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th BIFF] '어느 멋진 아침' 무엇이든 볼 수 있는 눈
[27th BIFF] '어느 멋진 아침' 무엇이든 볼 수 있는 눈
  • 변해빈
  • 승인 2022.10.1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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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빛을 따라 영화의 영혼과 만나다"
ⓒ LES FILMS PELLEAS

영화는 그저 빛이다. 빛을 일상적으로 인식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어둠이 조성되면 이야기는 다르다. 극장에서 어둠은 여전히 빛이다.

 

1.

산드라(레아 세두)가 악몽에 시달린다. 밤이 깊었고 직전에 나눈 대화가 산드라의 무의식 속에서 되살아난다. <어느 멋진 아침>에서 단일하게 등장하는 이 꿈은 잠든 그의 얼굴 위로 베일처럼 겹친 상을 통해 인식된다. 꿈은 무의식의 얼굴이지만 이때는 영화의 프레임을 단독으로 차지하지 못하는 이미지이므로 그 자체의 형상보다 꿈의 출몰을 감당하는 얼굴과의 조화에 방점이 있다. 영화는 그 이중의 상을 보기를 요구한다. 하나의 프레임에 뒤섞인 산드라와 바다표범의 얼굴, 의식과 무의식, 몸과 정신, 실재와 허구라는 두 세계의 동시적 출현은 경계 지어진 이미지이자 경계를 허무는 잔상이다. 이는 산드라가 무의식의 눈을 통해 보는 인출된 기억의 이미지이자 동시에 관객의 망막에 맺힌 교차되고 얽힌 복시(複視)적 상이다.

환상과 허구를 동원해 실존하지 않는 것을 기어코 드러낼 때보다, 초월적인 세계는 현존하는 대상을 볼 수 없거나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찾아온다. 영화에는 산드라의 어두운 방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녀의 하루에는 아이(린)를 취침에 들게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 자신은 자주 불면의 선명함을 주시하고 흑백으로 물들어 있다. 그녀는 돌봄의 책임과 기별 없는 연인, 언어와 언어 사이의 인식되고 요구되는 간극을 비롯해 기다림의 행위에 가장 생산적인 인물이다. 산드라는 아마 그로 인해 불면의 고통과 친밀해져야 했을 것이다. 그럴 때면 산드라는 그저 미세하고 고요하게 실루엣으로서의 움직임을 보여줄 뿐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언급한 꿈보다 은밀하면서도 대담한 형태의 이미지의 출몰로 일컬어질 만하다.

다시 말해 <어느 멋진 아침>이 보여주려는 것은 프레임 내부의 어둠이 극장의 어두운 환경과 맞물렸을 때 물리적인 시야의 한계를 초월하여 지각되는 검은빛, 곧 심연의 얼굴이자 영혼의 그림자다.

스타일과 장르적인 면에서는 다르나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함께 공개된 라스 폰 트리에의 <킹덤 엑소더스>(2022)는 검은빛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연결된 통로를 지녔다. 전기 충격이 가해진 뇌파 실험에서 측정값을 유일하게 증명하는 이는 몽유병을 앓는 카렌이다. 실험의 결과는 다음의 가정을 증명한다. "우주는 소통에 실패한 수백 년의 고통으로 가득하다." 여기서 검은자위로 뒤덮인 몽중의 카렌의 눈동자가 보는 세계는 '표백의 늪'에서 되돌아온 하얀 베일의 '그것'들, 즉 고통받는 영혼과 공존하는 미지의 방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고통이 존재함을 부인하고 있었음을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 LES FILMS PELLEAS
ⓒ LES FILMS PELLEAS

<어느 멋진 아침>의 영혼은 저절로 움직이는 사물, 뿌연 대기의 어스름으로 재현되는 유령 이미지와 질적으로 다르다. 미아 한센 뢰베의 영혼은 차라리 인간의 외형과 성질을 그대로 지녔다. 그가 입장시킨 영혼들은 심안으로 느껴야 하는 상상 속 인물이거나 현실의 자아가 분화된 거울로 이해된다.

