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프디 형제 #2] '헤븐 노우즈 왓' 사랑과 욕망이 실패하는 순간
[사프디 형제 #2] '헤븐 노우즈 왓' 사랑과 욕망이 실패하는 순간
  • 김민세
  • 승인 2022.11.1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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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매드'(mad)와 '러브'(love)"

사프디 형제의 영화는 언제나 '사실', 즉 '리얼'(Real)의 방법론으로부터 출발했다. 단편을 포함한 그들의 초기작들은 대부분 현실에서 가져올 수 있는 즉흥성과 일상성을 기반으로 한다. 또한, <아빠의 천국>(2009)의 경우에는 그들의 유년 시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따라가듯이 만들어졌다. 이와 관련하여, 장르적 특성이 두드러지고 있는 최근작 <언컷 젬스> 역시 뉴욕의 보석상이었던 '아버지'와 관련된 주변인의 이야기를 상상적으로 재구성하며 만든 작품이다. 극장 스크린 위로 떠 오르는 <아빠의 천국> 속 영화 필름 푸티지와 텔레비전 화면 안에서 빛나는 <언컷 젬스> 속 케빈 가넷의 NBA 경기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사프디 형제의 영화에는 '그들이 보고 경험한 현실과 기억을 어떻게 재현해내고 아카이브 할지'에 대한 그들만의 독특한 태도가 드러난다. 사프디 형제의 영화에서 경험할 수 있는 기이한 향수는 여기서 비롯된다.

 

ⓒ Iconoclast, Elara Pictures

영화와 현실 간의 관계에 대해 생각을 이어 나갔을 때, <헤븐 노우즈 왓>은 사프디 형제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논픽션에 기반한 영화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뉴욕 거리를 거닐던 홈리스이자 마약중독자인 '아리엘 홈즈'의 미발표된 자전적 소설 『매드 러브 인 뉴욕 시티』를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아리엘 홈즈가 극 중 주인공 할리를 직접 연기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헤븐 노우즈 왓>의 이야기가 시작된 곳이 사프디 형제의 손이 아니라, 아리엘 홈즈의 손이라는 점에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사프디의 형제의 손이 써 내려가는 욕망이 <굿타임>의 '코니'와 <언컷 젬스>의 '하워드'라는 서사적 캐릭터로 모이는 것처럼 보인다면, 아리엘 홈즈의 손은 자신이 보고 경험한 욕망을 하나의 풍경으로 그려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 풍경은 뉴욕의 거리라는 구체적 장소를 정확히 지목한다. <굿타임>과 <언컷 젬스>의 뉴욕이 스스로의 장소성을 반복적으로 포기하고 하나의 미로로서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맥락이다. 다시 말해 <헤븐 노우즈 왓>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뉴욕이라는 '거리의 욕망의 풍경'이다. (영화의 원작 제목을 인용하자면) 그 욕망은 '매드'(mad)와 '러브'(love)와 사이를 진동하며 드러난다.

그래서일까. <헤븐 노우즈 왓>의 감각적 체험은 극단적이다. 누구는 약과 술에 취해 춤을 추고, 거리에서 몸을 섞는다. 할리는 사랑한다면 죽으라는 일리야(칼렙 랜드리 존스)의 말에 면도칼로 손목을 긋고, 마이크(버디 듀레스)는 서로를 죽이겠다는 싸움 끝에 손바닥에 표창을 맞고 피를 흘리며, 일리야는 폐가에서 자던 도중에 모닥불이 번져 불에 타 죽는다. 그들은 거리 위에서 스스럼없이 서로를 향해 욕을 뱉어대며, 일렉트로닉 기반의 사운드트랙은 어김없이 감각과 정신을 헤집어 놓고, 거리 너머에서 인물들을 거칠게 포착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서스펜스의 밀도를 높인다. 이러한 사운드와 이미지는 이 영화가 갖고 있는 거친 질감, '매드'로서의 욕망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익숙한 사운드가 들려왔을 때를 돌아본다. 전자음악 작곡가인 '토미타 이사오'가 신시사이저로 편곡한 드뷔시의 달빛. 이때 카메라는 대화하며 나란히 걷는 할리와 마이크를 멀리서 내려다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가 흐르는 가운데 카메라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뉴욕의 아파트들을 천천히 패닝 한다. 이 클래식 원곡의 전자음악이 주는 모호한 멜랑콜리의 정서와 뉴욕 빌딩의 연속적 이미지가 만드는 형상은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리게 만든다. 재즈 음악에 취하듯이 뉴욕의 거리를 수없이 오가며 남자와 여자의 대화를 찍어온 그 사람, '우디 앨런'. 과도한 가정일 수도 있고 약간의 비약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 순간 확신했다. <헤븐 노우즈 왓>은 재즈가 아닌 신시사이저로, 남녀를 한 아름 감싸 안는 뉴욕의 풍경이 아닌, 뉴욕 거리 그 자체가 되어버린 남녀로 써 내려가는 우디 앨런의 새로운 변주가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영화는 무엇보다 로맨스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매드'의 장르로 가려진 '러브'의 서사를 볼 수 있다.

