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턴' 서정곡, 그 불능적 과정을 긍정하기 위해
'녹턴' 서정곡, 그 불능적 과정을 긍정하기 위해
  • 이현동
  • 승인 2022.08.2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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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란 공간이 말이 되기까지"
ⓒ 시네마달

장애에 관한 관심은 개인과 공동체가 극복해야 할 고결하고도 어쩌면 우아한 환상과 같은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최근에 방영되었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2022) 같은 드라마의 선풍적인 인기는 사회가 가진 장애인이라는 호칭이 가진 병폐를 불식시키는 데 모종의 역할을 했다. 또 우화와도 같은 이러한 픽션을 긍정하기 위해 유희적 요소를 삽입한 다큐멘터리 영화 <니얼굴>(2020)도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전에 신의 저주로 간주하였던 장애는 점차 근대라는 시기를 지나 탈신화적으로 대중들에게 진입하였고, 사회, 문화, 예술, 의학 등을 관류하여 해체의 대상으로 이행되었다. 결국 이는 시대의 요청이기도 하고 숙명이기도 한 인간의 휴머니즘과 깊이 개입되고 연동되어 있는 것이다.

다큐멘터리가 시간의 흔적을 기술하는 형식을 지닌다고 할 때 최종적으로 창착자는 자신의 의도가 관철되기까지의 이미지를 기다리는 낚시꾼과 같다. 장정 11년 동안 촬영된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지닌 정관조 감독의 <녹턴>(2019)은 긴 시간의 서사 속에서 낡아가거나 새롭게 갱신되는 카메라 렌즈, 파괴될 것 같이 흔들리는 성호와 건기의 우정, 엄마 민서가 고군분투하며 건기의 말처럼 성호에게 삶의 모든 것을 배팅하는 투혼을 통해 이 영화의 하모니는 점차 완성된다.

 

가족이 화음을 맞추기까지

'야상곡'이라는 뜻을 가진 녹턴(Nocturne)은 밤에 어울리는 낭만적인 서정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형태를 말한다. 쇼팽에게 많은 영향을 준 녹턴은 다시 쇼팽을 통해서 수많은 녹턴에 해당하는 곡들이 탄생하였다는 점에서 가족을 연상시킨다. 자명하게도 <녹턴>과 깊은 연관성을 가진 요소로 음악을 상기시키는 것은 새롭게 생성되고 개시될 가족과의 관계를 지목하는 데도 그 전반적인 발상을 공유한다. 가족이란 필연적인 만남이 시간이란 관성으로 인해 서로 멀찍이 표류할 때 발생하는 것은 일치가 아닌 불안정한 관계를 묘사하면서 발생한다. 이를 영화에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특수한 자폐라는 실체와 형질에 관한 프레임의 작동을 보게 될 때 가족이란 형태가 맞추게 될 화음에 대한 내용을 예견하게 된다.

 

ⓒ 시네마달

<녹턴>에서 프레임을 구성하는 가장 흥미로운 디자인은 성호와 건기라는 두 종류의 관념적 혹은 의식적이라 할 수 있는 물리적이며 정신적 공간을 분리와 결합을 통해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이를 분리하는 역할을 하는 것도 이를 결합하는 역할을 하는 것도 엄마 민서다. 작품의 리듬을 조율하는 엄마는 마치 지휘자처럼 서사를 지휘한다. 두 아들의 반응이 그녀의 교육방침과 철학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2008년도 최초로 촬영된 성호의 모습은 TV에 흘러나오는 아이돌 음악을 힘차게 따라 하거나 자유롭게 춤을 추며 기뻐한다. 혼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성호는 민서를 통해 머리감기, 면도하기 등의 도움을 받고, 자폐증세를 지닌 성호를 교육하기 위해 언제 어디서든 끊임없이 쫓아다닌다. 그다음 등장하는 동생 건기의 모습은 형 성호와의 이미지와는 상반된 삶을 조명함으로 그 차이를 지시한다. 고등학생인 건기의 일상은 자유롭지 않을뿐더러 입시라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지만 엄마는 크게 개입하지 않는다. 심지어 엄마는 건기의 콩쿠르에 지각하기도 한다.

