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전형성의 벽을 무너뜨리는 '경계'의 판타지
[Interview] 전형성의 벽을 무너뜨리는 '경계'의 판타지
  • 홍상현
  • 승인 2022.10.2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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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청작 <밤 저편으로의 여행> 카야노 타카유키 감독
「밤 저편으로의 여행」은 카야노 타카유키 감독의 세 번째 장편. 도쿄국제영화제를 거쳐 BIFAN의 관객들을 찾아왔다. (C)αPRODUCEJAPAN / KAYANO FILM
「밤 저편으로의 여행」은 카야노 타카유키 감독의 세 번째 장편. 도쿄국제영화제를 거쳐 BIFAN의 관객들을 찾아왔다. (C)αPRODUCEJAPAN / KAYANO FILM

'판타지'라는 명칭이 상상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판타시아(φαντασία)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은 어느 순간 영화가 삶과 일의 중심에 들어와 있는 필자에게 무척 의미심장하다. 애초에 문학을 거쳐 영화라는 매체에 주목하게 된 이유와 맞물리는 까닭이다. 본디 문학에서의 판타지란 몽상적인 이야기 전반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동화, 페어리 테일(fairy tale), 메르헨 등으로 불리던 장르에 심층의식, 상징주의 등과 같은 현대적 의의가 더해지면서 주로 초자연적 요소가 기능하는 세계를 취급했는데 바로 이 대목이 마뜩잖아서였을까. 판타지는 종종 '도피(escape)의 문학'이라는 꼬리표가 붙으며 매도되곤 했다. 이를 역전시킨 것이 작가, 언어학자, 그리고 역사가였던 영국의 천재 톨킨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39년 3월 8일, 그는 세인트루이스대학교에서 있었던 강연에서 도그마에 사로잡힌 파시스트와 공산주의자, 그밖에 모든 편협한 사상가들의 세계와 대비되는 이미지를 제시했다. 톨킨은 "도피가 왜 문학에서 욕설처럼 사용되는지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일갈하면서 "투옥된 채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은 사방으로 둘러쳐진 벽과 교도관 이외의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을 뿐더러 "바깥세상은 볼 수 없거나, 설령 볼 수 있다 하더라도 좁은 창문을 통할 수밖에 없으니 실재하지 않는 거나 진배없다"고 지적했다.

 

올해 만 스물 두 살의 카야노 타카유키 감독은 대학 졸업 후 줄곧 큐슈의 중심도시인 후쿠오카를 거점으로 활약하고 있다. (C)αPRODUCEJAPAN / KAYANO FILM
올해 만 스물 두 살의 카야노 타카유키 감독은 대학 졸업 후 줄곧 큐슈의 중심도시인 후쿠오카를 거점으로 활약하고 있다. (C)BIFAN 2022

이후, 1960년대에 들어 판타지는 질서나 권위를 강조하며 대중을 짓누르던 인식기반에 저항하는 흐름과 맞물리면서 젊은이들의 압도적 지지를 획득하기에 이른다. 판타지가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라는 구호로 상징되는 68혁명의 도도한 흐름에 합류한 순간이다. 영화이론가 수잔 헤이워드의 판타지에 대한 정의는 이러한 판타지의 '개념사적 유산(The legacy of conceptual history)'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사전』에서 그는 판타지가 무의식의 표현이며 우리가 억압하는 영역, 즉 무의식의 영역과 꿈의 세계를 가장 쉽게 반영한다고 했다. 영화가 디제시스(diegesis), 즉 '허구화된 세계'라면 판타지는 영화 그 자체라 할 수 있으니, 판타지 영화는 영화적 욕망이 가장 잘 발현된 장르에 다름 아니라는 결론.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인 스물두 살의 청년감독 카야노 타카유키는 올해 BIFAN 초청작 <밤 저편으로의 여행>에서 이러한 '개념사적 유산'의 수혜자로서 자신의 영화적 욕망을 거침없이 실현한다. 무난한 청춘영화 같았던 작품에서 어느 순간 사이키델릭 록을 연상시키는 이미지의 변주가 쏟아지고, 이내 꿈과 현실의 벽이 무너진 가운데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넘나드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구현된다.

