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썬다운' 거대한 부조리 아래 죽음을 욕망하다
'썬다운' 거대한 부조리 아래 죽음을 욕망하다
  • 김민세
  • 승인 2022.09.08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카뮈의 해변 위에서 증발하는 한 인간에 관하여"

"엄마가 죽었다" 마치 『이방인』의 첫 구절을 따라 읽듯 <썬다운>은 시작한다. 여동생 앨리스의 가족과 함께 멕시코 해변에서 휴가를 보내던 주인공 닐은 갑작스러운 엄마의 부고 소식을 듣는다. 얼굴을 감싸며 흐느끼는 앨리스와 달리 닐은 태평해 보이며, 심지어 호텔에 여권을 두고 왔다는 거짓말을 하고, 다시 해변으로 돌아가 우연히 만난 여자 베레니스와 휴가를 즐긴다. 이후 구치소에 구금된 닐에게 조사관은 이런 질문을 하기도 한다. "왜 엄마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습니까" 그렇기에 어떻게 보더라도 <썬다운>이 알베르 카뮈의 실존주의적 소설 『이방인』을 반복하고 있음은 당연하다. 총, 햇빛, 사형선고와 같은 『이방인』의 기호들은 <썬다운>을 떠돌며 닐의 알 수 없는 욕망과 스러져가는 육체를 형상화한다.

쉬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닐이라는 인물은 『이방인』의 뫼르소에서 시작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미셸 프랑코의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이다.

다짜고짜 운전하던 차를 멈춰 세우고 도로 위를 홀로 걷던 '로베르토'(<애프터 루시아>), 자신이 맡은 환자들의 지인인 척하며 의도를 알 수 없는 거짓말을 하던 간병인 데이비드(<크로닉>), 딸의 아이와 연인을 가로채 자신의 욕망을 채우던 에이프릴(<에이프릴의 딸>). 이렇게 미셸 프랑코 영화의 중심에는 항상 한 번에 이해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뒤틀린 욕망을 가진 인물들이 있었다. 다만,『이방인』의 뫼르소가 우리의 관습과 부조리의 의식에 도전하는 질문으로 남겨진 인물이었다면, 프랑코의 영화에서 이런 인물들은 서사적 미스터리를 한층 쌓아 올리는 서스펜스의 기폭제로써 기능한다. 프랑코의 서사를 운반하는 핵심은 언제나 미스터리였고, 그 미스터리가 해소되는 끝의 지점에는 이해할 수 있는 어떠한 본질적인 욕망이 있었다.

 

영화에서 닐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응시한다. 배 위에 올려져 있는 물고기들을 보고, 해변을 보고, 다이빙하는 사람들을 보고, 태양을 본다. 이 응시는 멕시코 해변, 즉 부조리의 태양 아래에서만 이루어진다. 보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닐이 그 해변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은, 결국 그 해변을 맴돌 수밖에 없는 것은 응시의 욕망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응시의 행동은 사실 그가 무언가를 보고 싶지 않다는 바람에서 비롯된다. 한마디로 해변 위에서 닐이 행동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무언가를 하고 싶지 않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닐은 그 '무언가'를 피하기 위해서 멕시코 해변으로 올 수밖에 없는 셈이다. 이것이 닐의 욕망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언가'는 닐에게로 다시 찾아올 것이다. 햇빛 아래서 그의 몸이 무너질 때, 그의 지각이 망가질 때. 미스터리로만 남겨져 있던 '무언가'는 환상의 형태로 몸을 바꾸어 그의 앞에 나타날 것이다.

닐이 사실은 성공한 육류 가공업 회사의 후계자였다는 것이 밝혀지고, 멕시코 범죄자들에 의해 앨리스가 살해당했을 때. 닐은 앨리스의 암살을 지시했다는 누명을 쓰고 구치소에 구금된다. 이때부터 <썬다운>에는 닐이 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 '무언가'가 환상의 방식으로 현현하기 시작한다. 그 '무언가'는 닐의 부모가, 그리고 어쩌면 닐이 수없이 죽여왔던 돼지이다. <썬다운>에서 돼지의 환상이 등장하는 방식은 세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구치소에 구금된 닐이 샤워를 하다 말고 허공을 쳐다보고 있을 때. 카메라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 닐의 얼굴을 본 다음, 그의 시선이 향한 자리에서 서성이고 있는 돼지의 환상을 보여준다. 돼지의 환상은 '닐의 시선'을 거친 뒤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그 환상은 닐의 응시 끝에서, 닐의 피폐해진 정신 상태로부터 나온 것임이 증명된다.

