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3개월 2주 5일 그리고 글쓰기
[Critique] 3개월 2주 5일 그리고 글쓰기
  • 이상용
  • 승인 2022.10.1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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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벤느망>과 '아니 에르노'의 자리

2022년 한림원에서 발표한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Annie Ernaux)다. 오래전 번역되어 소개된 『단순한 열정』에서부터 대담집이자 자신의 작업에 대해 나눈 『칼 같은 글쓰기』에 이르기까지 그의 언어는 장황하지 않으면서도 강렬하다.

그것은 작가의 대담함 때문이기도 한데 다수의 작가들과는 달리 아니 에르노는 모든 것이 체험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소설의 형식을 따르는 작품이 대부분인 탓에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의 경계가 미묘하다. 『단순한 열정』에서 "그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한 책을 쓰진 않겠지."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라고 썼을 때, 다시 말해 에르노의 문장이 보여주는 이중성처럼 쓰지 않은 것을 썼을 때, 이것은 사실의 세계가 아니라 소설이라는 허구임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문장은 더욱더 에로노의 글쓰기가 소설의 세계임을 강조한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 글은 그 사람이 내게 준 무엇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소설 자체가 아니다. "내가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와 같은 말이다. 에르노는 분명히 사실이 아니라 체험을 쓴다고 했지만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다"는 말에 휘둘려 체험을 사실과 동일시가 된다. 어쩌면 아니 에르노는 일부러 오해를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체험을 쓰는 것은 대다수의 작가들이 따라가는 길이다. 그녀의 선배 격인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연인』 뿐만 아니라 마지막 작품인 『이게 다예요』에서 체험으로 가득한 세계를 기록한다.

 

영화 <슈퍼 에이트 시절> ⓒ 부산국제영화제

19세기의 영국 작가 제인 오스틴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독신 생활은 물론이고 주변의 크고 작은 송사의 체험들이 단어와 문장으로 불려 나온다. 『오만과 편견』이 처음 나왔을 때의 제목은 '첫인상'이었다. 수정을 통해 다시 나온 제목은 '오만과 편견'이었지만 남자는 '오만'하고, 여자는 '편견'에 가득하다는 '첫인상'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출발은 변하지 않았다. 소설은 체험과 기억 그리고 일정한 관찰을 따르기 마련이지만, 허구의 세계로 완성된다. 결국 소설의 허구가 어떤 진실을 가리키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 내용이 사실인가 허구인가 하는 구별은 의미가 없다. 

다큐멘터리를 생각하면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눈앞의 사실을 카메라에 담았다고 해서, 그 장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해서, 다큐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답답한 일이다. 카메라가 기록한 사실의 조각들을 가지고 작가의 판단에 따라 편집함으로써 영화는 완성된다. 그 결과 어떤 사실을 가져왔고, 어떻게 사실을 이어 붙였는가에 따라서 같은 사실도 전혀 다른 진실이 된다. 

나아가 에르노의 작품이 진실을 말한다면, 체험을 내세운 그녀의 이야기가 실은 모두 거짓이라 해도 놀라지 않을 수 있다. 작가 아니 에르노의 개성은 다른 작가들이 단어와 문장 속에 꼭꼭 숨기려고 하는 '체험'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독자들을 끌어당긴다.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백년의 고독』이 출간된 후 전 세계에 번역이 되어 독자들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중에는 소설에 등장하는 돼지 꼬리를 단 아이가 자신의 동네에도 있다는 증언이 꽤 있었다고 말한다. 가보(작가의 애칭이다)는 독자들의 편지를 통해 자신의 소설이 환상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말하고 싶어했던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독자의 편지가 마르케스를 능가하는 허구여도 상관없다. 그렇게 믿으며, 그렇게 믿고 싶어하도록 세계를 작동시키는 것, 그것이 일급의 이야기꾼들이 만드는 세계이다. 

