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 '아이 케임 바이' 세상의 여백이 믿음이 될 때
[NETFLIX] '아이 케임 바이' 세상의 여백이 믿음이 될 때
  • 변해빈
  • 승인 2022.09.3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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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박 안바리의 영매되기의 지속적인 여정"

한 편의 영화를 탐험하는 데 있어 필자는 감독의 전작을 빠짐없이 숙지해야 한다는 규칙 또는 강박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굳이 이를 언급한 이유는 <아이 케임 바이>의 경우, 다른 차원의 접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바박 안바리'(Babak Anvari) 감독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에 영화의 여백을 말하기 위해선 전작들을 우회해야만 했다. <아이 케임 바이>의 여백이 <어둠의 여인>(2016), <운즈>(2019)와 공명하는 지점이길 바란다.

<어둠의 여인>과 <운즈>에서 바박 안바리는 영매다. 그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대상에 관심을 기울인다. 인물들은 악령과 환각을 부인하다가 결국엔 인정하고 만다. '그것'들은 커튼이나 책장을 쓸어 넘기는 바람으로 나타나 관객에게조차 형체를 감추는 데 능하고(<어둠의 여인>) 미세한 단서 하나를 던지고선 벽면, 피부와 같이 보이지 않는 이면을 향한 광적인 믿음으로 현혹시킨다(<운즈>). '그것'들은 물리적으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엄연하게는 인물들 곁을 다녀가며 원하는 것을 빼앗고 잃는 두려움에 시달리게 한다. 바박 안바리라는 영매의 눈을 거친 '그것'들은 전쟁과 차별·배제의 공포, 상처와 고통에 잠식되는 것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를 끌어안은 존재들의 빼앗긴 삶과 닮아있다. <어둠의 여인>에서 "사람은 원하면 (가짜임을 알면서도) 다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다"던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역설적으로 악령과 환각에서 비롯된 금기적인 믿음과 행위를 통해 그들이 '진짜' 원하는 것을 결핍과 파멸의 재앙적 진실의 차원으로 개인의 심리적 영역 안에서 목격해야만 했다.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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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케임 바이>에서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은 '주검'이다. 영화에는 죽기 직전이나 죽은 것으로 간주되는 상태는 있지만, 죽은 형체는 없다. 연쇄적인 살인사건으로 추동하는 영화에서 주검이 등장하지 않는다니. 이 작품에는 전작들에서 극을 이끌던 유령이나 환영도 없고, 죽음을 기리는 숭고한 뜻은 더더욱 없다. 물론 반드시 죽은 몸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끔찍한 상황은 충분히 전달될 수 있고, 오히려 벌어진 상황을 관객에게 전달하기를 유보하기에 두려움의 농도를 짙게 하던 바박 안바리이다. 그럼에도 가장 극적인 이미지인 미동 없이 누운 몸이나 무언가 불에 타고 남은 잿가루마저 죽은 신체를 대체하는 도구로서 불충분하게 느껴진다. 결정적인 여백은 영화의 마지막 순간, 생존자 제이(퍼셀 애스콧)의 입을 빌려 "그 사람들 어떻게 했어?"하고 묻는 부분이다. 살인자 헥터(휴 보너빌)는 무차별적으로 구타당하는 중이거나 입이 결박된 상태이므로 무엇도 대답해내지 않는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현장을 빠져나가던 제이는 무슨 일이냐는 아내의 질문에 울먹이느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더 현실적인 세계의 공포 곧, 살인으로 인한 죽음으로 이동하면서 그 현실 속의 주검을 <운즈>의 벽으로 둔갑한 밀실에 갇히게 하거나 <어둠의 여인>의 바람처럼 스치게 해 영매적인 능력을 경유하게 만든다.

