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띵 윌 체인지' 조별 과제 PPT와 영화 사이의 어딘가
'에브리띵 윌 체인지' 조별 과제 PPT와 영화 사이의 어딘가
  • 김경수
  • 승인 2022.11.1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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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학 조별 과제를 굳이 극장에서 봐야 할 이유가 있을까"

어떤 영화는 지나칠 정도로 정직하고 투박해서 가치가 있다. 마튼 페르지엘의 <에브리띵 윌 체인지>(2022)의 첫인상을 이리 설명해 볼 수 있겠다. 올해 제5회 서울동물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이 영화는 독일의 거장 빔 벤더스가 출연한 것으로 화제를 모았고, 영화제가 끝난 후 곧장 개봉했다.

<에브리띵 윌 체인지>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기후 위기로 인해서 생태계가 파괴되고, 메타버스와 일상의 경계가 무너진 2054년, 골동품 마니아 벤, 피니, 체리는 단골 골동품 가게에서 비치 보이스 앨범을 발견한다. 셋은 앨범 표지에 있는 기린을 처음 보고 놀란다. 기린은 이미 멸종되어서 검색해도 나타나지 않으며, 골동품 가게 노인의 비디오테이프 안에서만 있는 상상의 동물이기 때문. 노인이 빌려준 비디오테이프로 동물 다큐멘터리를 본 그들은 멸종된 동물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을 물색한다. 그러던 와중에 어떤 여성이 와서는 멸종된 새에 관련된 책을 건네주고는 지도를 하나 남기고 떠난다. 벤과 피니는 막 취업한 체리를 남겨두고 지도를 따라서 여정을 떠나며, 지도에 있는 연구소에서 멸종한 생명체들을 아키이빙한 자료들을 발견한다. 그들은 멸종된 생명체와 기후 위기의 진상을 기억하는 과학자를 물색해 그들을 인터뷰하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며 2020년대만 하더라도 멀쩡했던 자연의 경이로움에 눈뜨게 된다. 벤과 피니는 체리에게 수집한 자료를 전해주고는 방송국을 해킹해 그것을 송출할 계획을 세운다. 방송국을 해킹하는 데에 성공하지만, 대중이 환경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본 셋은 절망하기에 이른다. 갖은 애를 써 해결책을 물색한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장치가 과거로 데이터를 송출할 수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그들의 여정을 담은 영화를 2022년에 송출한다.

<에브리띵 윌 체인지>은 그들이 송출한 영화이기도 하다.

 

ⓒ 안다미로

<에브리띵 윌 체인지>는 지구상 생명체가 모두 사라진 2054년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SF로 보이지만, 장르적인 설정은 생태 다양성이 사라지는 2020년대를 반추하는 거울로 쓰인다. 이는 전혀 세련된 어법이 아니며, 오히려 고전적인 SF에 가깝다. 쥘 베른과 H.G.웰즈 등 초기 SF 거장들이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의 모순을 포착하려 미래의 시공간을 상상했듯이 이 영화도 비슷한 설정을 공유한다. 이는 장르적 설정을 미래를 온전히 상상하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패러디하는 수단으로 쓰는 것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픽션이 '마치 ~인 것'의 가상을 상상한다면, 패러디는 '너무 ~한 것'의 현실을 재현한다고 보았다.

마튼 페지엘 감독이 그리는 2053년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별 다를 바 없다. 줌 회의가 일상화되고, 모두가 인터넷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으려 하며, 가짜 뉴스와 조작된 데이터가 일상화된 시대다. 진실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자연과의 접촉이 사라진다는 문제의식은 현실의 패러디를 자처한 아담 맥케이의 <돈 룩 업>(2021) 등이 훨씬 세련된 방식으로 그려냈으므로 '과연 지금 이 영화를 굳이 볼 필요가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돈 룩 업>은 웃기기라도 하지만 이 영화는 시종일관 이미 옛것에 불과해진 진정성에 호소한다. 백 년 전에는 이러한 장르 문법이 유효했을지 몰라도 지금 유효한지는 의문이 생긴다. 게다가 지금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서 환경 보호를 실천해야만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계몽의식은 이 영화를 1시간 반짜리 캠페인으로 보이게 만든다. SF를 기대했던 입장에서는 더없이 실망스럽다.

무엇보다 미국 작가 앨런 와이즈먼의 『인간 없는 세계』와 같이 인간 없는 세계를 치밀하게 다루는 서사를 상상한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화법이 진부한 것까지는 참을 만하지만, 이야기까지 고루한 것이 영화의 결점이다. 너드(nerd) 셋이 기후 위기에 관련한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자연을 이해하고 각성한다는 설정은 어린이 교육만화의 플롯에 가깝다. 물론, 이러한 콘텐츠만의 진정성과 미덕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어린이가 아니라 대학생 또래의 청년이 한다는 것이다. 둘 이상의 사람이 각자 역할을 정해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따른 자료를 수집하고, 그것을 관객에게 송출하는 과정은 대학교 교양수업에서 PPT를 발표하는 과정과 놀라우리만치 똑같다. 형식마저 챕터 별로 나뉘어 PPT를 연상하게 한다. 대학 조별 과제가 끔찍한 경험으로 밈화되는 한국에서 조별 과제를 해가는 과정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영화가 얼마나 매력을 발할지는 미지수다. 생태학의 이해 교양강의 조별 과제를 굳이 영화관에서 보아야만 할 이유가 있을까.

