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시대와 장르 사이에 선 인간
[Critique] 시대와 장르 사이에 선 인간
  • 이상용
  • 승인 2022.10.0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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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남> 혹은 윤종빈의 모험과 비열한 거리

윤종빈의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시대' 혹은 '시대성'이다. 최근작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2)(이하 <범죄와의 전쟁>), <군도: 민란의 시대>(2014)(이하 <군도>)의 부제에는 '시대'가 달려 있다. <공작>(2018)에는 부제가 없다. 하지만 이 영화가 실화 사건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1990년대 중후반에 북한을 왕래했던 남한 스파이 흑금성 사건이 영화의 토대가 된다. 스파이가 주인공이므로 '간첩의 시대'가 부제로 어울릴 것 같지만, 정작 영화를 보고 나면 '정치의 시대'가 적합해 보인다. 주인공 박석영(황정민)은 정권 유지를 위해 움직이는 장기 말에 불과했다.

윤종빈의 영화는 '시대 혹은 실화 사건'을 반복적으로 내세운다. 그것은 영화의 리얼리티를 형성하는데, 한국 사회를 보여주는 '거울로서의 은유'가 될 뿐만 아니라 현실의 이면을 파헤치면서 그림자의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들(흑금성, 군도, 부산의 건달들)을 통해 비루한 현실을 폭로한다. 일종의 폭로전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와 실화'는 영화의 에너지가 되어 한국 사회의 추악한 얼굴을 응시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윤종빈의 영화에 빈번히 등장하는 주인공의 클로즈업은 현실이라는 민낯이다.

 

영화 <공작> ⓒ CJ ENM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 쇼박스

당연한 말이지만 '시대'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다. 군 전역 이후 북파 공작원이 된 박석영은 북한의 고위 간부와 접촉하는 데 성공하고, 북을 왕래하며 사업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던 박석영의 발목이 붙잡힌다. 그의 사업 아니 공작을 막은 것은 북한의 정치가나 군인이 아니었다. 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집권당은 안기부를 대동하고 북한의 리명운(이성민)을 만난다. 박석영의 상관이자 안기부의 해외팀장인 최학성(조진웅)은 "서해 5도를 비롯한 전 휴전선에 전시 상태에 준하는 실질적 타격"을 가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것은 김대중의 당선을 막고, 여당이 계속 집권하려는 계획이었다. 지난 총선 때에도 요청을 받았던 북한은 "판문점 도발"을 일으켰다. 최학성은 이번 도발을 대가로 4백만 달러를 약속한다. 도청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박석영은 리명운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와 함께 김정일 앞에 선 박석영은 남한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농락당하는 일일 수 있다며, 북의 무력 시위로 인해 오히려 역풍이 불고, 그 결과 남북이 추진 중인 사업과 기존에 해 오던 골동품 판매에도 지장을 줄 수 있다고 설득한다. 4백만 달러 때문에 그 이상의 기회비용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힘을 준다. 그 결과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다. 박석영은 안기부의 북파 공작원이었지만 새로운 시대를 만드는데 일조하는 역할을 한다. 과거의 시대는 여전히 그의 발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정권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편승함으로써, 권력을 거스르고 시대의 물꼬를 트는 인물로 묘사된다. 이 점은 그와 협상을 벌이는 리명운도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북한의 인민을 위한 새로운 시대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두 인물을 통해 <공작>은 단순한 스파이 영화가 아니라 번뇌하는 박석영의 얼굴을 통해 한국 사회의 내밀한 변화상을 보여준다.