아니 에르노는 돼지 꼬리를 단 아이보다는 자신을 내세운다. 『단순한 열정』을 비롯한 작품에는 반드시 그녀가 등장하고, 그녀의 기억과 그녀의 체험을 헤매고 다닌다. 에르노의 세계는 한 마디로 '드러냄'의 세계다. "이 글은 그 사람이 내게 준 무엇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라고 쓸 때 알 수 있는 드러냄 말이다. 에르노의 개성이라 부를 수 있는 특유의 노출증은 자신의 기억(때로는 희미한 기억)과 고백과 소설 사이를 오가며 독자들에게 강력한 믿음을 형성한다.

하지만 실화와 진실은 별개의 문제다. 중요한 것은 진실성을 구현하는 작가의 능력과 언어로 이뤄진 작품일 따름이다.

 

영화 <슈퍼 에이트 시절> ⓒ 부산국제영화제

에르노의 영화

아니 에르노의 작품이 영화로 옮겨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IMDB에 나온 필모그래피를 따라 살펴보면 최근에 감독으로 이름을 올린 작품이 나온다. 아들과 공동으로 연출한 <슈퍼 에이트 시절>(2022)은 여러 영화제에서 소개되었다. 아니 에르노는 2022년 9월 30일에 개막한 뉴욕 영화제에 참석하기도 하였고, 이곳에서 대담 행사 갖기도 했다. 이 영화가  처음으로 공개된 것은 칸 영화제 감독 주간으로 보인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에도 포함되어 있다. 서승희 프로그래머의 소개글에 따르면 "1972년에서 1981년 사이에 전남편 필립 에르노가 슈퍼 8카메라로 촬영하고 아니 에르노가 내레이션을 입힌 이 영화는 어느 프랑스 가족의 10년을 되돌아본다. 그녀는 본인의 영화를 '한 가족의 아카이브일 뿐 아니라 1968년 이후 10년 동안의 여가 생활, 삶의 방식, 중산층의 꿈 등에 대한 증언′이라고 소개한다. 바캉스와 이사가 거듭될수록 아이들은 자라고, 소설가로서의 위치는 공고해지나 가까운 한 사람과는 멀어진다."라고 쓰고 있다. 이 영화에는 이국적인 풍경들도 존재하는데 알바니아, 이집트, 스페인, 러시아 등을 가족 바캉스로 다니며 기록한 개인과 가족을 슈퍼 8미리 카메라로 기록한 작업이다. 체험이라는 측면으로 보자면 펜을 대신해 카메라를 선택한 셈이다.

프랑스 작가들의 감독 경력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연인』의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 역시 <인디아송>(1975)을 칸 영화제와 뉴욕 영화제에서 상영한 바 있다. 그의 임종을 지킨 얀을 만난 것은 <인디아 송>을 일반 극장에 상영하였을 때였다. 얀은 뒤라스가 함께 한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한 인연으로 연락하기 시작한다. 뒤라스가 연출한 영화는 단편을 포함하면 10편 이상이나 된다. 뒤라스와 함께 프랑스 누보로망 작가로 손꼽히는 '로브그리예'는 자신의 소설을 기반으로 한 영화들을 지속적으로 작업하거나 나중에는 영화만을 위한 작업을 하였는데, 에릭 로메르의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1969), 베르톨루치의 <순응자>(2016)의 주인공인 장 루이 트리티낭과 함께 <유럽횡단특급>(1966), <거짓말 하는 남자>(1968) 등의 영화들을 만들었다. 그의 영화 만들기는 2000년대까지 이어져 <그라디바>(2006)를 선보인다.

