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21세기에 도래할 시네마
[interview] 21세기에 도래할 시네마
  • 이지영
  • 승인 2022.11.0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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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지석상 심사위원 '장-미셸 프로동'

프랑스 영화평론가 앙드레 바쟁(André Bazin)은 "영화는 꿈꾸는 시스템이며, 상상의 소우주이고, 이 소우주의 중력은 –거듭 말하지만, 예술적인 퀄리티와는 별개로– 순전한 TV보다는 상상력에 더욱더 강력하게 작용한다."(1)고 말하면서 시네마 고유의 가치를 옹호했다. 동시에 그는 당대에 등장한 TV라는 강력한 뉴 미디어에서 영화가 취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견했다. 반 세기가 흐른 후, 인터넷과 플랫폼의 시대가 도래했고, 전례 없이 전 세계 극장을 강타한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급변하는 세태 속에서 영화는, 산업 및 관객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했다. 시네마는 한 번도 '위기'이지 않은 때가 없었고, 그럼에도 늘 변화하며 살아남았다.

 

뉴 미디어, 시네마 언어 그리고 동시대의 비극들

올해 심사위원으로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장-미셸 프로동(Jean-Michel Frodon) 평론가는, 앙드레 바쟁을 본보기로 삼아 왔다는 그의 말처럼, 바쟁의 정신을 지지하고 계승하며 시네마 비평의 최전선을 지켜왔다. 그는 바쟁이 창립한 세계적으로 명망 있는 영화비평지 「까이에 뒤 시네마」(Cahier Du Cinéma의 편집장을 역임했을 뿐 아니라, 「르 몽드」(Le Monde), 「르 뽀앵」(Le Point), 「슬레이트」(Slate) 등 다양한 성격의 매체와 독자층에 부지런히 다가가며, 비평가로서의 야심과 사상들을 일관적으로 고수해왔다.

시네마의 영역은 동시대와 조응하며 새롭게 열린다. 장-미셸 프로동은 전 세계 시네마의 지평이 확장되고 열리던 20세기 말에 구로사와 아키라(黒澤 明, Akira Kurosawa)의 영화가 '주류'라고 여겨지던 서구권 영화에 던져준 충격과, 21세기 초 중국이란 거대한 대륙이 빠르게 겪고 있던 변화를 시네마적으로 포착한 지아 장커(贾樟柯, Jiǎ Zhāngkē)의 영화에 주목해왔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시네마가 당도한 새로운 환경과 변화들은 무엇인가? 장-뤽 고다르(Jean-Luc Godard)의 상징적인 죽음 앞에서, 뉴웨이브(New Wave) 정신은 후세대 감독들에게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가? '쇼아(Shoah)' 이후의 시네마 언어는 현시대의 비극과 마주하여, 어떤 숙제들을 아직도 안고 있는가?

우리에겐 이런 문제를 진단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이에 대해 질의응답한다는 것은 한 감독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의 작품 세계를 탐구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기쁨이다. 필자가 던진 질문의 이면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시네마라는 한 세계가 많은 순간 위태로워 보임에도 우리가 믿고 있는 이 세계가 퇴화하고 축소되는 것은 아닌 지에 대한 뿌리 깊은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미리 고백한다. 프로동 평론가의 답변을 곱씹고 사유하며, 여전히 시네마는 치열하게 변화하고 있음에 안도했다.

변화한다는 것은 그가 거듭 강조했듯이, 퇴행의 의미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저널리스트 겸 영화평론가 장-미셸 프로동은 1990년부터 13년 간 『르 몽드』에서 영화기자로 일했으며, 2003년부터 2009년까지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온라인 잡지인 『슬레이트』 프랑스 판에 기고 중이다. 파리정치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영국 세인트앤드루스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허우 샤오시엔』(1999), 『우디 앨런과의 대화』(2009), 『호라이즌 시네마』(2006), 『중국 영화』(2006), 『로베르 브레송』(2008), 『영화 평론가』(2008), 『에드워드 양의 영화』(2010), 『오늘날의 프랑스 누벨바그』(2010), 『파리의 영화관』(2016), 『지아장커의 세계』(2021), 『영화의 다양성』(2021) 등이 있다. 그는 또한 페스티벌 및 전시 큐레이터와 프로그래머로도 활동 중이다. ⓒ 부산국제영화제

이지영

부산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그동안 매거진 『필로』(FILO)를 통해서 한국 독자들과 만나왔는데, 이번에 심사위원으로서 부산국제영화제에 방문했다.