영화의 스토리는 이렇다. 만화가 지망생 하루토시(다카하시 이시나리 분)는 대학생 시절 친구들과 1박 2일 여행을 떠난다. 지원했던 만화 공모전에서 탈락한 소식을 듣게 되지만, 동시에 학교 다닐 때 좋아했던 사야(나카무라 유미코 분)와의 갑작스러운 만남에 그는 실망과 기쁨의 감정이 뒤섞인다. 그리고 그녀의 등장으로 그의 여행은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일견 대학 동창들의 잔잔한 여행을 다룬 로드무비처럼 시작하지만 영화는 점점 모호하게 변해간다. 주인공 하루토시에 집중하며 그의 감정선을 세세하게 보여주던 이야기는 역동적으로 장르를 가로지른 끝에 몽환적이고도 환상적인 순간으로 나아간다.

 

무난한 청춘영화처럼 시작한 「밤 저편으로의 여행」은 역동적으로 장르를 가로지른 끝에 몽환적이고도 환상적인 순간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C)αPRODUCEJAPAN / KAYANO FILM
무난한 청춘영화처럼 시작한 「밤 저편으로의 여행」은 역동적으로 장르를 가로지른 끝에 몽환적이고도 환상적인 순간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C)αPRODUCEJAPAN / KAYANO FILM

홍상현

세 번째의 장편으로 드디어 도쿄국제영화제를 거쳐 아시아를 대표하는 장르영화페스티벌인 BIFAN에 오셨습니다. 게다가 초청작 감독 중에 거의 최연소이시다 보니 감회가 더욱 특별하실 것 같은데요.

카야노 타카유키

상영 당시 반응이 굉장히 신선했어요. 저도 객석에 앉아 관객분들과 같이 영화를 봤는데 목소리가 높아지거나 제대로 웃어주셨으면 하는 부분에서 적극적인 리액션을 보여주시더라고요. 일본에서는 좀처럼 없는 일이거든요. 더러 작은 소리로 웃어주시거나 하는 일이 있지만 한국에서처럼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시지는 않는답니다. 한국 관객 여러분의 리액션이 부럽기도 하고, 너무 즐거웠어요. 매일매일 멋진 영화제라는 걸 실감하고 있습니다.

 

홍상현

다음은 "홍상현의 인터뷰"를 통해 뵙는 분들에게 항상 드리는 질문인데요. 한국영화를 즐겨보십니까? 그밖에 좋아하는 작품, 감독, 배우가 있으시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카야노 타카유키

음.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하나만 고르기 쉽지 않은데요.

BIFAN에 불러주셨으니 분위기에 맞춰 꼽아보면 일단 <곡성>(2016)이 있습니다. 다른 작품을 만들면서 크게 영향을 받기도 했고요. 영화가 결국 사건이 완결되지 않은 채로 끝나버리잖아요. 보통 그런 결말의 영화는 잘 히트하지 않는데 엄청난 인기를 끄는 걸 보면서 한국영화의 힘을 실감했죠. 지금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예요. 그밖에 학창시절에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6)을 보고 대단히 충격을 받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송강호 배우의 작품을 꼬박꼬박 챙겨보기 시작한 계기이기도 했고요.

장르영화를 만들지 않는 연출자로는 이창동 감독을 가장 좋아합니다.

 

「밤 저편으로의 여행」은 청춘영화에 로맨스, 호러까지를 접목시킨 참신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 이는 "어떤 장르를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어본다면 ‘특정하기 힘들어요. 다 좋아해서’라고 대답할 것 같"다는 카야노 타카유키 감독의 독특한 취향이 낳은 성공적 결과다. (C)αPRODUCEJAPAN / KAYANO FILM
「밤 저편으로의 여행」은 청춘영화에 로맨스, 호러까지를 접목시킨 참신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 이는 "어떤 장르를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어본다면 '특정하기 힘들어요. 다 좋아해서'라고 대답할 것 같"다는 카야노 타카유키 감독의 독특한 취향이 낳은 성공적 결과다. (C)αPRODUCEJAPAN / KAYANO FILM

홍상현

이미 후쿠오카아시아필름페스티벌에서 전작들로 특별전이 기획될 정도의 재능 있는 감독이시라 앞으로 한국 관객의 여러분과도 자주 뵙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한국 관객의 여러분께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카야노 타카유키

