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감정을 그리며, 모두의 마음에 다가가고 싶다"
[interview] "감정을 그리며, 모두의 마음에 다가가고 싶다"
  • 홍상현
  • 승인 2022.11.2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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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 <플랜 75> 하야카와 치에 감독
「플랜 75」는 사진 속 요코로 대표되는 ‘시스템 쪽’사람들의 얼굴 또한 보여줌으로써 단편버전과 전혀 다른 가치와 무게감을 획득한다. (C)2022 Plan 75 Film Partners
「플랜 75」는 사진 속 요코로 대표되는 '시스템 쪽' 사람들의 얼굴 또한 보여줌으로써 단편버전과 전혀 다른 가치와 무게감을 획득한다. (C)2022 Plan 75 Film Partners

자연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나는 그 자연을 등지고 고리타분하고 아무쓸데도 없는 학문 속에만 빠져서 살았으니 이제는 그만 거기서 해방이 되고 싶다. 죽음이 아니다. 그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자연 속에서 살고 싶다.

 

나한테 생의 의욕을 줄 자는 누구든지 와라. 내 무엇이든지 지불을 하고 그것을 사시라. 누구든지 와라. 무엇이든지 주리라. 내게 살 의욕을 주는 자가 있으면 내 영혼이라도 팔리라. 나는 이제는 그만 이 비좁은 방에서 정처 없는 학문의 방랑을 더 이상은 하지 않으리라. 누구든 와라. 어서 와라.

세대를 뛰어넘는 존재감으로 '문호' 호칭마저 구태의연하게 느껴지는 괴테가 신문학을 접하던 시절부터 여든 두 살에 생을 마차기까지 60년 세월을 들여 완성한 1만 2111행 분량의 극시(dramatic verse) <파우스트>의 초반부 모놀로그를 지금도 기억한다.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종교적인, 이 세계문화유산의 한 대목은 필자가 배우를 꿈꾸던 시절 연기연습의 단골 텍스트였다. 스타일이야 번역ㆍ출판된 단행본과 조금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소극장문화의 발흥기에 극단 대표이자 극작가로도 활약했던 연출가 이재현의 각색 덕분에 대사가 입에 착 붙어서다.

내용은 작품의 앞부분에서 주인공 파우스트가 토로하는 현세적인 인간한계에 대한 환멸과 관념적인 학문세계에 대한 회의. 말이 끝나자마자 등장하는 건 '슈퍼 빌런' 메피스토펠레스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독백에서 회한뿐 아니라 늙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정서가 읽힌다. 일반적인 해석에서처럼 '땅 위의 쾌락에 빠지고 싶은 애욕과 천국에 올라가고 싶은 영생에 대한 기원' 정도로 양분할 수 없는 문제. 만약 그렇다면 인용한 부분에서 자연이라는 키워드가 몇 번이나 등장하진 않았겠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파우스트가 서재에서 걸어 나가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을 테니 말이다. 어떤 여성이든 헬레네처럼 보이게 하며 주인공에게 생물학적 젊음을 돌려주는 마녀의 물약도 불필요했을 테다. 그러니 다소 비약을 곁들여 보면 <파우스트>의 타이틀 롤에게 가장 큰 '이슈'는 바로 '늙음(Ạltern)'아니었을까.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첫 단편 「나이아가라」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의 영화제와 인연을 맺었다. (C)2022 Plan 75 Film Partners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첫 단편 「나이아가라」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의 영화제와 인연을 맺었다. (C)2022 Plan 75 Film Partners

2014년 단편 <나이아가라>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한국과 인연을 맺은 후,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총괄 제작을 맡아 화제가 된 옴니버스 프로젝트 <10년>의 제작에 <플랜 75>로 참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고, 올해는 이를 장편화한 동명 타이틀 장편 상업영화로 칸영화제(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특별언급)를 거쳐 다시 부산에 온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 하야카와 치에에게도 '늙음'의 문제는 괴테 못지않은 무게감을 갖는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지내던 78세의 카도야 미치(바이쇼 치에코 분)는 생물학적 연령 때문에 객실 청소원으로 일하던 호텔에서 해고당하고, 주거문제까지 겹쳐 고민을 거듭하다 '플랜 75(75세 이상 고령자를 대상으로 한 정부 주도의 안락사 프로그램. ※ 주)'에 지원하기에 이른다. 한편 시청의 '플랜 75' 신청창구에서 일하는 히로무(이소무라 하야토 분)와 '그날'까지 노인들을 지원하는 전화상담원 요코(카와이 유미 분), 그리고 딸의 힘에 수술비용 마련을 위해 플랜 75 참가자의 유품처리업무에 자원한 필리핀 여성이주동자 마리아(스테파니 아리안 분) 등 '시스템 측'에 서 있는 이들의 회의감도 점점 커져 가는데, 시시각각 모두의 숨을 조이며 다가오던 '그날'을 맞아 네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독신여성인 카도야 미치는 어느 날 갑자기 객실청소원으로 일하던 호텔에서 해고된다. 이유는 단 하나, ‘생물학적 연령’때문이다. (C)2022 Plan 75 Film Partners
독신여성인 카도야 미치는 어느 날 갑자기 객실청소원으로 일하던 호텔에서 해고된다. 이유는 단 하나, '생물학적 연령' 때문이다. (C)2022 Plan 75 Film Partners

