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히만 아일랜드' 삶과 예술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베르히만 아일랜드' 삶과 예술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 김민세
  • 승인 2022.08.16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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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의심의 아이러니로 써낸 세 여성의 서사"
ⓒ 찬란

'영화에 관한 영화'를 보는 건 언제나 흥미롭다. 예술가는 어떻게 반짝임의 순간을 발견하는지, 현실은 어떻게 영화라는 판타지가 되는지, 그리고 우리는 그 판타지로부터 어떻게 위로받을 수 있는지. 영화 안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는 필름 메이커들의 고민들과 작업 방식을 읽어내는 일은 그들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뿐더러 창작자들에게 새로운 귀감이 되기도 한다. 영화감독 부부의 시나리오 집필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베르히만 아일랜드>도 마찬가지이다. 영화는 새로운 시나리오를 위해 잉마르 베리만의 생가가 있는 포뢰섬에서 지내게 된 '크리스'(빅키 크리엡스)와 '토니'(팀 로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각자의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 나가고 있는 둘의 섬세한 걸음과 몸짓, 대화들은 섬의 아름다운 풍경과 어우러져 삶과 예술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베르히만 아일랜드>의 특별한 부분은 무엇보다 창작과 창작자의 관계로 엮인 '이야기들의 층위'이다. 영화의 주요한 서사는 크리스와 토니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둘이 함께 베리만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함께 그의 영화를 볼 때, 섬을 돌아다니며 영화의 흔적들을 발견할 때는 이 섬에 살면서 영화 작업을 했던 잉마르 베리만의 서사가 그 위로 쌓인다. 또한, 크리스가 토니에게 자신이 구상한 영화에 대해 긴 이야기를 할 때는 그녀가 만들어낸 캐릭터 '에이미'(미아 와시코우스카)의 이야기가 영화의 또 다른 흐름이 된다. 영화는 포뢰섬에서 창작 활동을 하는 '크리스'와 그녀가 선망하는 대상 '잉마르 베리만', 그녀가 투영된 대상 '에이미'를 겹쳐 놓으며 한 예술가가 창작하기까지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관계들과 이야기의 층위에 대해 사유할 여지를 남긴다.

 

ⓒ 찬란

특히, <베르히만 아일랜드>는 크리스와 토니 부부가 잉마르 베리만의 열렬한 팬이라는 사실을 지속해서 상기시킨다. 그들은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를 상영하는 전용 극장에서 그의 영화를 볼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들을 술술 외우기도 한다.

토니는 섬 안에서 진행하는 베리만 투어를 가고, 크리스는 우연히 만난 요나스라는 청년과 함께 섬을 구경하며 베리만에 대해 이야기한다. 원래 함께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포뢰섬의 베리만 투어는 크리스가 경로를 변경하면서 분열된다. 각자의 새로운 짧은 여정을 만드는 이 분열의 순간은 꽤 흥미롭게 찍혔다. 그 장면을 따라가 보자면. 먼저, 베리만 전용 극장에서 영화 상영이 끝나자 토니가 스크린 앞으로 나와 강연을 한다. 그는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자신의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여성에 대해 설명하는데 그때 쇼트는 그를 지켜보고 있는 크리스에게로 넘어간다. 크리스는 길어지는 그의 말이 지루한 듯이 극장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토니는 설명을 계속한다. 잠시 후 그의 말은 내레이션이 되고 장면은 동네를 거닐고 있는 크리스의 쇼트로 전환된다.