<범죄와의 전쟁>은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으로 시작한다. 군부독재는 전두환을 거쳐 노태우 대통령으로 이어지고,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1990년에 이른다. 이 친숙한 얼굴들 아래 부산에서 세관 업무를 하는 최익현(최민식)이 등장한다. 그는 동료와 함께 컨테이너에 숨겨진 마약을 발견하고 이를 처분하는 과정에서 건달 최형배(하정우)를 만난다. 최익현은 같은 최 씨라는 종친 관계를 앞세워 인연을 맺고 범죄 세계에 발을 들인다. 이를 계기로 최씨 가문의 족보를 곳곳에 들이밀며 검사 및 유력 인사와 친분을 맺으며 부산의 호텔 빠친코 사업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조직의 보스인 '김판호(조진웅)'와 엮이면서 갈등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최형배에게 혼쭐이 나고 내쳐지기도 하지만 범죄 세계에 탑승한 그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모든 것을 되찾고자 한다. 그런데 김판호와 손을 잡고 새롭게 군림한 최익현을 밀어낸 것은 깡패 조직간의 알력 다툼이 아니었다. 조범석 검사(곽도원)에 의해 궁지에 몰린 최익현은 최형배를 잡는 데 일조하고, 깡패 사이의 의리없는 전쟁은 검찰의 개입으로 막을 내린다. 형사들의 급습을 통해 최형배를 넘긴 익현은 자기 손을 움켜쥐며 "내가 이겼어!"를 반복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게임에서 승리한 것은 권력 그 자체다. 최익현에게 부산 지역의 돈과 권력을 쥐여준 것도 '권력'(안기부와 건달 최형배)이었고, 세력을 넓혀가던 최익현을 끌어내린 것도 '권력'(조 검사)이었다. <범죄와의 전쟁>은 부산 지역에서 펼쳐지는 한 시대의 그림자다. 서민적이면서도 탐욕스러운 최익현의 얼굴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시대의 공기를 쓸어 담는다.

 

<군도:민란의 시대> ⓒ 쇼박스

<군도> 또한 특정한 시대를 가리키며 시작한다. "철종 13년여. 1862년. 조선 백성들은 잦은 자연재해로 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렸고 거듭되는 흉년에 탐관오리들과 양반들의 착취까지 더해지니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만 갔다. 전국 각지에서 격분한 백성들의 봉기가 끓일 날이 없었는데 그중 진압된 백성들은 반상의 법도를 어겼다 하여 참수를 면치 못했으며 나머지 산으로 도망친 이들은 도적이 되어 생을 영위하여야만 했다."

다소 긴 내레이션의 첫 장면은 <군도>의 시대상을 알려준다. 지리산 의적단 추설의 활약상이 묘사되고, 백정이었던 돌무치가 도치(하정우)가 되어 군도의 일원이 되는 과정이 전개된다. 그런데 시대상을 설명하며 시작된 <군도>는 중반 이후 다른 방식으로 전개를 펼친다. 무관 출신 조윤(강동원)의 악행이 전개되는 한편 조윤과 관의 횡포를 막기 위한 군도의 출정이 시작된다. 자연스럽게 선과 악의 대결 구도로 나뉘면서 정의로운 민중의 활약상이 중심에 선다. 그것은 시대의 리얼리티를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장르적 쾌락을 제공하는 방식의 전개다. 이러한 전환이 또렷한 대목 중 하나가 영화의 절정부다.

조윤과의 첫 격돌에서 군도는 패망한다. 급기야 추설의 은신처가 조윤과 관군에 의해 유린을 당하고 많은 이들이 죽거나 붙잡힌다. 조윤과의 첫 대결에서 부상을 당했던 도치는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이들의 처형장에 나타난다. 이때 화면을 압도하는 것은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웨스트>(옛날 옛적 서부에서, 1968)에서 들어본 듯한 음악과 기관총을 끌고 나타난 도치가 관군을 향해 총탄을 난사하는 장면이다. 기관총 난사 장면은 마카로니 웨스턴으로 잘 알려진 <장고>(1966)에서 가져왔다. <장고>를 리메이크한 쿠엔틴 타란티노의 <장고>(2012)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타란티노의 영화는 원작에 충실하기보다는 레오네의 영향력 아래 리메이크를 시도하였다. <군도>를 이끄는 것은 민중과 권력이라는 선악으로 대립 속에 웨스턴의 대결 구도를 만들어 무협과 액션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다. 무협, 서부극, 민중활극 등의 여러 장르를 뒤섞어 놓으며 조윤의 칼과 도치의 도끼가 대결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격돌의 쾌감이 시대적 공기를 압도하기 시작한다.

 

<군도:민란의 시대> ⓒ 쇼박스

대중적 쾌락은 장르 영화가 추구하는 목적 중 하나다. 멜로 드라마나 뮤지컬과 같은 장르에서는 사회적 통합이라는 코드를 집어넣음으로써 불가능한 계급과 인종의 화해를 결말의 카타르시스로 제공하지만, 대결 구도가 펼쳐지는 무협이나 웨스턴에서는 정의의 승리를 통한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낸다. <군도>는 선악의 대결을 통한 장르적 쾌락을 추구하면서,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홍길동전'은 물론이고, 중국의 '수호지', 황석영의 '장길산', 홍명희의 '임꺽정'과 같은 민중적 상상력을 끌어당긴다.