에르노의 경우는 주로 다른 연출자들이 원작을 옮긴 것이다. 가족이 기록한 영상과 짧은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이력을 제외하면 2008년에 에르노의 『집착』을 패트릭 마리오 버나드와 피에르 트리비딕 감독이 <다른 사람>(2008)이라는 제목으로 베니스 영화제에 상영한 바 있고, 2020년에는 에르노의 가장 유명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단순한 열정』을 동명의 제목으로 다니엘 알비드가 연출한 바 있다. 소설 『단순한 열정』이 그 남자에 대한 묘사나 설명을 괄호로 묶어 둔 채 직접적인 묘사를 하지 않는다면, 영화는 그 남자를 알렉산더라는 러시아인으로 묘사한다. 심지어 남자의 이미지를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여주인공 엘렌을 그녀의 아들이 목격하는 장면은 원작과는 꽤 멀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의도는 일상을 살아가는 여성의 욕망을 가감없이 묘사하고자 함인데, 이러한 접근은 드러내는 것을 결국 문장 속에 잠가 두는 아르노의 표현과는 거리가 있다. 영화는 노골적일 따름이다.

 

ⓒ (주)영화특별시SMC , (주)왓챠

가장 유명한 작품은 2021년에 베니스 영화제 경쟁 부문에 선보여 대상을 수상한 <레벤느망>이다. 국내에 소개된 원작의 제목은 '사건'이다. 프랑스어 L'Événement(레벤느망)은 '사건'이라는 뜻이다. 2021년 상영 당시 봉준호 감독이 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연출을 한 감독 오드리 디완의 두 번째 장편이었다. 경쟁부문 작품 중에는 제인 캠피온과 파울로 소렌티노와 같은 거장들의 수작이 있었고, 평판도 좋았다. 결과적으로 캠피온의 <파워 오브 도그>(2021)는 감독상을 수상하였고, 소렌티노의 <신의 손>(2021)은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다. 두 부문 모두 베니스의 은사자상을 부여한다. 대상인 황금사자상은 <레벤느망>에게 돌아갔다. 제목 그대로 예상하지 못했던 영화제의 '사건'이었다.

 

3개월 2주 그리고 5일

<레벤느망>은 단순한 이야기다. 앙굴렘(원작에서는 노르망디의 중심도시 루앙으로 묘사된다)에서 문학을 공부하는 여대생 '안'(아나마리아 바토로메이)이 주인공이다. 그녀는 대학 기숙사에 살고 있다. 브레지어를 이리저리 착용하고 파티로 향하는 기숙사 여대생들의 모습이 등장하고, 다음날이 되면 문학 수업을 듣는 장면이 등장한다. 교수는 아라공의 시를 읽은 후 뜻을 말해보라고 한다. 한 여학생을 지목하지만 모르겠다는 답변뿐이다. 교수는 안을 지목한다. 그는 이 시를 "연인의 참사를 통해 국가의 참사를 말하다"면서 정치적인 해석을 한다. 아라공의 시처럼 단어와 단어를 반복하는 기법을 뭐라고 부르는가라는 질문에 '아나포라'라고 답을 한다. 

안은 영민하고, 지적으로 충만하며, 주변 친구들과 잘 지내는 1960년대 여대생이다. 물론 기숙사에는 그녀에게 시비를 거는 인물들도 있다. 그런데 기숙사로 돌아와 속옷을 갈아입은 후 책상에 안에 메모하는 안의 모습이 화면 가득 등장한다.  "4월 29일 오늘 또 없음" 그리고 처음으로 자막 화면이 뜬다. "3주 차"

이 영화의 자막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영화의 서사 작용 중 하나인 디제시스(diegesis)라 개념이 있는데,  스크린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사건들의 작용과 관계를 가리킨다. 디제시스는 주로 인물을 둘러싸고 작용하며, 영화 안의 이야기를 형성한다. 영화의 미장센도 사건과 관계에 일조하는 디제시스다. 그런데 영화에 쓰이는 배경 음악이나 자막 화면은 영화 속 인물이 경험하거나 볼 수가 없는 외부적인 요소다. 이것을 비디제시스(non-diegesis)라고 부른다.

