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5] '탑' 자기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불가사의
[홍상수 #5] '탑' 자기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불가사의
  • 변해빈
  • 승인 2024.04.2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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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연결, 세상으로부터의 탈주, 세월의 무법자"

홍상수 영화에는 타이틀 시퀀스가 없다. 배우와 스태프의 이름이 화면 여백 위에 뜨는 구간이 존재하지만, 영화의 성격을 함축해 암시하는 타이틀 시퀀스의 역할을 해내기엔 충분하지 않다. 이름의 나열로만 이뤄진 홍상수의 오프닝 타이틀은 특정 캐릭터나 극의 전개를 알리는 예고이기보다 각 영화의 기원을 알리는 표식이다. 그는 <소설가의 영화>(2022)에서 '좋아하는 사람, 편안한 상태, 진짜인 것'을 영화와 실제의 경계를 허무는 조건 또는 실재를 영화로 옮기는 태도로 제시한 바 있다. 홍상수의 오프닝 타이틀은 '그(이름들)'로부터 영화가 시작되고 '그(이름들)'의 고유성이 곧 영화의 본질이므로 이는 '진짜'일 수밖에 없음을 가리킨다.

<탑>에도 타이틀 시퀀스는 없다. 하지만 존재한다고 간주해볼 만한 것이 있다. 바로 해옥(이혜영)의 대사다. 세속적 건물주이자 그것을 고상하게 포장해주는 디자이너이기도 한 해옥은 영화의 공간이자 자신의 건물 각 층을 오가며 세입자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는 당분간 대화의 하중을 해옥에게로 기울이며 그녀에게 특정 신을 이끄는 권한을 부여한다. 청자는 영화감독 병수(권해효)와 그의 딸 정수(박미소)이면서, 관객들이다. 이들이 '탑'의 순회를 한차례 마치면, 병수는 해옥의 대사를 타이틀 시퀀스로 삼은 듯이 건물 층을 오르내리며 각 세입자의 인격을 지닌 채 화면으로 섞여 든다.

그로 인해 극 중 영화감독으로 설정된 인물은 병수인데, <탑>의 영화감독처럼 기능하는 인물은 해옥으로 느껴진다. 영화의 촬영지는 탑의 외양을 갖춘 해옥의 건물이며, 병수는 다양한 층위를 오가며 그녀의 훌륭한 배우로서 변주한다.

 

ⓒ 영화제작전원사

고유성과 동일성 사이 저울질

그런데 해옥의 대사가 일종의 타이틀 시퀀스로 기능하므로, 오히려 <탑>에서 배우 권해효가 연기한 최소 하나에서 최대 네 명의 병수(들)의 구분은 명확해지기보다 혼란을 가중한다. 병수(들)에게 대입된 다중 인격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누구의 것으로, 또 몇 등분으로 분류해야 하는지 모호하다. 급기야 영화의 '진짜'를 구축하는 근원적 뿌리라던 '배우'의 고유성마저 동일한 이름과 외형, 같은 직업과 건물에 갇힌 캐릭터의 다중성으로 인해 우후죽순 뒤섞여버린다. 절대적으로는 자기 자신조차 스스로를 다 알지 못한다고 깨닫게 하는 홍상수의 영화는 많았지만, 배우와 캐릭터의 실존 자체부터 의심하게 한 경우는 드물다.

고유성과 동일성의 뒤섞임은 <풀잎들>(2018)에서 투신한 비리 교수(김명수)의 격분과 맥을 잇는다. 교수는 자신이 살아생전 얼마나 '고귀한 한 사람'이었는지 하소연하지만, 정작 그를 포함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존재는 도처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곱씹는 한 여자, 아름(김민희)에 의해 봉합된다. 그녀는 종일 만난 인연들의 대화 속에서 공통적으로 죽음을 읽어내고, 이들은 죽음 앞에서 한낱 비루하고 허망하며 태연한 태도로 매듭지어진다. 이들의 동일성은 그저 홍상수 영화에 반복 출연하는 배우들의 에너지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공통적으로 죽음을 겪는 '누구나'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며, 동등한 생애 앞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의 존엄성은 '고귀한 하나'로 회복된다.

