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잘된 거야' 애도를 재발명하려는 글쓰기의 윤리
'다 잘된 거야' 애도를 재발명하려는 글쓰기의 윤리
  • 김경수
  • 승인 2022.09.2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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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이 저마다 슬픔을 발명하기를 요청한다"

어떤 영화들은 적절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문제작으로 보인다. 올해 초 프랑수아 오종의 <다 잘된 거야>를 프리미어 상영으로 본 뒤, 9월 중순에 재관람했다. 처음에는 오종의 오랜 팬으로 다소 실망스러웠다.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논쟁적인 요소들이 희미해진 데다가 그간의 영화와는 다르게 영화가 느슨하다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무엇보다도 플래시백의 감상적인 사용이 마음에 걸렸다. 또한, 인물이 안락사를 선택하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간다는 점에서는, 같은 소재를 다루는 미하일 하네케의 〈아무르〉(2012)에 비해서 평작이라는 인상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다만, 9월에 본 〈다 잘된 거야〉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작이 되었다. 하네케 감독이 하려는 것과 정반대로 오종은 '우리가 안락사를 마주하는 모럴'에 대해 질문한다. 이러한 감상의 변화는 영화 바깥의 사건들에 의해서 생겨났다.

<다 잘된 거야>를 다시 보기 전까지 영화계의 거장 두 명이 조력 자살(assisted suicide)을 선택했다. 세계적인 배우 알랭 들롱과 누벨바그의 선봉장이었던 감독 장 뤽 고다르는 죽기 전에 죽음을 선택한 이유를 남겼다. 〈다 잘된 거야〉의 주인공인 앙드레 베른하임(앙드레 뒤솔리에)처럼 뇌졸중으로 투병했던 알랭 들롱은 안락사를 선택한 이유로 육체의 고갈을 이야기했다. 반면 코로나가 유행하고 있을 당시에 인스타 라이브를 할 정도로 건강했던 장 뤽 고다르는 안락사를 선택한 이유로 정신의 고갈을 이야기했다. 각자 다른 이유를 지닌 거장의 조력 자살을 두 차례나 경험하면서 당혹스러웠다. 그들의 죽음에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만 하는지를 고민했다. 알랭 들롱의 죽음은 비극적이었던 데에 비해서 고다르의 죽음은 쿨했다. (영화의 원제이기도 한) "다 끝났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전해지는 앙드레의 부고는 허망함과 안도감을 느끼게 했다. 존엄을 지키려 한 선택이니 마냥 슬퍼할 수도, 마냥 기뻐할 수도 없는 법이다. 이 둘의 선택으로 인해서 안락사의 합법화는 프랑스에서 다시금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안락사를 택한 이들을 애도하는 방식과 그에 응당한 감정을 아직도 발명하지도 못한 채로 안락사를 이야기하는 시대에 도착했다. 독일 철학자 장 아메리(Jean Amery)가 자살이라는 단어 대신 자유 죽음이라는 신조어를 쓰자며,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 자유 죽음을 선택한 자의 선택에 경의를 지니고 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지 벌써 40년이 넘었다.(그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평생토록 나치의 고문 후유증 아래에 살다가 자살했다. 안락사는 여전히 죄악시되거나 무조건적인 슬픔의 대상으로 이야기된다.

그리고 오종은 우리에게 발명되지 않은 또 다른 애도를 절제미가 깃든 카메라로 그려낸다. 랭보가 사랑을 재발명해야만 한다고 요청했듯이, <다 잘된 거야>는 관객이 저마다 슬픔을 발명하기를 요청한다.

 