<녹턴>에서 형 성호에 비해 건기는 상대적으로 엄마의 관심을 덜 받는 모습이 비친다. 순간 시간이 지나 더 이상 피아노를 전공하지 않는 건기의 일상은 밤늦게까지 핸드폰을 팔고, 생계를 위해 알바를 이어간다. 생을 이어가기 위한 그의 삶 속에서 엄마의 관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건기는 사회와 엄마에 대한 불만을 호소하면서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을 타파하려는 의지를 갖고 독립하며 살아간다. 그는 퇴근하는 차 안에서 "아빠는 아빠 인생을, 엄마는 엄마 인생을, 저는 제 인생을 살아야죠"라고 말하거나 "저를 위해 관심을 쏟았으면 제가 더욱 잘되지 않았을까요?"라는 엄마에 관한 아쉬운 이야기를 남긴다. 이 이야기로부터 생성되는 이미지는 단순히 말이라는 의식적 소산으로 잔여 하지 않고 공간을 활용함으로 그 심리와 정서적 간격을 유용하게 공간화한다. 이는 가족이 머무는 공동 장소인 '집'에서 둘의 거리와 간격이 외부적으로 표시할 때 밀접하게 드러난다. 집의 입구로부터 촬영된 것으로 유추되는 앵글은 방에 있는 성호와 거실에 있는 건기와의 거리감은 벽을 통해 분활하여 스케치한다. 이러한 벽의 간극에서 성호는 민서의 요청에 따라 건기에게 넘어가서 형식적으로 안부를 묻거나 반대로 건기가 엄마의 요청에 대항하기도 하는 무심한 관계를 유지한다.

공간의 변화와 형제의 움직임, 그리고 부동적인 태도는 말을 건네는 것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건네는 행위가 마비되어 있음을 묘사한다.

 

ⓒ 시네마달

둘의 관계가 회복하기 위한 여정으로 적합한 이미지를 찾는다면 사고를 당한 건기를 문안하는 장면과 러시아에서 치러진 상트페테르부르크 협연이라는 두 가지 장면이다. 병문안을 간 민서와 성호의 모습에서 건기와의 물리적인 벽은 희미해지고, 곧이어 러시아의 초청을 받아 형제 둘이 함께 연주하는 과정에서 극적으로 둘은 정서적으로도 형제의 연대를 확립한다. 앞서 집에서 관측되었던 공간적 거리감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로 사용되었던 '벽'은 러시아의 생활 속에서 점차 제거된다. '집'에서의 공간 분리를 데칼코마니처럼 드러낸 벽이 없는 버스나 욕실에서 함께 면도하고 세면하는 둘의 허물없는 공존은 가족이란 형상을 부각하는 동시에 관계의 회복과 교정을 표면적으로 드러낸다. 화음이 교접하는 마지막 과정인 건기와 성호와의 연주는 이탈되지 않는 꿋꿋한 형제애를 발산하며 이 영화가 드러내는 녹턴의 서정성을 분출한다. 무대 이후 건기는 처음으로 정상적인 형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일치를 돕는 역할로 기능하는 '음악'이란 도구는 그들에게 있어 불능적 과정을 긍정하기 위해 쥐어진 신의 선물이자 어머니의 유산일지도 모르겠다. 혼신을 다한 엄마의 마음은 형제의 연주를 가능하게 하는 악기가 되어 <녹턴>의 지휘를 성공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민서가 성호에게 "엄마가 죽으면 들려줘, 쇼팽 C#단조"라고 요청할 때 서정적인 멜로디와는 거리가 먼 편견이 가득한 잔혹한 현실과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일상의 괴리를 뚫고 연주되는 가족의 화음은 자폐라는 장애에서 굴복되지 않고 모든 가족이 나아가야 할 보편적인 이미지라는 점에서 <녹턴>은 우리가 계속해서 청음 해야 할 서정곡이다. 그들의 끝끝내 삶을 포착하기 위해 정관조 감독의 집요한 관심과 태도는 한 가족의 희로애락을 투영하는 동시에 자폐를 가진 성호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아카이브를 대중들에게 쥐여준다는 지점에서 유의미한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 시네마달

녹턴
Nocturne
감독
정관조

 

출연
은성호
은건기
손민서

 

제작 포이에티케
배급 시네마달
제작연도 2019
상영시간 98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2.08.18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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