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시간의 이음새, 기억이라는 유산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시간의 이음새, 기억이라는 유산
  • 변해빈
  • 승인 2022.10.04 1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결핍과 불행의 동행자를 귀중히 여기기까지"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속 인물들의 삶은 가계도의 이전 단계, 곧 혈연관계 내의 다른 여성의 일생과 닮아있다. 엄마 혜숙(추귀정)과 같이 남편이 없는 명주(공효진)에겐 아빠가 부재한 딸 승아(배은진)가 있다. 영화 속에는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카우보이 맨(승아의 아빠)의 단면이 등장하긴 하지만, 명주의 과거에서 이것이 그녀의 어떤 선택에 있어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대신 명주, 명은(신민아) 자매가 아빠 현식(문재원)을 찾아가듯 또 다른 차원의 부녀관계를 그릴 뿐이다. 명은은 표면적으로 앞의 세 여성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남성성, 부성성의 부재를 끊어내길 욕망하지만, 생물학적 부녀관계에 대한 풀리지 않는 매듭을 지녔다는 점에서 조카 승아와 동형적이다.

물론,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가 모녀 관계를 통해 '불행한' 여성 서사를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재현하거나 재인하고 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추후에 드러나는 어떤 진실을 통해 이들 모녀 사이에 또 다른 여성성이자 모성성이 추가되는 설정은 분명 눈여겨봐야 한다. 정상 가족 담론에서 벗어난 '비정상적'으로 간주되는 공동체의 형태를 단절하거나 부인하기보다 오히려 '비정상성'의 연쇄적 흐름이 중첩되며 이를 포용하는 모종의 이음새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서브플롯에 해당하는 승아와 카우보이 맨의 갈등 서사의 이음새는 메인 플롯 속 명은의 과거와 상처를 경유해 보완되는가 하면, 승아 부녀의 화해와 회복의 과정은 명은의 미래에 관한 복선으로 기능한다.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가 각자의 결핍과 상처를 인정하고 회복하는 방법은, 원인(과거)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아픔을 지닌 삶의 동행자를 마련해주는 것, 일생의 단계를 먼저 거쳐온 이들의 기억을 유산처럼 귀중하게 여기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 스폰지 , (주)엣나인필름

흐름의 영화

결국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는 '흐름'을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에는 때때로 움직이는 이미지(영상)를 사진과 같이 정지시키는 순간이 있다. 자매가 지나온 과거의 공간은 낱장의 사진으로 다시금 복기된다. 정지는 인물들의 걸음 위에서도 발견된다. 명은이 모르는 과거의 비밀을 알고 있는 명주는 두 사람의 걸음을 어떤 식으로든 더디게 만든다. 돌발적인 교통사고로 '움직이면 안 되는' 상황은 노골적이기까지 하다. 움직임의 중단이 자매의 경로상 방향성의 결여로 직결되는 장치라는 점에서 공간이 수용하지 못하는 관계의 균열로 이해된다면, 이에 견주어 중요한 건 정지되기까지의 느릿한 속도감(슬로우 모션)과 그로 인한 물리적 시간성의 의도된 왜곡이다.

이것은 첫째, 신체의 외상은 과거의 흔적으로 남지만, 상쇄되지 않는 아픔과 마음의 상처는 거기서 중단되지 않고 예기치 않은 시간성 내에서 발현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둘째, 어떤 사실과 진실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그것이 사실이자 진실로 명명된다. 셋째, 그러므로 시간은 한쪽으로 열린 경로가 아니라 쌍방향으로 흐른다.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며 현재의 삶이 미래를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순간적인 정지(중단)를 위해서 느려지는 속도감이 가시화된 이유는, 이 슬로우 모션이 무언가를 딜레이시키는 장치이기보다 양편의 충돌에 의한 회복성에 목적이 있어서다.

교통사고 후 자매가 나란히 앉아 생각에 잠겼을 때, 명은이 결정적인 기억의 퍼즐을 맞추던 놀이기구 장면에서 우리는 상반된 두 가지의 충돌을 목격하게 된다. 빠름과 느림, 과거와 미래, 자매의 서로 다른 성격, 기억에 관한 무지와 앎, 그리고 삶의 애환이라는 극단. 아마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가 첫 개봉일과 리마스터링 재개봉일 사이, 13년의 간격을 두고서 '시대를 앞섰다'라거나 '이전과 다른 이데올로기적 관점으로 읽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 스폰지 , (주)엣나인필름