ⓒ 더쿱디스트리뷰션
ⓒ 더쿱디스트리뷰션

〈다 잘된 거야〉의 원작은 작가인 엠마뉘엘 베른하임의 자전소설이다. 안락사를 선택한 아버지를 뒤따라가되, 그의 낯선 죽음을 어떻게 서술할지를 난감해하는 과정을 다루며, 영화는 원작의 결을 어느 정도는 따른다. 원작이 자전소설이라는 것은 이 영화의 개성을 만든다. 작가인 엠마뉘엘(소피 마르소)는 9월 15일 아버지인 앙드레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영화는 앙드레가 죽는 4월 27일까지의 여정을 다룬다. 반년 가까이 되는 시간을 관통하는 것은 엠마뉘엘과 앙드레 사이의 긴장이다. 엠마뉘엘은 아버지가 다 끝내게 해달라는 부탁을 한 뒤로, 스위스 안락사 단체와 연락하는 둥 그를 돕는다. 그 와중에 스위스 안락사 단체로부터 마지막에 이르러서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고 안락사를 취소하기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내심 아버지가 결정을 철회하기를 바란다. 다만, 관객은 그가 결정을 끝내 이행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영화가 자전소설을 바탕으로 했으며, 현실에서 죽은 앙드레를 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안타깝게도 픽션에 있는 엠마뉘엘과 가족에게는 결말이 공유되지 않는다. 이런 정보의 격차는 히치콕이 서스펜스를 두고 이야기한 상황을 연상하게 한다. 두 사람이 테이블에 앉아 있고, 관객들은 그 테이블 아래의 폭탄을 보고 있는 상황은 이 영화에서도 이어진다. 어차피 일어나고 말 사건을 관객이 보고 있으며, 감독은 그 사건이 언제 일어나는지를 두고 인물 혹은 관객과의 신경전을 벌인다. 이러한 상황을 연출하는 것은 히치콕의 제자이자 오종 감독의 스승이기도 했던 에릭 로메르의 <사계> 연작을 연상하게끔 만든다. 오종은 앙드레의 여정을 따라가되 앙드레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를 최소화한다. 즉, 앙드레가 어떠한 고통을 느끼는지는 다루지 않는다. 이는 '앙드레의 선택이 다양한 감정의 이해관계 속에서 온전히 이행될 수 있느냐'를 다루려는 것이다. 오종은 가족의 반응마저 건조한 톤으로 다룬다. 시종일관 아버지의 조력 자살을 도우면서도, 감정이 흔들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엠마뉘엘은 영화가 끝에 다다를 즈음에서야 눈물을 터뜨린다. 그러한 감정에 도달하기까지 우리가 견뎌야 하는 것은 법적 절차와 가족과 뒤엉킨 감정을 풀어내는 과정이다. 오종은 관객을 안락사를 둘러싼 도덕적인 딜레마에 동참하게끔 하면서 관객이 안락사에 어떠한 감정을 느껴야만 하는지를 시험한다.

다만, 오종이 앙드레를 평범한 인물로 그려냈더라면 영화가 이토록 풍부한 결을 지니지는 못했을 것이다. 앙드레가 동성애자라는 진실이 드러나면서부터 영화는 한층 두터워진다. 처음에는 앙숙으로만 그려지던 제라르가 앙드레의 동성 애인이었다. 클로드(샬롯 램플링)가 앙드레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알고 결혼했으며, 사랑했기에 그의 외도를 묵인했다는 사실도 밝혀진다. 제라르는 사랑하기에 앙드레 곁을 맴돌며 그의 안락사를 무마시키고자 경찰에 신고한다. 무엇보다도 엠마뉘엘은 시계에 집착하는 제라르를 보고서는, 앙드레가 먹다 남긴 연어 샌드위치를 냉장고에 두고 이도저도 못 하는 자신의 감정을 이해한다. 인물이 하는 선택에는 그들이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 내포해 있다. 캐릭터의 비밀을 하나씩 드러내면서 캐릭터에 대한 관객의 판단을 흩뜨리는 작법은 오종이 그의 직속 선배 폴 버호벤의 작법을 이어받은 것이다. 버호벤은 한 상황에서 성과 속, 가해자와 피해자, 삶과 죽음, 선과 악 등 이항 대립을 설정한다. 이러한 이항 대립은 중심인물이 비밀을 드러내면서 무너지며,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는 흩뜨려진다. 또한, 그 이항 대립의 이면에 있던 것들이 드러나면서 관객을 혼란의 도가니로 빠뜨린다. 수많은 감독이 주제를 압축하려고 애쓴다면 버호벤은 중심 주제를 두고 소주제를 무한히 늘리면서 상황을 프랙탈 모양처럼 늘려나간다. 버호벤의 경우 자본과 권력, 스펙터클이 결탁해서 생긴 신자유주의의 모럴을 이러한 혼란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반면에 오종은 구조가 아니라 개개인의 무의식에 있는 불가항력을 지니는 감정을 혼란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인 더 하우스〉(2015)에서는 관찰하고자 하는 욕망이, 〈신의 은총으로〉(2019)에서는 유년기의 트라우마로 드러난다. 오종은 물론 스치듯이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안락사를 하냐"는 등 계급적인 문제를 언급한다. 그는 인간을 슈뢰딩거의 상자로 이해한다. 한 개인에게는 그가 알 수 없는 무수한 감정들이 있고, 그 감정들이 인간이 어디로 다다르게 하는지를 알 수 없게 한다. 오종은 그들의 선택을 하나하나 이해하게끔 한다. 앙드레는 그들 사이에서도 꿋꿋이 죽겠다는 의지를 관철하고야 마는 유일한 캐릭터다. 안타깝게도 오종의 전작에서는 이러한 개인들의 욕망을 드러내는 데에 시각적인 상상력이 동원된 데에 비해서 〈다 잘된 거야〉에서는 무미건조하게만 드러난다.