<군도>를 '홍길동전'의 재해석으로도 볼 수 있는데, 강동원이 연기하는 악당 조윤은 출생의 비밀과 가족사의 비극이 얽혀 있다. 그는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조대감 집에 입양되었고, 끝내 장자로 인정받지 못한 채 아버지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조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해 떠나는 인물이 아니라 아버지를 죽이는 인물이 된다. '홍길동전'의 활빈당을 대신하여 추설을 이끄는 것은 양반과는 거리가 먼 하층 계급이다. 허균의 '홍길동전'이 부르주아 계급에 속한 주인공을 내세워 개인적 분노를 사회적 분노와 연결하였다면, <군도>는 더 아래로 내려간다. 민중의 분노와 서출의 분노는 다른 것이며, 어떤 것이 더 진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다시 쓴 '홍길동전'의 주인공은 아버지를 부르지 못하는 서출 길동이 아니라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은 백정 도치다.

 

정글이라는 장르

<수리남>을 보기 전 예상했던 것 중의 하나도 '시대상’이 아닐까 하는 점이었다. 콜롬비아와 수리남을 연결하는 코카인 커넥션의 묘사는 수리남 혹은 라틴 아메리카의 복잡한 정치 상황, 미국의 군사적 개입, 한국의 현실 등이 뒤엉키기 마련이다. 여섯 시간에 육박하지만 한 편의 영화적 질감을 끌어내는 <수리남>은 국가별 커넥션을 이어가는 넓이의 실현을 제공해준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수리남>은 시대를 끌어 담지 않는다. 정치적 상황이나 시대적 배경의 묘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슬쩍슬쩍 흘리는 정도다. <수리남>은 현지의 홍어를 싼값에 사들여 한국으로 수출하려는 계획을 세운 강인구(하정우)가 하루아침에 마약사범으로 투옥되고, 그를 찾아온 국정원 요원 최창호(박해수)에 의해 진실이 드러나면서 이를 만회하고 극복하려는 한 인간의 의지를 따라간다. 이 모습과 가장 닮아 있는 것은 <군도>의 도치다. 공교롭게도 두 영화의 인물 모두 하정우가 맡고 있으며, 주인공 하정우가 행하는 복수극의 양상을 띤다. 

강인구의 홍어 사업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 것은 현지에서 목사로 있는 마약왕이자 범죄자인 전요환(황정민)이다. 최창호는 홍어 사업으로 손해 본 돈을 보전해 주겠다며 전요환을 잡도록 도와달라고 제안한다. 강인구는 몰락 직전의 상황에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악착같이 살아왔지만 특별한 것이 없었던 강인구는 국정원의 파트너가 되어 마약 범죄의 세계에 뛰어드는 모험을 시작한다.(이 설정 또한 백정이었던 도치가 가족을 잃은 후 군도의 세계에 뛰어드는 과정을 닮았다)

 

ⓒ 넷플릭스 코리아

<수리남>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모험을 위해 선택한 길은 현실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장르적 규범 속에서 6시간을 달리도록 만드는 것이다. 1화는 장르를 위한 설정들이다. 홍어를 좋아했던 화물 운전사 아버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전 재산을 들고 수리남까지 온 인구의 결단, 자신을 수리남까지 데려왔던 친구의 죽음 그리고 강인구를 교회에 가보라고 종용하는 아내의 모습까지 (목사 전요환을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만들어내기 위한) 모든 것이 모험에 탑승하기 위한 이야기의 설정이었다. 장르적인 요건은 이 영화가 부딪힐 반응에 대한 대책이기도 하다. 제아무리 실제 사건을 가져왔다고 할지라도 이 작품을 장르적 허구로 만들어 낼 때 예상되는(현재 벌어지는) 법적조치에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대를 읽는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시대상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인용된다. 최창호가 전요환의 과거 행적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대통령이 거제도 출신이라는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빠르게 지나치는 장면이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거제도 출신이고, 임기는 1993년 2월 25일에서 1998년 2월 25일까지였다. 그것은 전요환의 수리남 이전 시대를 요약하는 정도다. <수리남>의 현재 시대는 콜롬비아로부터 1톤의 코카인을 공급받기 위해 마약 조직 칼리 카르텔을 기다리는 공항 장면에서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전요환은 비행기에서 내리는 콜롬비아 카르텔 조직의 히메스를 반갑게 맞이하며 맨체스터의 박지성을 좋아한다는 아들에게 선물로 주라며 가짜 사인볼을 건넨다. 박지성 선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던 해는 2005년에서 2012년까지다.