 

ⓒ Iconoclast, Elara Pictures

먼저, 영화에서 명확한 커플로 등장하는 것은 할리와 일리야지만, 할리는 사랑과 관련한 관계에 있어서 또 다른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스컬리는 실연당한 할리를 쫓아다니며 계속해서 구애하고, 마이크는 마약에 취한 할리와 키스를 나누기도 한다. 그러므로 <헤븐 노우즈 왓>은 마약이라는 소재와 거친 스타일을 걷어내고 나면 한 남자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 그리고 그 여자를 사랑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로 설명될 수 있다. 일리야라는 최종적인 욕망의 대상은 자꾸만 눈앞에서 사라지고 그를 대신할 인물이 그녀의 주위를 맴돈다. 그리고 결국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 또한 어쩌면 로맨스 서사의 전형적인 공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다시 이 영화에 마약이라는 소재를 가져와 보았을 때, <헤븐 노우즈 왓>의 '매드'와 '러브'는 어떻게 관계 맺고 있을까. 영화 내에서 구체적인 대상을 상정해 보았을 때 '매드'는 마약, '러브'는 사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할리와 일리야가 마약에 취해 거리 위에 드러누운 채로 키스를 나누는 영화의 첫 장면을 보았을 때, 마약과 사랑의 키워드는 한 이미지 안에서 겹쳐진다. 일리야와의 결별을 겪은 할리가 상실감에 주삿바늘을 꽂아 넣을 때는 마약이 사랑을 대신하거나 밀어낸다. 할리와 마이크의 관계에 있어서 사랑은 서로 돈을 벌고 마약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즉 <헤븐 노우즈 왓>에서 마약과 사랑은 동어반복이거나, 서로를 대체하거나, 순수한 쾌락의 대상이 되거나,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된다.

 

ⓒ Iconoclast, Elara Pictures

영화에서 할리는 자신의 사랑을 계속해서 증명하려 하고 구체적으로 경험하려 한다. 영화 또한 그것을 손목에서 흘러나오는 피와 팔뚝으로 흘러 들어가는 마약, 즉 물성을 가진 어떠한 구체적 대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할리가 피를 흘릴 때, 일리야는 그녀의 곁을 끝까지 지켜주지 않는다. 사랑의 증명은 실패하고 욕망의 대상은 멀어진다. 반면 마약은 사랑의 유사 경험으로서 그녀에게 남아있다. 그것은 증명될 수 없는 무형의 사랑과는 달리 유물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영화에서 어느 순간 욕망의 대상 그 너머의 차가운 물질로 남아버린다. 다시 말해 마약은 할리에 의해 욕망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묘사되지만, 그녀의 욕망 이전에 존재하는 사랑의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유물로서만 남게 된다. 이를 증명하듯 마이크는 다시 돌아온 할리를 모르는 체하며, 아니 심지어 할리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친구들과 말을 이어나간다. 할리는 끝내 증명되고 교환되지 못하는 사랑 앞에서 허무의 얼굴을 드러낼 뿐이다.

<헤븐 노우즈 왓>은 과격한 장르와 로맨스의 서사 사이를 진동하며 기이한 체험을 안긴다. 그리고 그 끝에는 사랑과 욕망의 실패에 도달하고 나서 남은 서늘한 패배의 얼굴이 있다. 이제 영화를 시종일관 흔들어놓았던 '매드'와 '러브'의 태도는 후퇴하고, 카메라는 그 풍경을 유리창 너머로 지켜보고 있다. 그제야 현실을 비껴가듯이 앞으로만 질주하던 영화는 그 마지막 이미지로 현실의 풍경에 각인된다. 그곳에서는 그 어떤 사랑과 욕망도 볼 수 없다. 사프디 형제의 영화가 궁극적으로 가리켜온 현실, 리얼만이 있을 뿐이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 Iconoclast, Elara Pictures

헤븐 노우즈 왓
Heaven Knows What
감독
베니 사프디
Benny Safdie
조슈아 사프디Josh Safdie

 

출연
아리엘 홈스
Arielle Holmes
칼렙 랜드리 존스Caleb Landry Jones
네크로Necro
엘레노어 헨드릭스Eleonore Hendricks
유리 플레스컨Yuri Pleskun
버디 듀레스Buddy Duress

 

제작 Iconoclast, Elara Pictures
제작연도 2014
상영시간 94분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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