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악마가 우리의 미래일지라도
[Critique] 악마가 우리의 미래일지라도
  • 김경수
  • 승인 2022.11.2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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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프리드킨 감독 '엑소시스트: 디렉터스 컷'
ⓒ 워너 브러더스

미국 영화감독 '윌리엄 프리드킨'은 제24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2020) 마스터클래스에서 "모든 일의 밑바탕에는 운명과 신앙의 미스터리가 깔려 있다"고 말한 적 있다. 이어 그는 "〈엑소시스트〉(1973)가 신앙의 미스터리에 가깝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영화의 원작이 집필된 과정은 물론, 영화를 촬영하는 과정이 운명에 이끌리듯이 진행되었다"고 고백한다. 이는 원래 스탠리 큐브릭을 비롯해 당대의 여러 유명한 감독이 찍기로 한 이 영화를 결국 자신이 찍은 것이 운명이라는 것이다. 신앙은 신을 믿거나 배제하면 그만이지만, 운명은 그러지 않기에 인간은 운명에 승리할 수가 없다. 그는 나아가 "삶의 모든 과정이 운명이 만든 우연"이라고까지 한다. 〈엑소시스트〉를 보는 동안 열띤 말투로 운명론을 설파하는 프리드킨의 표정이 선연히 떠올랐다.

어쩌면 〈엑소시스트〉는 모든 것을 기어이 운명론으로만 보고자 하는 예술가의 고집이 응축된 작품이 아닐까.

〈엑소시스트〉의 플롯은 단순하다. 유명 배우인 크리스 맥닐(엘렌 버스틴)의 딸 리건(린다 블레어)에게 정체를 알기가 힘든 병이 생긴다. 크리스는 딸에게 생긴 병을 치료하고자 여러 병원을 전전하지만, 의사들은 하나같이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한다. 그녀는 차츰 리건에게 악령(devil)이 들린 것을 체감하기 시작하고, 고심한 끝에 그녀는 신부들의 정신과로 활동하고 있는 카라스(제이슨 밀러)에게 엑소시즘을 해달라고 청탁한다. 그는 리건에게 악령이 들렸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고뇌한다. 그가 엑소시즘을 한 적이 없을뿐더러, 노모를 요양원에 보내서 자신이 그녀를 죽인 데에 일조했다는 죄의식을 지니고 있어서다. 끝내 그는 지금은 이라크에서 악마에 관련된 유적을 발굴하고 있지만, 오랜 세월 엑소시즘을 한 노신부 메린(막스 폰 시도우)에게 부탁을 한다. 그들은 악령에게 엑소시즘을 행하지만, 실패하고야 만다. 불행하게도 메린은 악령에게서 어머니를 본 카라스가 쉬러 나간 사이에 살해당했고, 카라스는 악령에 사로잡힌 리건을 목 졸라 죽이려던 참에, 자신이 어머니를 살해했듯이 리건도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낀다. 카라스가 주춤한 틈을 탄 악령은 카라스를 살해한다.

〈엑소시스트〉는 운명이 인간에 승리한다는 중심 플롯을 따라간다. 윌리엄 프리드킨가 이 영화의 후속작으로 찍고, 스스로 최고의 걸작이라 자부하는 〈소서러〉(1977)도 유사한 주제와 플롯 구성을 공유한다. 둘 다 인간이 제힘으로는 결코 대적할 수 없을뿐더러 정체를 파악하는 것도 불가능한 운명과 악전고투하지만, 결국에는 패배하고야 마는 비극을 그린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는 인간이 악마에 맞서서 제 모습만 부지하더라도 승리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오컬트 장르 문법을 만든 설정이기도 하다. 이 두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감독이 '시간을 그려내는 방식'이다. 플래시백도 없는 데다 시간을 이리저리 뒤섞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연대기 순으로 불안감이 일상에 차츰 스며드는 과정을 그리며, 거기서 생기는 균열과 긴장을 건조한 시선으로 응시할 뿐이다. 그는 여러 장치로 플롯을 복잡하게 구성하는 데에 흥미가 없는 듯이, 단순한 구성으로 엄습하는 악을 서서히 마주하는 인간의 표정을 포착하고자 한다. 프리드킨은 이를 막힐 데 없는 유려한 편집과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다운 날것 그대로 보이는 듯한 촬영으로 그려내며, 테크니션으로의 면모를 한껏 드러낸다. 특히 카메라의 거리를 멀리서 두면서 곳곳에 그림자에서 악마 파주주의 형상을 드러내는 연출은 탁월하다.