조금 쑥스럽네요. (웃음)

큐슈 후쿠오카라는 지방도시에서 영화를 만들고 있는 카야노 타카유키라고 합니다. <밤 저편으로의 여행>이 세 편째의 장편인데요. 드디어 제 작품을 한국 관객 여러분께 선보여 드릴 수 있게 되어 너무나 기뻐요. 제가 살고 있는 후쿠오카는 부산까지 배를 타고 갈 수 있을 만큼 한국과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한국 분들을 평소 친근하게 느껴왔고, 압도적인 수준의 한국영화도 열심히 봐 왔거든요. 이렇듯 친근감과 동경심을 함께 가지고 있는 나라를 대표하는 영화제에서 제 작품을 초청해주신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홍상현

한국에서도 유명한 제제 타카히사 감독과 동향(오이타)이시고, 큐슈를 대표하는 도시인 후쿠오카를 거점으로 활약하고 계십니다. 물론 한국에서도 영화도시로 불리는 곳은 서울이 아닌 부산입니다만, 역시 모든 것이 도쿄에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후쿠오카를 활동의 본거지로 삼는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거 같은데요.

카야노 타카유키

아, 다른 분들로부터도 자주 듣는 질문인데요. (웃음) 어떤 엄청난 결심이나 의무감 때문은 아닙니다. 도리어 그런 마음은 적은 편이고요. '어깨에 힘을 뺀 자연체'로서 계속 영화를 만들어 온 결과, 자연스럽게 후쿠오카에 자리를 잡게 된 느낌이랄까요? 확실히 도쿄와 비교하면 상업적인 의미에서의 기회라는 게 그다지 많지 않겠지만, 이번 작품의 프로듀서를 비롯해 작업에 큰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주변에 많이 계세요. 저로서는 큰 행운인 거죠. 좀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라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이렇듯 지역을 근거로 조금 다른 영화들을 만들어내고, 이를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어가는 일도 보람 있지 않을까 싶고요.

저는 할리우드영화를 좋아하지만, 유럽영화도 그에 못지않게 좋아하거든요. 그런 까닭에 일본영화 가운데서도 다양한 작품이 많이 나와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어요. 그러니 수도 이외의 곳에서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시도나 노력들이 앞으로 다른 분들에 의해서도 많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카야노 타카유키 감독이 주인공을 무명만화가로 설정한 이유는 자못 철학적이다. 만화가 소중한 삶의 수단인 동시에 지옥이라는 양가적인 의미를 갖는 캐릭터이기 때문. (C)αPRODUCEJAPAN / KAYANO FILM
카야노 타카유키 감독이 주인공을 무명만화가로 설정한 이유는 자못 철학적이다. 만화가 소중한 삶의 수단인 동시에 지옥이라는 양가적인 의미를 갖는 캐릭터이기 때문. (C)αPRODUCEJAPAN / KAYANO FILM

홍상현

그럼 본격적으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도쿄국제영화제에서 화제가 되었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데뷔작인 밤 저편으로의 여행은 도저히 신인감독의 작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완성도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도 청춘영화에 로맨스, 호러까지를 접목시킨 참신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데요.

카야노 타카유키

제 개인적 취향이 드러난 게 아닐까 합니다. 어떤 장르를 가장 좋아하느냐고 물어본다면 '특정하기 힘들어요. 다 좋아해서'라고 대답할 것 같거든요. (웃음)

어린 시절의 저는 영화를 그렇게까지 많이 보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그러다 작정하고 영화를 보기 시작한 게 대학에 들어간 이후부터죠. 시네필로서는 좀 늦은 편일 텐데요. 그만큼 많은 영화들을 보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한꺼번에, 그것도 아주 많이 접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부터인가 제 안에 다양한 장르가 섞인, 그러니까, 장르를 가로지르는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욕구가 자리 잡고 있더라고요.

이런 욕구가 관객들을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여행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또 다른 제 평소 생각과 어우러지면서 <밤 저편으로의 여행>이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종잡을 수 없는 스릴이 느껴지는 여행 같은 영화 말이죠. 청춘영화와 호러라는, 얼핏 상당히 불편해 보이는 이 조합을 시도하는 것은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하는 저로서도 상당한 도전이었습니다.