시원적 바다

아울러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의 공간을 빼놓을 수 없다. 명주와 가족들의 생활 터전이자 명은에겐 멀리하고픈 고향이었을 제주도, 자매가 현식을 찾아 떠난 전주는 정작 색깔을 잃었다. 명주가 생선가게를 운영한다는 점이 자매의 차이를 극대화하기 위한 설정에 불과하고 명은의 고향에의 방문이 드물다는 점도 지역적 특색 없이 수도권과 지방의 거리감 정도에 머문다. 강조된 것은 두 개의 지역 자체라기보다 이를 둘러싸고 이어주는 바다다. 바다는 명주의 알뜰함 덕분에 비행기가 아닌 배를 타고 이동하는 직접적인 경로, 곧 이별과 만남의 제약에 관한 상징적 공간으로 가시화되기도 하지만 그보다 바다를 시간의 모티브로 읽었을 때 의미가 더 풍성해진다.

인물들은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마음의 고통을 달래기 위해 바다로 향한다. 영화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바다는 혜숙을 애도하는 인물들 곁에 있었다. 승아가 아빠를 향해 날카로운 언행을 쏟아낸 후와 어린 명은이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고 하교하던 길에도 이들은 어김없이 바다를 찾았다. 선박 내부, 숙소, 자동차의 좁은 실내에서 반복되던 자매의 다툼을 봉합하는 일과 혜숙과 현식이 나눈 비밀을 보살피는 것도 바다의 몫이다. 다시 말해 어떤 결심을 실행에 옮기거나 갈등을 해소하는 지점의 논리적인 개연성과 인과성은 바다라는 배경적 정경에서 비롯된다. 바다는 이동하는 자(명주, 명은)와 머물러있는 자(혜숙, 현아, 승아),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는 장치이길 거부한다. 자매의 여정에 남은 가족들이 동행하고, 미래의 길 위엔 과거에서 건져 올린 기억이 수놓아져 있다. 바다가 위치한 프레임은 전술한 스틸사진에서처럼 슬로우 모션 효과가 덧입혀졌거나 그렇게 보인다.

인물들을 에워싼 바다라는 프레임, 즉 시간으로써 바다는 정지되어 고인 상태가 아니라 실체적 사물과 세월을 포함해 무언가를 계속해서 흐르게 하고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 스폰지 , (주)엣나인필름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는 시작과 끝이 이어지는 바다의 흐름과 동행한다. 시간성의 차원에서 바다를 정점으로 드러내는 대목은 명은이 현식의 사진을 바닷바람에 실어 보낼 때이다. 명은이 움켜쥔 사진(과거의 시간)을 바다의 평원 속으로 놓아준다. 그것은 영화의 시작에서 혜숙의 화장된 유골을 뿌리는 장례 의식을 대신하여 누군가의 상징적 죽음을 애도하는 몸짓이다. 이때 죽음이란 비극적 헤어짐과 절대적 소멸이 아닌 생을 원초적으로 되돌려놓는 신호다. 바다장(葬)에는 시원적 상징인 바다에서 태어난 인간을 심해로 되돌려보내는 영원회귀의 염원이 담겨 있다.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의 로드는 과거와 미래, 삶과 죽음, 떠남과 만남이라는 인생의 애환을 포용하고 회귀하는 바다의 시간과 닮았다. 명은의 마지막 손짓이 가볍지만 허망하지 않은 건 백골이 될 때까지의 갖은 인생사를 맞은 인간의 육신처럼, 암석이 파도에 깎여 바람에 흩날리는 고운 입자가 될 때까지의 세계의 시간처럼 ("너 혼자만 잘난 줄 안다"고 타박하던 명주의 말과 달리) 혼자만 불행하다고 여기던 혹은 혼자만 모르던 과거의 시간 속에 다른 이들의 시간이 서로 포개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자매는 다시 그들이 태어나 자란 곳으로 돌아간다. 이제는 이전과 다른 삶이 시작될 것이다. 이는 떠나간 사람이 남긴 기억의 유산을 이음새 삼아 '지속되는' 삶이다. 영화의 시간은 다시 느리게 흐른다. 오프닝에 등장하는 엄마의 영정에서 닳아 없어진 빛깔이 남은 이들의 새로운 삶을 움트기 위해서라면, 원망스럽던 이별도 귀중히 들여다보게 된다.

[글 변해빈, limbohb@ccoart.com]

 

ⓒ 스폰지 , (주)엣나인필름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Sisters On The Road
감독
부지영
BOO Jiyoung

 

출연
공효진
신민아
추귀정
김상현
문재원
배은진

 

제작 DNA프로덕션
배급 스폰지, 엣나인필름
제작연도 2008
상영시간 90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09.04.23
재개봉 2022.09.22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