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 '더 원더' 이야기의 지극히 기이한 투명함
[NETFLIX] '더 원더' 이야기의 지극히 기이한 투명함
  • 변해빈
  • 승인 2022.11.30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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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과 경계, 가깝고도 먼 또는 필연적인 만남"

<더 원더>는 두 번 시작된다. 하나는 으레 그러하듯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페이드 인'(fade in)에 의해서고, 다른 하나는 '의문의 목소리'와 '카메라 프레이밍'을 통해 열린다.

세트장 내부이자 집의 형태를 갖춘 세트 외관을 비추던 카메라는 얼추 반 바퀴 회전하면서 주변에 널린 촬영 장비까지 노골적으로 보여주고선, 반대편의 세트 내부로 진입한다. 페이드 인과 동시에 동행하던 어느 여인(니암 알가르)의 목소리(내레이션)가 단언한 대로 영화는 세트장에서부터 시작되지만, 1862년 대기근이 발생한 아일랜드의 금식 소녀 이야기는 프레임을 경계로 세트장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 시작된다. 극으로의 즉각적 몰입을 방해하는 소격효과는 방백과 이음매의 뒤틀림, 제시적 블로킹으로 변주해 드문드문 벌어지면서 돌연 관객을 현실로 복귀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목소리 주인은 자연스러운 몰입에 균열을 내는 동시에 또 이야기를 사실로 믿는 캐릭터들의 태도에 관객이 동의하고 말 것이라고 세뇌하고 부추기는 지점이다. 목소리 주인의 이중성은 극의 중반부와 엔딩에서 거듭 발견된다. 그녀는 세트장의 관리자이면서 금식 소녀 이야기 속 캐릭터 '키티'이다. 오프닝에서 관객의 눈을 피해 숨었던 여인은 캐릭터로서의 몸체를 드러내는 대신 내레이션으로 말을 걸며 주변 캐릭터에게 자기 정체를 감춘다. 종국에는 세트 바깥에 대기해서는 기어이 관객과 다시금 대면하는 것도 모자라, "안, 밖"이라는 중얼거림까지 보탠다. 몰입하라는 걸까 경계하라는 걸까.

 

ⓒ 넷플릭스

목소리 주인의 경고

<더 원더>의 두 번의 시작은 공간으로의 입장, 무대 위에서 막이 열리는 연극의 환경과 닮았다. 이때 영화와 연극의 일차적인 차이는 카메라의 유무다. 실화 기반의 엠마 도노휴의 『더 원더』를 원작으로 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독자가 읽던 텍스트가 이미지화된다는 점에서 소설을 영화화하는 작업 역시 맥을 나란히 하며, 여기에는 문자가 배우의 목소리로 읊어진다는 차이가 더해진다. 그런데 목소리 주인의 내레이션은 부연 설명이 붙지 않아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고 파악 가능한 것들이다. 예컨대 카메라가 주인공 라이트(플로렌스 퓨)를 비출 때, 여인은 "저기 간호사가 앉아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라이트의 위치와 직업을 포함해 대기근의 유행, 4개월째 먹지 않고도 살아있는 애나(킬라 로드 캐시디)에 얽힌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전반적인 스토리 역시 인물의 대사나 이미지로 충분히 유추 가능하다. 결정적으로 엔딩에서 "안, 밖"이라는 대사가 없다고 해서 카메라가 세트 내부에서 바깥으로 움직일 때, 안팎의 구분이 벌어졌다는 것쯤을 모를 리 없다.

목소리 주인은 아주 단순한 것조차 눈으로 보는 행위를 믿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녀는 관객이 무언가를 제대로 목격했는지 강박적으로 확인하려 들거나, 또는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경고한다. 영화에는 사진 위에 가짜로 덧씌워 그려진 눈이 있다. 아들 팻이 죽은 뒤 오도넬 부인(일레인 캐시디)이 직접 그려 넣었다는 눈은 혼탁한 생김새에 비해 무언가를 꿰뚫을 것 같은 섬뜩함을 자아낸다. 팻의 사진이 실제 배우의 제시적 블로킹보다 더 날카롭게 느껴지는 까닭은 실제가 아닌 가짜이기 때문이다. 라이트는 비밀을 감추는 애나와 근접한 거리에서 눈 맞춤을 시도한다.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면 진실을 고백하도록 유도할 수 있거나 그 자신이 상대의 내면을 관통하는 심안을 갖출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오도넬 부인이 그려 넣은 가짜 눈은 이것이 불가함을 암시한다. 살아생전 죄를 저지른 진짜 팻의 모습을 거부하겠다는 뜻이거나 죽어서까지 무언가를 정해진 방식으로 보게끔 통제하는 오도넬 가의 폐쇄적 신념이 내포되어서다. 그러므로 팻의 눈동자가 주는 섬뜩함이 그런 눈을 가진 그의 사악한 내면 때문인지, 눈앞에 비친 사악한 대상을 반영한 거울상인지 알 수 없다.