 

ⓒ 더쿱디스트리뷰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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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오종의 〈다 잘된 거야〉는 〈프란츠〉(2015)를 기점으로 멜랑콜리에 천착한 필모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영화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축은 엠마뉘엘이 이를 하나의 이야기로 인식하기까지의 과정이다. 영화의 엔딩에 다다라서 앙드레는 이 이야기가 엠마뉘엘에게 소설로 쓸 만한 것이라 이야기한다. 엠마뉘엘이 이 소설을 쓰는 과정은 안 드러나나, 이 책이 이미 출간되었기에 엠마뉘엘이 이 소설을 쓰리라는 것을 관객은 이미 안다. 글쓰기와 멜랑콜리는 오종의 세계에서 깊이 연결되어 있다. 오종의 전작 〈프란츠〉와 〈썸머 85〉(2020)는 멜랑콜리를 다루는 영화라 할 수 있다. 멜랑콜리는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한 사람이 사랑하는 대상을 대체할 만한 대상을 발견하지 못해서, 상실을 그들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자학적인 감정에 시달리는 병증을 이야기한다. 〈프란츠〉의 아드리앵과 안나, 〈썸머 85〉의 알렉시의 경우가 그러하다. 〈프란츠〉의 안나는 루브르에 걸린 마네의 《자살》을 마주해 사랑하는 대상인 프란츠와 아드리앵 둘 다가 온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직시한다. 〈썸머 85〉는 데이빗이 사고사로 죽고 난 뒤에야 죽은 아버지에게 느끼고 있던 멜랑콜리의 정체를 이해한다. 〈썸머 85〉가 자전적인 이야기임을 두고 생각할 때, 우리는 오종이 죽음에서 삶으로 되돌아오는 역설을 그리고자 함을 이해할 수 있다. 앙드레가 죽어가는 과정은 곧 엠마뉘엘에게는 도저히 정리할 수가 없던 가족의 서사를 이해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플래시백의 느릿한 진행은 거울을 마주 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엠마뉘엘은 결국 아버지의 서사를 쓸 것이다. 멜랑콜리에서 벗어나고자 이야기를 쓰는 의지야말로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라는 듯이 오종은 이야기를 다시 이야기한다. 안락사는 슬프거나 기쁘거나 하나의 감정으로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앙드레의 입장에서도, 엠마뉘엘의 입장에서도 서로의 이해관계를 다시 이야기로 쓸 기회로 남긴다.

〈다 잘된 거야〉는 안락사를 섣불리 옹호하거나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락사라는 당혹스러운 사건을 쓰는 윤리를 옹호한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고 끝내는 나 자신을 이해하고 치유하려 끝없이 글을 써야만 한다. 그 글쓰기는 멜랑콜리에 함몰되어서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산재하는 질문에 답해나가는 데에서 나온다. 오종은 〈프란츠〉를 기점으로 해 차츰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 〈신의 은총으로〉도 이러한 사유의 연장선에 서 있다. 오종의 이 작품이 다소 밋밋하게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서 오는 듯하다. 그간 연극적인 상황을 소재로 모럴을 시험하고자 한 그는 이 작품을 계기로 필모의 두 번째 막을 연 듯하다. 우리 곁에는 우리가 아직 사유하지 않은 비극들이 얼마든지 남아 있으며, 멜랑콜리에 빠지지 않으려 그것을 끝내 사유하고 써야 한다는 윤리가 그의 작품에 깃들기 시작했다.

[글 김경수, rohmereric123@ccoart.com]

 

ⓒ 더쿱디스트리뷰션

다 잘된 거야
EVERYTHING WENT FINE
감독
프랑수아 오종
Francois Ozon

 

출연
소피 마르소
Sophie Marceau
앙드레 뒤솔리에Andre Dussollier
제랄딘 팔리아스Geraldine Pailhas
샬롯 램플링Charlotte Rampling
에릭 카라바카Eric Caravaca
한나 쉬굴라Hanna Schygulla

 

수입|배급 더쿱디스트리뷰션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13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2.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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