 

홍상현

주인공의 직업을 무명만화가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카야노 타카유키

원래 소설가로 설정되어있었는데 제작이 진행되면서 만화가로 바뀌었어요.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만화가를 실내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캐릭터라 생각했고, 따라서 여행이라는 개념과는 대비되는 면이 있으므로 이 둘을 병치시키면 재미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또, 실사를 뛰어넘는 확장성을 가진 만화적 발상에 관한 제 동경도 한몫했고요.

그런데 여기에 이 만화가의 작품이 굳이 '팔리지 않는다'는 제한을 걸어놓은 것에는 제 나름의 의도가 있었어요. 예컨대 주인공은 '결국 언젠간 내 작품이 잘 팔릴지도 몰라'라는 꿈을 안고 온갖 어려움을 감내하며 살고 있지만, 바로 그 '꿈' 때문에 생활도 어렵고 여자 친구와의 관계도 잘 풀리지 않으니 결국 만화가 소중한 삶의 수단인 동시에 지옥이라는 양가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는 거죠. 아울러 코로나 19로 집에 틀어박혀 지내며 느낀 우울함과 폐색(blockage)의 감정을 반영한 것이기도 합니다.

 

대학 졸업 후 모처럼만에 친구들과 함께 떠난 여행. 주인공 하루토시는 공모전에서 탈락한 소식을 듣게 되지만 동시에 학교 다닐 때 좋아했던 사야와의 갑작스러운 만남에 실망과 기쁨의 감정이 뒤섞인다. (C)αPRODUCEJAPAN / KAYANO FILM
대학 졸업 후 모처럼만에 친구들과 함께 떠난 여행. 주인공 하루토시는 공모전에서 탈락한 소식을 듣게 되지만 동시에 학교 다닐 때 좋아했던 사야와의 갑작스러운 만남에 실망과 기쁨의 감정이 뒤섞인다. (C)αPRODUCEJAPAN / KAYANO FILM

홍상현

80분이라는 상영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갈 정도로 시나리오의 짜임새가 견고한데요. 집필 과정과 특히 어떤 부분에 이야기는 포인트를 맞추셨는지 궁금합니다.

카야노 타카유키

이야기를 대충 머릿속에 그려 본 기간이 1~2주 정도고, 여기에 조금씩 수정을 가하다 보니까 대략 2~3개월 정도가 훌쩍 지나가 버리더라고요. 정말 세밀한 부분까지 일일이 살폈습니다. 다만, 작품에서 가장 큰 분위기 전환이 이루어지는 부분, 즉 주인공이 머리채를 잡혀 지옥으로 끌려가는 부분은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고, 바로 이 부분을 중심으로 언저리의 이야기들을 짜 가는 방식으로 서사를 완성했죠.

그밖에 중요했던 부분이 '두려움을 잊는 순간 저주가 풀리고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룰(rule)이었는데요. 이 부분의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순간 전체적인 내용이 한순간에 쭉 연결되면서 시나리오가 완성되었습니다.

 

홍상현

역시 그런, 이를테면 일반적인 타임라인에 따라 구성되지 않은 서사 때문일까요?

영화가 마치 훌륭한 변주곡 같다고 느끼게 합니다. 스토리가 전개될수록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결국 무너져버리면서 나아가 생과 사의 경계마저 자유롭게 넘나드는.

카야노 타카유키

저는 <밤 저편으로의 여행>이 '경계'에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이승과 저승, 픽션과 논픽션, 과거와 현재, 주인공의 일상과 비일상, 궁극적으로는 누구에게나 가장 보편적일 수 있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덧붙여서, 어떤 망상을 한다든가 잠을 자다 꿈을 꾸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무척 자연스러운 삶의 부분인 까닭에 이런 일들과 현실을 칼로 무 자르듯 나누기가 제게는 말처럼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떤 영역과 그 반대의 부분 사이에 놓여있는 그라데이션(gradation)에 주목하는 습관이 생겼죠. 어제와 다른 자신으로 거듭나 일상으로 돌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린 것도 이런 세계관이 반영된 결과였습니다.