"3주 차"라는 자막은 전형적인 비디제시스의 요소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안이 임신을 하였고, 제시된 자막은 그녀가 임신 기간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안과 의사나 지인과의 대화 중에 임신 기간이 등장하기도 한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임신의 경과를 알리는 자막은 더 이상 인물이 인지하지 못하는 비디제시스적인 요소가 아니라 그녀를 조여오고, 압박하는 강력한 디제시스로 전환된다. 이것은 주인공과 관객 모두에게 해당한다.

이러한 전환의 방식은 영화의 스타일 전체에 해당한다. 한 여대생의 일상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화면 바깥에 놓여 있는 세계를 점점 더 안으로 끌어들인다. 프랑스에서 12주 이내에 자발적 임신 중지가 합법화된 것은 1975년의 일이다. '중력의 은총'을 쓴 철학자 시몬느 베유가 보건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때였다. 이 영화로부터 최소한 10년 이상이 흘러야 여성의 낙태 결정이 가능하다. 

안은 현재 시점에서 자신의 인생을 출산과 바꿀 수 없다고 말하지만, 의사든 친구든 낙태의 결심을 드러내는 순간 자꾸 외면당한다. 이 영화가 1960년대의 낙태를 둘러싼 법률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임신 주기가 흘러갈수록 그녀를 압박하는 현실이 된다. 오늘날에도 도시 앙굴렘은 인구 5만이 되지 않는 지역이지만 그녀를 도와줄 손길을 찾는 것은 만만치 않다.

 

ⓒ (주)영화특별시SMC , (주)왓챠
ⓒ (주)영화특별시SMC , (주)왓챠

영화의 화면 비율도 이야기의 작용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안을 보여주는 1.37:1의 화면 비율은 주인공을 제외하고는 다른 인물들이나 외부적 환경을 배제시킨다. 반대로 말하자면 안을 밀착하며 따라가는 카메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외부 인물이나 요소들은 무관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사건에 개입하게 되며, 작고 좁은 화면 안으로 치밀어 들어온다.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소방관 남자에게 외롭다고 말하는 안은 고립되어 있지만, 뜻밖의 돕는 손길과 그녀를 지켜보는 엄마의 존재처럼 좁은 화면을 밀고 들어오는 외부들이 있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디제시스가 있다. 임신의 불안으로 설거지를 하고 있던 안이 "엄마가 시험을 뭘 알아?"라고 말하자 따귀를 때리기도 하고, 안이 다가가 끌어안기도 하는 엄마 역을 한 배우는 상드린 보네르이다. 그는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2019)의 화면 속에도 잠깐 등장하는, 바르다의 영화 <방랑자>(1985)의 주인공이다. 프랑스의 마을과 평야를 끊임없이 걸어가다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한 여성의 이미지를 채현한 상드린 보네르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안과 닮아있다. 또한 안의 주치의로 등장한 배우는 파브리지오 롱기온이다. 그는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며, 다르덴 형제의 대표작 <로제타>(1999)에서 와플을 팔며 로제타를 도와주려고 했던 리케를 연기한 남자 배우다. <레벤느망>에서의 역할도 유사하다. 그는 안을 도와주면서도 낙태를 돕는 일은 거부한다. 하지만 그녀의 건강을 염려하면서 홀로 자궁을 자극한 후 병원을 찾아오거나 낙태 후 출혈로 인해 병원으로 실려 왔을 때 유산이라는 판정을 내린 의사가(모습은 정확히 보이지 않는다) 그로 짐작된다. 만일 낙태로 판정내릴 경우 안은 감옥에 가야만 한다.

오드리 디완 감독이 두 영화를 참조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안의 뒷모습을 따라가는 카메라는 다르덴 형제의 인장처럼 여겨지는 것을 보여주기를 활용하는 스타일이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안의 모습은 <방랑자>의 상드린 보네르다. <레벤느망>은 두 불어권 영화(벨기에, 프랑스)의 자장 아래에서 프랑스의 작가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영화적으로 다시 쓴다.