홍상현

<10년>에 포함되어있던 동명 단편을 장편화해서 4년 만에 부산국제영화제에 돌아오셨습니다. 게다가 칸영화제(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특별언급)를 거쳐 심사위원까지 맡으셨으니 더 감회가 깊으실 것 같은데요.

하야카와 치에

그렇습니다. 너무 감회가 새롭네요.

말씀하신 <10년>의 킥오프 기자회견을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했거든요. 이듬해 아시아 프리미어 상영을 해주셨고. 뒤이어 이렇게 장편을 가지고 돌아오게 되니 참으로 기쁩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심사위원까지 맡겨주셨잖아요. 제안을 받았을 당시만 해도 제가 잘할 수 있을까 무척 긴장됐었거든요. 그런데 어제 같이 심사위원으로 선임된 한국의 윤가은 감독과 영화를 보고 토론을 하다 보니까 너무 즐거운 거예요. 항상 심사를 받기만 하는 쪽이었던 까닭에 영화를 만드신 분들의 마음을 좀 더 깊이 헤아릴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그분들께 죄송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한 작품, 한 작품 최선을 다해서 보고 싶어요.

 

홍상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최우수상 출신이실 정도로 한국영화와 인연이 깊으십니다. 다음은 '홍상현의 인터뷰'를 통해서 뵙는 분들께 늘 드리는 질문인데요. 원래 한국영화를 즐겨 보시나요? 좋아하시는 작품이나 감독, 배우 등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하야카와 치에

영화학교에서 처음 찍은 단편 <나이아가라>(2014)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게 벌써 8년 전이네요. 그 일로 큰 자신감을 얻었어요. 한국영화에 굉장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그 나라의, 게다가 규모도 대단히 크고 멋진 영화제에서 큰 상을 주신 거니까. 저 말고도 아직 학교에 다니고 계시는 감독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다른 작품을 볼수록 수준이 너무 달라 깜짝 놀랐고, 역으로 '내가 그랑프리를 받아도 되나'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한국영화 중에는 워낙 대단한 작품들이 많이 있는데, 거기에 끊임없이 혁신을 거듭하는 업계 분위까지 더해지다 보니 전제적으로 훌륭한 인재와 자본이 모이는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본이 배워야 할 점이 많죠.

아울러 저 자신, 한국영화의 비약적인 성장의 이유나 재능 있는 영화인들이 끊임없이 육성되고 있는 원인, 그런 인재들을 길러내는 영화교육의 내용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한국 감독에 대해서도 꼭 말씀드리고 싶네요. 이창동 감독님인데요. <밀양>(2007)하고 <버닝>(2018)을 몇 번이나 봤어요. (웃음)

 

‘플랜 75’는 고령자들을 대상으로 정부가 주도하는 안락사 프로그램. 사회복지사나 보험사직원처럼 보이는 지원인력의 가장 큰 임무는 사실 ‘이탈자를 막는 일’이다. (C)2022 Plan 75 Film Partners
'플랜 75'는 고령자들을 대상으로 정부가 주도하는 안락사 프로그램. 사회복지사나 보험사 직원처럼 보이는 지원인력의 가장 큰 임무는 사실 '이탈자를 막는 일'이다. (C)2022 Plan 75 Film Partners

홍상현

방금 언급하신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 <나이아가라>를 저도 봤었는데요. 돌이켜보면 그 작품도 고령화 문제를 다룬 것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주제에 특별하게 관심을 가지시게 된 계기가 궁금한데요.