둘째, 한밤중 해변. 파도가 치고 있는 해변 모래사장 위로 다소 뜬금없이 돼지 무리가 등장한다. 이 환상이 모습을 드러낼 때는 앞선 환상의 주체인 것처럼 보였던 닐이 보이지 않는다. 이 환상은 누구의 것인가. 프랑코의 영화에서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는 듯이 욕망의 자리를 차지하는 '바다'이다. 그 바다가 꿈꾸는 환상. 닐이 다시 돌아온 <썬다운>의 바다는 갑자기 보트를 타고 나타난 사람들이 총을 쏠 수 있고, 잠든 사이 맥주가 든 바구니를 바꿔치기할 수 있는 부조리의 세계이다. 그곳은 엄마의 죽음 전, 석양진 바다를 멀찍이서 바라볼 수 있는 호텔 안의 인공적인 바다(호텔 안의 수영장)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공간이다. 안락한 호텔에서 바라보던 해변은 모든 욕망이 시작되고 뒤엉키는 곳이 된다. 그러므로 이 환상은 그 욕망과 부조리의 바다 위에서 수없이 죽어갔던 돼지들의 유령이다.

 

셋째, 구치소에서 풀려난 닐이 베레니스와 함께 집으로 돌아올 때. 가장 방점을 찍고 싶은 것은 이 세 번째 환상이다. 이때 카메라는 닐이 들어올 집 안에 있다. 그리고 카메라가 비추는 문 앞에는 장기가 쏟아져 나온 채 쓰러져 있는 돼지의 환상이 있다. 카메라는 닐과 베레니스가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올 때까지 돼지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사실 이때까지 우리는 그 돼지가 환상인 것조차 확신할 수가 없다. 베레니스가 문을 열고 돼지 앞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갈 때. 반면 닐은 그 돼지를 보고 문지방을 넘지 못한 채 가만히 서 있을 때. 그때 우리는 그것이 닐의 눈에만 보이는 환상임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 환상은 닐의 응시 전에도 존재하는 실재이며, 동시에 닐에게만 지각되는 환상, 즉 '실재하는 환상'이다.

이 세 번째 환상이 보여주려 하는 것을 단순히 피폐해진 닐의 정신상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장면이 보여주려는 것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닐은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닐만이 그것을 볼 수 있고 다른 사람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이름의 욕망으로 살해당한 그 돼지는 환상이 아닐 수도 있기에. 그것은 지금 우리 눈앞에 있음에도 볼 수 없는, 알아챌 수 없는, 모른 체 할 수밖에 없는 것일 수도 있기에. 그래서 <썬다운>에서 돼지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환상에서, 세상을 떠도는 유령으로, 결국 마지막에는 눈앞에 있는 실재, 그렇지만 누군가에겐 보이고 누군가에겐 보이지 않는 기이한 위치의 실재(實在)로 변모한다.

<썬다운>은 그 실재하는 환상을 눈으로 본 자의 무너지는 육체를 보고 있다는 점에서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자마>를 떠올리게 만든다. 아니, 어쩌면 <썬다운>은 <자마>의 반대편에 있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자마의 몸이 제국주의와 함께 썩어갈 때, 닐의 몸은 부조리의 햇볕 아래에서 증발한다. 자마의 죽음은 기이한 승리이지만 닐의 죽음은 처절한 비극이다. 우리 눈앞에 닥친 돼지의 비극을 보는 것과 그것을 본 인간이 살아있는 것은 양립할 수 없다. 수없이 많은 역사들이 증명하듯 인간이 살아있는 한 돼지들이 환유하는 자연은 죽고 죽어 나가는 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썬다운>의 미스터리 끝에서 마주칠 수 있는 것은 그 거대한 부조리 앞에서 스스로 사라질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자의 무력한 육체와 죽음의 욕망이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썬다운
sundown
감독
미셸 프랑코
Michel Franco

 

출연
팀 로스Tim Roth
샤를로뜨 갱스부르Charlotte Gainsbourg
헨리 굿맨Henry Goodman
아주아 라리오스Iazua Larios
사무엘 보텀리Samuel Bottomley

 

배급|수입 엠엔엠인터내셔널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82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2.08.31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