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th BIFF] 'EO' 당나귀를 위한 나라는 없다
[27th BIFF] 'EO' 당나귀를 위한 나라는 없다
  • 김경수
  • 승인 2022.11.0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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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간의 시공간을 상상하려는 집념으로 만들어진 문제작"
ⓒ 부산국제영화제

"어떠한 사실을 알려면 상상해야 한다" 이 문장은 프랑스 미학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이 유대인이 아우슈비츠 내부에서 찍은 네 장의 사진을 다룬 책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의 도입부에 쓴 선언이다. 어떠한 이미지를 연구하고자 하는 이들은 사진에 드러나 있는 현상에 끝내 접근할 수 없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고집스러움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물론 맥락이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접근 불가능한 이미지를 마주하고 상상하려 하는 고집스러움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EO>를 이야기하는 데에도 이 문장을 그대로 인용할 수 있을 듯하다.

<EO>는 비-인간의 시공간을 상상하려는 집념으로 제작된 문제작이다. 2022년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은 이 작품은 당나귀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로, 로베르 브레송의 걸작 <당나귀 발타자르>(1966)를 독창적으로 재해석해 주목을 받았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당나귀 'EO'가 훌리건, 도축업자, 환경단체, 부자 등 온갖 인간군상을 마주하는 이야기지만, 플롯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브레송의 영화와 달리, 이 영화가 의도적으로 서사의 연결을 방해하고 소격효과를 자아내서다. 대신에 감독은 당나귀가 감각하고 있는 세계를 익숙한 영화 문법을 파괴하며 그려내고자 한다. 드론, AI로봇 등을 동원한 미디어아트와 영화를 횡단하는 연출로 우리가 지금껏 상상하지도 못한 시공간을 창조해내고, 혼돈의 한가운데에서 허우적거리게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만 <EO>가 왜 문제작인지 이야기하기 전에 이 영화가 재해석하고자 하는 영화를 앞서 설명해야만, 이 영화의 경이로운 점을 더 자세히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하다.

 

ⓒ 영화 <당나귀 발타자르>(1966) 스틸컷

<EO>의 원작이라고 할 수 있는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는 도스토옙스키의 장편소설 『백치』를 각색한 영화로, 성자와 닮아 있는 당나귀를 통해서 부조리한 인간군상을 보고자 한다. 발타자르는 농장에서 일하는 마리(안느 비아젬스키)의 반려 당나귀이며 그녀와 깊은 유대감을 지니고 있다. 당나귀는 자동차의 등장으로 인해서 시대착오적 동물로 취급당하며, 마리는 애인으로 인해서 고통받는다. 마리는 발타자르를 지키려 한다. 다만, 당나귀를 둘러싼 세간의 시선은 그리 곱지만 않다. 당나귀는 여기저기에서 고통받는다. 마리의 애인으로부터 구타당하며 동네 소년들에게 가학 행위를 당한다. 서커스단에서 억지로 공연하기도 하며, 농장에서 종일 뱅뱅 맴돌며 밭을 갈기도 한다. 그러다 마침내 인간에게서 달아나 산에 있는 양 떼들 사이에서 편히 잠든다.

발타자르는 원작 소설에서는 소아뇌전증 환자이자 미친 척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수도자를 일컫는 말인 유로지비(바보 성인)로 그려지는 미쉬킨 백작을 동물로 각색해 만든 것이다. 미쉬킨과는 달리 당나귀는 말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기에 그저 고통을 견디고 있을 뿐이다. 영화의 원제는 <Au hasard Balthazar>로, 직역하면 <발타자르 무작위로>이다. 당나귀 발타자르의 삶은 당나귀 자신의 주체적인 선택이 아니라 무작위로 흘러가며, 이는 인간의 모순적이고 부조리한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다. 그는 부조리로 인한 불가항력의 폭력을 마주하지만, 이에 저항하거나 복종하지 않는다. 그저 한없이 깊고 맑은 눈으로 그것을 보고 있을 뿐이다. 이때 당나귀는 온갖 인간 군상의 관찰자로 있지만, 인간에게 어느 정도 감정을 이입하고는 있다. 틸다 스윈튼을 비롯한 영화 거장들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배우로 이 당나귀를 이야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터다.