이러한 영화의 스타일은 에르노의 글쓰기와도 관련을 맺는다. 스웨덴 한림원은 유튜브 생중계를 통해 수상자 발표에서 "개인적인 기억의 뿌리와 소외, 집단적 억압을 용기 있게, 임상적 예리함으로 탐구했다"고 선정의 사유를 밝혔다. 선정 사유는 <레벤느망>에서도 발견되는 요소다. 한 여대생의 뿌리와 소외가 이 작품의 주제라고 할 수 있으며, 카톨릭의 교리가 지배하는 1960년대 프랑스 사회에서 한 여성의 개인적 결단(낙태)을 둘러싼 소외는 대학, 기숙사, 남자들, 가족 사이에서 반복된다. 안은 기숙사의 친구들인 엘렌과 브리지트에게 임신 사실을 고백하지만, 브리지티는 "우리가 알 바 아니야?"라며 처벌에 대한 공포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나중에 안을 찾아온 엘렌은 방학 한 달 동안 연상의 남자와 열정적인 섹스를 고백하면서 미안한 마음을 드러내기는 한다. 그것은 임신은 물론이고 섹스에 대해서도 쉽게 말하지 못했던 사회적 단면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임상적 예리함이 영화의 미덕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영화는 안이 낙태한 시체를 쏟는 장면, 탯줄을 매달고 가위를 가져와 달라면서 자신이 끊어버리지 못하는 장면들을 묘사한다. 일상 속에서 안은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해 섣불리 분노하거나 우는 인물은 아니지만 홀로 있을 때 소방관 남자의 말처럼 '슬퍼 보일'뿐만 아니라 울기도 한다. 그럼에도 자신의 인생을 위해 낙태 시술을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한 책들을 팔고(판매하는 책 중에는 샤르트르의 '벽'이 등장한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 '안 뒤셴느'라는 이름은 '아니(안) 에르노'가 되기 전의 가족의 이름이었고, 결국, 이 영화를 가능케 한 것은 1960년대 여대생으로, 문학도로, 임신한 여성으로 살아간 아니 에르노 이전의 아니 뒤센느를 카메라에 의해 재현하고 체험으로 이끄는 오드리 디완 감독의 노력 덕분이다.

 

ⓒ (주)영화특별시SMC , (주)왓챠

<레벤느망>에는 눈여겨 볼 몇 가지 장면이 있다. 하나는 안이 대학친구 장에게 시술을 도와줄 사람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는 대목이다. 원작에서는 유부남으로 나오는 장에게 말을 하는데 그는 아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노골적으로 성적인 요구를 한다. 영화에서는 다소 부드럽게 묘사했지만 평소 안에게 관심이 많았던 장은 안이 임신 사실을 고백하자 그녀를 달리 본다. 그녀의 섹스의 경험을 노골적으로 물어보고 불편하게 만든다. 그것은 1960년대 남성들의 성관념을 건드리는 장면 중 하나다. 

또 하나의 장면은 안 뒤센느가 어째서 아니 에르노일 수밖에 없는가를 대변하는 장면인데, 탐침관을 넣은 낙태 시술을 한 후 교수를 찾아가 자신이 듣지 못했던 지난 강의 내용을 알려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다.

"왜죠?"

"시험을 치려고요."

"너무 늦었어요."

"따라잡을게요."

"왜 관심이 돌아왔죠?"

"공부를 할 수 없었는데 이젠 아니에요."

"아팠군요."

"여자만 걸리는 병이었어요. 집에 있는 여자로 만드는 병."

"아직 선생님이 되고 싶나요?"

"아니요."

"왜죠?"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요."

"그게 뭔가요?"

"글을 쓰고 싶어요."

