 일상을 마치고 돌아와 평온을 얻어야 마땅한 집에는 '읽지 않은 편지'가 있고, '사용한 콘돔'이 '선물 받은 코트'가 그리고 '가위로 자른 엄마의 옷'이 있다.

이 집 곳곳에서 입을 벌리며 이빨을 벌리고 있는 폭력의 기억이란 틈 사이에 끼어 휴식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딸은 아무렇지 않기로 한다.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에 방에 앉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는 것. 이건 그녀가 선택한 생존 비법이다. 이 아무렇지 않음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서 아무렇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무렇지 않아야 살 수 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기로 한, 그런 슬픈 아무러함이다. 이 집에는 그런 슬픔이 있다. 그렇다면 엄마는 어떠한가. 엄마 또한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저지른 폭력을 정당화하며 부모로서의 소임을 하는 것 대신, 그동안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자유'를 소망한다. 어린 시절 딸이 남긴 뜯지 않은 편지로 상징되는 무책임은 엄마가 가져야 할 부모로서의 책임을 양육 과정에서 방기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가질 생각 자체가 없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녀는 이러한 잘못들을 인식하고 마주하려는 대신, 자꾸만 집을 벗어나는 것으로 아무렇지 않으려 한다. 그로 인해 딸의 고통은 아무렇지 않은 것이 되고,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별것도 아닌 것에 대한 호들갑으로 치환된다.

다만, 엄마가 선택한 집 바깥의 공간도 완벽한 대안이 될 수 없기에, 그녀는 필요할 때마다 딸을 찾는다. "얼마나 힘든데, 와서 욕을 한 바가지 남기고 가면 내가 그 욕을 다 받는 거야. 알아? 다른 딸들은 엄마가 힘들어서 그렇구나 하는데 너는...!" 이 관계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딸의 말에 "그럼 너도 딸 낳아"라는 절망적인 대답은, 이 모녀의 관계가 두 사람의 세대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을 것이란 세대적이며 사적인 절망을 전달한다. 그도 그럴 게 영화는 딸의 알리바이를 사회성의 결여로 상정하며 진행한다. 타인의 미묘한 불편을 애써 무화하며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대입한다. 자신의 존재가 타인의 불편보다 더 크다 생각하며 죽기 살기로 독립한 동료의 집에 얹히려 한다. 이 안타까운 상황은 엄마의 양육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그 엄마조차 양육의 희생자―였으리 예상되―기에 '아무렇지 않기'의 기원을 찾기란 말 그대로 지난할 것이다.

 

ⓒ 찬란
ⓒ 찬란

이 모녀의 관계가 진정으로 가슴 아픈 까닭은, 두 사람이 여성으로서 연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목의 형태로 관계를 지속하는 데 있을 것이다. 딸의 첫 생리 때에조차 틀어져 버리는 관계 말이다. 여성으로서의 첫 선생인 엄마는 생리대를 어떻게 착용해야 할지도 모르는 딸에게 피 묻은 팬티 위로 생리대를 붙이며 본인의 손 위로 떨어진 딸의 생리에 '윽 더러워'라고 말한다. 같은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심지어 엄마의 화장대 위에 생리대가 아직 있고, 콘돔을 사용하는 것으로 미루어 엄마는 아직 폐경 전임을 유추할 수 있다) 왜 그토록 딸에게 모질어야 하는가. 이 회상이 더욱 슬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생리대를 붙이며 스쳤던 손을 '돌봄'이라 느끼며 기분이 좋았다고 고백하는 소박하고 애절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딸은 엄마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아마 어렵지 않을까. 영화에서 호명되는 이유는 돈이니까. "너 키우는 데 얼마나 돈이 많이 들어갔는지 알아?" 엄마가 딸을 괴롭힐 수 있는 이유도, 자신을 자동차로 쳐버리려 했던 엄마에게 벗어나지 못해 집 안으로 들어가야 했던 이유도, 모두 '돈' 때문이다. "아무리 벌어도 통장에 돈이 없어"라는 말은 이 땅에 존재하는 성인이 되어도 가정 폭력에 시달려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된다. 독립 이전에 자립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무렇지 않은 심정이 아님에도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가지의 수는 단 하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돈은 자신을 차로 멀어버리려 한 엄마가 소유하고 있는 집에 돌아가게 만들고, 어른의 책임과 소임 그 어떤 것도 치르려 하지 않는 엄마는 양육자로서의 권력을 가지게 된다. 이 권력의 불균형이 엄마의 적극적인 가학이 가능하게끔 작동한다. 대인관계의 어려움으로 인해 직장 생활의 어려움을 느끼며 돈을 제대로 벌 수 없게끔 엄마가 만들었지만, 사회와 주변은 이 맥락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 무심한 사회는 '이런 가정(家庭)'이 존재하게끔 한다.

그리고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영화가 아닌 현실의 거울이 된다.

영화는 끝에 이르러, 서로에게서 떨어진 모녀가 각자의 자리(한 명은 집, 다른 한 명은 속옷 가게)에서 순간 상대의 부재를 느끼며 '심정적 공백'을 가지게 한다. 이때 이것은 두 사람이 상대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감정이 적의만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한다. 엄마는 영화 안에서 단 한 번도 딸을 위해 차리지 않았던 식사를 준비하고, 딸은 속옷 가게에서 사이즈를 묻는 점원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며 엄마가 사(온)주는 것만 입었다 말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표정이 변화한다. 하지만 오해하진 말자. 두 사람의 공허를 담은 이 씬이 화해 혹은 용서나 성찰의 순간은 아닐 테니. 두 사람의 심정적 불화는 끝나지 않았고, 그 원인으로 등장하는 문제 또한 단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다만, 딸은 엄마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엄마는 딸에게 감정 쓰레기통을 요구하는 관계만이 아님을 감독(개인사적)은 고백하며, 이 관계의 단절 그 이상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기에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의 엔딩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 찬란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The Apartment with Two Women
감독
김세인
KIM Sein

 

출연
임지호
양말복
정보람
양흥주
이유경
최경준
이양희
권정은

 

제작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배급 찬란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40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2.11.10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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