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th DMZ Docs] '도망친 사람이 유령이다' 주체의 소리를 들어라
[14th DMZ Docs] '도망친 사람이 유령이다' 주체의 소리를 들어라
  • 이현동
  • 승인 2022.10.04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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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 없고 기억만이 남은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가 이미지로써의 기록을 전시하고 재현하는 장르적 강령에서 이탈하기 위한 시도는 미학적 관점에서 다시금 재귀되어야할 필요성이 있다.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동시성을 지닌 이미지의 형태가 무엇을 향하여 진격하고 있는지는 단순히 자크 오몽이 제시했던 것과 같이 회화적인 속성과 결부되어 있지 않다. 예술은 본질주의를 양태하거나 일률적인 이미지를 거부한다. 이는 장르적 발상과 저항, 모종의 경계를 창조하거나 재정의하는 것이 창작자의 미학적인 태도로 간주됨을 의미한다. 

우선 영화제에 대해 소회를 하고 시작하자면, 이번 제14회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감상한 몇 편의 영화가 다큐멘터리에 갖고 있었던 고상함과 편견을 깨우쳐 주었다. 리티 판의 <에브리씽 윌 비 오케이>(2022)나 로뱅 훈징어의 <숨겨진 편지, 그리고 사랑>(2021), 그리고 친위안 레이의 <도망친 사람이 유령이다>(2021)는 아방가르드적인 성향이 강했던 작품들이었다. 여기서 <도망친 사람이 유령이다>가 언급한 두 작품의 이미지의 특수성과는 별개로 아방가르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창작자의 기억을 기록의 방식으로 소급하는 것이 아닌 기억을 대체하는 고유한 이미지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친위안 레이 감독의 첫 장편 다큐멘터리인 <도망친 사람이 유령이다>의 무대로 삼은 선전은 개인적인 회억의 대상이자, 중국 개혁개방과 동시에 변혁의 최전선에 있었던 디지털화된 장소이다. 3평 남짓한 전자 상가를 운영하는 부모의 자매인 하오하오와 주주는 마치 유령처럼 장소를 유영한다. 이미지로 포착되지 않는 유령은 어떤 존재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유령은 결코 유형으로 포착되거나 시간과 장소에 구속되지 않는다. 데이빗 로워리의 <고스트 스토리>(2017)가 사랑하는 이에게 발각되지 않고 시간과 공간의 변위와도 관계없이 그 주변부에 머물고 있듯이, 유령은 마치 지켜봄을 중단하지 않는 카메라와 같이 부유한다.

이와 관련하여 "종말은 끊임없이 재생된다"는 레지스 드브레의 책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이미지의 종말은 결국 인류의 종말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영원할 권리를 지닌 영화는 유령으로 존립한다. <고스트 스토리>의 시선이 시각을 추동하는 형식이라면 <도망친 사람이 유령이다>에서의 시선은 시각이라기보단 청각에 가깝다. 주체를 형성하는 창작자의 목소리는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는 이미지와 끊임없이 충돌한다. 선행적으로 말하자면 아이들의 순수성을 묘사하는 놀이와 고립되고 통제된 기계 문명을 기호로 삼은 이 영화의 장소가 바로 그 사례다. 영화 전체를 장악하는 주체로 기생하는 감독의 목소리는 아이들의 놀이 행위를 접신의 대상으로 삼는다. 총 3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놀이와 감독의 목소리는 메아리를 치듯 계속 중첩되거나 반복되며 일관적인 주제를 선점하는 시도로 포섭된다.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아이들의 놀이와 감독의 소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내레이션으로부터 우린 초연히 증류되는 목소리의 음질과 마주한다.

우선 이 의뭉스러운 내레이션의 정체를 파악하기 전에 목소리의 톤과는 무관하게도 두 종류의 특성을 내포한 문장이 지속해서 들려진다는 점을 유념해보기로 하자. 첫 번째로 아이들의 놀이와 합을 맞추듯 이어지는 감독의 보이스오버가 그 예다. 매번 장의 구성에서 반복되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내가 '하'하면 네가 '헤이'"는 감독의 과거를 연상하는 회귀의 문장이면서 시대를 연결하는 놀이의 소리다. 놀이는 무한히 반복되고 소거되지 않는 불멸의 행위이기 때문에 타자와의 소통을 전제로 한 놀이의 구조는 시간을 연동하기 적합한 장치다. 영화에서 아이들은 다양한 놀이를 한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얼음 땡'이나 손전등으로 비추는 빛 밟기, 그리고 자판기를 발로 차거나 충격을 주어 음료수를 불법적으로 꺼내먹는 것일지라도 그 놀이에는 일말의 규율도 없는 긍정만이 위치한다. 놀이를 행하는 협소하고도 조직화된 장소가 어린아이의 정서와는 다른 상충된 무드를 조성한다는 지점에서 이 감독의 목소리는 점진적으로 감각적인 탈주를 감행한다.