<풀잎들>에서 인간들 사이 정박을 내는 죽음이 무언가를 다르게 보게 하는 조건이라면, <탑>은 인물의 실존부터 뒤흔든다. 병수(들)의 존재에 대한 영화의 서사적 구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경우의 수를 나열하고픈 충동을 유발한다. 그러나 <탑>에선 개별적인 자아와 타아의 구분부터가 공허하고, 한 인간의 내외부를 둘러싼 고유성과 동일성 사이의 저울질은 영화의 혼란한 구조 뒤에 가려진다. 영화 속 감독의 위치에 세워진 해옥은 딸 정수가 집 안팎에서의 병수의 모습에 격차가 있다는 이유로 그를 비난하자, 양쪽 모두 한 사람을 구성하는 부분에 불과하며 집 밖에서의 모습이 '진짜'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탑>의 '진짜' 감독인 홍상수는 인물(들)을 구성하는 공통분모를 느슨하게 쥐고선 몇 개의 세계를 맞물렸다가 시공간적 구분을 은연중에 이탈한다. 이러한 모호함과 풀리지 않는 의심이 비로소 무언가를 제대로 보게 하는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이다.

 

ⓒ 영화제작전원사

안팎으로 열리는 문

<탑>이 인물의 실존을 뒤흔들 때마다 화면에는 텅 비워진 공간이 등장한다. 인물들은 화면의 좌우 경계면을 일종의 문처럼 여기면서 대화 도중에 그 문을 열고 이동한다. 카메라는 프레임 아웃된 이들을 자신의 영역으로 포착하기 위해 패닝 하지 않으며, 피사체의 움직임을 따라 시공간을 이동하는 컷의 전환도 없다. 심지어 관객의 눈에만 보이는 이 텅 빈 화면들은 인물이 되돌아오기를 기다리기보다 화면 바깥의 목소리를 수용하면서 정확히 분간할 수 없는 '누군가'의 실존을 지속되게 한다. 이렇게 경계를 나누는 기준으로 인식되던 프레임은 각각의 세계를 공존하고 존재하게 만드는 문이거나 계단으로서 접촉면이 된다.

영화에서 프레임 인-아웃하는 대상의 이동을 목격하는 것은 흔하다. 여기서 <탑>은 그 움직임으로 이동성을 논하기보다 동시성을 보여준다. 병수가 연인 선희(송선미)의 귀가를 기다린다. 카메라는 병수의 뒤에서 그가 선희에게 문자 보내는 뒷모습을 포착한다. 문자의 내용은 병수의 목소리를 경유해 전해지는데, 그것이 배우가 모션과 함께 현장에서 내는 목소리인지, 기술적으로 덧입혀진 내레이션인지 구분이 불가하다. 이때까지는 어느 쪽이건 큰 문제가 없지만, 카메라와 배우가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어진 컷에서 병수가 침대에 모로 눕는다. 시간을 축내거나 속을 달래려는 심상인 듯한데, 머지않아 화면 바깥에서 안으로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온다. 하나는 선희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를 반기는 또 다른 병수 자신이다. 잠깐의 외출로 마음이 더 깊어진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듣던 병수는 "혼자가 속 편하다"라고 건조하게 호응한다. 단지 호응만으로 바깥의 목소리를 꿈 또는 상상이 아니라고 단언하긴 어렵지만, 이 육성은 적어도 각 목소리가 어디서부터 나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설명하는 데에 보조적으로 쓰인다.

위치와 방향이 모의적이던 직전의 문자 내용과 견주어보면, 후자의 상황은 이질적인 두 세계의 공존 가능성을 제기한다. 부연하면, 각 목소리는 특정한 공간을 점유하면서 공감각적인 심상을 일으킨다. 병수의 침실을 담은 프레임 너머의 세계는 카메라의 눈이 포괄하지 못했으나 배우 송선미와 권해효가 위치한 촬영 공간이며, 이 보이스오버는 화면 전반에 고르게 분포된 사운드가 아닌 방향성과 거리감의 계산된 일종의 건축화된 소리이다. 근접한 미래거나 동시적인 다중 세계의 사운드인 목소리는 마치 침실 내부 공간에 기이하게 놓인 의자 위의 냄비, 책장에 얹어둔 물병과 같이 의도된 착오 또는 부조화를 통해 실제 관객의 현실에서 작동하는 의식과 논리를 비튼다. 의식과 논리가 무너진 <탑>의 세계에서 혼자 남겨진 병수, 서로가 애틋한 병수-선희는 격리라기엔 공생하고, 유폐라기엔 소외를 유발하는 분신(分身)하기와 도플갱어 피하기의 눈치싸움을 벌인다. 그러므로 더 이상 '진짜'를 구축하는 기원은 프레임 바깥의 현실(배우와 제작진의 이름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해옥이 지적했던 '진짜'를 가르는 안팎의 차이란, 영화에 현실을 동원해도 무모해지는 것이다.

