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th BIFF] '스칼렛' 21세기판 백마 탄 왕자
[27th BIFF] '스칼렛' 21세기판 백마 탄 왕자
  • 김경수
  • 승인 2022.10.2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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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수공예품의 시대를 회고하다"

피에트로 마르텔로의 신작 <스칼렛>은 2022년 칸 영화제 감독 주간 개막작으로 최초로 공개되었으며, 지금도 세계의 많은 영화제에서 주목받고 있는 영화다. 러시아 작가인 알렉산드르 그린의 단편소설 『스칼렛 세일즈』를 각색한 프랑스 작품으로, 원제는 <L’envol>로 비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은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전후 시기를 다루며, 현대 문명이 들어서지 않은 노르망디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 부산국제영화제

<스칼렛>은 한 편의 동화와도 같다. 이 작품은 2부로 나뉘며 1부는 아내를 잃은 전직 군인 라파엘(라파엘 티에리), 2부는 그의 어린 딸인 줄리엣의 이야기를 다룬다. 먼저, 라파엘은 전쟁이 끝난 뒤 시골 마을에 정착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그를 반기지 않기에 마을 외곽에서 목수 일로 생계를 유지한다. 그는 타고난 손재주로 목각인형과 장난감 등을 제조해 마을 여기저기에 납품한다. 피에트로 마르텔로 감독이 이번 부산국제영화제 GV(관객과의 만남)에서 언급했듯, 라파엘의 캐릭터는 피노키오에 등장하는 제페토 캐릭터와 유사하다. 라파엘은 아들린(노에미 르보브스키) 등 마을 외곽으로 밀려 나간 이웃과 함께 어울리며 살아간다.

그의 딸 줄리엣은 거기에서 사람들과 동떨어져서 시와 노래, 그림 등을 마음껏 그려내며 예술에 깃든 힘을 깨달아간다. 그런 와중에 그녀는 마법사로부터 "하늘을 나는 주홍 닻을 단 배에 납치될 것"이라 예언을 듣고 거기에 타고 있을 왕자를 기다린다. 하늘을 나는 주홍 닻을 단 배는 비행기고, 세계를 탐험하는 비행사인 장(루이 가렐)이다. 장은 노래하는 줄리엣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를 물색하고자 마을을 배회한다. 이때, 영화는 이를 백마 탄 왕자와 비스름한 이야기로 가공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줄리엣이 이 사랑을 주체적으로 이끌도록 한다. 이후, 차츰 누구도 목제 장난감을 사지 않기 시작한 시기가 도래하고 라파엘은 줄리엣의 권유로 마지막으로 배 앞머리에 놓을 조각상을 작업한다. 그 조각상은 라파엘이 상실한 아내와 닮아있으며, 조각을 만드는 순간에 라파엘은 죽는다. 줄리엣은 장과 함께 마을을 떠난다.

피에트로 마르텔로 감독은 다소 심심할 수 있는 이 이야기를 황홀한 미장센으로 찍는다. 16mm 필름으로 찍은 화면에 거칠게 도는 은화 입자는 자연의 색감을 그대로 담아낸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감독은 영화 곳곳에 푸티지 필름을 삽입한다든지 그것과 똑같이 찍은 화면들을 연출한다. 환상적인 가브리엘 야레의 음악이 빈티지한 감성을 잘 살려내기에 영화를 보는 내내 꿈꾸는 듯한 감흥에 젖게 된다. 이 영화는 있는 그대로 보아도 아름다운 영화이므로 여기에 말을 더하는 것이 실례라 느껴질 정도다.

 

영화 <마틴 에덴> ⓒ 알토미디어

본격적으로 영화를 이야기하기 전에 피에트로 마르첼로의 전작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의 픽션은 여러 장르가 충돌하는 격전장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영화는 그러한 충돌에서 마술적인 효과를 자아내고야 만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전작인 <마틴 에덴>(2020)의 경우, 이 작품의 장르를 정의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신분이 다른 두 사람의 격정 어린 사랑을 다룬다는 점에서 멜로드라마의 플롯을 지니며, 빈민가 출신에서 사회주의 작가로 거듭나려 고군분투하는 마틴 에덴(루카 마리넬리)의 일대기를 다루기에 정치 영화로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마틴 에덴>은 SF라고도 할 수 있다. 1909년에 출간되었고, 시기상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전환하고 있는 순간의 영국을 다루는 소설을, 연도를 특정할 수 없는 현대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로 각색한다. 시공간의 변화에 따라서 마틴 에덴도 각색되어야 마땅하지만, 영화는 마틴 에덴을 20세기가 만든 모순이 가득한 인간상으로 남기려 한다. 결국, 이 영화를 타임슬립 SF로 만드는 것은 영화의 결말이다.