그런데 박지성 사인볼보다 더 직접적으로 연대를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 있다. 미국에서 건너온 최창호가 이름을 속이고 마약 거래를 위해 나타나자 의심 많은 전요환은 첫 대면식에서 여권을 빼앗고 조사를 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조사를 벌이던 전요환이 황급히 야구 경기를 보러 텔레비전 앞으로 뛰어가는 장면이 등장한다. 박찬호 선수의 경기였고, 그는 박찬호의 광팬으로 등장한다. 전요환은 뉴욕 메츠와 필라델피아의 경기를 관람한다. 박찬호 선수는 뉴욕 메츠에 몸을 담은 적도 있지만 텔레비전 화면에는 필라델피아 구단의 옷을 입고 있다. 이때가 2009년이다. <수리남>의 모델인 조봉행이 국가정보원과 미국 마약단속국 그리고 브라질 경찰과의 공조로 체포된 것도 2009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일련의 장면들은 간접적으로 시대를 환기시킬 뿐 정치적 커넥션이나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후반부에 미국 마약단속국이 등장하는 과정이나 헬기의 출격 장면도 꽤 화려하지만 장르적 규범에 충실한 방식을 따른다.

 

ⓒ 넷플릭스 코리아

<수리남>은 시대극을 접는 대신 갱스터 장르를 따라간다. 수리남에 당도해 홍어 사업을 시작하는 '1화'가 지나가면 2화부터는 전요환 목사의 실체를 보여주면서 본격적으로 마약 세계의 일원이 되기 위해 감옥에서부터 고군분투하는 강인구의 변신이 펼쳐진다. 평범한 시민, 현지 마약왕, 국정원 요원이라는 삼각 구도를 중심으로 <수리남>은 여러 대결 구도를 반복하거나 변형하는 다채로운 인물 구도를 보여준다. 강인구-전요환(마약왕)-최창호(국정원)의 삼각 구도 외에도, 수리남 마약 커넥션의 다른 루트인 차이나타운의 수장 첸진(장첸)이 더해진 전요환-강인구-첸진의 삼각 구도는 후반부에서 이야기의 반전을 일군다. 전요환이 수리남의 코카인 커넥션을 지배하고 있다면, 첸진은 필로폰 커넥션을 장악하고 있다. 두 범죄자 사이에 끼어들게 된 '피쉬맨 강인구'는 이들의 대결 구도를 활용하여 전요환을 적극적으로 개입시키는 데 성공한다.

여기에 또 하나의 삼각관계인 강인구(혹은 전요환)-변기태(조우진)-최창호(국정원)의 드라마는 후반부인 5화가 되서야 실체가 드러내면서 장르적 구도의 풍성함을 더한다. 변기태는 전요환의 오른팔이 되기 위해 먼저 첸진의 편에서 일했고, 전요환에게 돌아선 후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그의 출생에 대한 궁금증이 남기는 하지만(그는 중국과 한국의 피가 섞인 인물처럼 보인다) 배신자와 스파이를 오가는 복잡한 정체성으로 관객의 눈을 속이고, 이야기가 비밀스럽게 작동하는 역할을 돕는 중요한 조력자다.

자연에서 펼쳐지는 서부극과는 달리 갱스터 장르가 도시를 생존의 정글로 묘사했던 영화들이었다면, <수리남>은 정글의 자연을 고스란히 끌어들이며 마약이 범람하는 도시를 무대 삼아(특히 차이나타운은 갱스터 장르의 풍경으로 활용된다) 이방의 땅에서 몸부림치는 한 남자를 응시하게 만든다. 윤종빈 특유의 과장된 코미디도 있다. 강인구의 유도 경력은 곳곳에서 위력과 기지를 발휘하는데 1화의 많은 설정들이 이후의 장르 전개에서 위력을 더한다.