장-미셸 프로동

부산에 다시 돌아와서 참 행복하다.

1997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 때부터 나는 자주 부산을 방문했는데, 그 당시에는 BIFF가 아니라 PIFF였다. (웃음) 물론, 항상 부산을 찾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 이유는 내가 아시아 영화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고, 부산이 아시아 영화의 정말 훌륭한 쇼케이스 현장이라고 생각한다. 또 부산에 오는 다른 이유는, 친구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부산에 자주 방문하다 보니 한국에도 친구들이 있고, 다른 국가에서 오는 친구들도 있다. 이런 이유에서 부산에 오는 것은 나에게 의미가 있고 중요하다. 항상 오고 싶은 마음이다.

올해는 심사위원으로 발탁되어 선정작을 고르고 심사하는 역할을 맡았다. 다른 심사위원 분들과 함께 소통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으며, 선정된 작품 말고도 여러 다른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기회들도 소중했다.

이지영

먼저, 당신의 필명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고 싶다. 'Frodon'은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Frodo)'에서 따온 것이라고 들었는데, 같은 <반지의 제왕>의 광팬으로서 굉장히 반가웠다. 당신은 사진작가로도 활동했었고 「르 뽀앵」, 「르몽드」, 「까이에 뒤 시네마」, 현재의 「슬레이트」까지 시네마와 비평을 위한 모험과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 마치 반지를 지키는 프로도처럼, 당신이 이 여정을 따라가는 데 중요한 지향점, 혹은 어떤 세력으로부터 지켜야만 하는 절대적인 가치가 있을까.

장-미셸 프로동

우선, 나한테는 반지가 없다. (웃음)

먼저, 내가 글쓰기를 즐긴다는 사실이다. 나는 언제나 커다란 기쁨을 느끼며 글을 쓰고, 나를 지탱하는 근본적인 힘이 있다면 그것은 '영화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나는 언제나 새로운 영화와 스토리, 새로운 영화 제작 방식을 발견하는 것을 즐긴다. 또 한편으로는 나는 영화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행동에도 영향을 준다고 믿고 있다.

영화 비평을 통해, 우리는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과 영화가 우리에게 의도한 것이 무엇인지를 좀 더 가시적으로 펼쳐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독자들은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일지 선택한다. 독자에게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알려줄 필요는 없지만, 영화가 작동되는 방식을 더 잘 볼 수 있게 해 줄 필요는 있다. 왜냐하면 영화는 사회적이거나 개인적인 영향을 줄 수 있고, 이는 관심을 충분히 가질 만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해진다면, 이는 진정한 글쓰기의 과정이다.

글쓰기는 무언가를 드러내 준다. 글을 쓰기 전에는 나는 무엇을 쓰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글쓰기는 내가 쓰려고 하는 특정 영화에 대해서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지 발견하도록 해준다.

이지영

역사와 전통이 있는 「까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을 4년간 역임하고 현재 「슬레이트」에 기고하고 있다. 지금은 어떤 작업들을 이어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전통과 역사, 매체의 특성이나 독자의 성격 등, 다양한 차이점들이 있었을 텐데. 이것들은 당신의 글쓰기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장-미셸 프로동

잘 이해했다. 실제로 비평 작업과 관련해서는 많은 차이들이 있다.

<까이에 뒤 시네마>에서 내가 맡았던 직무인, 편집장의 구체적인 업무들은 차치하더라도 먼저 리듬이 다르고, <슬레이트>에서는 결국, 주간 영화 개봉일에 따라서 리듬이 만들어진다. 물론 칸 영화제 기간처럼 매일 써야 하는 일이 생기기는 하지만 말이다. 