 

카야노 타카유키 감독의 스타일리스트적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나는 지옥장면. 흔히들 머리에 떠올리는 전형적인 이미지를 탈피한 미장센이 역설적으로 공포를 자아낸다. (C)αPRODUCEJAPAN / KAYANO FILM
카야노 타카유키 감독의 스타일리스트적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나는 지옥장면. 흔히들 머리에 떠올리는 전형적인 이미지를 탈피한 미장센이 역설적으로 공포를 자아낸다. (C)αPRODUCEJAPAN / KAYANO FILM

홍상현

디자인을 전공하셔서인지 작품에서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재능이 드러납니다. 특히 지옥을 연상시키는 장면의 미장센이 정말 뛰어났는데요.

카야노 타카유키

높게 평가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딱히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분명 다른 영화에서 흔히 보는 느낌과는 조금 달랐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이를테면 제 경우, 꿈속에 지옥이 나오더라도 그렇게까지 요란한 이미지는 아니거든요. 해서, <밤 저편으로의 여행>도 딱 그 정도 수준에서 시각화를 진행했고요.

그 밖에 유령의 이미지랑 관련해서도 일본영화에서 정형화 되어 있는 이미지, 즉,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칼에 흰 원피스'라는 패턴을 탈피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파카 차림에 갈색머리를 숏컷으로 자른 캐릭터가 등장하게 된 거죠.

 

홍상현

그런 의도에서였다면 충분히 성공하신 것 같습니다. 말씀처럼 정형성을 탈피한 이미지들이 오히려 공포감을 더해줬으니까요. 특히 지옥장면에서 사야의 옆에 서 있던 저승사자. 아니, 오브제였나요? (웃음)

카야노 타카유키

아, 그거요? (웃음) 연극에서 소품으로 쓰는 종이인형인데요. 일단 얼추 사람 키 높이에 맞춰 만들어 놓고 CG를 덧씌워서 인형인지 사람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게 해 둔 거였는데 효과가 있었어요. (웃음) 다만 생동감을 더하기 위해 질감은 최대한 부드럽게 했어요. 촬영감독과도 상의해서 그 자리에 어렴풋이 뭔가 있거나 우연히 어둠과 관객의 눈이 마주치는 느낌을 내는 방향으로 찍었고요.

 

홍상현

늦은 밤 주인공과 사야가 산책하는 장면도 정말 오싹하더라고요.

카야노 타카유키

네, 꿈속에서 두 사람이 밤길을 산책하며 데이트하던 장면이었죠. 그 장면에도 비밀이 하나 숨어있는데, 흘러나오는 벌레소리, 새소리, 나무소리 등이 죄다 일단 현장의 음향을 지워놓고 악기소리로 만들어낸 겁니다. 꿈속 세계를 모두 조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하나의 거대한 무대장치처럼 기능하도록 했어요.

 

「밤 저편으로의 여행」의 제작비는 도저히 장편상업영화의 예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단돈 6백만 엔. 하지만 뛰어난 ‘가성비’는 그 사실을 믿기 어렵게 만들어버릴 정도다. (C)αPRODUCEJAPAN / KAYANO FILM
「밤 저편으로의 여행」의 제작비는 도저히 장편상업영화의 예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단돈 6백만 엔. 하지만 뛰어난 '가성비'는 그 사실을 믿기 어렵게 만들어버릴 정도다. (C)αPRODUCEJAPAN / KAYANO FILM

홍상현

정말 놀랍습니다. 6백만 엔의 제작비로 그 모든 표현이 가능했다는 것 자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예요. 그밖에 편집의 리듬감도 뛰어나더라고요. 상영시간이 그렇게 긴 편은 아닌데 전반부와 후반부가 전혀 다른 영화처럼 느껴질 정도로.

카야노 타카유키

그 부분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콘셉트가 있었는데요.

첫 번째는 개인적 기호입니다. 관객의 입장에서 작품의 중간에 '어? 이게 어떤 줄거리였지? 생각했던 거랑 다른데?'하면서 장르가 전환되는 영화를 너무 좋아하거든요.