영화에는 화면 전체가 암흑으로 뒤덮이는 또 다른 순간이 있다. 이것이 페이드아웃 의한 블랙화면이 아니라 밤하늘이란 사실은 세공사가 심어둔 작은 유성들이 프레임을 가로지르고 나서다. 스스로 몸체에서 백색으로 산란하는 유성이 주는 황홀경이 있다면, 불면하는 산드라의 몸은 일종의 자생적으로 빛을 낼 수 없는 행성(그중에서도 린(카밀 레반 마틴스)이 행성의 목록에서 읊기를 제외한 명왕성)이며, 어두운 방은 고통으로 메워진 우주다. 인식능력의 한계를 넘어서 유성의 이동 경로를 산출하는 것이 과학과 기술이 열어준 미래인 것이 비해,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내면의 고통은 정념화되지 않으면 판독 불가한 행성에 불과하다.

여기서 어둠 속의 검은 실루엣으로서의 산드라의 몸은 연인 클레망(멜빌 푸포)이 말하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그녀의 몸과 공명하지만, 타인에게 도외시되는 슬픔과 불안의 정동이 보내는 검은빛처럼 느껴진다. 이때의 빛은 그저 어둠 속에 그녀의 몸, 그녀의 고통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자들만이 볼 수 있다.

 

2.

산드라의 고독이 밤과 방의 어둠을 부조한다면, 아버지(파스칼 그레고리)의 어둠은 기억의 황혼이 만들어낸 머릿속의 텅 빈 공간을 가리킨다. 이는 물론 관객이 체험할 수 있는 종류의 차원이 아니다. 이를 위해 영화는 다음 세 가지 상황을 제시한다. 먼저, 신체와 정신의 퇴행을 겪는 아버지에게 "무엇이 보이세요?"하고 산드라가 묻는 장면이다. 아버지는 마주 앉은 그녀의 몸이 보인다고 응답한다. 다음은, 아버지가 산드라에게 자신을 위해 찾아와 달라고 부탁하는 대목이다. 산드라가 그날 해야 할 것은 아버지의 몸짓을 '지켜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산드라가 아버지를 '보고 있으니'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그를 안심시킨다.

아버지가 머무는 병동의 노인들은 영화의 방인 프레임을 아무렇게나 침투하곤 한다. 노인들은 몸이라는 피사체로 존재할 뿐 어떤 이유와 형태로 어디에 위치하는지, 그들 스스로의 몸에 관해 사유하지 못한다. 산드라와 아버지가 나눈 세 번의 대화에서 몸을 본다는 행위에 몰두하는 지점은 어둠이라는 외적 세계의 힘이나 기억력의 오류 혹은 배반에 지배되지 않고 실존을 증명하는 시도로 읽힌다.

그런데 두 번째 상황에서 아버지가 봐달라고 부탁한 것이 하필 '잠자는 몸짓'인 것은 이상하다. 일례로 아버지가 아무것도 아니며 무엇인지도 모르는 대상(noting)을 기다리는 중이니, 이것을 어떤 기다림의 축적에 의한 산드라의 불면과 동일시해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잠에 빠지고자 하는 것은 그런 고통으로의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안식처에 대한 욕망의 표출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버지는 10분여의 잠이 영원이 될 수 있어 두렵다고 덧붙인다. 무의식의 체계에서 기억은 죽기보다 심연에서 살아 돌아오는 차원에 가깝다. '잠자는 몸짓'에 대한 갈망은 영면으로의 육체적 소멸에 대한 두려움보다 망각에 의한 존재적 사라짐이 더 고통스럽다는 표현인 걸까. 그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이 상황을 통해 아버지의 육체적 퇴화 이면의 보이지 않는 영혼의 상실을 보는 이가 산드라뿐이라는 사실을 체화하는, 그녀의 거듭되는 불면의 몸짓이다.

 

ⓒ LES FILMS PELLEAS

3.

<어느 멋진 아침>에는 몇 권의 저명한 작가들의 책이 거론된다. 영화는 그 책들을 읽어주지도 속을 펼쳐 읽게 하지도 않는다. 카메라는 그저 책장에 가지런히 꽃인 책의 나열을 보여준다. 프레임이 책들로 가득 채워져 있을 뿐인데 유구하면서도 신기롭고, 무심한가 하면 그 자체로 강렬한 풍채마저 느껴지는 듯하다. 산드라는 책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읽기 위해 선별하는 과정이 아버지의 삶이자 영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예로부터 서재는 깊은 사색을 통해 미로를 탐색하는 여정이자 성찰을 위한 존재면의 거울이며, 책을 통해 세계를 확장하는 일은 고유한 권리로 여겨져 왔다. 미아 한센 뢰베는 인식되지 않는 '아버지의 영혼'을 대신하여 책과 서재, 미로와 눈동자라는 심혼의 거울을 영화 곳곳에 심어둔다.