독자들도 특별히 시네필이라거나, 영화와 관련된 교양을 갖춘 사람이라고 상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쓰는 어휘나 참고 문헌들도 다른데, 지금 주로 내가 하는 일이 개별 영화들에 대한 비평 작업이라면 <까이에 뒤 시네마>에서는 좀 더 이론적이고 영화 전반에 대한 반성적인 사유와 관련한 작업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내 입장에서는 아주 부차적인 것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요컨대, 지금도 나는 같은 작업을 하고, 내가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 것들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은 그러한 바탕 위에서, 나의 본보기는 여전히 <까이에 뒤 시네마>의 창시자, 앙드레 바쟁이다. 그는 「에스프리(Esprit)」라는 더 높은 수준의 지적인 정기간행물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 대한 주간지인 「라디오 시네마(Radio Cinéma)」, 그리고 대중적인 일간지 「오로르(L'Aurore)」에도 기고했었다.

비평가로서의 야심도 같고, 지켜내고자 하는 사상들도 같지만, 나에게는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 다양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과거에, 나는 여성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주간지에서 일하기도 했고, 만화 월간지에서 일하기도 했는데, 동시에 <르 몽드>라는 진지한 성격의 일간지에서 전혀 다른 성격의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고 즐겼다.

이지영

이미 오래된 이야기지만, 프랑스에서는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문학과 예술 비평에 대한 전통이 영화 비평으로도 계승되어 왔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정보가 범람하고 빠르게 유통되는 인터넷 시대에 패러다임 전환을 맞이하고 있다. SNS의 출현은 비평이 확산하고 소통하는 좋은 통로가 되고 있지만, 동시에 이전의 비평이 갖고 있던 전문성과 깊이가 다소 축소되고 있는 것 같은데, 앞으로도 영화 비평은 유의미한 작업이 될 수 있을까.

장-미셸 프로동

우리가 비평 작업에서 주요한 변화를 겪고 있지만, 그 말인 즉 비평 작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비평 활동 자체와 그것을 직업으로 삼고 고료를 받는 활동은 서로 구분해야 한다. 직업으로서 비평이라는 한 측면은 분명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지만, 비평 작업 그 자체는 아니다. 인터넷상에서 단순한 반응이나 프로모션과 관련된 메시지의 대규모 유통과 이보다 훨씬 드물긴 하지만 상당수 존재하는 사유할 시간과 진정한 글쓰기 작업에 뛰어들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한 비평 작업을 구분해야 한다.

또 한편으로 인터넷은 전례 없이 등장한 도구들(비디오, 하이퍼텍스트 등)을 쓸 수 있게 하며, 비평 작업을 한층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다. 인터넷 덕분에 영화에 대해 사유하고 영화를 사랑하는 새로운 방법들 또한 발전하고 있다. 이런 도구들은 비평을 읽는 사람과 쓰는 사람 모두에게 무료로 제공되며, 예전과 같은 맥락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장래성 있는 미래를 가능하게 해 준다.

 

ⓒ 영화 '라쇼몽' 스틸컷
ⓒ 영화 '라쇼몽' 스틸컷

이지영

올해 8월 슬레이트에 이제는 전 세계적인 고전이 된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1950)을 비평하며, 비서구권 영화로서 20세기 시네마에 남긴 거대한 족적에 대해 코멘트를 남겼다. 21세기에도 이와 같이 압도적인 존재감과 영향력을 가질 만한 비서구권(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 감독(들)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일까.

장-미셸 프로동

20세기 말(1980년대와 1990년대)은 시네마 세계가 개방되던 시기였다. <라쇼몽>이 출현한 시기에 서양에서는, 서구권 영화 외에 아시아나 아프리카 시네마 등 비서구권 국가의 영화에 대해 무지하던 시절이었다. 20세기 말에 오면 이미 이런 세태는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 세계가 서로 다른 문화권에 서로 열려 있다. 미국 영화의 양식이 여전히 우세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칠레, 아프리카, 아랍 국가들, 아시아, 파타고니아, 필리핀, 태국, 그리고 물론 한국의 영화들을 접할 수 있다.

