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트' 과거와 현재를 잇는 서늘한 질문
'헌트' 과거와 현재를 잇는 서늘한 질문
  • 배명현
  • 승인 2022.08.19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정재의 거대한 농담"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헌트>는 '악수'를 기점으로 1부와 2부로 나뉘는 구조를 가진다. 대부분의 러닝타임을 차지하고 있는 1부는 서로의 정체를 밝히는 데 주력하는 스파이 장르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고, 2부는 서로의 정체를 공유하는 두 인물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도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스릴러로 이루어져 있다. 이 구조는 영화를 구성하는 틀로 언뜻 정합해 보이지만, 이상한 구석이 있다. 왜냐하면 1부의 목적이 박평호(이정재)와 김정도(정우성)가 서로의 정체를 밝히는 데에 있다면, 그들의 정체를 드러내도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박평호와 김정도는 계속해서 서로를 겨루지만, 그 어떤 새로운 정보도 얻지 못한다. 대신 이 과정으로 관객이 알 수 있는 건 안기부를 감싸고 있는 공기와 내부 상황에 대한 흐름이다. 무고한 이들을 간첩으로 만들고 고문하는 것은 물론, 안기부 내부에서도 서로를 믿지 못하고 힘겨루기한다. <헌트>는 시종일관 엄청난 속도로 정보들을 쏟아내지만, 정작 핵심 인물인 박평호와 김정도의 은폐된 진실을 밝혀내지 못한다. 오히려 이는 서로에 의해서가 아닌 그들 자체의 행동으로 드러나게 된다. 김정도는 베드로 암살을 기획해 왔음을, 박평호는 동림임을.

결과적으로 이 트릭에 속은 사람은 '관객'이다. 박평호와 김정도가 계단을 구르며 싸움하는 도중 나누는 대화를 다시 복기해 볼 때, 김정도는 이미 박평호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하고, 박평호는 자신이 감청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듯 행동하기까지 한다. 이 둘은 이미 서로의 정체를 알고는 있지만 함께 행동할 수는 없고, 같은 목적을 이루려 하지만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없는 존재였다. 아니, 같은 목적이라는 판단을 취소해야겠다. 베드로 암살은 두 사람이 생각하는 최종 목적이 아니라 경유해야 하는 중간 과정이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박평호와 김정도는 서로 도울 수도, 침범해 제거할 수도 없는 이상한 관계를 시종일관 유지한다.

 

1부에서 박평호와 김정도가 행동한 과정을 도식으로 그려낸다면 위와 같이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두 인물은 교차'점'(X)이 아닌, 평행'선'(=)을 그린다. 이렇게 그려진 평행선을 인물이 성취하고자 하는 바를 추구하는 과정이라 보았을 때, 이 평행선의 정의는 의미심장해진다. '같은 평면(시대) 위에 있는 둘 이상(두 인물)의 평행한 직선(욕망)'이라고. 두 사람은 애초에 만날 수 없는 선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잠시 동안이긴 하지만) 환대로 보였던 악수는 접점이 아니다. 그저 주변의 수만은 선에 의한 착시에 가깝다. 이 평행선은 두 사람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대비시키기까지 한다. 두 사람이 가려했던 지'점'까지 말이다.