안은 임신을 여자만 걸리는 병이자 집에 있는 여자로 만드는 병이라고 부른다. 교수가 그 말을 다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잠시 생각을 하고 난 후 시험을 보고 통과해 선생이 되고 싶은가를 묻는다. 그러자 안은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글을 쓰는 일이다. 그 결과 오늘날 아니 에르노가 탄생했다. 이 장면은 원작에는 없지만 스크린 밖에 존재하는 작가 아니 에르노를 끌어오는 디제시스라고 할 수 있다. <레벤느망>은 에로노의 과거 이야기이고, 과거의 한 때를 통해 미래의 작가가 어떻게 탄생했는가를 이 장면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몰라도 상관은 없다. <레벤드망>을 차분히 관람한 관객이라면 그녀의 선택이 집에 있는 여자가 아니라 작가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공감하게 된다. 그것을 위해 좁은 화면 비율 속에, 지독하게 버텨내려고 하는 안을 따라가면서, 안이 지향하는 외부를 함께 바라보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은 7월 5일 시험을 치르는 안의 모습이다. 교내를 걸어가는 안의 뒷모습이 보이고, 교수는 빅토 위고의 시를 낭송한 후 시험을 시작하라고 말한다. 펜을 들어 쓰기 시작하는 안의 모습이 클로즈업 된다. 여전히 좁은 화면 위에 파란색 옷을 입은 안의 상체와 얼굴만이 화면 가득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보이고 고개를 숙여 쓰고 있는 그녀의 머리가 보인다.  쓰는 인간, 아니 에르노의 탄생이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과 에르노의 원작

<레벤느망>이 나왔을 때 크리스티안 문주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2007)과 비교하거나 언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드리 디완 감독이 낙태를 다루면서 문주의 영화를 의식하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두 영화의 전개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문주 영화의 주인공은 중절 시술을 하는 '가비타'(로라 바실리우)가 아니라 그녀를 돕기로 한 기숙사 룸메이트 '오틸리아'(아나마리아 마린차)다. 대학교, 기숙사, 임신 중절이 불가능한 시대상이 겹치지만, <레벤느망>의 기숙사 친구들은 안을 철저히 외면했다면, 블랙 마켓이 일상이 된 1980년대 루마니아에서 오틸리아는 기꺼이 가비타를 돕는다. 기숙사뿐만 아니라 호텔 로비 등에서 불법적으로 담배를 파는 일상적 묘사는 불법이 자행되는 시대임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다. <레벤느망>의 시대성과는 대조적이다. 오틸리아는 친구의 비용 때문에 연인에게까지 돈을 빌릴 뿐만 아니라 비용을 두고 시비가 일어나자 남자가 원하는 대로 섹스까지 한다. 이 남자는 자신의 행위가 목숨을 건 행위를 강조하면서 오틸리아뿐만 아니라 임신한 가비타에게도 섹스를 요구한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에서는 남자들의 태도도 더욱 중요하게 다뤄진다. 영화의 첫 장면은 대학교 복도에서 오틸리아와 남자 친구가 대화를 나누고 돈을 빌려준 후 키스를 하고 헤어지는 장면이다. 남자친구는 자신의 어머니 생일 파티에 와 줄 것을 청한다. 이어서 부산스러운 오틸리아의 하루가 보여지는데 호텔을 예약하고, 시술자를 만나고, 중절 시술을 위한 준비를 한다. 친구의 시술이 끝난 후에도 오틸리아의 하루는 끝나지 않는다. 약속한 대로 남자 친구 어머니의 생일 파티를 위해 집을 찾아간다. 그리고는 끝내 남자친구와 말다툼을 벌인다.