영화 서두에 감독의 소리는 아이들의 행위와 일치되지 않는다. 제3장이 돼서야 아이들은 내레이션이 언급한 놀이를 하게 되는데, 이는 장소의 운용과도 결부된 감독의 화법이기도 하다. 먼저, 아이들을 향한 카메라 앵글은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과 같이 다양한 각도에서 그들을 조망한다. 롱 쇼트로 아이들이 창문 밖을 바라보는 시선을 조명하기도 하고, 끌차를 타고 누워있는 아이를 클로즈업하기도 하며,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애니메이션을 바닥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는 아이의 모습을 측면과 후면 장면을 통해 다채롭게 촬영하기도 한다. 특히, 후반부에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그들이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달리는 모습을 핸드헬드(Hand-Held)로 밀착해서 촬영할 때, 아이들의 움직임은 감독이 그토록 일관되어 말하고자 하는 주체적인 움직임으로 확연히 이동한다. 이때 아이가 가진 생기로움과 활력은 중국 최고의 전자기기 거래가 이뤄지는 화창베이라는 기계화된 장소에서 주체성을 발산하는 움직임으로 도달한다.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주체를 잃어버린 장소와 사물들

두 번째로는 자기 고향을 그리워하거나 장소를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을 투영한 문장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을 그리워할 수 있을까. 고향을 그리워하는 병, 향수병은 무엇일까"라는 초반 내레이션과 "가족의 성을 버리는 꿈을 꾼다. 영어 이름은 새 이름의 시작이다. 영어 이름은 성이 없고 온전히 내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장소의 기억에서 벗어나 주체가 되려는 감독의 의지를 드러낸다. 어린아이는 긍정의 가능성과 주체를 모색하는 존재라면, 이 작품에서 어른과 장소 그리고 사물은 어떠한가. 영화에서 아이들은 기계로 점철된 규범적 세계와 관계없이 자신만의 놀이와 세계를 구축한다. 반면에 어른들은 어떠한 놀이도 없이 기계적으로 행위를 수행한다. 엘리베이터 문이 개폐되는 과정, 기계적으로 물건을 나르고 테이핑하며 상품을 정리하는 근무자들, 무심하게 천장에서 돌고 있는 선풍기, 창문밖에 소거되지 않는 조명들의 건물들, 전구들의 깜박임은 공간을 황폐하게 만드는데 동원된다.

더군다나 어른은 자신의 목소리도 없이 외부로부터 응답하는 수동적인 소리다. 잠깐 등장하는 어른인 엄마는 아이에 대한 관심보다 전자 기기가 잘 작동하는지를 확인하거나 잘못 배송된 택배에 관해서 전화상담을 한다. 그들은 노동의 책무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행위자들이다. 그들은 주체 없이 기계화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사물처럼 머무른다.

추가로 덧붙이자면, 영화의 디제시스로 기능하는 사운드는 내레이션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를 다른 측면에서 규정하는 디제시스로 엠비언트 음악(Ambient Music)의 기능은 마치 공간을 점유하는 사물로 감지된다. 원초적인 언어와 같이 분류되는 이 음악적 장르는 명상적인 양식과 대응하기도 하고, 주변부에 새로운 성격을 부여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엠비언트 가 시간의 궤적과는 무관한 이유는 멜로디와 리듬의 부재한 보편적인 양식으로 작동하기가 더욱 그러하다. 이는 아이들이 가진 불균질한 성질이 보편적인 양식 아래에서 덧붙여진다. 이는 아이들의 속성이 기본적으로 주체적이라는 것에서 보편성은 다른 방식으로 결합한다. 극의 운율은 이질적으로 반응하는 매개들을 통해 더욱 보편의 이야기로 치닫는다. 그것은 결국 인간이 자유와 해방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건 감독의 목소리를 통해 명시되는 것이다. 이를 보면 아이들과 장소, 사물을 대치하는 이미지들의 연쇄는 이 영화의 층위를 파악할 수 있는 흥미로운 룰이자 뛰어난 감각으로 디자인된 액티비즘 다큐멘터리다.

유령이 호랑이를 잡아먹고, 뭘 가져오는 것을 깜박 잊은 유령이 다시 숲속에 있는 유령의 집에 들어가 막강한 힘을 가진 괴물에게 잡아먹힌 이야기. 그 종국에 유령이 괴물의 입 밖으로 탈출함으로 마무리되는 은유는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가. 어디서 혹은 무엇으로부터도 귀속될 수 없는 무한한 아이들의 놀이가 마무리되는 시점이 야외 옥상이라는 것을 대조해보면, <도망친 사람이 유령이다>는 감독이 아이가 되는 이야기와 어른으로 겪고 있는 물리적인 고통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이야기가 서로 맞물려 있다. 결론적으로 감독의 내레이션은 갑작스레 변주된 것이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토대에서 구조적으로 구성된 스타일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영화의 질료로 추출되는 내레이션과 아이들의 자유로운 놀이, 통제된 '안'이라는 구속의 장소와 감독의 욕망이 투사된 '밖'을 포커스하는 카메라 무빙은 계속하여 아이의 관점으로 도주를 희망한다.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 Moserfilm

도망친 사람이 유령이다
The One Who Runs Away is The Ghost
감독
친위안 레이
Qinyuan LEI

 

제작 Moserfilm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72분
등급 전체 관람가
공개 제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2022.09.22~29)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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