윤종빈의 영화는 시대와 장르, 그리고 두 축을 연결하는 실화를 건드리거나 재해석하면서 캐릭터 구축의 방식을 제시한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주인공과 악당들을 통해 곳곳에 의혹의 그림자과 배신의 과정을 덮어씌운다. 친구 따라 수리남에 간 강인구는 국정원의 제안을 받지만 손쉽게 국가를 믿는 인물이 아니다. 그가 한국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할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 대한 절규는 ‘국가’가 개인을 보호하지 못하는 현실의 단면을 건드린다. 그는 전요환 못지않게 국정원에 대한 의심을 드러내며 때로는 독자적인 행동을 한다. 윤종빈의 영화가 시대와 장르를 오가면서 보여주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의심하거나 배반(당)하는 인물들이다. <범죄와의 전쟁>의 최익현이 그러하고, <군도>의 조윤이 그러하며, <공작>의 박석영이 여기에 속한다. 물론, 장르를 따라갈 때는 비교적 단순한 선악의 이분법으로 서로를 속고 속이는 권선징악의 드라마를 전개하고, 시대를 따라갈 때는 끝내 배신하고 몰락하는 인간상이 전면에 나서는 차이를 보이지만,

시대와 장르를 아우르는 의혹의 그림자야말로 윤종빈의 영화가 집요하게 다루는 세계다.

<수리남>을 관람한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전요환이 강인구에게 선물로 준 '박찬호'의 사인볼은 무슨 의미인가 하는 점인데, 6화의 마지막에 강인구의 카센터를 찾아온 최창호에 의해 이 사인볼은 진짜였다는 말을 듣는다. 최창호는 감옥에 있는 전요환이 사인볼을 돌려받고 싶다는 말을 전한다. 그토록 의심 많은 전요환이 강인구에게 수리남에서 펼칠 미래의 땅을 보여주고(그는 이곳에 코카인 나무를 대량으로 직접 재배하여 생산, 유통, 관리를 하고자 했다), 진짜 사인볼을 건네준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믿음의 결과였다. 하지만 이 믿음은 처참하게 배신당하고 도망을 치던 전요환은 결국 강인구의 손에 붙잡힌다. 사기꾼이 사기를 당하는, 이 장르의 결말은 권선징악의 결말을 따르는 행보이지만 서로를 향한 반복과 믿음 속에서 흥미로운 면모가 발견된다. 그것은 강인구와 전요환이 서로 닮아 있는 시대의 인물일지 모른다는 통찰이다.

전요환은 빈번히 강인구에게 자신과 닮았음을 표현한다. 정글에서 마약 트럭을 싣고 도망치는 생존력을 발휘하는 강인구를 보며 자신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기에 이른다. 이를 증명하듯 자신이 코카인 재배를 위해 사들인 땅을 보여주고, 그에게 미래를 제안하기에 이른다. 전요환의 미래를 본 강인구 또한 국정원이 의심스러울 때 차라리 전요환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어떨까 하는 고민을 하기도 한다. 두 인물을 선과 악으로 구별하는 것은 얼마나 가능한 일일까. 그들은 머나먼 수리남에서 각자의 법칙에 따라 생존하려고 애쓰는 하드보일드 감성의 캐릭터가 아닐까. 결국 생존을 위한 동일한 목적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이 아닐까. <수리남>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두 인물의 수리남 생존기이자 대결인 셈이다.

 

ⓒ 넷플릭스 코리아

비즈니스의 두 가지 뜻

가족을 떠나기 전 강인구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돈이었다. 그러나 수리남에서 그는 뜻밖의 모험을 하게 되고, 끝내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기 위한 작전을 펼친다. 이러한 모습은 <공작>의 박석영이 리명운을 설득하면서 던진 비즈니스의 두 가지 뜻을 연상시킨다. "처장님 우리가 하려는 비즈니스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업이고 둘째는 모험입니다. 처장님. 저하고 마지막으로 모험 한번 해 보시렵니까?"

그것은 고스란히 <수리남>으로 이어진다. 애초에 강인구가 수리남으로 간 것은 돈을 벌기 위한 비즈니스 때문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상황을 맞이하면서 그는 모험을 선택한다. 윤종빈이 사랑하는 영화의 세계 또한 궁지에 몰린 주인공이 선택하는 '모험'이라는 비즈니스다. 그런데 모험에는 중요한 토대가 있다. <수리남>의 1화에서 강인구의 가족사를 보여주며 부모의 죽음과 남은 가족을 돌보야 하는 상황 그리고 다소 자신을 좋아했다고 생각한 여자들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어 청혼하는 엉뚱한 장면들은 가족을 떠난 강인구가 끝내 돌아와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강력하게 보여준다. 2화 이후에도 가족들에게 전화 통화를 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5화에 이르면 더 이상 가족과의 통화는 단절된다.

