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 말하자면 줄기차게 호상을 소망했다. 잘 죽고 싶었다. 장래의망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에게 잘 죽고 싶다고 대답한 적도 있다. 장래희망이 죽는 것이냐고 되묻는 사람에게 죽고 싶은 것이 아니고 잘 죽고 싶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을 때만은 여한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름엔 복숭아를 듬뿍 먹고 가을엔 사과를 양껏 먹을 수 있는 정도로 살다가 양지바른 곳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 황정은 『낙하하다』, 문학의 숲, 2014
1.
나는 이따금 황정은 작가의 단편 『낙하하다』 속 몇 줄의 문장을 떠올리곤 한다. 여름에는 복숭아를 듬뿍 먹고 가을엔 사과를 양껏 먹을 수 있는 정도의 삶은 어떤 삶일까. 만약 그 삶을 그린다면 준비해야 할 종이는 얼마만 해야 할까. 모르긴 몰라도 분명 크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작은 크기를 소망하는 이의 삶은 얼마나 작고 작은 걸까. 나는 위 문단을 생각할 때마다 삶의 크기를 상상하곤 한다.
잘 죽고 싶다는 꿈. 호상이란 꿈. 죽을 때만은 여한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꿈. 소설은 잘 죽기 위해선 잘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나는 저 인과는 아무래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잘 산다는 건, 여한 없이 죽는 것보다 어려울 것이라고. 분명 그러겠다고 생각한다. 죽어보진 않았지만 분명 그러리라 굳게 믿고 있다.
2.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가 '이미 죽어 있는 삶'에 대한 영화라면 <미안해요, 리키>(2019)는 '살아 있지만 이미 죽어 있음'에 대한 영화이다. 전자 속 시스템은 비인간적인 공정함으로 살아있는 다니엘을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이, 후자의 시스템은 리키를 비롯한 노동자를 일하는 좀비(dead alive)로 보여준다. 두 영화가 바라보는 삶에 대한 태도는 다르지만, 공통점이 많다. 소외, 노동, 외로움. 나는 많은 영화가 현실의 거울상이라 믿는 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삶은 죽음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 걸까.
3.
2022년 10월 15일, 한 생이 기계에 의해 마감 당했다. 스물세 살이었고, 2인 1조가 아닌 혼자 일을 하고 있었다. 근처에는 사십 명이 넘는 노동자가 있었다. 기계에는 안전장치가 없었다. 가족이 있었고 애인이 있었다. 사고가 발생한 다음 날 회사는 검수가 끝나지 않은 기계에 흰 천을 덮어 놓고 사망 현장에 있던 노동자들에게 작업을 지시했다. 그리고 이 회사는 영국 진출에 관한 소식을 대대적으로 내보냈다.
프로이트는 애도를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라 규정했고 애도는 대상에게 집중되었던 리비로를 철회해 새로운 대상에게 전위하였을 때 완성된다고 보았다. 여기에 더해 자크 라캉은 죽음을 '생물학적 죽음'과 '상징적 죽음'으로 분류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유기체가 죽으면 유령이 태어나는데 그것이 세계를 활보하며 공백의 기호로서 죄책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선 상징적인 표상을 도입해(제사) 유령에게 죽음을 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령에게 사로잡혀 자기처벌을 특징으로 하는 우울에 빠지게 된다. 프로이트와 라캉은 내게 죽음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졸려 죽어. 이렇게 해도 낼 300봉은 더 까야 하는데... 서럽다."
나는 여기서 다시 황정은의 문장을 떠올린다. 잘 죽는다는 것과 여한 없는 죽음에 대해. 여한을 생각해볼 틈도 없었을 사고에 대해. 우리는 이것을 '사고'라고 부를 수 있을까. 사건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에도 노동자의 손이 끼였고 회사는 그가 비정규직이라며 방치하였다. 기계에는 안전장치가 달려 있지 않았고 2인 1조로 진행해야 하는 작업을 홀로 처리하고 있었다. 이는 사고가 아닌 예견된 살인이라 불러야 정확하다.
4.
회사는 피해자가 아닌 소비자에게 사과문을 발표했고, 장례식장에는 피해자를 살해한 공장에서 만든 빵을 보냈다. 기업은 그를 두 번 죽였다. 생물학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엔 너무 어린 생명을 앗아간 것도 모자라 애도할 시간마저도 강탈해 버렸다. 22년의 살인자 없는 살인은 이렇게 일어난다. 현실은 거울에 비친 상보다 더 비참하고 참혹하다. 그래서 더 서럽다.
여한을 생각해볼 틈도 없었던 죽음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서럽다"는 죽음은 말 그대로 서글프다. 나는 이 죽음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무력해진다. 하지만 이 무기력함이 엔딩이 되어선 안 되지 않을까. 이 세계에서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22년 10월 15일에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다시는 참상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