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th DMZ Docs] '발코니 무비' 발코니 앞에 블랙박스
[14th DMZ Docs] '발코니 무비' 발코니 앞에 블랙박스
  • 이현동
  • 승인 2022.10.1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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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코니라는 첫무대에 선 사람들"

필자는 다큐멘터리의 양식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초의 장편 다큐멘터리로 공인된 로버트 플래허티(Robert Flahery)의 <북극의 나누크>(1922)와 베르토프(Dziga Vertov)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가 그 대표적인 예다. 전자는 인간의 삶을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표현의 수단이라면 후자는 형식적 리얼리즘의 영화언어를 재창조한 진보적이며 실험적인 다큐멘터리로 대중들 앞에 선보여졌다. 다큐멘터리를 논할 때 '현실 세계의 실제 사건에 관한 객관적 기록'이라는 일차적 명제가 계속해서 진화를 거듭해온 결정적인 이유는 새로운 존재를 향한 미학적 관심이 감독에게 끊임없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에피스테메'(Episteme)라는 개념을 통해 각각의 시대를 규정하고 지배하는 특정한 사물들의 질서, 즉 무의식적 체계가 있다고 규명하였다. 어떤 분야가 되었건 그가 언급하듯 '권력'과 '지식'과 같은 구조의 체계에 표류하고 있다고 한다면, 영화 또한 이 개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마치 존 포드의 서부극이 구로사와 아키라, 세르조 레오네, 클린트 이스트우드, 스티븐 스필버그까지 영향을 주었듯이, 영화 문법은 계속해서 계승되기도 하고 수정되기도 한다. 이는 쉽게 말해 '유행'을 쫓는 것과 같다. 그러나 유행의 근원은 우발적이기 때문에 결코 쉽사리 총체화되거나 정의될 수 없다. 이따금 등장하는 새로운 존재 양식은 다시금 시대를 점거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푸코는 구조가 계승되는 지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고고학자이자 예언자였다. 영화사의 변곡점으로 작용하였던 프랑스의 누벨바그,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일본의 뉴웨이브라 불리는 쇼치쿠 시기를 볼 때 '새로운 것'이 주는 파괴력이 영화계의 지평을 바꾸어 놓았다는 점도 이를 증언한다.

필자는 <발코니 무비>가 이런 예시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실험적 시도를 '에세이즘'1)이라 지칭할 때 창작자의 사유는 미학적 가능성을 증폭할 여지가 있다. <발코니 무비>가 영민하고 도전적인 영화인 이유는 바로 영화의 계보학적 층위에서 한 걸음 벗어나거나 혹은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발코니 무비>는 다큐멘터리가 논구해온 공공성, 계몽성, 교육성과 같은 전통적인 과제와 타협하지 않는 진보적인 다큐멘터리다. 파벨 로진스키 감독은 다큐멘터리의 법칙을 바꾸고자 했다. 감독의 직접적인 개입 없이도 자동으로 기능하는 이 영화의 독특하고도 기이한 양식은 모든 구성이 선장인 감독에 의해 수행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그는 장정 900일이란 시간과 1,000여 명의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이 수많은 스크립트를 하나의 작품으로 조립했다. 그가 대략 2년 반 정도가 소요되었던 작업에서 고심했던 건 '과연 이 영화를 무사히 끝맺을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었다. 일주일에 4번, 계산해보면 1년 165일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푸티지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과연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의 물음과 카메라에 응답할 수 있을지 혹은 누구를 다큐의 주인공으로 삼아야 할지 등은 감독에게 거대한 숙제였다. 그는 편집의 포인트를 계절과 날씨, 등장인물별로 분류했고, 주인공이 될 만한 인물을 가까스로 선별했다. 그러나 그는 영화를 볼 때마다 아쉬워서 볼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에피소드도 그에게 있어 각별한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캐릭터를 창조하거나 캐스팅하지 않았고 리얼리즘의 힘을 끝까지 믿고 이를 영화화했다.