두 번째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슷한 톤의 자극이 이어지는 방식을 피하자는 거였습니다. 그런 영화는 도입부에서 좀 자극적일지 몰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지면서 금방 질려버리거든요. 또, 작품 전체 러닝 타임이 80분으로 대단히 짧기 때문에 끊임없는 포맷의 전환이 필요할 거 같다는 판단도 있었습니다.

 

홍상현

불투명한 이 시대의 젊은이를 상징하는 것 같은 주인공을 연기한 다카하시 이시나리 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감독이 보시기에 그는 어떤 배우인가요?

카야노 타카유키

신뢰할 수 있는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캐릭터에 대해 무척 많이 고민한다는 점에서 다른 배우들과 차별화되지 않을까 싶어요. 카메라가 돌아가기 직전까지 망설이는 모습이 보일 정도니까요. 이런 신중한 면에 힘입어 주어진 역에 더욱 몰입할 수 있는 배우라고 생각해요. 특유의 신중함으로 인해 제가 애초에 의도했던 바와 다르긴 하지만 전체적인 차원에서 보면 완성도에 더욱 기여하는 연기를 보여주는 경우도 많고요.

 

홍상현

지금까지 감독이 만드신 세 편의 작품에서 주연을 맡으셨는데 아무래도 감독님과의 케미스트리가 뛰어나다는 의미겠지요?

카야노 타카유키

그렇습니다. 세 편 모두 성격이 무척 다른 역할을 맡다 보니 본인으로서는 매번 상당히 불안했겠지만, 막상 촬영이 시작되면 제대로 된 연기를 보여줬어요. 그래서 날이 갈수록 신뢰가 두터워졌습니다.

 

하루토시가 사야와 밤길을 산책하는 꿈 속 장면에서 카야노 타카유키 감독은 현장의 음향을 모두 지운 뒤 악기소리로 다시 만들어냈다. 꿈 속 세계를 모두 조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하나의 거대한 무대장치처럼 기능하도록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C)αPRODUCEJAPAN / KAYANO FILM
하루토시가 사야와 밤길을 산책하는 꿈 속 장면에서 카야노 타카유키 감독은 현장의 음향을 모두 지운 뒤 악기소리로 다시 만들어냈다. 꿈 속 세계를 모두 조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하나의 거대한 무대장치처럼 기능하도록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C)αPRODUCEJAPAN / KAYANO FILM

홍상현

평소 패션모델로 활약 중이신 나카무라 유미코 씨는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어떤 감상을 들려주시던가요? (웃음)

카야노 타카유키

매니저가 시나리오를 전달하면서 청춘로드무비의 히로인이라고 말했다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괴물(본인의 표현을 직접인용)"이라 대단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답니다. (웃음) 결국 출연을 결정해주었지만요.

 

홍상현

그래도 처음과 결말부의 갭이 상당한 캐릭터인 사야를 워낙 성공적으로 연기하고 계신 걸 보면 감독께서 어떤 디렉션을 하셨는지 궁금해지는데요.

카야노 타카유키

말씀대로 정말 어려운 배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카무라 배우와는 상당히 많은 토론을 거쳤습니다.

예컨대 꿈 장면의 경우, 주체적인 캐릭터라기보다 하루토시의 이상형을 표현해야 하니까 대사도 그가 말해주길 바랄 것 같은, 다시 말해 그의 내면을 파고들 수 있는 내용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앞서 언급했던 지옥장면에서도 음향을 믹싱한 게 아니라 대사를 하면서 호흡에 변화를 줘서 일반적이지 않은 말투를 연출해냈습니다. 마치 유령이 인간의 흉내를 내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 느낌으로요.

장면마다 접근법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대단히 힘들었을 텐데. 워낙 독해력과 조정력이 있는 배우라 대단히 성공적으로 연기해주셨어요.