자신이 겪은 오늘(현실)을 솔직히 설명할 수 없다는 공포에서부터(생판 모르는 남자와 섹스를 해야만 했고) 이 세계 도처에 널린 위협에 대해 남자는 이해하지 못한다. 영화의 위기를 보여주는 이 시퀀스는, 임신 중절이라는 사건의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1987년이라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가 끝내 도달하는 지점은 차우세스크 독재 정권 말기의 모습이라는 것을, 그리고 독재적 권력은 매우 가부장적이고 남성적이며, 그것은 일상과 가족과 연인 사이에도 침윤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문주 감독이 선택한 방식은 임신한 여성을 한 발 떨어져 보는 오틸리아의 하루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가비타(왜 네가 직접 남자를 만나러 가지 않았느냐, 왜 임신 기간이 얼마인지 솔직히 말하지 않느냐)에게 불만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오틸리아가 연락이 되지 않는 친구가 걱정되어 호텔로 돌아가는 장면이다. 가비타는 방 안에 보이지 않는다. 잠시의 불안이 지나고 두 사람은 호텔 라운지에서 만나서 하루를 정리한다. 끔찍한 하루가 마무리되며 잠시의 평화가 찾아왔을 때 두 사람은 함께 밥을 주문한다.

 

ⓒ (주)영화특별시SMC , (주)왓챠

원작에서는 1960년대가 비교적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일주일 후,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달라스에서 암살당했다. 그러나 그런 사건조차 내게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케네디의 죽음은 1963년 11월 22일의 일이다. 또한 카톨릭적 배경들이 임신 중절을 둘러싼 갈등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건드린다. "기숙사 여학생 O.가 생도미니크의 수도원 부설 학교에서 자기 대신 프랑스 수업을 하겠냐고 제안했다…(중략)… 다음 날 수도원장에게 전화해서 수업을 못 하겠다고 전했다." 등의 카톨릭적인 배경들을 언급하거나 '새로운 라루스 백과사전' 1948년판에 등장하는 법조항을 인용한다. "법. 이들은 금고형과 벌금형을 받았다. 1. 몇 건의 임신 줄절 시술을 집도한 자. 2. 의사들, 산파 전문의들, 약사들 그리고 임신 중절 시술을 추천하고 용이하게 한 이들. 3. 스스로 임신 중절에 나선 여성 혹은 그에 동의한 여성. 4. 임신 중절을 선동하고 피임을 선전한 자. 더불어 범법자들에게는 체류도 금지된다. 2번 조항에 속하는 범법자들은 고려할 것도 없이 직업 활동을 일시적으로 금지하거나 자격을 완전히 박탈한다."

영화는 이러한 구체적 요소들을 가리고 안의 일상과 반복 속에서 점점 무너져 내리는 개인의 모습에 집중한다. 그 끝에는 대학의 시험이 있다. 이 시험을 통과해야만 안의 자기결정적 미래가 열린다. 그것을 위해 중절을 선택하고, 혼자이기를 결단하며, 끝내 펜을 든다. 그 결과 오늘날의 아니 에르노가 남는다. 그 모습을 상상하도록 영화는 이끌어 간다. 이 결말은 분명 아니 에르노를 상정해 두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결말일 것이다. 

영화와 달리 작가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겪었던 '사건'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고 있다.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이 사건에 대해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유일한 죄책감을 지웠다. 재능을 받았지만 낭비해 버린 듯. 경험한 사건에서 찾을 수 있는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모든 이유를 넘어서서 무엇보다 가장 확실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하나 있다. 그저 사건이 내게 닥쳤기에, 나는 그것을 이야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내 삶의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아마도 이것뿐이리라. 나의 육체와 감각 그리고 사고가 글쓰기가 되는 것, 말하자면 내 존재가 완벽하게 타인의 생각과 삶에 용해되어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작가의 운명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건이 일어났고, 그것을 경험했기에, 이야기해야 하는 의무감을 따라 쓴다는 것이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이 글쓰기가 타인에게도 이해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 되기를 꿈꾼다. 그것이 이뤄진 결과 에르노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오드리 디완은 에르노를 빌어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우연한 행운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대한 자신의 기록과 해석이 만들어 낸 우리 시대의 보편성이다.

 

※ 추신

10월 29일(토) 더 숲 아트시네마에서 19:10 <레벤느망> 상영 후, 영화와 원작을 오가며 탐독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번에는 원작을 들고 오시는 게 필수적인 프로그램입니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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