먼저 헥터의 주된 목적은 살인이라는 직접적인 행위보다 감금에 있다. 그는 결과(주검)가 아닌 과정을 중시하는데, 이때의 과정이란 그의 범행 단계가 아닌 범행을 결심하기까지의 인과관계를 가리킨다. 이를테면 범행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그는 스스로 분석해낸 살인의 동기와 과정(유년 시절의 결핍에 의한 혐오 정서)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다 일을 그르치고 만다. 토비(조지 맥케이)가 최초로 발견한 범행의 주요 실마리인 사진들은 라비(헥터가 처음 살해한 대상)의 등장 전후의 과정을 설명하는 일종의 도식이다. 헥터가 최후를 맞이한 순간, 카메라는 도식의 첫 번째 단계에 해당하는 그의 유년기 시절 사진으로 역행해 다시금 '결과'가 아닌 '과정'의 시작점을 비춘다. 즉 헥터는 사회경제적 지도자로서의 윤리적 태도와 어긋나는 혐오에 따른 폭력적/권위적인 모습이 '불우한' 성장 과정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존재다.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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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의 그라피티("I Came By")는 바박 안바리 영화에서 다녀간 것들이 남긴 기호들 중 가장 직관적이지만 개연성의 미비함은 다름없다. 토비 스스로가 기득권층에 대한 저항정신으로 포장한 행위는 아버지의 부재에 따른 결핍과 불만을 표출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리지(켈리 맥도널드)의 위험한 미행이 아들의 실종과 직전의 죄책감에 기인한다고 보더라도 치밀한 추적의 경과로 보긴 어렵다. 게다가 두 사람은 제이가 우연히 발견한 단서로 사건에 휘말려 범행 대상이 된다. 제이가 너무도 능숙하게 발견한 붉은색의 감금방은 우연의 힘에 기대지 않으면 연출상의 실패로만 언급될 것이다. 이러한 우연은 헥터의 과정적 도식과 다른 세상의 여백이다. 구체적으로 설명되지도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도 없으며,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그저 인물들 곁을 지나치는 '그것'들과 같다. 헥터의 도식 속 거대한 구멍을 전면화하는 것이 토비와 리지의 죽음이라면, 이들의 우연한 죽음은 헥터가 주장하는 시스템화된 과정으로 인정받을 수 없어서다. 연쇄적인 살인사건 사이에 가장 비밀스럽게 위장된 이런 여백이 다수(권위층)가 생산하는 시스템의 권위에 맞선다.

그러므로 <아이 케임 바이>에서 영매의 눈은 도식화된 은폐의 시스템으로도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폭력에 감춰진 진실을 향한다.

<아이 케임 바이>는 추적 영화라기보다 '후사건적 영화'다. 타인이 촉발한 어떤 행위 이후 그에 따른 움직임을 지켜보거나 변화된 개인의 행동 양태를 드러내는 영화. 그래서 바박 안바리의 관심사는 죽은 것 자체보다 '죽음 이후'에 있다. 영화의 엔딩에는 그가 처리해야 할 후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전술했던 제이의 물음-대답이다.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여백은 생존자를 구해내고도 프레임을 '다녀간' 이들의 생사를 확신할 수 없는 절망을 위한 걸까, 우연의 여백을 토비와 리지에게 일임한 뒤 그런 무지로부터 자유로워지려던 자신을 향한 자책일까. 혹은 경찰의 손에 우연히 검거된 것으로 위장된 사건을 뒤로 하고 유령처럼 존재를 감춰야 하는 처지에 대한 원망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바박 안바리는 재차 금기를 수행하기보단 다시금 영매로 돌아가려는 것 같다. 결정적이지만 잔혹한 이미지를 재현하여 죽은 신체를 다시 죽이는 금기보다 개인의 심리적 고통으로 들어가기. 그의 영매되기의 여정은 폭력적 사건의 도달지점이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기는 고문을 당하는 인간의 영혼에 있으며 그 영혼의 외상을 목격하는 일임을 전한다. 인물들이 죽어가는 내내 죽음을 여백으로 비워뒀다가 되새김질하듯 죽음을 부인하는 물음을 꺼내놓은 건 마치 다른 걸(원하는 것) 믿어보라는 권유처럼 들린다.

[글 변해빈, limbohb@ccoart.com]

 

ⓒ 넷플릭스

아이 케임 바이 
I Came By
감독
바박 안바리
Babak Anvari

 

출연
조지 맥케이
George MacKay
휴 보네빌Hugh Bonneville
켈리 맥도널드Kelly Macdonald
퍼셀 애스콧Percelle Ascott
바라다 세투Varada Sethu
프랭크 애슈먼Franc Ashman
안소니 캘프Anthony Calf
안토니오 아킬Antonio Aakeel
피터 브램힐Peter Bramhill
미키 맥그리거Micky McGregor
나제스 라쉬디Narges Rashidi

 

제공 넷플릭스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09분
등급 15세 관람가
공개일 2022.08.31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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