나는 21세기의 중요한 감독 중 한 명이 지아장커(Zhang Ke Jia)라고 생각한다. 21세기가 시작되고 초반의 15년 동안, 그의 영화들은 이전과 다르면서도 굉장히 의미 있었는데, 바로 변화하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현상을 다루었던 것이다. 지아장커의 영화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이 어떻게 격변하고 있는 지를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오늘날 나는 두 작품 <리바이어던>(2012), <인체해부도>(2022)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두 영화감독 루시엔 카스탱-테일러(Lucien Castaing-Taylor)와 베레나 파라벨(Véréna Paravel)에 주목하고 있다. 이들은 새로운 시네마 언어를 창조하고 있다. 이 두 감독이 새로운 국가에서 온 것은 아니듯이, 이제 더 이상 지역적인 것이 문제 되지는 않는다. 루시엔 카스탱-테일러와 베레나 파라벨은 우리가 속한 세계를 보여주는 중요하고도,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이지만 전에 본 적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다.

20세기 말에 구로사와 아키라가 그랬던 것처럼, 이들은 시네마의 새로운 공간을 열고 있다. 세계화가 진행된 현재의 시점에서는 지역보다는, 새로운 시네마 언어,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방식, 새로운 시선이 중요하다. 물론 여성의 관점으로 만든 여성 영화들이 더 나와야 하며, 토착민의 영화들도 있다. 그럼에도 세상을 느끼고 세상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새롭게 열리고 있는 변화의 시대로 우리는 진입하고 있다.

이지영

2010년에 당신은 『시네마와 쇼아: 20세기의 비극과 대면하는 예술(Cinema and the Shoah: An Art Confronts the Tragedy of the Twentieth Century)』이라는 저서를 집필했다. 이후 10년 동안 새로이 등장한 우리 시대의 비극들과, 이와 대면하는 신진 감독들의 예술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장-미셸 프로동

물론이다. 동시대에도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끔찍한 비극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중 어떤 것들은 영화 안에서 논의되고 다뤄지고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환경과 기후변화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환경 위기와 관련된 모든 문제와 재앙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에 관한 새로운 시네마, 새로운 필름 메이킹 방식을 필요로 한다.

내가 예전에 썼던 책은 '쇼아'를 묘사하는 시네마에 관한 것이기도 했지만, 쇼아가 어떻게 시네마를 바꾸었는지도 함께 다루었다. 시네마에 의문을 제기하고, 시네마 언어 역시도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토록 거대하고 복잡하며, 구체적인 학살을 다루어야만 했고, 그로부터 시네마를 옹호해야만 했다. 그동안 언제나 이런 학살들은 있어왔지만, 쇼아는 시네마 언어에 의문을 제기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나는 환경 위기도 마찬가지로 시네마 언어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영화 제작자들은 이에 대한 새로운 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건, 이제 인간을 더 이상 만물의 중심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생각의 전환이 영화의 방식을 바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시아의 영화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데, 아시아는 전통적으로 인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특히 시각적인 전통을 갖고 있다. 중국의 전통 회화를 떠올려 보면, 커다란 배경 안에 사람의 존재는 어딘 가에 아주 작게 들어가 있다. 서양 회화에서는 주로 초상화로 그려진다. 남자와 여자가 가운데 있고 뒤에는 나무들이 작게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영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안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

이지영

아녜스 바르다(1928-2019), 올해 장 뤽 고다르(1930-2022)의 죽음은 20세기 누벨바그의 시대가 저물어 간다는 상징과도 같다. 이들이 남긴 레거시는 2022년에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가. 21세기를 견인해 갈 시네마의 '새로운 물결(New Wave)'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장-미셸 프로동

물론, 이들의 세대는 이제 나이가 들어서 죽음을 맞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공통되게 믿는 자연의 섭리이지만, 나는 뉴웨이브가 의미했던 것,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까지의 영화를 만드는 새로운 방식이었던 뉴웨이브의 정신이 아직도 살아있다고 믿는다. 물론, 장-뤽 고다르(Jean-Luc Godard), 아녜스 바르다(Agnès Varda), 에릭 로메르(Éric Rohmer), 알랭 레네(Alain Resnais), 프랑수아 트뤼포(François Truffaut)는 이제 모두 세상을 떠났다. 즉 그 시대를 살아간 감독들이 연이어 떠났고, 고다르가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정신만은 여러 세대를 거쳐 전승되고 있다.