주인공 마틴 에덴은 언뜻 창문 아래를 지나가는 자기 자신을 미행하다가 어느 해안가로 접어든다. 거기에는 "전쟁이다!"라며 소리를 지르는 노인과 해안에 떠밀려 온 난민들이 있다. 여기에다가 다큐멘터리를 네 편이나 찍은 감독이면서 아키비스트인 감독 특유의 미장센이 끼어든다. 명백히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8mm와 16mm, 35mm 등 필름이 동원되며, 과거에 버려진 필름 조각(파운드 푸티지)들도 쓰인다. 무엇보다 버려진 필름들의 미장센과 똑같이 찍은 장면들이 더해지기 시작하면서 영화의 시공간은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다. 마르첼로가 하고자 하는 실험은 20세기를 그려내고자 하는 시도다. 20세기를 배경으로 한다고 한들, 20세기를 단일한 미장센으로 찍는 것은 온갖 요소들이 복잡하게 충돌하는 20세기를 그려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마르첼로는 플롯이 그러하듯 시공간을 모자이크화하는 방식의 스토리텔링으로, 영화의 요소들을 충돌하게 하는 독보적인 스타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 부산국제영화제

<스칼렛>은 그러한 전작과는 정반대로 동화적인 20세기를 그려낸다. 노동자인 티에리마저도 비참한 모습이라기보다는 무언가에 전념하는 아름다운 인물로 그려진다. 또 이 영화는 명백히 예술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마녀로 몰려서 마을 청년들에게 대상화를 당하지만, 이를 헤쳐 나가는 여성의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끝내 비행기를 타고 자신이 구한 장을 따라가고자 하는 줄리엣의 강한 의지는 이 영화를 시대착오적인 동화로 두지 않는다. 또 다른 관점으로 이 영화는 문명과 마을 사람들 등이 집시 등 이방인을 추방하게 하는 메커니즘에 대항한 마술적인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는 줄리엣과 라파엘이 만드는 수공예 예술을 마법으로 그려내면서도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지금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를 질문하는 영화로 유의미하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아시모프의 명언을 생각할 때, 우리 사회는 실제로 마법으로 가득 차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스칼렛>의 미학은 모든 것을 마법화하는 상품화와 테크놀로지에 맞서서 백 년 전인 20세기에 여전히 남아 있던 마법을 살려보자는 데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기술로 인해서 인간이 진보하는 것이라 신뢰하며, 기술사를 흘러가는 시간순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스칼렛>은 그러한 경험을 거스른다. 이 영화의 푸티지 파운드는 이러한 주제의식 아래서 작품의 정서와 맞물려 있다. 마법이 사람을 구하기도 했던 어떤 세계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낭만적 노스탤지어다. 감독은 노스탤지어로 퇴행하고 거기에 갇혀 있지 않으려 애쓴다. 웨스 앤더슨이 과거에 머무르려고 강박적인 조형과 대칭으로 폐쇄적인 세계를 만드는 데에 비해, 이 영화는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포착해내려 한다. 마술적인 것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 근대를 문득 드러내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만든다. 아직 장인의 손길이 남아 있어서 하나의 진본만이 가치가 있는 기술적 복제 시대 전의 예술작품을 드러내는 듯한 라파엘의 목제 인형들, 비행기가 있어도 여전히 미지로 가득한 세계를 탐험해야만 했던 탐험가라는 직업이 그러한 것이다. 또한 그림, 노래와 시를 구분하지 않고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쥴리엣도 마찬가지다.

세계가 아직은 미지이던 시절을 그려내고자 하는 <스칼렛>의 미장센은 이러한 과거의 것에 매끈히 잘 녹아나지만, 종종 곳곳에서 날카로워진다. 줄리엣이 아버지 대신 도심에 나가서 일거리를 구하러 갈 때 급작스럽게 파리의 백화점을 연상하게 만드는 파운드 푸티지가 삽입된다. 이때 소격효과가 일어나듯 영화의 시공간이 1920년대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마찬가지로 라파엘이 전쟁에서 돌아올 때도 이러한 푸티지가 삽입된다. <마틴 에덴>의 파운드 푸티지는 유년기의 상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플래시백으로 삽입되는 데에 비해서, <스칼렛>의 파운드 푸티지는 환상을 깨고 파열을 내는 방식으로 쓰인다. 인물의 감정선과 자연스레 이어지는 대신 충돌로 인해서 오는 활력이 줄기는 했으나, 도리어 이것이 매력으로 느껴진다.

<스칼렛>의 마술적인 순간은 이 영화가 시대착오적인 연출을 할 때 드러난다. 특히, 줄리엣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장면은 오페라의 한 챕터로 느껴졌으며, 라파엘이 아내의 조각상을 완성하고서 그것을 보는 장면은 무성영화로 느껴지게 한다.

<스칼렛>은 골동품의 미학을 되살리며, 아름다움이 가장 강한 무기라는 것을 드러낸다. 영화가 끝나고 꿈에서 깬 감흥을 느껴서 극장을 떠나기가 아쉬웠다. 영화가 끝나고 제자리에서 다시 보고 싶은 영화를 오랜만에 만났다. 어릴 적 디즈니 애니메이션 <피노키오>를 보았을 때나 느꼈을 법한 감동이었다.

[글 김경수, rohmereric123@ccoart.com]

 

 

스칼렛
Scarlet
감독
피에트로 마르첼로
Pietro MARCELLO

 

배우
라파엘 티에리
Raphael Thiery
줄리엣 주앙Juliette Jouan
노에미 르보브스키Noemie Lvovsky
루이 가렐Louis Garrel
욜랭드 모로Yolande Moreau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05분
공개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2022.10.05~14)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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