물론, 프리드킨의 극작술은 지금 보기에는 진부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 이는 〈엑소시스트〉와 〈오멘〉(1977)을 기점으로 유행한 할리우드 오컬트 영화가 〈엑소시스트〉의 플롯을 공식화해서 재생산한 탓에 지금의 관객에게 클리셰로 보이는 탓도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클리셰로부터 벗어나고자 시도하는 새로운 어법의 오컬트 영화가 계속해 등장했다. A24를 필두로 해서 부상한 엘레베이티드 호러(Elevated Horror, 고급 호러라는 뜻으로 B급 감성을 중심으로 한 기존 호러 장르 영화를 거부하며, 호러 장르를 아트하우스 영화의 문법으로 그려내고자 하는 작가주의 색채가 강한 호러 영화를 지칭)의 화려한 극작술은 〈엑소시스트〉의 극작술을 다소 시시한 것으로 느끼게 하기 충분하다. 비선형적인 시간과 세련된 촬영으로 무장한 〈유전〉(2017)과 〈겟 아웃〉(2017), 〈서스페리아〉(2018) 등 호러 영화와 비교하기에 프리드킨의 이 영화는 다소 투박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엑소시스트〉가 당대의 문제작이었으며 영화관에서 본 관객이 졸도하기까지 했다는 말은, 뤼미에르의 〈기차의 도착〉(1895)를 본 관객들이 기차가 상영관을 덮치는 줄 알고 혼비백산했다는 일화만큼이나 낯선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하다고 해서 〈엑소시스트〉가 수명을 다한 고전은 아니다.

 

ⓒ 워너 브러더스

〈엑소시스트〉의 가장 눈여겨 볼만한 장면은 오프닝이다. 감독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메린 신부가 이라크에서 유물을 발굴하고 있는 현장을 삽입하고자 했다. 심지어 원작자가 쓴 시나리오에 이라크에서 유물을 발굴하는 에피소드가 빠진 것을 보고는 그것을 거절하기까지 했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보기에 오프닝이야말로 영화의 핵심이어서다. 이야기상으로는 이 장면은 메린 신부가 누구인지 소개하는 데에 그치는 데에 그친다. 메린 신부는 발굴 현장에서 연대를 추정할 수가 없는 유물이 거기에 묻혀 있는 것을 보고는 계속 어떤 것에 불안감을 느끼며 사로잡혀 있다. 메린 신부는 카라스로부터 엑소시즘을 집행해달라는 연락에 응하며 '악과 악의 싸움'이라고 뇌까린다. 이윽고 메린 신부는 발굴지의 한가운데에 올라선다. 그때 불그스름한 태양이 차오르기 시작하며, 주변에 있는 개가 싸우기 시작한다. 그는 맞은편에 있는 고대의 조각상을 보고서는 현기증을 느낀다. 그 정체가 선한 신인지 악한 신인지 관객은 알 수가 없다. 이 조각상을 마주 보고 있는 장면은 희미해지며 곧장 크리스가 있는 조지타운과 디졸브 숏으로 이어진다.

메린 신부가 느끼는 '현기증'이야말로 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를 압축한다고 할 수 있다. 세계를 선과 악의 대결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어느 쪽이 악하냐, 선하냐라고 판단하기 시작하고, 왜 그것이 악하고 선한지 인과를 설명하고자 하는 충동에 휩싸인다. 메린 신부의 현기증은 이와는 거리가 있다. 그는 조각상으로부터 기인하는 '공포와 미스터리'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인과와 기원을 파악하기도 힘들뿐더러, 그것이 어떠한 형상인지도, 어떠한 시공간에 존재하는지 파악하기도 힘든 악마의 속성은 사실상 신의 속성과도 같다. 프리드킨은 "선과 악은 언제나 공존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프리드킨의 세계관은 단순히 세계를 선과 악으로 나누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세계관은 세계를 유와 무로 구분하는 대신, 결성적 무(無)와 부정적 무(無)로 구분하는 쇼펜하우어의 세계관과 닮아있다. 결성적 무가 빛의 부재로 드러나는 암흑, 즉 선과 대립하는 악의 형상이라면, 부정적 무는 인과가 없는 공허, 그 자체이다. 그에게 운명은 도저히 인과를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메릴 신부가 '악과 악의 싸움'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어쩌면 프리드킨는 1970년대 미국 사회의 혼란을 운명처럼 불가사의하다고 보려는 듯하다. 악마는 형이상학적인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그 시대에 따라서 달리 정의되는 시대정신에 가깝기 때문이다. 1970년대 미국은 보수화된 기성세대에 저항했던 반문화 운동의 여파가 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히피 등 부유한 대학가 청년층을 중심으로 전개된 반문화 운동은 베트남 전쟁의 발발이 겹치며 불타올랐다.

