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타임' 또다시 노동의 중심으로
'풀타임' 또다시 노동의 중심으로
  • 김민세
  • 승인 2022.08.24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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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으로 감염된 일상의 시간"

지금 이 시대의 노동의 풍경을 포착할 수 있을까. <풀타임>은 이 질문에 대답하는 영화다. 싱글맘 '쥘리'(로르 칼라미)는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 5성급 호텔에서 일하고, 더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해 여러 차례의 면접을 보며, 지옥 같은 노동의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매일 이른 새벽 똑같이 눈을 뜬다. 왠지 모르게 알람이 울리기 전 눈이 떠질 것만 같은 출근 직전의 불안함을 소환하듯이, 영화는 잠이 든 쥘리의 몸과 얼굴, 그 위에 맞닿은 스산한 공기를 유영하며 시작한다. 그리고 눈이 떠지면 파리행 기차를 타기 위해 달리는 쥘리와 함께 노동을 위한 시간에서 노동의 시간으로, 노동의 주변에서 노동의 중심으로 따라 들어가게 될 것이다.

 

ⓒ 슈아픽처스

<풀타임>이 노동의 풍경을 그려내는 방식은 '질주하는 이미지'이다. 직장이 있는 파리와 거주지인 교외지역을 오가며 출퇴근하는 쥘리는 전국적인 교통파업 이후로 자신이 쌓아 놓은 신뢰와 커리어가 엉망이 될 위기에 처한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축소 운행하는 전철을 타기 위해 달려도, 지각하지 않기 위해 파리 거리 위를 또다시 하염없이 달려야 한다. 이때 사프디 형제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전자기반의 사운드트랙은 질주의 이미지를 운반하는 코러스가 된다. 그리고 직장에 도착해 일을 시작할 때, 질주의 이미지와 사운드트랙은 마치 합을 맞추듯이 영화에서 후퇴한다. 마치 태풍의 눈에 도착한 것처럼, 노동의 중심에서 노동하는 시간은 질주 끝에 안도하는 순간이 된다.

이 아이러니가 섬뜩한 이유는 노동자가 노동할 때를 안심시키고, 노동하지 못할 때를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노동의 불안에서 노동하지 못하는 불안으로의 전이. 노동의 시간이 감염시키고 장악한 여분 세계의 시간. 욕망을 위한 노동에서 노동 그 자체의 욕망으로. 그렇기에 쥘리의 욕망은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노동의 중심, 파리라는 도시로 다시 회귀한다. 그러므로 <풀타임>이 질주하는 이미지를 통해 그려낼 수 있는 것은 태풍의 눈과 같은 노동의 중심이 아니라, 그 주위를 회전하는 노동을 '위한' 시간, 즉 파노라마적인 노동의 풍경이 된다.

 

ⓒ 슈아픽처스
ⓒ 슈아픽처스

쥘리의 질주가 시스템을 반복하고 순환시킬 때, 시스템에 저항하는 교통파업은 서로 충돌한다. 교통파업은 곧 이동의 부재이기에 쥘리의 질주를 멈추게 만들거나, 방대로 더 질주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러나 노동의 욕망을 가시화하는 질주의 이미지와 달리 시스템을 향한 저항은 영화 내에서 숨겨져 있다. 파업과 시위는 쥘리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지만, 영화는 그 시위 현장의 순간 또는 그것을 짐작하게 할 만한 미장센조차 보여주는 법이 없다. 파업과 시위에 대해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실재하는 사건이 아니라 매체화 된 라디오 뉴스이며, 기차역의 안내 방송이고, 연착을 나타내는 플랫폼의 안내 스크린뿐이다.