물론, 당나귀 발타자르가 온갖 인간군상을 마주하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학대당하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기에, 이 영화를 보는 일에는 상당한 고통이 수반된다. 발타자르를 보고 있으면 서사가 다소 동물에게 가학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어서다. 거기다 카메라는 금욕적으로 미동도 하지 않고 발타자르를 찍고 있다. 당나귀 발타자르의 무한히 슬픈 눈동자는 당나귀가 우리를 이해하고 있다는 착시를 준다. 이 영화의 맹점은 여기서 온다. 인간은 물리적인 시간을 저마다의 이야기로 각색해서 세계를 이해한다. 인간은 서사를 통해서 덧없이 흘러가는 무의미한 시간을 유의미한 시간으로 전환하며, 그에 따라서 삶의 희로애락과 의미를 체득한다. 동물이 인간의 서사를 이해하리라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인간중심적인 사고다.

<EO>가 질문하려는 것은 이러한 지점이다. 당나귀와 우리 사이의 접점은 어디까지인지를, 타자로서의 동물을 어느 정도까지 이미지로 접근할 수 있는지를 질문하며, 그러한 사유의 최전선에 선다.

 

ⓒ 부산국제영화제

<EO>는 당나귀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인간이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니지 않는다. 오히려 반성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영화다.

인간이 동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동물을 대상화하는 것이며 인간의 이야기를 전달하려 동물을 도구로 쓰게 할 가능성이 있기에, 이 영화는 거기서부터 벗어나려 한다. 할리우드에서 동물이 죽는 장면을 연출하고자 실제 동물을 죽인다든지 한 에피소드는 그간 있던 터라, 영화가 시작할 즈음에 등장하는 "동물을 보호하면서 촬영이 진행되었다"는 타이틀은 영화가 다다르고자 한 윤리적인 인식을 가늠해보았을 때, 하나의 선언처럼 들린다. 물론 동물권이 부상하기 시작하면서 등장한 영화들도 물론 비슷한 윤리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공장제 축산업의 희생자인 소에게 최대한 근접하고, 그들이 사는 세계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이해해보고자 하되 소의 1인칭 시점은 찍을 수 없으리라는 반성에 이르는 안드레아 아놀드의 <카우>(2020), 돼지의 한평생을 연대기로 보고자 한 빅터 사코프스키의 <군다>(2020)등이 그러하다.

다만 두 영화는 동물을 건조한 시선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당나귀 발타자르>와 닮아 있다. 두 영화는 음악을 배제하고, 서사의 연결점을 모호하게 하기에 발타자르와 달리 서사를 발견하기가 힘들다. <EO>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서사를 차단하되, 동물을 단순히 영영 이해하기 힘든 타자로 분리하기보다 그들과 공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오히려 작년에 개봉한 데이빗 로워리의 <그린 나이트>(2021)의 연장선에 있다. 자연과의 공생을 다루는 점에서도, 기교 과잉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촬영도 그러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두 영화가 자연을 시각적인 매체로 경유하기에 그러하다. 이로 인해서 인간과 동물의 감각이 뒤엉키기를 바란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EO>에서 당나귀는 이름이 없다. 'EO'는 당나귀가 우는 소리를 이름으로 만든 것이기에, 자연의 익명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당나귀(EO)는 이름으로 포착되는 존재가 아니기에, 인간이 규정할 수 없는 존재로 정해진다. 이는 당나귀가 어디든 갈 수 있는 횡단의 존재라는 것을 드러낸다. 당나귀는 인간이 제아무리 규명하려 한들 규명되지 않는 신비로움을 지니고 있다. 크레딧에 등장하듯이 이 영화의 EO로 등장하는 당나귀는 여섯 마리다. 당나귀를 영화의 배우로 등장시키되 각각 에피소드가 끝나는 순간마다 화면을 암전 시켜 당나귀를 교체한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영화를 찍을 당시에 윤리적인 문제의식으로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일 터다. 이는 이 영화를 하나가 아니라 여섯 마리일 수 있는 당나귀의 이야기로 만든다.

그런데도 영화는 당나귀가 배우로 고정되어 있다고 믿게끔 숏을 연결해 여섯 당나귀 사이의 외형적인 차이를 없애며, 동시에 여섯 당나귀가 제각기 다르다는 것을 찍는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하나일 수도 있고, 여섯일 수도 있기에 모든 당나귀일 수도 있는 존재의 이야기다. 당나귀 발타자르가 어떤 하나의 당나귀의 이야기만을 다루는 데 비해서 이 영화는 EO로 당나귀 전체를 주인공으로 삼게 된다. 당나귀일 수 있기에 EO는 자연 그 자체일 수도 있다.

 

ⓒ 부산국제영화제

<EO>는 초반부에 당나귀의 서커스쇼, 그를 지키는 공연 파트너인 여성과의 관계를 드러내며, 이 영화가 당나귀의 수난사를 다루는 영화라는 인상을 준다. 영화는 곧장 기대를 배신한다. 이윽고 수레를 끌고서 폐차장 가운데를 횡단하는 당나귀는 동물 단체로 인해서 우연히 구출된다.