뉴웨이브의 정신을 계승하는 가장 윗 세대는 필립 가렐(Philippe Garrel)인데, 그는 아직도 뉴웨이브 정신으로 영화를 찍는다. 클레르 드니(Claire Denis), 올리비에 아사야스(Olivier Assayas), 아르노 데플레솅(Arnaud Desplechin), 알랭 기로디(Alain Guiraudie), 프랑스와 오종(François Ozon), 크리스토프 오노레(Christophe Honoré), 미아 한센 러브(Mia Hansen-Løve) 등, 많은 이들이 뉴웨이브의 정신을 살아 숨 쉬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뉴웨이브는 스타일이 아니라 '정신'이고, 다양한 필름 메이킹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 나는 굉장히 젊은 세대 감독들 중에도 뉴웨이브 정신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지금 부산에 와 있는 클레망 코지토르(Clément Cogitore)는 동시대의 젊은 영화감독이지만, 동시에 그는 이 모더니티의 유산을 이어받고 있다. 또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타카라, 내가 수영을 한 밤>(2017)을 연출한 다미앵 마니벨(Damien Manivel)을 들 수 있다. 그는 일본의 이가라시 코헤이(Kohei Igarashi) 감독과 공동 연출을 했고, 이 영화는 일본영화이지만 그는 프랑스에서도 영화를 찍고 있다. 이들에게서도 뉴웨이브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 여전히 발견된다.

나에게 있어서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 더 새로워 보이는 감독들의 반대편에 서 있는 중요한 힘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비디오 게임처럼 영화를 만들기도 하는데, 나에게는 전혀 새롭지 않고 오래된 것이라고 느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토리텔링이나 사물을 보여줄 때 지배적인 규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어느 시점에 뉴웨이브에 속하는 모든 이들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 올 것은,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시네마를 탐구하는 정신이 여전히 생생히 살아있는지가 진정한 문제이다. 프랑스 영화들 안에서―프랑스 영화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프랑스 영화들을 좀 더 언급했다―이 정신은 살아있다. 

 

영화 <슬픔의 삼각형> ⓒ 부산국제영화제

이지영

매거진 『FILO』에 기고한 《성공과 상처(A Success and A Wound)》(2)라는 칸 영화제 총평을 잘 읽었다. 2번째 황금 종려상을 수상한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의 <슬픔의 삼각형>(2022)을 포함한 경쟁 부문 수상작들에 대해 신랄하고 가차 없는 비판을 가했다. 본인이 생각했을 때 영화가 할 수 있는 것(What a film can do)과, '영화가 될 수 있는 것(What a film can be)'들을 가르는 태도, 혹은 주제나 미학적인 요소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장-미셸 프로동

그렇다. 나는 영화에서 핵심 질문이 '영화가 무엇인가(What is cinema)?'라는 질문에 해답을 찾는 것이라는 생각에 늘 반대해왔다. 내게 그것은 무의미한 질문이다. 우리가 논의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영화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것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우선은 영화가 나 스스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논의해볼 수 있다. 개인적인 것이지만, 단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면 그렇게 흥미롭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가 관객들에게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였다. 때로 영화가 만들어내는 효과는 관객을 넘어서 사회 전체를 돌고 돌아,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나는 영화의 주제와 미학을 분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둘은 함께 작동한다. 어떤 영화들은 거의 서사가 없기도 하고, 최근의 이미지-메이킹의 거대한 트렌드가 있는데 색과 소리의 리듬이나, 그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것이다. 어떤 영화에는 강력한 서사가 있지만 서사가 전부인 것은 아니다. 그것을 관객과 공유하는 시네마적인 방식과 해석을 찾아야만 한다.

내 관점에서 영화비평가가 하거나, 해야 하는 것은, 먼저 본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영화 안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다. 캐릭터와 편집, 프레임, 리듬, 그리고 벌어지는 사건들도 있다. 이 요소들 전체가 나에게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주고, 내면의 무언가를 건드린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지만, 특히 비평가에게 더 적용된다. 물론 모든 관객은 영화를 보며 반응을 하고, 그 모든 반응이 타당하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서로 다르게 느끼는 것은 합당한 일이지만, 나는 (평론가로서) 단지 반응을 하는 데 그치지는 않고 글쓰기를 통해 그다음 단계에 나아가려 한다. 바로 영화가 하려는 것과, 영화가 해도 된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한 이해를 돕는 작업이다.