이렇게 비가시화된 저항은 시스템과 어떻게 관계한다고 볼 수 있을까. <풀타임>에서 파업과 시위는 특정한 실재하는 사건이라기보다 자연스럽게 삶에 스며들어 코드화된 하나의 절차이자 시스템의 일부인 것처럼 묘사된다. 마치 <설국열차>(2013)의 커티스가 이루어낸 혁명이 사실은 시스템 유지를 위한 거대한 계획의 일부였듯이. 이것은 이 영화가 가진 노동을 둘러싼 세상을 응시하는 '태도'이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세계 안에서 노동을 반복해야만 하는 쥘리가 그리고 그녀가 대변하는 수많은 현대인이 가질 수밖에 없는 '시선'이기도 하다. 비극적이게도 노동해야 하는 그들은 저항의 주체가 될 수 없고 오히려 저항의 반대편에서 노동의 중심을 향한 운동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 슈아픽처스

쥘리는 결국 자본주의의 논리와 시스템이 된 저항에 굴복한다. 교통파업으로 인한 잦은 지각으로 해고를 당하고, 새로 면접을 본 회사에서도 합격 연락을 받지 못한다. 그제야 그녀는 태풍 밖으로 나와 노동 밖의 고요한 세계를 마주한다. 그 세계는 새벽부터 아이들을 이웃에 맡기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기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플랫폼으로 달리지 않아도 되는 세계이다. 아이들과 함께 파리 놀이공원에 가지만, 지금의 쥘리가 서 있는 파리는 이제 노동의 중심이 아니다. 잠깐일지도 모르겠지만 쥘리의 세계와 쥘리의 이동을 감염시킨 노동이라는 단어는 영화에서 소거되기에 이른다. 쉽게 안도할 수도 없을 만큼 고요한 이 새로운 세계는 그 이전까지 '노동'이라는 단어가 주었던 무게를 체감하게 한다.

그리고 뒤늦게 걸려 온 면접 합격 전화가 쥘리의 세계를 다시 바꾸어 놓는다. 전화 너머로 합격을 알리는 긍정적인 말들이 나올 때, 면접관의 목소리는 면접 장면의 긴장감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면접관의 입에서 나왔던 말들. 이렇게 달려와서 면접에 합격하더라도, 그것은 도착이 아닌 결국 또 다른 노동이 반복임을 말하는 듯한 장면. 다시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와서. 과연 그 전화를 받고 흘리는 눈물은 기쁨에 찬 눈물일까. 그것은 쥘리 스스로가 하고 있는 착각일 수도 있다. 그 잠깐의 기쁨은 눈을 뜨면 다시 돌아가야 하는 세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 전화를 끊고 감정을 추스르는 쥘리가 프레임 밖으로 응시하고 있는 희망찬 미래는 실재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음성 또한 노동의 선언이 될 뿐이지, 그 너머의 새로운 미래는 실재하지 않는 판타지이다. 실재하는 것은 또다시 노동의 중심으로 회전하는 질주의 이미지, 그리고 시스템 안에서 코드화 된 저항 뿐이다.

<풀타임>은 노동의 시간뿐만 아니라 노동이라는 태풍의 눈을 회전하고 있는 이미지를 통해 노동이라는 단어가 일상의 시간을 어떻게 잠식하고 감염시키는지를 그려낸 노동의 풍경화이다. 영화 전반을 흔들어놓는 장르적 문법은 이른 새벽 울리는 알람 소리와 출근길 지하철에 가득한 노동자들의 풍경과 어우러져 지금 여기의 노동의 풍경을 소환시킬 감각을 깨운다. 스릴러의 문법을 따르는 듯한 장르적 특성 또한 이 영화를 숨죽여 볼 수밖에 없게 하는 이유가 되겠지만, <풀타임>이 진정한 일상의 스릴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피부에 맞닿는 동시대 노동의 보편적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장르를 통해 이 감각의 밀도를 촘촘히 메꾸어나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 슈아픽처스

풀타임
Full Time
감독
에리크 그라벨
Eric Gravel

 

출연
안 수아레즈
Anne Suarez
제네비에브 음니히Genevieve Mnich
시릴 구에이Cyril Guei
루시 갈로Lucie Gallo
아가테 드론느Agathe Dronne
마렘 은디아이Mareme N'Diaye
올리비에 팔리에Olivier Faliez

 

수입|배급 슈아픽처스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88분
등급 전체관람가
개봉 2022.08.18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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