가족은 장르의 롤러코스터를 타기 위한 일종의 승차권이자 종착지다. 궤도에 올라 질주할 때는 더 이상 가족을 보여줄 필요나 여유는 없다. 중요한 것은 모험이라는 배에 어떻게 오르고, 그 모험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하는 데 있다. 그 과정에서 귀환의 깨달음이 생긴다. 일종의 장르적 성숙이라고 부를 수 있는 태도이자 <수리남>의 결론이기도 하다.

집으로 귀환한 강인구는 기대했던 돈을 벌지는 못했다. 그것은 사업이라는 비즈니스의 실패다. 친구의 죽음이 있었고, 전요환을 자기 손으로 체포하였으며, 여러 사람들의 죽음과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는 죽음의 정글에서 무사히 귀환했다는 사실에 만족해야만 한다. 모험의 결과는 생존 자체를 가리킨다. 아내 혜진(추자현)이 운영하는 김밥집에 나타난 인구는 딸 민서의 질문을 받는다. "아빠 또 가?" 그러자 인구는 "아니, 안 가. 절대 안 가."라며 가족들을 끌어안는다. 카센터에 나타난 최창호가 잔금을 대신해 의정부 단란주점을 제공하겠다고 할 때도 그는 거부한다. 이것은 모험에 대한 거부인 동시에 가족들로부터 눈총받을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 이러한 결론은 윤종빈의 영화가 반복적으로 도달한 것이다.

 

ⓒ 넷플릭스 코리아

<범죄와의 전쟁>의 마지막은 집 안의 돌잔치다. 검사가 된 아들 최주환(박병은)은 아이의 돌잔치를 치르고 있고, 이때 외부인을 데리고 나타난 사위 김서방(마동석)이 최익현을 찾는다. 김서방은 명진건설 박회장을 소개한다. 돌잡이가 시작되고, 장면이 바뀌면 아버지 익현은 아들 주환에게 담배를 건넨 후 말을 꺼낸다. 손주 최준석이 복덩이고, 자신한테도 최주환이 복덩이었다면서 "이 아부지도 니 갖고 나서부터 일이 잘 풀렸다 아이가"라고 말을 건넨다. 아들은 기다려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부자간의 대화는 범죄자들 사이에 배신이 난무하며 칼부림이 벌어졌던 영화의 결말이 하나의 모험이며, 그 결과 검사 집안으로 가족이 재탄생하는 순간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새로운 손주가 태어난 가족의 통합은 <범죄와의 전쟁>이 일어난 몇 년 후의 결과였다.

가족 때문에 먼 수리남으로 떠나고, 가족 때문에 범죄의 세계에 뛰어들고, 가족의 죽음으로 인해 복수를 꿈꾸며 군도의 일원이 되는 일련의 영화들은 주인공들이 시대에 흔들려도, 장르적 선악 대결을 펼치는 가운데서도 '돌아갈 목적지'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윤종빈 영화의 결말은 가족이고, <공작>의 경우처럼 가족 서사가 미약한 경우에도 남과 북의 우정이라는 가족적 테먀를 은근히 깔면서 박석영과 리명운을 연결한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은 우정의 연대를 넘어선 유사 가족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가족적 분위기나 언급은 곳곳에서 등장한다. 박서영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리명운이 가족을 소개하는 장면, 안기부와 집권당의 배신을 알게 된 후 괴로워하던 박석영이 상관에게 "지금까지 전 저의 가족, 저의 생사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국가의 부름에 충실히 따랐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마지막까지 임무를 완수할 수 있게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항변하는 장면 등. 박석영은 가족을 대신하여 국가를 선택하였고, 그것은 리명운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은 새로운 가족을 만들기 위한 일종의 희망이었다.

박석영과 리명운은 서로 다른 체제 속에서 살아왔지만 <수리남>의 강인구와 전요환처럼 서로를 이해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김정일을 설득한 박석영이 북파 간첩이었다는 사실이 탄로가 난 후 리명운은 총을 들이대며 전향을 설득한다. 하지만 자신의 국가도 리명운처럼 하나라는 말을 들은 후 그가 북한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여권과 권총을 마련해 준다. <공작>이 도달하는 지점은 조금은 넓어진 '가족-국가'라는 목적지였다.