영화 한 편을 놓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큰 범주에서 어떤 국가나, 장르, 감독의 영화를 모아 놓고 그 영화들이 모여서 내는 효과나 커다란 프로세스를 보는 것이 더 효과적이기도 하다. 이것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영향을 주기도 하는데, 물론 관객들이 그 영화를 보았을 때를 말한다. 누군가 그것을 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때로는 그냥 보여지는 것보다는 주의를 끄는 것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아까 말한 대로, 누군가 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 <익스티리어, 나이트> 스틸컷

이지영

당신은 마르코 벨로키오(Marco Bellocchio)의 <익스티리어, 나이트>(Exterior, Night, Esterno notte, 2022)가 형식과 상관없이 '시네마적 경험'이었고, 5시간 30분의 형태로 영화관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표현했다. 스토리와 플롯, 인물을 다룰 때 분명 TV 시리즈에서만 가능한 시도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러닝타임이 길기 때문이 아니라 넷플릭스 등 OTT에서 제공할 수 있는 거대 자본과 창작자의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외적인 조건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TV시리즈는 시네마의 영역을 점차 확장하고 있는가, 아니면 역으로 그 영역을 침범하고 있는가.

장-미셸 프로동

모든 사람들이 해야 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것 중 하나가 플랫폼과 TV시리즈를 구분하는 것이다. 이 둘은 전혀 다른데, 플랫폼이 무엇이든 보여줄 수 있는 도구라면, 시리즈는 픽션의 특정한 포맷이다. 플랫폼에서 영화, TV시리즈를 포함한 많은 콘텐츠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엔터테인먼트와 같은 패턴이다. 플랫폼은 이미지들을 유통하는 새로운, 아니 어쩌면 이제는 주요한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넷플릭스를 하나의 모델로 생각하는 것은 큰 실수라고 생각한다. 넷플릭스는 5년 뒤에는 사라질 수 있고, 그만큼 현재 굉장히 취약하다. 수십억 달러의 부채를 회복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디즈니, 애플, 아마존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바라 건대, 더 작은 플랫폼들이 성장하여 미국에 기반을 둔, 플랫폼의 정글에서 살 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또 잘못된 관념들이 있는데, 모든 사람들이 넷플릭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넷플릭스의 성공은,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이야기하도록 한 데 있다. 이들은 수백 수천만 달러를 써서 다른 플랫폼을 제치고 더 눈에 띄지만, 이런 효과가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플랫폼들은 기본적으로 TV시리즈를 위해 만들어졌고, 시네마를 마치 상품 진열장처럼 광고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넷플릭스는 마틴 스코세지(Martin Scorsese)와 코엔 형제(Joel Coen, Ethan Jesse Coen), 봉준호에게 거금을 주고 그들을 섭외한다. 단순히 그들의 이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각 감독들은 넷플릭스를 위해서 그들의 전작들에 비해 최악의 작품들을 찍고 있다.

이지영

마틴 스코세지 조차 그러한가?

