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프디 형제'의 영화는 어딘가 어긋나 보인다. <도난당하는 것의 즐거움>(2008)의 주인공 엘레노어는 도벽이 있어 절도 행위를 스스럼없이 함에도 우연한 만남과 행운이 자꾸만 찾아온다. <굿 타임>(2017)의 주인공 코니에게 동생 닉을 구하라는 서사 상의 미션이 던져지지만, 나쁜 상황은 커지고 코니는 닉이라는 목표에 한 발 치도 가까이 가지 못한다. <언컷 젬스>(2019)의 하워드도 마찬가지이다. 빚더미에 앉은 뉴욕의 보물상 하워드는 NBA 스포츠 도박을 통해 돈을 갚을 기회를 얻지만 실패하고, 다시 도박의 늪으로 스스로 빠져들고 만다. 엘레노어, 코니, 하워드는 현실을 부정한 채로 같은 거리를 거닐고, 같은 행위를 반복하며 빠져나올 수 없는 비극의 현실을 직시한다.
그래서 이 인물들은 뉴욕 거리 위로 계속해서 발을 딛지만 어떠한 방법으로도 현실과 동화되지 못한다. 이들은 예상에서 벗어나는 지나친 우연과 행운을 맞이하거나, 목표에 도달하려고 하지만 자꾸만 실패하고 미끄러진다. 행운과 실패. 어찌 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이지만, 이상하게도 '사프디 형제의 영화'에서는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
이 중에서 '하워드'라는 인물은 전인류의, 혹은 인류 역사의 알레고리임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영화가 시작하면 난데없이 에티오피아 광산의 현장이 등장하고, 광산에서 채굴된 다이아몬드 오펄로 카메라가 들어간다. 카메라는 오펄 속의 형형색색의 빛과 기하학적 형태를 따라 유영하다가, 하워드의 대장으로 디졸브 되며 대장내시경 모니터 화면으로 나온다. 2010년 가을, 에티오피아. 그리고 2012년 봄, 뉴욕시. 당혹스러울 정도로 방대한 시공간을 뛰어넘어 이어진 하나의 이미지는 오펄과 하워드를, 에티오피아와 뉴욕을 연결시킨다. 이 같은 연결은 엔딩에서 반복된다. 카메라가 하워드의 얼굴을 관통한 총알구멍으로 들어가면 초반부에 등장했던 빛과 형태들이 다시 한번 반복된다. 그리고 마침내 대우주의 광경에 도달한다. 에티오피아에서 뉴욕으로. 오펄에서 하워드로. 하워드에서 우주로. <언컷 젬스>는 오펄을 바통 삼아 넘기고 연결시키며, 하워드의 이야기를 미시적 개인에서 거시적 역사까지 넓히며 해석의 가능성을 확장시킨다.
특히, 케빈 가넷이 하워드의 오팔을 들여다보는 장면은 영화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층위의 세계와 관점을 압축하고 있다. 가넷이 하워드의 확대경을 빌려 오펄을 관찰하자, 그 추상적 빛과 형상 위로 역사의 이미지들이 빠르게 중첩된다. 혼란과 경이로움이 공존하는 파편적인 이미지의 향연은 케빈 가넷이 팔로 누르고 있던 진열장의 유리가 깨지면서 중단된다. 하워드의 확대경(유리)으로 보자, 진열장(유리)이 깨진다. 이 도식을 영화 전체에 적용해보자. 하워드의 망막(유리)을 경유해 환상 같은 행운의 연속을 보자, 하워드의 안경(유리)이 권총의 발사와 함께 깨진다. 하워드의 렌즈(유리)를 경유해 환상으로 왜곡된 현실을 체험하는 우리를 조롱하기라도 하듯, 카메라는 총에 맞아 쓰러지는 하워드를 천장의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보여준다. 영화라는 창과 영화라는 거울. 하워드라는 창을 보던 우리는 영화라는 거울에 비춘 우리의 모습, 타자에서 발견된 자아와 마주한다. 이로써 유리-눈-이성으로 인류 역사의 서사를 보려는 시도는 실패한다.
남아 있는 것은 거울로 인해 파편화된 이미지이며 분열된 세계이다.
<언컷 젬스>에는 하워드의 눈으로 본 왜곡된 세계에 해당되지 않는 장면이 존재한다. 하워드라는 개인으로 연결되기 전, 에티오피아 광산에서의 해프닝이다. 이 장면의 분석은 마치 영화 전체에 대한 해석의 코드가 된다. 중상을 입은 광부, 그를 둘러싼 현지 노동자들. 뒤이어 현장의 아시아계 간부는 노동자들과 다툼을 벌이고 있다. 노동자와 자본가, 노예와 주인의 도식. 자본과 권력. 2012년의 뉴욕시로 대입해보자면. 채무자인 하워드와 채권자인 아르노. NBA 팬인 하워드와 그의 우상 케빈 가넷. 오펄의 경매가를 올려줄 것을 부탁하는 하워드와 어쩔 수 없이 그의 부탁을 들어주는 억만장자 장인어른.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하워드와 그의 발목을 붙잡는 NBA 도박. 하워드는 뉴욕을 자유롭게 거닐며 막무가내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보이는 대상에게, 때로는 보이지 않는 대상에게 종속되어 있는 '노예'나 다름없다.