문제는 이어지는 장면에서 당나귀가 급작스레 정체 모를 행사장에 초대되어 있지만, 당나귀가 그곳으로 이동하는 과정이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퀀스 사이에 있는 서사의 공백을 연결하는 것은 상상하는 당나귀가 경험하는 '무언가'다. 서사의 공백을 메우는 시퀀스가 매개되는 방식은 흥미롭다. 인간의 이야기가 당나귀의 시점으로 보이는 듯하다가 이를 뒤튼다. 이는 숏-리버스 숏 연출에서다. 숏-리버스 숏은 둘 혹은 둘 이상의 인간이 한 곳에서 대화하는 순간에 그들의 표정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들이 인간 대 인간으로 대화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때 얼굴과 표정, 대화는 같은 가치를 지니며 교환의 대상이 된다. 숏-리버스 숏이 180도의 구도에서 무너지는 순간에 영화에 긴장이 스며들게 된다. 둘이 평등한 위치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며, 숏이 제대로 교환되지 않아서다.

<EO>에서 인간과 당나귀의 대화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인간의 얼굴이 정면으로 찍히고 난 뒤에 당나귀의 얼굴을 찍는 순간 감독은 비스듬한 각도를 택하며, 광각렌즈를 통해서 당나귀의 얼굴을 왜곡함으로 이 둘의 연관성을 차단해낸다. 영화는 인간의 서사가 이어지고 있는 통로를 차단함으로 인간의 서사에 더는 이입되지 않게끔 하는 소격효과를 만든다. 마찬가지로 당나귀가 밖에서 질주하고 있는 말을 보거나 우리에 갇힌 다른 동물을 보고 있는 장면에서도 당나귀는 그들에게 이입하는 듯하지만, 결국 다른 길을 가고야 만다. 당나귀의 시공간에는 인간들이 생산해내는 서사가 존재할 수 없고, 거기에는 아무런 체계도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려면 이와 같은 서사 차단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다만 한 에피소드의 단절이 <당나귀 발타자르>의 경우에는 수동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데에 비해, <EO>에서는 주체인 당나귀에 의해서 이뤄진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을 보고 한탄하는 관찰자의 위치로부터 해방된다.

EO(당나귀)는 어디에서든 익명인 존재이기에 오히려 어디든 갈 수 있으며 그 경로를 예측할 수 없다. EO야말로 무작위로 움직이는 존재인 셈이다. 이러한 시퀀스 연결에는 음악이 한몫 더한다. 서사 영화에서는 음악을 통해서 인물이 느끼는 감정을 극대화하고 인물에 따라서 주제곡을 써서 그 인물의 이야기가 두드러지게 한다. <EO>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소리를 개발하는 감독의 전작 <외침>의 노이즈들을 연상하게끔 하는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사운드를 무작위로 배열하며, 잠시나마 지닐 수 있는 감정을 차단한다. <EO>가 자칫 혼란스러운 영화로만 느껴지는 것도 이러한 연출로 인해서다. 우리가 이 이야기의 틈새를 보아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숏이 영화의 시공간을 다르게 매개해서다. 이 영화의 시공간은 우리가 전혀 경험할 수 없는, 새로운 것이어서다.

<EO>의 시공간은 인간의 시공간과는 아예 다르다. 어쩌면 당나귀의 시공간일 수도 있는 것들을 상상하게끔 하는 역할을 해서다. 당나귀의 시점에 이입할 수 없다는 윤리의식은 가늠, 혹은 상상으로 인간 바깥의 시점을 찍게끔 한다. 이는 최근 SF소설이 하고자 하는 작업에 가깝다. 비-인간 행위자, 장애인 등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이들의 시공간에 이입하는 대신 다른 비-인간 행위자의 시공간을 매개함으로, 우리 인식의 너머를 사유해 정상성 바깥의 세계를 상상하자는 식이다. 김초엽의 『마리의 춤』을 이러한 상상력의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SF의 인식을 도입하고, 당나귀가 느끼는 시공간이 인간과는 아예 다름을 매개한다. 당나귀가 하나이면서도 여섯인 어떤 멀티버스를 다루는 SF라고도 할 수 있는 셈이다.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 할 수 있는 장면은 드론 촬영으로 찍은, 사이렌 조명 아래서 카메라가 세계를 활강하는 장면이다. 드론이 움직이는 경로는 시각적인 경로가 아니라 청각적인 경로로 이어진다. 이는 공감각을 연출해내며 우리의 여러 감각을 자극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러한 장면은 하나의 당나귀가 다른 당나귀로 교체되는 시간 사이에 있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홍색 불빛의 통로 등의 장면도 당나귀가 다른 당나귀가 사는 평행세계로 진입하는 통로로도 보인다. 즉, 당나귀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당나귀가 또 다른 당나귀로 전환될 수 있는 멀티버스가 열린 셈이다.