장-미셸 프로동

전작들에 비해 <아이리시맨>(2019)은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아이리시맨>에서 한 모든 것들은 스콜세지의 전작에서 이미 더 잘 만들어졌다. 내 생각에는, 스코세지 감독에게 거금이 주어진 상태에서 그가 혼자 남겨진 것이 이러한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어떤 진정한 프로듀서가 와서는 "마티, 한번 이런 식으로 해봐요. 이 부분은 이렇게 하면 더 좋겠어요. 이번엔 이렇게 다르게 찍어봐요."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영화를 찍는 지엔 관심 없고, '우리에게 마틴 스코세지가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수입을 거두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TV시리즈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 먼저 고백하자면, 나는 TV 시리즈를 거의 보지 않고, 크게 관심을 갖지도 않는다. 내 생각에 시리즈물은, 시네마보다 문학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항상 고정된 패턴으로 제작되며, 어떤 면에서 가장 창의적인 TV시리즈 조차도 결국엔 똑같아져 버린다. 나는 <왕좌의 게임> 첫 시즌을 보고, 괜찮다고 생각하고 다양한 스토리와 아이디어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언제나 똑같다고 느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이고,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바와 정확히 똑같을 때 흡족해한다.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일은 흔치 않고, 때로 불편한 일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이미 아는 것을 소비하기 위해서 돈을 지불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TV시리즈들은 이렇듯 똑같이 찍어낸 것처럼 만들어진다. 나에게 있어 이것은 예술과 대립되며, 시네마가 '되어야 하는 것'과 시네마가 '해야 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TV시리즈의 대중적인 인기 때문에 시네마는 위협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매일, 매주, 전체 시리즈를 쭉 따라가면서 반복적으로 시리즈물을 보면서 이런 생각들이 점차 더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신적인 노예 상태인데, 본인이 원해서 노예가 스스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최악이다. 마치 중독되는 것과 같다. 중독 또한 노예로 전락하는 것이다.

시리즈는 반복적으로 같은 레퍼런스들과 같은 캐릭터와 같은 이유를 제공하면서 중독적으로 만들어진다. 물론, 미장센과 플롯에 상상력이 많이 들어갈 수는 있지만, 시리즈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반복적인 상품을 생산해내기 때문에 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상품을 반복적으로 찍어낼수록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네마의 본질과는 정 반대된다. 시네마는 반복되거나 정형화되지 않아야 한다. 흔하지는 않을지라도 영화는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대상이어야 하며, 영화는 대부분의 순간에 새로운 무언가를 약속해주어야 한다.

 

영화 <아이리시 맨> ⓒ 넷플릭스

이지영

영화감독 페드로 코스타(Pedro Costa)는 저작권에 상관없이 자기 영화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이야기했다. 이것은 단적인 예로 그만큼 아트시네마가 수요가 적다는 것을 뜻할 텐데. 아트시네마의 특성상 수입 단절이 작가들로 하여금 위축된 환경을 조성하게 될 때, 점차 아트시네마의 규모가 축소될 것이라는 우려를 해보게 된다. 더군다나 저널리즘의 혹평이 무색하게 계속해서 양산되는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수요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앞으로 아트시네마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고 있나.

장-미셸 프로동

나는 우리가 거대한 변화들을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플랫폼이고 또 하나는 TV시리즈다. 둘은 다르지만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코로나도 있어서, 우리는 사회적으로 깊은 변화들을 겪고 있다. 즉 사물에 대한 사고방식이나, 사물에서 무언가를 기대하던 것들이 깊이 영향받았다는 뜻이다.

나는 아직도 답을 찾아야 할 것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약해지는 것 같지만 점차 더 강해질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극장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전 세계적으로 문을 닫는 극장보다 열리는 극장들이 더 많다. 어디에서나 그런 것은 아니고, 이전과 똑같은 극장도 아니며, 예전과 같은 영화를 보여주지도 않을 것이고, 당연히 여러 변화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네마 그 자체나, 영화관 자체에 대한 접근은 전혀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영화나 극장에 가고 싶으면, 일련의 행동이 필요할 것이다. 보고 싶은 영화를 늘리려면 여러 종류의 액션, 예를 들어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행동, 직업적이고 경제적인 행동에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과 같은 환경으로 우리는 이미 진입했고, 앞으로도 더 많이 겪게 될 것이다. 이것은 미래를 위한 과제이기도 하다. 이미 많은 부분을 잃거나, 손실되기도 했지만, 수많은 과거의 유산들과 필름 메이킹의 창조성은 여전히 살아있다.

양적으로, 특히 금전적인 흐름에 있어서는 이전보다 저조한 수준이 되었지만, 나는 비록 증명하기 어렵더라도 우리가 예술 영화라고 부르는 것들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아니, 예술영화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시네마 전체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블록버스터들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고 전체 시네마, 부산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이 시네마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류 안에 깊게 뿌리 박혀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와, 실제로 영화를 보러 가기 위해 집 밖을 나서고 티켓을 산다는 행위를 연결시키는 구체적인 조건들에 있어서는, 전반적인 사고방식의 변화만큼이나, 생활 방식에 있어서도 다시 적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최근 10년 동안의 변화 속에서 이러한 이행 과정을 겪고 있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이런 변화들이 좋은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시네마는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다. 변화하지 않으면 죽는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슬퍼할 필요가 없다. 재차 강조하지만, 예전과 똑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변하지 않는다면 죽기 때문에, 변화해야만 한다. 어느 순간엔 내가 너무 나이가 들어서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나는 이러한 변화에 관심이 많다. 이런 내적인 움직임들은, 쇠락의 증거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음의 증거이다.