하야카와 치에

아, <나이아가라>에 알츠하이머를 앓는 할머니가 나오기는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오히려 사회문제보다 '소리를 통해 상기되는 기억'이라는 주제에 주목했던 작품입니다. 그래서 장기수감 중인 주인공의 할아버지에게 보내기 위해 소리를 수집하는 간병인을 등장시켰고요. 당시만 해도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까닭에 말씀하신 부분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 보니 이성보단 감정적으로 어떤 걸 그리고 싶은지에 더 초점을 맞췄고.

그런데 이제는 좀 달라진 것 같아요. 특히 <플랜 75> 같은 경우, 일단 우리 사회에 대한 분노를 영화로 어떻게 그려나갈까 하는 게 출발점이었으니 <나이아가라>를 만들었을 때와는 접근이 전혀 달랐거든요.

 

홍상현

TV방송 분야에서 사회생활을 하시다가 미국에서 출산, 귀국하신 뒤,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영화감독 데뷔를 준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영화에 대해 그렇게까지 절실한 마음을 갖게 되신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하야카와 치에

처음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한 건 중학생 무렵인데, 그 한 걸음을 내디딜 수가 없었어요. 미국에서도 원래 영화학과에 들어갔다가 도중에 사진학과로 옮겼고요. 무척 이른 시기부터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행동을 취할 수 없다 보니까 늦어진 거죠.

그렇다고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건 아닙니다. 좋아하는 일이었으니까. 언젠가 기회가 주어지면 꼭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지요. 그러다 삼십 대에 접어드니까 이러다 정말 아무것도 안 되겠다는 게 실감이 가기 시작하더라고요. 순식간에 나이를 먹어 그대로 삶을 마친다는 게 너무 싫기도 했고요. 그래서 결국 야간 영화학교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미치는 길거리에 나앉게 되는 최악의 사태를 피해보려 안간힘을 쓰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C)2022 Plan 75 Film Partners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미치는 길거리에 나앉게 되는 최악의 사태를 피해보려 안간힘을 쓰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C)2022 Plan 75 Film Partners

홍상현

<플랜 75>를 장편화하면서 어떤 부분에 가장 힘을 기울이셨나요.

하야카와 치에

단편 때는 아무래도 분량이 길지 않으니까 문제제기를 하는 수준에서 끝을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러닝 타임 두 시간짜리 영화에서는 그게 힘들잖아요. 게다가 시나리오를 개발하는 동안 코로나 19 사태가 일어났는데 온 세상이 불안에 휩싸이고 현실이 이렇게 힘든 와중에 사람들을 불안하게만 만들 영화를 과연 만들어야 할지 무척 망설여지더라고요.

 

홍상현

아, 혹시 그래서 결말을 단편과 다른 방향으로 잡으셨던 건가요?

하야카와 치에

네. 뭔가 희망적인 내용을 전해드려야 될 필요가 있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결말부를 중심으로 내용을 계속 바꿔갔습니다. 원래 구상했던 결말은 지금보다 훨씬 어두웠고, 전체적으로 좀 무서운 느낌마저 들 정도였는데 그걸 바꾼 거죠.

 

홍상현

단편 버전이 단시 사회성이 강한 디스토피아 영화였다고 하면, 장편버전이 되면서는 여성영화로서의 특성이 강해진 느낌도 듭니다.

하야카와 치에

저는 영화를 통해 한 사람의 마음을 정성스럽게 그리고 싶어요. 그렇게 인간을 그리다 보면 사회도 인간의 배경인 까닭에 자연스레 그려질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아울러, 관객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어야 영화 속의 메시지도 좀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영화가, 이야기가 가진 힘도 바로 여기서 비롯되는 거 아닐까요?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를 만들더라도 그게 사람의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면 차라리 책 한 권을 읽는 편이 나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런 까닭에 영화를 통해 감정을 그려냄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필리핀 출신 여성이주노동자 마리아는 타인에게 무관심한 일본사회의 분위기와 대비되는 존재. 제3자의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역할을 한다. (C)2022 Plan 75 Film Partners
필리핀 출신 여성 이주노동자 마리아는 타인에게 무관심한 일본 사회의 분위기와 대비되는 존재. 제3자의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역할을 한다. (C)2022 Plan 75 Film Partners

홍상현

장편버전에서 추가된 인물 중에 단연 눈에 띄었던 건 역시 여성 이주노동자인 마리아 아닐까 합니다. 대단히 의미심장한 캐릭터 같은데요.