이 장면 전환이 의미심장한 이유는 자신의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에 대한 토니의 발화가 포뢰섬을 산책하는 크리스의 이미지로 표현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토니가 그의 입으로 '내 영화에 나오는 여성'이라고 말할 때 카메라는 마치 그 설명에 해당하는 부연처럼 크리스로 향하고 그의 말은 그녀의 이미지와 중첩되기에 이른다. 토니가 말하는 영화가 크리스라는 존재로 변모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녀는 단순히 토니의 영화를 반복하지 않는다. 그것보다 크리스는 토니의 영화를 지워내는 존재이거나, 토니의 영화의 경로를 변경하는 하나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캐릭터인 것처럼 보인다. 이 '변경'은 크리스가, 그리고 <베르히만 아일랜드>의 감독 미아 한센-러브가 베리만의 섬에서 어떻게 영감을 받고 영화를 만드는지에 대한 태도를 증명한다.

크리스는 베리만에 대한 사랑을 표하는 동시에 그의 영화가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고 말한다. 이런 아이러니한 태도를 두고 토니가 질문하자 크리스는 이렇게 답한다. "사랑하니까. 이유는 모르겠어. 그게 문제야" 크리스는 존경, 경외와 같은 방식으로 베리만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녀가 보여주는 근본적인 태도는 '의심'이다. 그는 왜 이렇게 아름다운 섬에서 그로테스크하고 절망적인 영화를 상상할 수밖에 없었는지. 자신은 왜 상처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를 볼 수밖에 없는지. 섬의 곳곳을 살피며 베리만의 흔적을 찾을 때마다 그녀는 의심에 빠진다. 그리고 그 의심은 그녀의 창작이 베리만에게 잠식되지 않게 하는 힘이 된다.

 

ⓒ 찬란
ⓒ 찬란

크리스의 모습과 영화의 스타일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크리스와 감독 미아 한센-러브)는 베리만의 영화를 반복하거나 그 영향에 잠식되지 않는다. 그녀가 영감을 얻는 방식은 베리만의 영화와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하며 그것을 자신의 삶과 창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마치 친구의 결혼식 때문에 3일 동안 방문한 포뢰섬에서 사랑에 대해 끝까지 의심하고 갈등하며 상처받는 에이미처럼. 만약 크리스가 토니와 함께 베리만 투어를 했다면, 그것은 토니의 영화 또는 베리만의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만의 경로를 따라 포뢰섬을 탐험하고 베리만을 읽어낸다. 그리고 영화는 크리스의 영화가 되었고 에이미의 영화가 되었다.

베리만에 대한 크리스의 의심은 창작자로서의 삶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진다. 토니는 그녀와의 대화 중 수십 편의 영화를 찍은 베리만이 가정을 잘 꾸리지 못하고 이혼을 반복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말한다. 크리스는 그것에 대해 의심한다. 그녀는 베리만처럼 영화를 찍고 싶고, 자신의 딸을 키우고 싶어 한다. 이 고민이 여성 창작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결국 영화가 보여주려 하는 것은 삶과 창작 사이에 놓인 창작자 공통의 고민이다. 그것이 이 영화가 '크리스의 영화'가 완성되었을 때 끝나지 않는 이유이다. 영화의 마지막 쇼트는 딸을 안고 있는 크리스의 얼굴이다. 이때 <베르히만 아일랜드>가 의심에 맞서 긍정하려는 것은 '크리스의 영화'를 넘어선 '크리스의 삶'이 된다.

<베르히만 아일랜드>가 창작자에 대한 사려 깊은 영화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예술적 사랑의 대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경이 아니라, 결국은 그 의심과 고민 너머에서 자신의 창작을 해내는 순간을 보여주고야 말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묘사하고 있는 크리스의 고민은 창작자에 대한 깊은 탐구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 또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창작자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필자는 이 영화와 관련한 세 여성이 삶과 예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느낀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 찬란

베르히만 아일랜드
Bergman Island
감독
미아 한센 러브
Mia Hansen Love

 

출연
빅키 크리엡스
Vicky Krieps
팀 로스Tim Roth
미아 와시코우스카Mia Wasikowska
앤더스 다니엘슨 라이Anders Danielsen Lie
요엘 스피라Joel Spira

 

배급|수입 찬란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13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2.08.04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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