이지영

유럽에서는 언어과 국경을 초월한 영화 공동 투자/제작이 활발한 반면 아시아는 비교적 이러한 관습이 덜 형성되어 있다. 당신은 한국뿐 아니라 다른 아시아 영화에도 관심이 많은데, 하마구치 류스케(Ryusuke Hamaguchi)의 <드라이브 마이카>(2021) 혹은 고레에다 히로카즈(Hirokazu Kore-eda)의 <브로커>(2022) 같은 아시아 문화권 내의 합작 시도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장-미셸 프로동

우선은 투자 기회 때문에 공동 투자·제작된 유럽의 많은 영화들이 상당히 안 좋은 결과를 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20여 년 전에 '유로 푸딩'이라고 불렀던 영화들이다. 이것들은 공동제작의 기회들이, 실용적 일지는 모르나 그것 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나는 <브로커>가 그런 경우이지 않을지 걱정이 된다. 반대로 <드라이브 마이카>는 분명 일본 영화이지만, 작품 자체의 타당함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나라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지아장커의 거의 모든 영화들은 일본인 이치야마 쇼조(Shozo Ichiyama)와 공동제작했는데, 이것은 논쟁의 여지없이 중국 영화로서의 진정성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프로젝트에 더 용이하도록 공동 제작 파이프라인을 만드는 데 그치는 것 아니라, 그 프로젝트들의 예술적인 통일성 및 일관성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시네아스트가 자국을 보는 시선만큼 타국을 심도 있게 들여다볼 때도 그러하다. 홍상수, 구로사와 기요시(Kurosawa Kiyoshi), 압바스 키아로스타미(Abbas Kiarostami), 챠이밍 량(Tsai Ming liang) 그리고 다른 감독들은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지영

끝으로, 근 10년간, 한국 영화는 기록적인 성장과 성취를 이루었다. 한국에서 가장 알려진 시네아스트들(홍상수, 봉준호, 박찬욱)과 그들의 영화에 대한 세계적인 인지도도 아울러 높아졌다. 오래전부터 한국영화에 애정을 가져온 입장에서 이들의 성취를 어떻게 지켜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렇다면 한국 영화, 혹은 감독들은 아직도 앞으로의 미래가 기대되는 잠재력을 갖고 있는가.

장-미셸 프로동

질문에서 언급한 세 명의 위대한 감독들은 전적으로 그들의 커리어를 이어갈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언제까지나 전 세계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나는 더 젊은 한국의 시네아스트들이 계속 발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창동이나 김기덕만큼이나 세대를 잇는 커다란 발견은 아직까지 보이지 않았다.

윤제균, 연상호, 그리고 김성훈 감독이 이제 막 관심을 끌기 시작했지만, 내 기준에서는 이들을 그 증거라고 보기엔 아직 어렵다. TV시리즈에서 거둔 성공의 무게는, 진정한 시네마 프로젝트에서 재능 있는 신진 감독들의 발걸음을 돌릴 수 있고, 이는 아주 유감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나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수상자 명단에 있는 한국 영화들을 아직 보지 못했는데, 그들 중에서 미래의 위대한 작가들을 발견하길 바란다.

[통역 지혜성]

[인터뷰 및 번역 이지영, karenine@ccoart.com]

※ 참고자료

(1) A film is an oneiric system, an imaginary microcosm, whose forc of gravitation – which I keep repeating, is independent of its artistic quality – works more powerfully on the imagination than pure television. <André Bazin's New Media> André Bazin (Author), Dudley Andrew(Editor), California Press, p.146

(2) <FILO> No.27 Jul. Aug. 2022 pp.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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