 

ⓒ 부산국제영화제

후반에 EO는 부잣집에서 탈출하고, 폭포로 이른다. 이때 폭포는 위와 아래가 반전된다. 역재생을 통해서 물이 아래에서 위로 흐르며, 당나귀의 눈에는 그것이 폭로의 흐름으로 드러난다. 다만 이러한 당나귀의 멀티버스는 실제 당나귀가 다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진다. 훌리건으로 인해서 구타당한 당나귀는 AI로봇으로 대체되며, 그가 병원에 실려가는 과정은 생략된다.

<EO>의 놀라운 성과는 당나귀가 보고 듣고 느끼는 시공간을 매개하면서, 보는 이의 시간의 한계를 확장하려 한다는 것이다. 도나 해러웨이의 문장을 인용하자면 "하나는 너무 적지만, 둘은 너무 많다" 인간과 종은 혼자 있을 때도, 각자의 개체로 둘이 있을 때도 완전하지 않으며, 둘이 세계를 공유하는 순간에야 완전해진다는 이야기다. 당나귀의 시공간을 공유함으로 인간은 감각의 뒤엉킴을 경험한다. 드니 빌뇌브가 <콘택트>에서 하고자 했던, 외계인의 언어를 거쳐서 인간의 선형적인 시간관을 파괴하고 순환적인 시간관을 연출하고자 했던 작업은 <EO>에 이르러서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다른 시공간을 지니고 있다는 인식에 다다른다. 인간은 인간 바깥의 시공간을 체험할 필요가 있으며, 이러한 태도는 윤리적인 상상력으로 작동한다. 이를 영화적 체험이라는 말로 축소하기는 힘들다.

문제는 이 아름다운 의도에 진정성이 있냐는 데에 있다. <당나귀 발타자르>를 지나치게 인식한 나머지 영화는 인간의 서사를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가공한다. 당나귀의 시공간에서 인간이 그리 행동하는 이유를 하나도 이해할 수 없다는 의도 자체는 존중하나, 인간은 복잡한 차원에서 존재한다기보다 동화나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인물처럼 단순한 대화를 한다. 당나귀의 시공간이 경이로운 데 비해서, 인간은 비루한 시공간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면 조금 더 나은 대사를 배치했어야 나은 작품이 되었을 거다. "내가 너를 구하는 것인가? 훔치는 것인가?"라는 대사를 제외하면 매혹적 대사는 없다시피 하다. 이와 같은 인간의 서사와 당나귀 서사의 수준 차이는 이 영화의 여운을 계속 파괴한다. <당나귀 발타자르>의 엔딩에서 감독은 당나귀를 양들 한가운데에서 쉬게 만드는 데 비해, <EO>에서는 소들이 사는 도살장으로 우연히 가서 함께 도살당한다.

이러한 엔딩은 감독의 진의를 의심하게 한다. 그토록 자유롭고 아름다운 동물을 그려내되 그것이 결국 자본주의 아래에서 희생되고 말리라는 비관은 오히려 이 시대의 병증을 그대로 드러낸다. 슬라보예 지젝은 “자본주의의 멸망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멸망을 상상하는 것이 쉽다”라는 말로 이 시대를 묘사한 적이 있고, 이러한 인식은 오히려 혁명이 불가능하기에 그 실패를 긍정하고 마는 멜랑콜리로 이어지기에 이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당나귀 발타자르>의 엔딩은 낭만으로 보일 거다. <EO>는 자본주의가 자연으로 되어버린 사회에 그대로 굴복한다. 오히려 조금 자의식을 버리고 원작을 따라서 당나귀를 농장에서 벗어나게 했더라면, 혹은 당나귀를 죽이는 선택만 피했더라면 이 영화는 21세기의 걸작이 되었을 것이다. 

<EO>의 결말은 이 영화가 이룬 모든 영화적인 업적을 부정하고 그것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EO>는 당나귀를 위한 나라는 없다는 것을 당나귀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파괴함으로 증명한다.

[글 김경수, rohmereric123@ccoart.com]

 

EO
감독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Jerzy SKOLIMOWSKI

 

출연
이자벨 위페르
Isabelle Huppert
산드라 지말스카Sandra Drzymalska
로렌조 주르졸로Lorenzo Zurzolo
마테우시 코스치우키에비치Mateusz Kosciukiewicz
사베리오 파브리Saverio Fabbri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86분
공개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2022.10.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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