이렇게 <더 원더>는 응시의 주체 ―그것이 관객일지라도― 라고 하여 반드시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는 권한을 지닌 것이 아니며 어떤 대상이 시야에 걸렸다고 하여 추궁당해 마땅하다는 뜻은 아니라고 전한다.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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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과 이야기

그렇다면 <더 원더>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무엇을 믿을 수 있을까. 마을 의원들은 금식 소녀 애나를 ‘기적’이라 칭하고 종교적 믿음과 과학적 근거로 설명하려 든다. 반면 관찰자로 고용된 라이트는 어떤 식으로든 애나의 생존이 설명되기를 거부하면서, 애나가 음식을 감춰서 먹거나 누군가 몰래 섭식을 돕는다고 의심한다. 그녀는 애나와의 첫 대면에서 상대를 눈으로 보는 것도 모자라 불쑥 신체를 침범해서는 여기저기를 만지고, 보이지 않는 집 구석구석을 수색한다. 부수는 한이 있어도 장식품 구멍에 든 것을 눈앞에 꺼내 보려던 라이트는 호스로 애나의 식도 내부를 강압적으로 침범하려다 실패한다.

본 형체를 파괴해서라도 보고야 말겠다는 라이트의 절실하고도 광적인 집념은 그녀 자신의 기이한 의식으로도 발현된다. 라이트는 종종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오직 관객의 시선만이 허용된 공간에서 발견된다. 그녀는 정체 모를 약물을 복용한 뒤 죽은 아기의 신발을 쓰다듬고, 허공에서 아기의 걸음을 흉내 내다가 자기 손가락을 바늘로 찔러 그 피를 먹고 쓰러진다. 이러한 모종의 의식은 그녀를 연옥인지 지옥인지 모를 공간에서 불에 타기를 반복하게 만든다. 정확히는 촛불로 밝힌 그녀의 방은 애나가 말했던 연옥 또는 지옥에 관한 연상을 불러온다. 피부 표면 아래 감춰진 피를 포함해 라이트는 자기 눈앞에 두고 볼 수 없는 대상을 그리워하고 보려 애쓰면서 자발적 형벌에 든다. 아기의 생물학적인 죽음과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상실감을 안기는 남편의 행방불명. 그녀는 과부가 그려진 애나의 그림 카드를 보며 가장 나쁜 죄라고 자조한 적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심적 고통은 피와 쓰러짐이라는, 죽음을 매개하는 자학적 몸짓으로 우회하여 ‘보여진다’. 그런 라이트에게 애나가 ‘서서히 죽어가는’ 과정은 신체 둘레와 파리한 안색, 하나씩 제 기능을 잃으며 탈구되는 신체들로 자극적일 만큼 선명하게 보이는 것일 테다. 어금니가 불필요한 애나의 몸, 자기 자신을 상실해가는 그녀의 피 묻은 입가는 스스로 낸 상처의 피를 먹는 라이트와 닮았다. 그러므로 라이트가 애나를 둘러싼 진실과 사실에 집착하는 이유는 스스로가 애나와 마찬가지로 어떤 의식에 의존하고 도피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외면하고 싶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천국에서 추방해 화염 속에 몇 번이고 몰아넣기, 이미 무너진 적 있는 과거 자기 삶을 상기함으로써 지금 앓는 두려움에 겨우 포섭되지 않을 수 있으므로.