오프닝에서 화면 내부로 걸어 들어오던 산드라는 아버지의 문 앞에서 멈춰 선다. 산드라는 문을 닫거나(의자로 문고리를 고정해 노인들의 출입을 막는 문, 크리스마스 이벤트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문, 병원에서 배회하는 아버지를 외면하던 엘리베이터 문, 클레망과 재회 후의 현관 이중문) 닫히는(문을 여는 방법을 잊은 아버지의 문, 클레망이 떠난 후 홀로 남겨졌을 때의 문, 아버지를 뒤로하고 도망치듯 승차한 지하철의 문) 것을 보는 쪽이다. 이렇게 그녀의 걸음을 중단하는 건 분절되고 파편화된 기억의 문이다. 감독은 영화가 24개의 단기 기억(사진)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기억 장치임을 보여준다.

전술했듯 세 번째 상황에 이르러 아버지는 자신을 스스로 기억해서 지웠다. 산드라는 이제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를 차마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눈물이 시야를 가린다. 고개를 돌리고 자리를 피해버리는 걸음도 한몫한다. 산드라는 이전처럼 문을 닫고 고통 없이 그것을 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전작 <베르히만 아일랜드>(2022)에서 문은 언제나 열리는 쪽이었다. 크리스(비키 크립스)는 '문을 잠그는 룰'이 깨진 덕에 우연히 베르히만의 작업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은 공간을 구분 짓는 경계나 집필 중인 시나리오 속 가상의 차원과 만나는 입구일 뿐 아니라 현실의 파편적인 감정들의 조화를 회복하는 등불이었다

<어느 멋진 아침>은 문을 자동으로 열어주지 않는다. 우연의 은총이나 타인의 손길을 기대해선 안 된다. 따라서 그녀는 영화의 시작부에서 어느 노인이 전했던 말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그러니 동정은 안 된다" 그녀는 아버지의 '사라짐'을 동정해서는 안 된다.

 

ⓒ LES FILMS PELLEAS

돌이키면 이례적으로 기억의 퇴행과 상실의 고통을 기록한 아버지의 시는 시지각적 체험을 이탈한다. 시는 아버지의 목소리(내레이션)로 들리는 대신 산드라의 삶의 풍경과 조응한다. 이때 아버지의 시는 파괴되지 않으려는 자기 구제의 몸짓을 넘어 타인의 걸음을 비추는 보이지 않는 빛으로 은유된다. 그 빛을 벗 삼아 산드라는 보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도 아무것도 남지 않은 메모리아라는 방도, 어둠보다 짙은 망각의 고통도 보아야만 한다. 산드라가 아버지를 볼 수 있고, 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의 영혼은 죽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 이제 산드라가 스스로 눈물을 멈출 차례다. 영화는 외롭던 그녀의 눈물이 눈앞의 대상을 가리는 문이 아니라 개안의 물성을 지닌 열쇠라고 말한다.

그러자 마침내 문이 열린다. 아니, 산드라와 린, 클레망이 바라보는 마지막 전경에 문은 없다. 전망 좋은 난간에서 이들은 '무엇이든 다' 볼 수 있다. 도시와 건물,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 바람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푸른 잎사귀들, 태양이 감춰 둔 하늘의 유성도 볼 수 있다. 햇살에 찡그린 눈들은 그 어느 때보다 총기로 반짝인다. 눈으로 바라본 모든 것은 이렇게 영화의 영혼이 된다.

[글 변해빈, limbohb@ccoart.com]

 

어느 멋진 아침
One Fine Morning
감독
미아 한센 로브
Mia HANSEN-LØVE

 

출연
레아 세두
Lea Seydoux
파스칼 그레고리Pascal Greggory
멜빌 푸포Melvil Poupaud
니콜 가르시아Nicole Garcia
카밀 르방 마르탱Camille Leban Martins

 

제작 LES FILMS PELLEAS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13분
공개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2022.10.05~14)

변해빈
변해빈
2020년 경기씨네영화관 영화평론 우수상, 박인환상 영화평론 부문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현재 《코아르》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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