영화의 곳곳에는 이러한 1970년대 미국 사회가 경험해야만 했을 혼란들이 반영되어 있다. 크리스가 찍고 있는 버크의 영화는 반문화 운동으로 인한 대학가의 혼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크리스가 연기하는 역할이 학생운동을 반대하는 학생인 것은 제법 의미심장하다. 자신을 가진 크리스가 청년을 가장하면서 청년들이 과격하다고 공격하고 있는 꼴은 역사에서 반복되는 백래시를 연상하게 한다. 크리스의 독일인 가정부가 나치에 복무했던 사람이라는 설정도 미국 사회에 남아 있는 나치즘의 흔적을 엿보게 한다. 더군다나 정신의학을 맹신하는 의사와 그들을 맹신하는 크리스도 풍자의 대상이다. 당시의 정신의학은 환자를 약물에 의존하게끔 하거나, 측두엽 등 뇌의 일부를 절제함으로 환자의 정신병이 나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혹성탈출〉(1968), 〈뻐꾸기 둥지 위를 날아간 새〉(1977), 〈버디〉(1984) 등 당대에 나온 여러 영화에서 재현된 적이 있는 소재이다. 결국, 〈엑소시스트〉가 여러 영화 연구자나 비평가에게 1970년대 사회상을 반영한 영화라는 해석을 하게끔 하는 이유도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이러한 요소들로 인해서다.

프리드킨은 나름의 방식으로 1970년대 미국의 풍경을 풍자적으로 그리고자 했고, 이는 〈엑소시스트〉가 문제작으로 보이게 될 수 있던 이유이기도 했다.

 

ⓒ 워너 브러더스

〈엑소시스트〉의 가장 논쟁적인 장면은 리건의 신체를 지배한 악령이 은십자가로 리건의 성기를 막 찌르며 예수가 나를 범하고 있다며 크리스를 조롱하는 장면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검열당했다가 감독판 개봉에서야 겨우 볼 수 있는 이 장면을 정도로 수위가 높은 장면이다. 이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캐리〉(1976)와 더불어 그 당시의 공포 영화에서 반영되고 있는 여성혐오를 분석하는 사례로 쓰이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보수적인 주류 문화로 인한 성적인 억압이 어떻게 공포라는 형상으로 드러나는지를 드러내는 사례로도 쓰인다. 이 시기의 공포영화를 연구한 로빈 우드는 "호러 영화는 우리들의 집단적인 악몽이다"라고까지 이야기한다. 사회가 억압하고 짓누른 것이 가장 먼저 끔찍한 형상으로 드러나는 것이 공포영화의 악령이라는 말이다. 그는 이를 억압된 것의 귀환이라고 이야기한다. 다만 이러한 해석은 프리드킨의 영화를 설명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도식적이다. 리건의 행동이 당시 청년 세대의 히스테리라는 관점을 프리드킨은 정작 회피하고 있는 듯하다. 리건의 행동이 크리스의 이혼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심리적 해석, 뇌의 이상으로 보는 과학적 해석, 그리고 청년의 반항심을 이야기하는 사회적 해석을 거부한다. 또한 리건이 악마의 미사에 이용되었다는 종교적 해석도 거부한다.

카라스가 엑소시즘을 집행하기 전에 리건을 진단하러 그녀의 방으로 가는 장면에서 이러한 감독의 신중한 태도가 드러난다. 카라스는 엑소시즘을 집행하려면 증거를 확실히 모아야만 한다며 리건과 대화를 나눈다. 카라스는 크리스에게 리건이 완전히 다른 언어로 말한다든지, 스스로 데몬(Demon)이 아니라 악령 그 자체라고 말한다든지, 가짜 성수에 속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그녀가 악령에 쓰인 것은 아닐 것이라 이야기한다. 프리드킨은 카라스가 악령을 보는 관점을 다룰 때 기성세대가 신세대를 대하는 관점을 상기시키되, 이와 정반대의 방식으로 악령을 보고자 한다. 리건을 대하는 카라스와 다른 신부의 태도를 비교하면서 말이다. 다른 신부들이 보기에 리건에 쓰인 악령이 말하는 방식은 기존 문장을 뒤집고 그것을 유추하게끔 하는 암호다. 카라스는 그것을 듣고도 리건을 계속 보고자 한다. 엑소시즘을 집행하기까지 악령의 기원이나 그들이 왜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 정의하기보다 판단을 신중히 하는 것이다. 카라스가 리건의 배에 새겨진 "Help me"를 보고 엑소시즘을 집행하기로 한 것도 이러한 태도와 이어져 있다. 신세대는 그저 생겨나는 것이다.