 

ⓒ 안다미로

물론, <에브리띵 윌 비 오케이>는 이러한 필연적인 결점을 실험정신이 가득한 형식으로 극복하려고 한다. 다큐와 픽션, 애니메이션을 오가며 생태 다양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관객의 뇌리에 새기려고 애쓴다. 그러나 자칫 매력적일 수 있던 장르의 교차는 감독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전면에 드러나면서부터 균형을 상실해간다. 이야기가 허술하고 대사가 진부한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픽션과 다큐가 반씩 진행되던 초반을 지나서 중후반에 다다를수록 과학자들의 인터뷰와 자료화면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시작한다. 진행되어야 할 플롯은 계속 삐걱거리고 멈춘다. 캐릭터가 지녀야 할 감정선은 사라지고 자연이 사라지고 있으므로 하루라도 빨리 재야생화(rewilding)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인터뷰 속 과학자들의 감정선이 그 빈자리를 대신한다. 이때부터 픽션은 다큐를 틀기 위한 도구로 쓰이기 시작하며, 픽션의 힘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 감독의 자의식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 다큐와 픽션이 역전된다. 셋은 방송국을 해킹하는 데에 성공하지만, 대중의 무관심을 몸소 경험하고는 낭패감에 빠진다. 그들이 인간은 원래 악하다고 좌절할 즈음에 감독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는 순간을 담은 자료화면을 십 분 가까이 나열한다. 기린이 총살당하고, 동물의 터전은 불탄다. 이러한 과장은 오히려 환경이 파괴당하는 현장을 염세적인 감정과 동일시하면서, 환경을 스펙터클로 쓰고 있다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다. 다만, 이야기 속 이야기로 삽입된 애니메이션 시퀀스만은 감동적이다. 감독은 우주선이 망가져 우주에 갇힌 두 우주인이 녹음기에 녹음된 새의 소리를 듣고는 스스로가 인간임을 인지하고 버텼다는 이야기를 차분히 전달해 비인간과 인간의 공존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드러낸다. 감독이 픽션을 유일하게 신뢰하는 순간이어서 영화 전반에 있는 투박하고 거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에서만큼은 마음이 움직였다.

 

ⓒ 안다미로

<에브리띵 윌 비 오케이>의 미덕은 이 영화가 온전히 동화라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화책을 낭독하는 노인 여성 나레이터를 통해서 구전 동화를 듣는 듯한 효과를 자아내는데, (이 선택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조별 과제하는 대학생이 영웅으로 거듭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한껏 부풀리며 관객에게 어떠한 이야기가 생기는지 호기심을 느끼게 하는 장치로는 효과적이다. 아마 이러한 장치로 인해서 평범한 이야기에 관객을 몰입시킬 수 있었을 터다. 또한, 이러한 장치가 주제의식으로도 이어진다는 데에서 눈여겨 볼만한 점이 생긴다. 영화는 그 아무도 환경 영화를 보지 않을 것이라는 상황을 묘사해, 이 영화가 실패할 것이라는 절망감을 드러낸다. 해결책이 없는 상황에 던져진 세 주인공이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순간에 나레이션이 개입해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다 동화'라는 것을 알리고 급작스럽게 사건을 해결한다. 과거로 지금까지의 영화를 송출하는 장치가 있다는 설정으로 말이다.

이때 감독은 모든 것이 동화에 불과하다는 설정을 쓰지 않고는 무엇도 절대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극단적인 염세주의로 다다르고야 만다. 어쩌면 신적인 존재가 개입해야만 환경이 변할 수 있다는 절망감이야말로 이 영화의 진짜 주제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끝날 즈음에 벤과 피니, 체리의 활약으로 인해서 미래를 나열하며, 세상이 어떻게 변할 것이라 예견하지만 거기에는 인과가 서술되어 있지 않다.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미래는 공허한 나열에 불과해진다.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무조건적인 희망은 역설적으로 그 무엇도 변할 수 없다는 무조건적인 절망감을 드러낸다. 감독은 분명 희망 어린 미래를 말하려 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대책 없는 희망을 말하기에 성공한다. 이 영화야말로 기후 위기론자들의 염세주의와 우울을 그 어떤 영화보다도 잘 드러내고 있어서다.

[글 김경수, rohmereric123@ccoart.com]

 

ⓒ 안다미로

에브리띵 윌 체인지
EVERYTHING WILL CHANGE
감독
마튼 페지엘
Marten Persiel

 

출연
노아 자베드라
Noah Saavedra
제사민-블리스 벨Jessamine-Bliss Bell
폴 G. 레이몬드Paul G. Raymond
비베케 하스트룹Vibeke Hastrup
재클린 챈Jacqueline Chan

 

배급|수입 안다미로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92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2.11.09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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