병수(들)가 프레임을 차지하는 대신 해옥은 이와 물리적 거리를 둔다. 세입자들의 문턱을 자유롭게 넘나들던 그녀는 건물의 구조물에 의해 가로막히거나 대화 도중 다른 공간으로 반복적으로 퇴장한다. 그에 반해 해옥이 공간을 디자인하는 다중 직업을 지녔다는 점과 그녀가 보수해야 하는 각 층의 구조적 결함이 동시다발적으로 세입자들의 불안과 불쾌한 감정, 어떤 미래를 결정짓는 재량권은 여전히 지속된다. 전후 관계를 고사하고 병수(들)가 타이틀 시퀀스와 같은 해옥의 대사에 들어맞는다면, 그녀의 소극성은 캐릭터와 감독 사이의 계산된 거리감에 비롯된 것이다. 영화 내부, 다중 세계를 품은 하나의 건물과 이를 관리하는 건물주는 영화 바깥의 현실을 재현한 풍경이다. 캐릭터들의 세상과 감독의 세계관의 맞물림은 한 편의 영화가 여러 자아의 시공간을 중첩시키고, 복수적 감각과 사건을 집합하면서, 그 속에서 개별적인 감정적 교감과 소외를 발굴한다는 것을 빼놓고 말해질 수 없다.

이로써 <탑>의 혼란 속에서 병수(들)의 고유성과 동일성은 자신을 타인의 삶 속에 침투시키거나 타인을 자기 세계의 일부로 유입하는 영화의 본질적 태도를 통해 설명된다. 누구를 가릴 것 없이 "(당신의) 말을 잘 듣겠다"라는 인물들의 영리하고도 절실한 피력은 이러한 상호관계의 적정 거리감에 대한 신호인 셈이다.

 

ⓒ 영화제작전원사

세월의 무게를 짊어진 한 남자(들)

선희는 병수의 영화 속 기록적인 말수에도 그것이 거슬리지 않으므로 그의 영화를 일상의 소음 삼아 틀어둔다고 말한다. 극 내부로의 진지한 몰입에 매진한다던 해옥과 달리 '깔깔거리며' 보게 된다는 선희의 감상법이 각별하다는 식의 분위기가 조성된 가운데, 해옥이 극의 바깥으로 잠시 물러나면서 병수와 선희 둘만 남겨진다. 해옥의 일시적 후퇴는 그녀의 유사 감독으로서의 역할과 어울렸을 때 몰입에의 엄격성을 느낌과 감정으로 풀어낸다. 병수와 선희에게 중요한 건 주어진 삶의 여건에서 발생하는 두려움과 겁이고, 그것을 느끼는 자신의 감응과 소회다. 잇따른 대화에서 병수가 어느 다큐에서 보았다던 화가의 '그림이 아닌' 그의 하루가 묻어난 얼굴, 곧 화가의 삶의 단면에서 받은 소감을 이야기한 것 역시 중요하다. 병수(들)의 영화도 대화 속에 섞여 언급되지만, 그 내용이나 함의를 직접적으로 노출하지 않는다. 영화를 업으로 하는 홍상수의 숱한 캐릭터가 반드시 그들과 관계된 '영화 속 영화'를 보여주거나 설명해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유달리 병수(들)가 우울한 업보를 실감하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영화의 불가사의한 구조와 형식에 가려지기 쉽지만 <탑>의 다면적 인격의 복수 출현은 '누군가'의 생애의 단면이 조립되는 일례에 성장담이자 이에 대한 회고이다.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남자(들), 혹은 자기 자신이 되어온 지난한 여로를 돌이키는 남자(들)의 이야기. 다시 말해 <탑>은 우리에게 영화라는 매체를 기틀 삼아, 어느 감독(들)의 '하루'와 그 속에서 업에 대한 두려움과 권태로 격상된 불확실성을 절감하게 한다. 병수(들)는 한창 잘 나가는 감독이건 한때 잘 나갔던 감독이건 하나같이 영화감독으로서의 성격을 잃은 채다. 이들은 회고전이나 참석하는 스스로의 처지를 비관하고 12편의 영화를 만들라는 신의 예언으로 애써 위로받으면서, 급기야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는 기별을 전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이야기가 드라마틱하고 역동적인가 하면, 그닥 유별나지도 않다. 굴곡이나 선명하다면 비극이라 덧붙이기라도 하겠으나 층계 별로 드러나는 단면적 사건은 죽음보다 심심하고 기이한 삶의 흔적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다지도 모호하고 고독한 병수(들)의 생애에 다가가고 멀어지기를 거듭하면서 잠정적인 물음들을 켜 낸다. 그리고 정말로 기이한 체험은 영화가 삶에 대한 해답을 구해내기보다 어떤 세월의 흐름을 무신경하게 느껴보게 만든다는 점이다.