 

「밤 저편으로의 여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슷한 톤의 자극이 이어지는 서사의 방식을 지양한다. 도입부에서는 자극적일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지면서 금방 질려버리는 기존 호러영화의 전철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다. (C)αPRODUCEJAPAN / KAYANO FILM
「밤 저편으로의 여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슷한 톤의 자극이 이어지는 서사의 방식을 지양한다. 도입부에서는 자극적일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지면서 금방 질려버리는 기존 호러영화의 전철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다. (C)αPRODUCEJAPAN / KAYANO FILM

홍상현

개인적인 미련 때문에 드리는 질문인데, 그러니까 결국 두 사람이 원래 서로 좋아하긴 했던 건가요? (웃음)

카야노 타카유키

그 부분은 두 사람의 주연배우들과 제 생각이 좀 다른데요. (웃음)

시나리오상으로 자세한 설명이 이루어지진 않지만 저는 하루토시의 감정을 짝사랑이라고 생각했던 반면, 두 배우들은 한때 서로 좋아했던 걸로 파악하고 있더라고요. 특히 하루토시 역을 맡은 다카하시 배우는 쭉 그런 느낌으로 촬영에 임했고요. 그런데 감정처리의 양상을 보니까 그저 공포심만 가득한 것보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표현하고 싶었던 제 의도에 더 부합하는 거 같아서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홍상현

촬영을 하면서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도 많았을 것 같은데 하나 소개해주실 수 없을까요.

카야노 타카유키

유서를 쓰는 주인공의 내레이션이 흐르면서 이런저런 장면들이 이어지는 시퀀스가 있는데요. 그중에서 사야가 비늘구름이 가득한 하늘 아래 서 있는 커트가 있거든요? CG 아니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은데 실사입니다.

야외에서 다른 장면을 촬영하고 있는데 갑자기 비늘구름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라고요. 부랴부랴 찍던 장면을 마무리하고 비늘구름이 잘 보이는 포스트에 가서 커트를 잡아냈죠. 비슷한 연령대인 친구들이 모여 여행을 하는 분위기로 촬영을 진행하다 보니 이런 임기응변이 가능해서 좋았어요.

 

「상상력에 대한 고찰이 담긴 영화입니다. 그 놀라움과 자유로움, 그리고 두려움에 대한, 그밖에 이별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있고요. 주인공인 하루토시처럼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경험하며 고민하고 계신 분들과 함께 보고 싶어요. 그 중에서도 호러영화가 재미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과 제일 먼저.」 카야노 타카유키 감독의 말이다. (C)αPRODUCEJAPAN / KAYANO FILM
「상상력에 대한 고찰이 담긴 영화입니다. 그 놀라움과 자유로움, 그리고 두려움에 대한, 그밖에 이별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있고요. 주인공인 하루토시처럼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경험하며 고민하고 계신 분들과 함께 보고 싶어요. 그 중에서도 호러영화가 재미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과 제일 먼저.」 카야노 타카유키 감독의 말이다. (C)αPRODUCEJAPAN / KAYANO FILM

"<밤 저편으로의 여행>은 상상력에 대한 고찰이 담긴 영화입니다.

그 놀라움과 자유로움, 그리고 두려움에 대한, 그밖에 이별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있고요. 주인공인 하루토시처럼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경험하며 고민하고 계신 분들과 함께 보고 싶어요. 그중에서도 호러영화가 재미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과 제일 먼저.

한국 관객 여러분과 같이 앉아, 여러분의 반응을 직접 지켜보면서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건 정말 행복한 체험이었어요. 말로만 듣던 한국 관객 여러분의 영화를 보는 높은 안목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체험할 기회이기도 했고요. 그런 여러분과 다시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 해외영화제나들이를 경험한 설렘과 한국 관객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그의 인터뷰 원고를 정리하던 중 <밤 저편으로의 여행>의 현지개봉 소식을 들었다. 배급사는 <극한직업>(2018), <82년생 김지영>(2019) 등을 소개하며 일본 시네필의 한국영화 사랑을 꾸준히 견인해 온 클락웍스. 6백만 엔이라는 작은 제작비에도 움츠러들지 않았던 그의 꿈이 부디 흥행 면에서도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고 다시 한번 바다를 건너, 한국 일반 관객들과의 만남으로 결실을 맺는 순간을 기대해 본다.

[인터뷰 홍상현, krpopper@ccoart.com]

홍상현
홍상현
 《코아르》 운영위원, 고토부키홈빌더 영화영상사업부 프로듀서.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일 양국 매체에 분석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 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지부인 일본영화펜클럽 회원.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 주최 디지콘 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및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심사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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