하야카와 치에

마리아는 필리핀에서 온 간병인이지요. 필리핀 사람들은 커뮤니티나 가족 간의 유대가 강하고 국민의 90퍼센트 이상이 그리스도교 신앙이라는 문화적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도 해서 타인을 돕는다든가 부모가 아이를 남다른 사랑으로 보살피는 문화에 익숙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외국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서로 깊이 연대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 오늘날의 일본과 상당히 대조적이죠. 일본 사람들의 경우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박관념 수준으로까지 발전해 있는지라 서로를 돕는 일에 생각 자체가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볼 때 타인에게 무관심한, 참으로 살기 힘든 환경에 대비되는 존재로서 필리핀 출신의 여성 이주노동자라는 캐릭터가 갖는 의미는 중요했습니다. 아울러 그의 눈에 비친 일본 사회의 모습도 그려보고 싶었고요.

 

홍상현

작품의 도입부와 클라이맥스, 그리고 특히 결말부에서 카메라가 주인공의 손에 포커스를 맞추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야카와 치에

주인공이 난간을 붙들고 서 있는 신 말씀이시군요. 각본상으로는 그 장면에서 바람이 굉장히 많이 부는 걸로 설정되어있는데, 막상 촬영을 할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웃음)

어쨌든 마치 바람에 날아가지 않으려는 듯 난간을 꽉 쥐고 있는 손을 통해 삶의 끈에 매달려, 다시 한 번 의지를 내비치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시스템 쪽’사람들은 프로그램 지원자들에게 끊임없이 ‘원하면 언제든 취소를 요청할 수 있다’고 강조하지만, 이후에 닥쳐올 현실은 더 잔인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그 말을 공허하게 만들어버린다. (C)2022 Plan 75 Film Partners
'시스템 쪽' 사람들은 프로그램 지원자들에게 끊임없이 '원하면 언제든 취소를 요청할 수 있다'고 강조하지만, 이후에 닥쳐올 현실은 더 잔인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그 말조차 공허하게 만들어버린다. (C)2022 Plan 75 Film Partners

홍상현

주연을 맡으신 바이쇼 치에코 배우의 연기가 닭살이 돋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배우 본인의 생물학적 연령도 있어 연기에 몰입하기가 더 쉬우셨을 거란 생각도 듭니다만, 감독님과의 의사소통도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하야카와 치에

바이쇼 배우는 정말 훌륭한 연기자이십니다. 이번 작품에서 제가 한 디렉션이란 그냥 사소한 부분을 수정한 것에 지나지 않아요. 다 합쳐도 두세 군데 정도나 될까요? 나머지는 거의 바이쇼 배우님이 준비해 오신 대로 촬영을 진행한 겁니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컷이 퍼스트 테이크로 OK를 받았고요.

시나리오만 읽어보면 '이 부분의 연기를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을까? 살짝만 어긋나도 정말 연기 같은 느낌이 들어서 보기 싫어질 수도 있는데'하는 걱정이 드는 부분이 있었는데, 바이쇼 배우님이 연기를 맡아주시면서 그런 문제가 말끔하게 해결됐어요. 이 배역에 대해서는 분명 바이쇼 배우님이 저보다 더 깊은 이해를 가지고 계셨을 거라 확신합니다.

 

홍상현

조연이지만 드라마의 반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아키코 역의 카와이 유미 배우도 인상 깊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연민을 표현하는 감독의 심리가 반영된 캐릭터 아닐까 싶었는데요.

하야카와 치에

카와이 배우와 이소무라 하야토 배우가 연기하는 히로무 역, 이 두 젊은 캐릭터는 모두 '플랜75'의 시스템 측에서 일하고 있죠. 원래는 아무런 의문도 없이 그저 주어진 임무를 다하려다가 노인들과 실제로 교류하게 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인간적인 감정을 품게 되고요. '이 사람을 죽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내가 관여하는 시스템에 얼마나 비인간적인가' 하는 것들 말이죠.

말씀처럼 아키코는 미치를 직접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그의 죽음에 대해 생생하게 느끼게 되잖아요. 이 두 젊은이가 얻는 깨달음이야말로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희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대단히 중요한 캐릭터예요.

 

영화가 단편버전과는 사뭇 다른 결말을 맞게 되는 데에는 코로나 19라는 미증유의 사태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C)2022 Plan 75 Film Partners
영화가 단편 버전과는 사뭇 다른 결말을 맞게 되는 데에는 코로나 19라는 미증유의 사태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C) 2022 Plan 75 Film Partners

홍상현

앞에서도 말씀을 나눴지만 결말을 단편과 다르게 설정해주셨던 것에 개인적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단편과 같은 방향으로 마무리가 되면 다 보고 나서 심정적으로 너무 힘들 것 같았거든요.