홍상수는 병수(들)가 지닌 무언가, 예를 들면 재능과 능력, 재미와 사랑, 어떤 증험과 성취감을 한두 개씩 차감한다. (지니고 있던 무언가를 모조리 덜어낸 다음에야 '진짜' 자기 자신이 된다고 말하고 싶던 걸까?) 그런 다음 병수에게 남은 건 그 자신이자 비등하게 살아온 또는 살아가는 병수(들)의 전신이다. '탑'의 어느 층계를 시작과 끝으로 배치해도 무관할 테지만, 가벼운 몸짓으로 계단을 부지런히 오르내리던 병수(들)는 타임머신 같은 자동차 시동 한 번으로 영화의 시작점으로 되돌아간다. 물론 이 역시 구조적 위치상의 시작이므로, 그가 오프닝 시퀀스의 병수로 되돌아온 건지 그와 얼굴이 닮은 남자들의 인생을 일일이 살아보고 온 건지 알 수 없다. 그저 이 마지막 남자는 '누구나'로 살아본 것도 같고 '누구나'로 살아갈 수도 있다는 불가사의한 믿음을 준다.

병수(들)의 마지막에 관여하는 모든 것을 명명하기란 여전히 무모하지만, 단일하게 등장하는 '탑'의 전신(로우 앵글 샷)과 그와 조응하는 인물의 전신(풀 샷)은 '자신(들)'의 세월의 무게를 홀로 짊어진 듯한 기진함을 느껴지게도 한다. 하루를 온전히 소진했다던 어느 화가의 얼굴이 바로 이러할까. 모종의 세월을 생동하게 할 수도 모조리 무산시킬 수도 있는 힘을 지녔지만, 한편으론 그가 알아채지 못한 사이 훌쩍 자라버린 딸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볼 때의 애틋함과 아쉬움만이 선명하다. 여전히 어떤 '자신'으로 살아온 건지 살아가야 할지 무상한 스스로에 대한 감응을 대신해 한 번 더 태워지는 담배와 느릿한 기타 선율이 제멋대로 흐르던 세월을 간신히 붙잡는다. '탑'에 버티고 선 남자, 쓸쓸함과 안도감을 분간할 수 없는 표정, 좀처럼 믿음을 주지 않는 생애, 그 상태로 흘러버린 세월, 그럼에도 지속되는 삶. 우리는 누구로 태어나서 누구로 살다, 누구로 죽게 될 것인가. <탑>이 제기한 이 물음은 한편으론 덧없고 다시 말하면 무겁다.

[글 변해빈, limbohb@ccoart.com]

 

ⓒ 영화제작전원사


Walk Up
감독
홍상수
Sang-soo Hong

 

출연
권해효
이혜영
송선미
조윤희
박미소
신석호

 

제작 영화제작전원사
배급 영화제작전원사, 콘텐츠판다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97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2.11.03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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