애나의 현재 삶보다 죽은 팻의 연옥에서의 삶, 일시적인 소사를 중시하는 종교적 의식과 이야기 역시 위선이자 보이지 않는 폭력의 형태로 작동한다. 그런데 목소리 주인은 진실을 파헤치는 라이트에게 "부인한테도 이야기가 필요해요"라고 충고하고, 이어 관객에게 "우리는 이야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고 강조한다.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들고 숨겨진 사실을 투과하는 미로다. 목소리 주인은 보이는 것 너머 미스터리가 존재함을 자각하라고 경고한다. 따라서 앞선 라이트의 의식이 미스터리를 푸는 데에 반복 실패되는 것은 결국 그녀가 자기 내면의 미스터리를 들여다볼 줄 모르기 때문이다. 내면의 진실은 무언가를 폭력적이다시피 응시하고 외피를 너덜너덜하게 파괴하는 자학적 형벌이 아니라 자신에게 벌어진 사건을 복기하면서 고통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조화하고 운용할 때 가능해진다. 개연성을 지적받는 라이트와 번의 관계도 가족을 잃은 두 사람의 쓰라린 이야기가 서로를 오간 뒤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가벼이 여겨지지 않는다.

 

ⓒ 넷플릭스

응시의 끝, 살아갈 세상

굶어죽지 않기 위해 ‘애나’로 죽은 뒤 또 다른 이름 ‘낸’으로 새로 태어나는 라이트의 의식이 대담한 이야기인 것은 라이트가 애나의 기도문과 의식들, 다시 말해 진실과 거리가 먼 것으로 간과하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라이트가 만든 이야기는 애나에 의해 닫힌다. 신성한 샘에서, 라이트는 애나였던 낸을 흔들어 깨우지 않는다. 그녀는 이제 막 태어난 아기를 다루듯이 조심스럽고 간절한 어투로 이름을 부를 뿐이고 낸은 스스로 태어나기를 택한다. 돌이키면 <더 원더>는 음험한 분위기의 배경음이 끊이지 않고 흐르는 와중에, 라이트의 호흡소리, 기도하는 애나의 속삭임을 증폭해 들려준다. 비록 그 두 가지가 자신에게 벌어진 과거의 사건을 두고 미망하는 심정일지라도 적어도 영화는 귀를 기울이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신성한 샘에서의 제시적 블로킹으로 촬영된 두 얼굴 숏의 연결은 애나에게는 과거의 고통을 차단한 뒤의 탄생이자 라이트에게는 새로운 세계의 잉태이다. 이때의 응시는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상상하던 두 인물이 살아나고 살아있는, 자기 자신이자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거울면이 된다. 라이트가 진실 추구를 위해 동의를 구해야 할 대상은 자식을 잃은 오도넬 부인이 아니라 애나였다. 방식과 의도상 문제와 별개로 오빠 팻과 결혼했다던 애나는 라이트와 같은 과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더 원더>는 한쪽이 상대를 구원한다기보다 라이트와 애나의 유비 관계에 의한 상호 연대이자 자기 구제에 관한 이야기다.

뒤늦게 두 개의 이야기가 걸린다. 애나의 가짜 죽음에 대한 라이트의 거짓말과 애나를 데려간 천사를 보았다던 수녀의 거짓말. 두 개의 이야기는 이후 마을 기사의 내용을 결정짓는다. 누구에게도 혐의를 물을 수 없으며 그저 비통한 세상 탓이라는 말. 선의라는 아름다운 표현 앞에서도 나는 거짓으로 점철되어 쓰인 이 마지막 이야기에 온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본질적인 방관과 묵인이 뒤따르기에. 다만 감독이 그것을 목소리 주인을 통해 읊어지게 한 까닭이 이를 곱씹어보라는 의미일지 모른다는 점에 힘을 실어본다. 그리고 스스로를 낸이라 소개한 아이가 스크린 너머로 보내는 <더 원더>의 마지막 시선, 그것은 그녀의 세계가 집이자 세트 내부에서 세상이자 극 바깥으로 넓어졌음을 알린다. 우리의 시선이 스크린 안으로 넓어지는 것처럼.

[글 변해빈, limbohb@ccoart.com]

 

ⓒ 넷플릭스

더 원더 
The Wonder
감독
세바스찬 렐리오
Sebastian Lelio

 

출연
플로렌스 퓨
Florence Pugh
시아란 힌즈Ciaran Hinds
니암 알가Niamh Algar
탐 버크Tom Burke
토비 존스Toby Jones
일레인 캐시디Elaine Cassidy


제공 넷플릭스(NETFLIX)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08분
등급 15세 관람가
공개 2022.11.16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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