'노예로서의 하워드'는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문을 여닫는 행위로도 증명된다. 하워드는 아르노의 부하들이 찾아와 사업장 문을 두드릴 때, 문을 열어줘야 한다. 또는 빚을 갚지 못한 대가로 차 문을 통해 강제로 아르노의 차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자신의 차 트렁크 문에 갇혀야 한다. 케빈 가넷이 보석가게의 이중문 사이에 껴서 불만을 토할 때, 하던 일을 멈추고 고장 난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불륜 사실을 아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이웃의 문(의 너머에 있는 화장실)을 빌려야 한다. 문을 열어주거나, 문 안에 갇히거나, 문밖에서 기다려야 하는 하워드는 <언컷 젬스>의 세상에서 노예의 자리에 있다.
그런 하워드에게 찾아온 마지막 기회는 지금까지 문제의 해결을 미루거나 당장 앞의 상황만을 모면하려 했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방향성을 부여한다. 케빈 가넷에게서 하워드에게로, 하워드에게서 장인어른에게로, 돌고 돌아 다시 하워드에게로 돌아온 오펄은 현금과의 맞교환으로 가넷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돈은 드디어 하워드의 손으로 들어온다. 이제 그는 그 돈을 넣은 돈가방을 문(창문)을 통해 내연녀 줄리아에게 건네고, 돈을 받으러 온 아르노와 그의 부하들을 이중문 안에 가둬버린다. 노예에서 주인으로의 전복. 그를 영화 내내 괴롭히던 노예의 시간이 끝나고 주인의 시간이 찾아오자, 거짓말 같은 행운의 연속이 일어난다. 그에게 전혀 져줄 것 같지 않던 NBA 도박도 말 그대로 대박을 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언컷 젬스>는 노예 하워드의, 또는 주인 하워드의 왜곡된 눈으로 보는 환상이다. 다시 찾아온 노예의 시간, 현실의 시간. 가넷의 전설적인 경기가 끝나고 하워드가 닫힌 이중문을 열면 아르노의 부하 중 하나가 그의 얼굴에 총알을 꽂아 넣는다. 그리고 아르노에게도 방아쇠를 당긴다. 하워드와 빚쟁이, 부하와 아르노라는 주종 관계. 하워드를 향한 첫 번째 총성은 그 관계의 회복이고, 아르노를 향한 두 번째 총성은 관계의 전복이다. <언컷 젬스>는 잠깐의 환상에 불구했던, 혹은 무너질 기미를 주지 않았던 두 가지 관계를 회복시키고 전복시킨다. 그야말로 알 수 없는 부조리의 세계. 우리가 지니고 있던 최소한의 도식과 이성적 관람 태도를 부정하듯이 아르노의 부하들은 진열장의 유리를 깨부순다.
하워드가 다이아몬드 오펄에게 가공되지 않은 보석의 잠재성을 기대한 것과 달리, 우리는 하워드에게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언컷 젬스>는 결국 우리를 그런 하워드에게 무언가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자리로 옮겨 놓는다. 10만 달러가 넘는 돈을 가넷의 경기에 베팅하는 하워드. 이 베팅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이마저도 실패해버린다면,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하워드에게 그 순간은 단순한 반복이 될 것이다. 겹쳐지는 수많은 대사들과 혼란스러운 일렉트로닉 음악, 불친절한 내러티브, 소음과 분열의 반복. 우리는 더 이상 이 반복을 버틸 수 없다. 지친 우리의 몸이 갈 곳은 고장 난 이중문 사이의 자리이다. 이제 우리가 그 자리에서 바라는 것은 하워드의 심판 같은 것이 아니라, 부조리의 순환 고리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하워드가 이중문을 열 때. 아르노의 부하가 그에게 총을 쏠 때. 우리는 드디어 현실 밖으로 나온 것일까. 하워드의 얼굴에 박힌 총알구멍으로 새로운 차원의 문을 열며 카메라가 유영할 때. 그리고 그 끝으로 별이 가득한 대우주를 마주했을 때. 우리는 문밖으로 나온 것일까. <언컷 젬스>는 문을 통한 주종관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대답을 한다. 우리의 자리는 언제나 부조리의 세계이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언컷 젬스
Uncut Gems
감독
베니 샤프디Benny Safdie
조쉬 사프디Josh Safdie
배우
아담 샌들러Adam Sandler
케빈 가넷Kevin Garnett
폼 클레멘티프Pom Klementieff
라케이스 스탠필드Lakeith Stanfield
이디나 멘젤Idina Menzel
주드 허쉬Judd Hirsch
에릭 보고시안Eric Bogosian
줄리아 폭스Julia Fox
제작 A24
제공 Netflix
제작연도 2019
상영시간 130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공개 2020.01.31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