감독은 그들을 무어라 판단하기보다 그들의 절규를 듣고자 한다.

한편으로, 〈엑소시스트〉는 A24의 정치적 호러와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대상에 접근한다. 〈겟 아웃〉이 흑인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공포를, 〈멘〉(2022)이 여성을 가스라이팅하는 남성성의 재생산을, 〈언더 더 실버레이크〉(2019)가 할리우드 신화의 허상 등의 다소 명확히 파악되는 주제를 실험적인 영화 문법을 거쳐서 모호한 대상으로 그린다면, 〈엑소시스트〉는 정반대다. 이 영화는 다루고자 하는 대상이 기성세대의 시선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신세대라는 미지의 대상으로 드러나기에 되려 정직하고도 단순히 다루는 것이 미덕인 영화인 셈이다. 선명한 대상을 모호하게 다루기와 모호한 대상을 선명히 다루기의 차이인 셈이다.

〈엑소시스트〉는 기성세대가 신세대를 마주하는 순간을 담은 영화다. 메린은 그들이 거짓과 진실을 교묘히 뒤범벅하며 그들을 공격할 것이라 경고한다. 다만 거짓과 진실을 판단하는 기준이 고루한 것이 된 세계에서 메린의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그는 구세대이므로 신세대가 올 때 마땅히 죽어야 한다. 중간에 끼인 카라스는 리건이 자신을 모욕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들을 죽이려 한다. 여기서 그가 끝내 리건을 죽이지 않고자 죽음을 선택하는 숭고한 순간에, 카메라는 악마에 잠시 사로잡히는 공포와 측은함이 반씩 뒤섞여 있는 '카라스의 표정'을 포착한다. 이때 카라스는 악마가 되지 않으려 창문으로 뛰어내리고야 만다. 프리드킨은 이 영화가 각자의 슬픔을 이겨내는 이야기라고 이야기한다. 카라스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죄의식과 트라우마를 견디는 이야기이며, 리건은 크리스의 이혼으로 인한 슬픔을 이겨내고자 한다. 모든 세대가 각자의 슬픔을 지니고 있더라도 이것이 다가올 신세대를 막을 수 있는 이유는 아니다. 이 영화는 이러한 운명이 되풀이될 것이라는 암시를 형사를 통해서 남긴다. 또 다른 악마가 우리 곁으로 다가오리라는 암시로 말이다.

프리드킨은 이 결말을 〈소서러〉에서도 비슷하게 반복한다. 그는 인간이 운명의 굴레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운명을 긍정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로 다가온다. 이는 프리드킨이 일직선으로 사건을 그려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저항할 수 없다. 프루스트 마니아인 감독은 사뮈엘 베케트의 프루스트 비평을 빌려서 "인간이 시간의 희생자"라는 것을 강조한다. 대신에 그는 염세주의에 침잠하지 않는다. 다가올 운명에 이길 수는 없을지라도, 그것에 각자 최선의 방식으로 저항하려는 인간의 윤리를 포착하고자 애쓴다.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이 영화는 미래에 품은 무한한 불안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숭고한 운명을 보게끔 한다. 카라스의 얼굴만큼이나 이를 잘 드러내는 이미지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엑소시스트〉는 비록 악마가 우리의 미래일지라도, 우리가 가능한 최선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가장 낙관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인 셈이다.

[글 김경수, rohmereric123@ccoart.com]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엑소시스트: 디렉터스 컷
The Exorcist
감독
윌리엄 프리드킨
William Friedkin

 

출연
엘렌 버스틴
Ellen Burstyn
막스 폰 시도우Max Von Sydow
리 J. 콥Lee J. Cobb
키티 윈Kitty Winn
잭 맥고란Jack MacGowran
제이슨 밀러Jason Miller
린다 블레어Linda Blair

 

수입|배급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작연도 1973
상영시간 131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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