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th BIFF] '노바디즈 히어로' 편집증 환자들의 술래잡기
[27th BIFF] '노바디즈 히어로' 편집증 환자들의 술래잡기
  • 이지영
  • 승인 2022.11.16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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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포비아와 환상을 전복하지 못한 산발적인 블랙 유머들"
영화 <노바디즈 히어로> ⓒ 부산국제영화제

지난 2022년 9월 22일,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 테러 용의자 2명에 대한 항소심이 열리면서 최근 프랑스에서도 테러와 관련된 논의가 다시 뜨겁게 일고 있다. 2011년부터 2018년까지 파리 담당 검사로서 대테러 수사를 총괄했던 프랑수아 몰랭(François Molins)은 「꼬띠디앙」(Quotidien)의 인터뷰에서 "공판을 촬영(Filmer)할 필요성이 있냐"는 패널의 질문에 찬성을 표하며 후세대에게 남겨질 중요한 기록이자 교훈이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어 그는 "테러는 스펙터클 공연이나, 연극이 아니다"라고 단언하며 미디어에서 비치는 테러 공격은 우리가 엄연히 맞닥뜨린 현실이고, 가공되지 않은 진실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2015년을 돌이켜보면 프랑스 정부는 시민들이 테러 상황에 대한 경각심을 갖도록 파리 시내에서 액션 영화 촬영을 금하기도 했다. 테러 뉴스 보도를 보면서 이들은 매번 각성해야만 했다. '이것은 절대로 영화가 아니다. 이것은 실제다.'

파리 테러 이후, 여러 이데올로기와 사회학적인 해석들이 난무했다. 언론의 자유라는 가치의 수호, 프랑스의 애국주의와 보수주의의 대두, 유대인을 대상으로 자행된 범죄와 공권력에 대한 도전 같은 사회 문제들, 프랑스의 시리아 침공에 대해 치른 대가라는 급진 좌파 이데올로기까지… 논의들이 한꺼번에 급물살을 타는 가운데, 집단 트라우마를 블랙 유머의 소재로 쓴다는 것은 영화 미학에서조차도 터부시 되는 듯했다. <프랑스 대테러>(2015) 같은 미스터리한 극 영화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11월 13일: 파리 테러 그 이후>(2018)와 같이 사뭇 진지한 톤의 영화들이 연이어 제작된 것은 이 때문일까? 2015년 샤를리 엡도 테러와 바타클랑 테러, 2016년 니스 테러까지. 잊을 만하면 고통스럽게 재발하는 일련의 참사 이후, 일상은 절대로 이전과 같아질 수 없었다.  그럼에도 수십, 수백 명의 참사를 목격하고도 살아남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을 영위해야 했다.

주류 영화계를 선동하고 도발해온 프랑스의 시네아스트 알랭 기로디(Alain Guirodie)의 최대의 문제작이자, 대표작 <호수의 이방인>(2013)의 주인공 프랑크는 호수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과 관련된 경찰 조사를 받다가 이렇게 말한다.

"그런 일(살인)이 일어났더라도 계속 살아가야 하지 않나요?"

테러는 일어났지만, 중산층 시민들은 경제 활동을 계속하고 스스로를 부양하는 수밖에 없다. 이들은 평상시와 똑같이 운동을 하고, 직장에 출근하고, 길거리에서 낯선 이를 유혹한다. 비극은 어느 시대나 존재했지만, 2010년대 이후, 특히 2015년에 샤를리 엡도 테러가 일어났을 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스마트폰의 보급이 전면화되었다는 점이다. 학살 현장을 가까이서 묘사하는, 날 것의 증거 자료들이 소셜 미디어에서 대홍수를 이루었고, 프랑스 국민들은 각자의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된 영상과 사진을 보면서, 타자의 눈과 귀가 되어 마치 현장에 있는 것처럼 집단 학살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올해 10월 말 이태원 참사를 맞닥뜨리고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를 앓고 있는 한국인들의 처지와도 다를 바 없다.

 