하야카와 치에

쉽게 갈등이 해결되거나 해피엔딩을 맞이하기 힘들 거라는 점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치가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건 사회적 압박에 짓눌린 것은 물론이거니와, 딱히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잖아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는 결말부에서 나타나는, 죽지 않겠다는 그녀의 결심에 큰 의미가 있을 거라 판단했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거대한 시스템에 어떤 저항도 없이 그저 순종하고 있을 뿐인 일본이라는 나라의 현실과 관련해서도 메시지를 전해줄 수 있고요. 아울러 마지막에 조금이나마 희망의 실마리를 보여드리고 싶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런 제 의도와는 다르게 일본 관객 분들 가운데서는 '이제 집도 없어지고, 수입도 없을 텐데 주인공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굉장히 어두운 결말 아니냐'는 견해를 보이시는 분도 계시기는 했어요. 물론 그런 한편으로 '나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이 났다'는 분들도 많이 계셔서 다행이었지만.

 

홍상현

연기력이 뛰어난 캐스트가 모여서 만든 작품인 만큼 촬영 중에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한 가지만 소개해주시지 않겠습니까?

하야카와 치에

마지막에 미치가 석양이 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을 꼭 찍고 싶었는데, 촬영기간이 하루밖에 남아있지 않았어요. 게다가 아침부터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흐리더라고요. 곤란한 노릇이었죠. 석양을 찍지 못하면 마지막 장면을 제대로 구성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촬영장으로 향하는 동안 점점 구름이 사라지더라고요. 일단 좋은 예감을 가지고 촬영장에 도착할 수 있었죠.

그리고는 말 그대로 거짓말 같은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벼랑 쪽을 향해 서계시던 바이쇼 배우가 모니터를 바라보며 헤드폰을 끼고 있던 저한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리기 시작하셨는데 엄청나게 신령한 분위기의 빛이 구름 사이로 나오더니 천천히 사라져 가는 거예요. 그 풍경 속에서 홀로 서계신 바이쇼 배우를 현장에 있던 모든 제작진들과 함께 주시하는데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 혼났습니다.

 

“영화가, 이야기가 가진 힘도 바로 여기서 비롯되는 거 아닐까요?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를 만들더라도 그게 사람의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면 차라리 책 한 권을 읽는 편이 나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런 까닭에 영화를 통해 감정을 그려냄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야카와 치에 감독의 말이다. (C)2022 Plan 75 Film Partners
"영화가, 이야기가 가진 힘도 바로 여기서 비롯되는 거 아닐까요?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를 만들더라도 그게 사람의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면 차라리 책 한 권을 읽는 편이 나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런 까닭에 영화를 통해 감정을 그려냄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야카와 치에 감독의 말이다. (C)2022 Plan 75 Film Partners

"<플랜 75>는 여백이 많은 영화예요. 어떤 분이 보시는지에 따라 굉장히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수용자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는 작품이지요.

한국에서도 고령화 문제가 심각하다고 들었고, 청년세대와 노인세대의 분단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기에 이 영화를 보시는 분들이 어떻게 느끼실지 무척 궁금합니다. 한국은 영화에 대한 열정이 아주 특별한 나라라고 생각해요. 나중에 부디 극장 개봉을 통해 뵙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 원고지 위에 연필로 꾹꾹 글자를 눌러쓰듯 신중하고 성의 있는 대답을 이어가는 '중량급 신인'과의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예의 잔잔한 미소가 번지는 표정과 함께 '영화를 완성한 게 올해 5월인데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긴, 첫 단편을 완성한 게 서른여덟 살 때, <10년>의 단편을 만든 게 마흔두 살 때, 그리고 더도 덜도 아닌 4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플랜 75>의 장편버전을 볼 수 있었다. 이제 다시 4년이 지나면 또 다른 멋진 작품을 볼 수 있을까. 살짝 욕심을 부려 본다. 아무쪼록 그 4년이 앞에 붙는 수식어가 '최소한'이 아니라 '최대한'이었으면 좋겠다고.

[인터뷰 홍상현, krpopper@ccoart.com]

홍상현
홍상현
《코아르》 운영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ㆍ일 양국 매체에 분석 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시미즈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 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 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주최 디지콘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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