 

ⓒ 넷플릭스 코리아

그런데, 윤종빈의 영화는 가족이라는 마침표를 찍는 마지막 지점에서 종종 이상한 장면을 끼워 넣는다. 가령 <범죄와의 전쟁> 마지막은 출소한 형배가 나타나 "대부님"을 부르는 장면이다(이때 하정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며, 카메라가 형배의 움직임을 대신한다). 이 장면은 최익현의 상상과 불안으로도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줄 뿐만 아니라 범죄와의 전쟁 시기가 지나가고 검사 가족으로 재결합한 최익현의 세계가 '새로운 범죄의 탄생 혹은 완성'일지도 모른다는 독해를 가능케 한다. 최익현이 도달한 검사 집안은 대한민국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갈까. 이 최씨 집안은 정의로울 수가 있을까. 탐욕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최형배와 최익현은 닮아 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최형배는 건달의 세계를 지탱하려고 했지만, 자신을 공무원이라고 소개했던 최익현은 관료들의 세계를 지배하며 힘을 갖기를 원했다. 손주의 돌잔치에서 검사가 된 아들의 어깨를 쓰다듬는 장면은 새로운 전쟁의 서막일지도 모른다. 

<군도>의 마지막 장면도 기묘하다.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조윤을 향해 타오르는 도치의 분노와 계급적 한계를 절감하는 조윤을 맞붙임으로써 두 사람의 공통점을 끌어낸다. 무엇보다 자신의 조카를 품에 안고 지키려다가 도치의 도끼를 맞는 모습은 그 또한 조선 시대의 가족 이데올로기에 희생당한 인물일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수리남>은 비교적 안전하게 가족으로 귀환한 강인구를 보여주지만 해결되지 않는 궁금증이 있다. 바로 전요환 목사의 신도들이다. 전요환의 사택에 머물던 강인구는 집으로 전화를 하는 과정에서 사택 주변에 감금 사태로 살아가는 소녀를 발견한다. 이들의 모습은 중반 이후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그 시점은 강인구가 더 이상 집에 전화하지 않는 장면과 연결된다. 그리고 마지막 6화에서 강인구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만, 사택에 갇혀 있던 사이비 교단의 가족들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서로에게 체벌을 가하던 사이비 교단의 몇몇 장면은 강인구의 귀환을 행복하게만 바라볼 수 없도록 잔상을 남긴다.

왜 이러한 설정들이나 장면들이 필요한 것일까. 그것은 윤종빈의 세계가 여전히 비열한 거리를 응시하고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장르적 법칙에 따라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윤종빈의 세계와 인물들은 여전히 비열한 거리에서 생존을 위한 게임을 벌이는 혈투를 상상하고 있다. 시대를 품고 시대의 뒷모습에 냉혹함을 보여주었기에 완전한 귀환이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또한, 몇몇 이들이 비판하고 있듯이 그가 도착한 가족의 세계에는 정작 ‘여성’의 자리가 부재하고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은 여전히 작동할 뿐만 아니라 항상 흔들린다.(이미 본지에 쓴 이현동 기자의 글(「머나먼 길을 찾아, '수리남'에 꿈을 찾아」)처럼 윤종빈의 영화가 마초적이기는 하지만 남성 옹호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세계의 타락, 불안한 가족의 현실이 윤종빈의 다음 작품을 가능케 하는 토대이자 해결되지 않는 열망으로 남겨지는 심연이라는 것이다. 그곳에서 도끼를 들고, 마약 현장을 급습하며, 빠친코의 레버를 당기는 남성들의 세계가 여전한 잔혹함으로 살아있다. 그리고 이토록 살아있는 세계를 날 것처럼 묘사해 보려는 윤종빈의 야심과 행보를(이 몫의 절반은 공동 각본을 쓰는 권성휘의 세계이기도 하다) 지켜볼 필요가 있다. 죽은 자들의 도시에서 "살아있네"를 외치는 부박한 현실을.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수리남
Narco-Saints
감독
윤종빈

 

출연
하정우
황정민
박해수
조우진
유연석
장첸

 

제공 넷플릭스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6부작(371분)
등급 19세 관람가
공개 2022.09.09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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