영화 <노바디즈 히어로> ⓒ 부산국제영화제

기로디의 신작 <노바디즈 히어로>(2022)는 테러 공격 이후에 프랑스 사회와 소시민의 일상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온전히 집중하며 사건 자체로부터 거리 두기를 시도하는 블랙 코미디이다. 영화는, 블랙 코미디에 잘 어울리는 한적한 무채색의 지방 도시 클레르 몽페랑(Clermont-Ferrand)에서 촬영되었는데, 이 도시의 전경을 배경으로 하는 오프닝은 레오 카락스(Leos Carax)식으로 '소년, 소녀를 만나다'(Boy Meets Girl)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메데릭(장-샤를 클리셰)은 동네를 조깅하던 중, 50대 이상의 매춘부로 추정되는 이사도라(노에미 르보브스키)를 만나고 불현듯 그녀에게 성욕을 느낀다. 그리고 그녀에게 아무런 대가 없는 잠자리를 제안한다. 이사도라는 몇 번의 거절 끝에 결국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윽고 한 호텔에서 완전히 전시된 두 인물의 육체에 포커스를 맞추어 유희적인 정사가 이어지던 도중에, TV에서 클레르 몽페랑의 테러리스트 공격이 보도되면서 이들의 행위는 잠시 지연된다. 그리고 이사도라의 남편 제라르(르노 루텐)이 아내를 찾으러 오면서 섹스는 완전히 종결된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던 메데릭에게 부랑자인 무슬림 청년 셀림(일리스 카드리)이 접근하고, 돈을 구걸하고, 비를 피할 공간을 부탁하다가 끝내는 메데릭의 아파트와 그의 거실에까지 들어온다.

<호수의 이방인>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욕망을 시네마의 관습에서 해방시키고, 절대적인 타자성, 그리고 인간 본연의 고독을 그린 기념비적인 성취였다. 이제 <노바디즈 히어로>에서 기로디는 테러 공격 이후 프랑스 중산층에 만연한 편집증과 이슬람포비아를 주제로 건드리며, 셀림이라는 인물의 '타자성'을 다시금 강조한다. 셀림은 주변에 흔히 보이지만, 어느 때고 지하디스트로 돌변할 수 있는 유럽 이민자 계층 청년을 대표하는 얼굴이자 현현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아기 바구니에 담겨 강가로 떠내려온 '이집트 왕자'처럼 취약하고 결백해 보이기도 하고, 온갖 페티시와 주변 여자들(어쩌면 남자들까지)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가 이슬람식 금욕을 깨고 섹스를 하면 급진주의에 빠지거나 일탈을 하지 않을 것이란 어처구니없는 대화는, 안보에 대한 불안감과 각자의 욕망이 섞인 끔찍한 혼연체다. 이와 같은 영화의 기조는 유럽 사회에 여전히 만연한 이슬람 문화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꼬집는다.

 

영화 <노바디즈 히어로> ⓒ 부산국제영화제

<호수의 이방인>에서 이들은 모두 노동 계급에(프랑크는 과일 파는 행상이었고, 앙리는 벌목꾼으로 나온다), 평등하게 벌거벗은 채 서로를 욕망하고 관음한다. 이때 개인의 섹슈얼리티 정도에 따라서 자유롭게 연애를 할 수 있다는 소위 빈익빈 부익부의 격차가 생길 뿐이다. 반면 <노바디즈 히어로>의 캐리커처 스타일의 인물들은 인종과 계층에 대한 다양한 편견을 자극하는 '코스튬'을 입고 등장한다. 메데릭은 건강을 염려하는 성실한 IT 종사자가 입을 법한 조깅 옷을, 이사도라는 화류계 여인임을 과시하는 듯한 붉은 계열의 옷을 입는다. 그녀는 나중에 제라르의 추적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르카(눈 부위를 제외한 전신을 덮는 이슬람 여성 복장)를 두르기도 한다. 이것은 겉치레 포장일 뿐 이면에는 대부분 본능과 충동이 작용하고 있다는 아이러니는, 영화 내내 아슬아슬한 경계를 타며 불편한 웃음을 자극한다.

셀림은 다른 누구보다도 평범하고 허름한 옷을 입었음에도, 은유적으로 벌거벗겨진다. 메데릭은 그가 테러 용의자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이메일을 해킹하여 그의 실체를 파악하려 한다. 이것은 마치 그의 옷을 강제로 벗기고, 실체를 드러내도록 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메데릭과 셀림 사이의 위계가 성립한다. 메데릭이 발견한 지하디스트 사이트의 이미지와 영상은 어느 정도 힌트를 줄 수는 있으나, 여전히 셀림이 용의자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주지 못한다. 불안이 도진 메데릭은 급기야 셀림이 지하디스트 일원이라는 꿈을 꾼다. 기로디는, 무의식의 기저에 깔린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이것을 인종차별이라고 불러야 할까?)을 프로이트적으로 발현시킨다. 이를 통해 강조되는 것은 메데릭의 반영웅, 아니 비-영웅의 특성이다. 그는 누구의 영웅도 아니다. 앞서 이사도라에게는 자신이 매춘을 반대한다면서 사실은 매춘부를 욕망했고, 흑인이며 무슬림 중학생 소녀가 일하는 매춘 장소에 드나들면서 윤리 불감증과 자기기만을 보여준다. 그리고 억압받는 이사도라를 구해내겠다는 보잘것없는 기사도 정신과 남성성은, 폭력이 난무하는 비열한 거리에서 (제라르와 아랍계 청년들에게 무자비하게 짓밟힌다.