필자는 여기서 <헌트>를 '감독 이정재의 거대한 농담'이라고 말하고 싶다. 80년대 이후를 사는 우리는 마지막 미션이 실패할 것을 뻔히 알고 있다. 이런 예정된 실패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감독은 모호하고 의뭉스런운 질문을 한다. "절대 죽지 않을 것 같았던 베드로가 자연사로 죽어버린 오늘을 우리는 지금 이 픽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80년대 이후(평행선의 연장선)를 살아가는 우리가 긋고 있는 선은 어떤 선입니까?" 이 질문들은 조원식(이성민)의 '추워war, 무서war'처럼 썰렁하면서도 동시에 스산한 농담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 문제는 난센스이기에 정답이 없다. 다만, 이에 대한 답을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어떤' 웃음을 지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1987>(2017)과 <박하사탕>(1999)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87>(2017)은 가장 대중적인 80년대의 인식을 공유하는 최근 영화라는 점에서 유의미하고, <박하사탕>(1999)은 <헌트>와 같은 동기로 변해버린 인물을 다룬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먼저, <1987>부터이야기 해보자. 두 영화는 현실의 시간으로는 5년, 영화 내에서는 4년이라는 시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공교롭게도 이후 개봉한 <헌트>가 영화 내의 시간에서는 선행한다) 재미있는 건 같은 시대의 인물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전혀 다르다는 데 있다. <1987>이 80년대를 관통하는 민주화의 세대의 성공에 대한 영화라면, <헌트>는 실패한 영웅에 대한 영화이다. 그리고 전자가 586의 성취를 현재까지 이어주는 이야기라면, 후자는 실패한 영웅(박평호)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동시에 총알을 피해 도망친 조유정이 스크린 바깥에서 살아남은 오늘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때문에 이전 이야기의 중심이었던 586세대는 <헌트>에서 부정된다. 그들은 폭력경찰에게 매를 맞고 혁명과 개혁으로 싸움을 벌인다. 그러나 이 움직임이 유의미해 보이진 않는다. 심지어 이 싸움이 안기부 요원의 월급으로 정리된다는 점에서 다시 부정된다. 이들은 등장 빈도로도 배제된다.

그렇다면 <박하사탕>은 어떨까. 이 영화는 <1987>과 마찬가지로 민중 속 개인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지만 김영호(설경구)가 가해자라는 점에서 차별된다. 이는 <헌트>의 김정도와 같은데, 김영호와 김정도는 같은 사건을 경험했지만 그 이후가 전혀 다르다. 김영호는 망가졌고 김정도는 처단하려 한다. 전자가 시대의 흐름 속에 휩쓸려 버린 인물이라면, 후자는 거스르려는 인물로 의지를 다진다. 여기서 우리가 중점을 두고 보아야 할 부분은 어디에 있을까. 엄혹한 시대 속에서 개인의 의지는 무기력하거나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염세? 혹은 그런 시대 속에서도 누군가는 정의를 추구하고 변화를 만들어내려 했다는 실천의지(의지가 권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혐의를 피할 순 없겠지만)? 아니면 정해진 결말을 복기하며 인물과 냉소적인 거리두기?

<헌트>는 최근 급속도로 변화해버린 시대에 대한 인식을 끌고 들어와 질문하게 한다.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즉, <헌트>의 놀라운 지점은 기존의 주체였던 586세대를 주변으로 미뤄버린 뒤, 역사적 판단에 새로운 공백이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다. 러닝타임의 중간 스쳐 가듯 등장한 '강남'의 탄생과 정치적 문제. 그리고 그곳의 아파트에서 아주 오래 살고 싶다고 한 김정도 부인의 아들. 조유정에서 박평호의 정신적 딸이 된 박은수까지. 이들이 살면서 만든 오늘을 우리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영화는 조각으로 나누어져 재조립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당연히 이 조각을 맞추는 사람은 역사의 이후를 재판단해야 하는 우리이다. 

그렇다면 박평호와 김정도가 그은 평행선의 연장에 서 있는 관객인 우리는, <헌트>라는 농담을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웃으며 긍정해야 할까.(사악한 것의 기를 꺾고 그 허위의 가면을 벗기는 데 요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 아니면 조소하는 것으로 냉소적인 거리두기를 유지해야 할까.(냉소적인 거리두기는 단지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지니고 있는 구조화하는 힘에 대해 눈을 감아버리는 여러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 보다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의 반응은 두 평행선의 또 다른 연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글 배명현, rhfemdnjf@ccoart.com]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헌트
Hunt
감독
이정재

 

출연
이정재
정우성
전혜진
허성태
고윤정
김종수
정만식
최민
박윤희

 

제작 (주)아티스트스튜디오 , (주)사나이픽처스
배급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25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2.08.10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