모든 구성의 전부인 발코니 앞에 카메라와 담장에 설치된 마이크로폰은 영화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부감숏(High Angle Shot)으로 촬영된 모든 쇼트에서 사람들은 발코니 위에 있는 카메라를 향해 시선을 옮긴다. 이때 카메라는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관찰할 뿐, 주인공으로 군림하지 않는다. <발코니 무비>는 지극히 타자적인 방식으로 상호작용한다. 타자의 이야기에 반응하는 카메라는 어떠한 지시도 하지 않는다. 감독이 "당신에게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은 그들의 감정에 깊이 부표하면서도 등장인물의 '말함'만을 추동하는 제스처다. 감독은 끝까지 자신이 믿고 있었던 '타자와의 소통'이라는 실험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다. 그가 영화를 끝내는 시점이 소통이 불가했던 펜데믹 상황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이라는 점을 유념하면 더욱 그렇다. 부단히 타자를 향한 희망의 무드를 잊지 않는 이 작품은 역설적으로 Movie에 가장 가까운 창조적 형태로 관객들과 근접해있다.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 화면 안에 지나가는 아이가 외화면 밖에 울고 있는 동생의 소리를 듣고 서 있다가 이내 달려가는 신(scene)이 있다. 그리곤 동시에 프레임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발코니 앞길을 비출 때를 생각해보면 영화가 늘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상념에 휩싸인다. 이 장면이 <발코니 무비>에서 서두를 장식하는 장면이라는 것은 모종의 의미를 지닌다. 결코 카메라는 부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카메라가 공공성을 갖고 부단히 모든 인물과 감독, 시간과 공간이 맺는 관계성을 포착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영화가 포함하는 '믿음'과 같다. 관계에 대한 희망 말이다.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카메라의 반경

우리가 직접 운전할 때 블랙박스의 존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는 지점에서 인간의 시선은 오로지 주체성에 의해 지시된다. 영화가 감독의 시각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라면 주체성이란 동시에 무언가의 망각처럼 체현된다. 프레임 반경에 있지 않은 것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인데, 블랙박스는 운전하지 않을 때도 그 주위에 운동성을 주시한다는 점에서 <발코니 무비>의 촬영방식은 감독의 손을 떠나있다. 발코니에서 벗어나지 않는 영화의 특수한 촬영 현장은 극히 제한적인 공간성을 탐사하면서도 관계의 범위를 점차 확장해나간다.

초반에 사람들은 감독의 인터뷰에 쉽사리 응하지 않고 무심하게 지나가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들은 카메라에 고해성사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허물없이 털어놓기도 하고 삶을 비관했던 초반에 나왔던 인물이 후반에 들어서 자기 삶을 긍정하는 모습으로 변화하기도 한다. 이런 희망적인 무드는 유순하게 이 영화에 상징적으로 배열된다. 삶의 부정보다 긍정을 사유하고자 하는 태도는 불식되지 않고 지속된다. 어느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난 살아있어 다행이네. 살아만 있으면 행복한 것이지" 이는 영화 속을 관통하는 초반부의 대화다. 손을 잡고 함께 길을 걷는 노부부를 아무런 말도 없이 트래킹 쇼트로 포커스 한다든지, 교도소에서 출소한 남자가 돈을 구걸하며 자기 삶을 한탄하고 반성하다가 시간이 지나 취직했다며 반가운 얼굴로 다시 찾아올 때, <발코니 무비>는 새로운 존재와 마주하는 갱신적 성격을 지닌 다큐멘터리가 된다. 어느 순간 사람들은 프레임 앞에서의 노출을 두려워하지 않고 카메라라는 무대에 선다. 영화주인공을 찾는다는 감독의 농담 같은 말에 한 여인은 '자신감'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용기를 내어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담담하게 말한다.

감독은 영화 촬영을 마친 후 사람들에게 허가 동의서를 받으려고 할 때 반대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1주일에 3, 4일 정도 촬영하는데, 촬영하지 않는 날에도 사람들이 발코니 앞으로 나와서 일 좀 제대로 하라는 말을 할 만큼 이 영화는 카메라가 꺼진 상태에서도 인간에게 요청되고 있는 관계성에 대한 통찰을 가시화한다. 이처럼 인간은 관계를 욕망한다. 나이브하게 말하면 발코니 앞은 인간의 일상이고 스쳐 지나갈지언정 소멸하지 않는 기억의 모음인 셈이다. 영화의 마지막의 시선은 부감 쇼트가 아닌 발코니의 위치에서 패닝 쇼트로 인물이 아닌 천천히 주변 배경을 촬영한다. 우리는 얼만큼이나 주변의 배경과 소리에 눈을 맞추거나 귀를 기울였는가. 영화는 이전까지 잘 듣지 못했던 바람에 의해 흔들거리는 나뭇잎 소리를 듣게 한다. 신경 쓰지 못한 무엇인가의 소리는 듣기를 희망하는 감독의 사인은 결코 인간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가장 근접한 곳에 삶의 의미가 있다는 메시지는 이 영화의 재기발랄하지만, 근원적인 물음으로써 성찰을 가져다준다.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1) '에세이'(프랑스어 'essai')라는 어휘의 본래 의미는 “확실치 않아 보이는 것에 대한 실험(또는 시험)을 목적으로 한 시도”다. (차민철, 『사적 다큐멘터리와 다큐 에세이』, 커뮤니케이션북스)

 

ⓒ Lozinski Production

발코니 무비
The Balcony Movie
감독
파벨 로진스키
Pawel LOZINSKI

 

제작 Lozinski Production, HBO Europe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00분
등급 15세 관람가
공개 제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2022.09.22~29)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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