사랑에 있어서도 부르주아의 편집증은 예외 없이 발견된다. 이사도라와 제라르의 관계는 루이스 부뉴엘(Luis Buñuel)의 1967년 작 <세브린느(Belle de Jour)>를 거꾸로 뒤집는 내러티브다. 이사도라는 남편에게 공식 허락을 받은 매춘부이고, 대신에 다른 남자와 플라토닉한 사랑을 나누는 것을 엄격히 금지당한다.(제라르는 스마트폰으로 이사도라를 추적해서 어디에서나 갑자기 튀어나온다) 세브린느의 꿈에 나타나는 사도-마조히즘적 페티시는 <노바디즈 히어로>의 현실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다. 이사도라는 끊임없이 끓어오르는 성욕을 해소하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브린느처럼 정신적인 만족을 끝내 얻을 수 없다. 종국에는 세브린느의 욕망이 점차 해소되면서, 정숙한 부르주아 부인으로 돌아와 그녀의 남편에게 봉사하는 장면으로 부뉴엘의 영화는 끝이 난다. 반대로 이사도라의 충족되지 않는 욕망으로 인해, 소위 제라르의 '정신적인 사랑' (실은 자기중심적이고 도착적인)은 영영 충족되지 못한다.

 

영화 <노바디즈 히어로> ⓒ 부산국제영화제

<노바디즈 히어로>의 캐릭터는 모두가 하나같이 욕구불만을 앓는다. 하다못해 주인공 메데릭 조차 단 한번도 쾌락의 절정에 이르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늘 소외된다. 이는 <호수의 이방인>의 게이들이 쾌락을 탐하며 절정에 이르는, 시네마에서 극히 보기 힘든 도발적인 시퀀스들에 대한 정반대의 도치로 보인다. 메데릭이 이사도라를 찾아가 성관계를 맺기까지 부단히 노력할 때마다 사회와 개인의 간섭과 중지가 계속된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를 쫓고 쫓기며 전체 스토리를 추동한다. 하나 더, 욕구불만에 이어 관음증적인 욕망도 이 영화에서는 충족되지 못한다. 마르지 않는 욕망의 샘 같은 이사도라와, '욕망의 모호한 대상'인 셀림의 정사 장면은 프레임을 밖으로 벗어나고, 이사도라의 과장된 신음으로 대체된다.

<호수의 이방인>에서 평온한 일상에 갑작스레 끼어들어 긴장을 만들어내는 것은 다름 아닌 경찰이다. '당신들의 사랑 방법은 이상하다' 또는 '살해당한 사람이 마지막에 얼마나 고독했을지 상상해보았는가? 당신도 똑같이 동성애 혐오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는데, 그것이 두렵지 않은가?' 이런 식의 이상한 조서 질문은 아마도 초자아적인 자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인물이 무참히 살해당한 후, 포식자(미셸)조차도 떠나자 정적과 고독만이 남는다. 그렇다면 <노바디즈 히어로>에서는? 호수라는 원시의 공간을 뒤흔드는 벼락같은 물음도, 진실을 발설하고 정의를 되찾으려다 희생되는 대속(앙리의 죽음)도, 초자아(경찰)의 죽음도 없다. 인물들은 스스로를 구하려 하지 않고, 이 술래잡기는 중학생 소녀인 샤를렌(미벡 파카)이 가볍게 바통터치하듯 술래가 되어 욕망의 대상(셀림)을 쫓아가는 숏으로 끝이 난다.

누구든 공평하게 타자(셀림)의 위치에 설 수 있다는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 또한 영화에는 없다. 이웃 사회가 열렬한 토론을 통해 셀림에 대해 내린 합의는, 아파트 계단이 상징하는 바처럼 위계를 담보로 베푸는 동정과 연민, 구원자라는 자기도취와 나르시시즘, 인종차별적인 페티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런 방식의 블랙유머는 집단 트라우마의 기억으로부터 거리를 확보할지언정, 영화가 비판하고자 하는 이슬람포비아의 근간을 뒤흔들지 못한다. 그 자리는 허무로 가득한 냉소만이 남을 뿐이다. 사회를 향한 산발적인, 그러나 예리하지 못한 헛발질, 이는 정작 유럽 사회가 당면한 이슬람포비아에 공모하는 것은 아닐까.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 영화 <노바디즈 히어로> 포스터

노바디즈 히어로
Nobody′s Hero
감독
알랭 기로디
Alain GUIRAUDIE

 

출연
장-찰스 클리셰
Jean-Charles Clichet
노에미 르보브스키Noemie Lvovsky
미셸 마시로Michel Masiero
일리에스 카드리Ilies Kadri
도리아 틸리어Doria Tillier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99분
공개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2022.10.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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