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여성의 서사에서 어머니의 서사로
[Interview] 여성의 서사에서 어머니의 서사로
  • 김민세
  • 승인 2022.08.08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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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청작 <어미> 파자브 누그로스 감독 인터뷰

필자를 장르영화 마니아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장르영화'라고 밖에 불릴 수 없는 영화들, 특히 호러영화들을 읽어내는 일은 꽤 흥미로운 작업이다. 장르의 극단에 다다르는 표면적 상 아래에는 사회와 역사, 그리고 이 시대의 무의식을 읽어낼 수 있는 또 다른 층위의 움직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장르'야말로 관객으로서 영화 이면의 움직임을 읽어내고 스스로 가정과 사유를 극단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최적의 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중 호러영화는 이 시대가 공포를 느끼는 대상이 환상을 등에 업고 발현된다는 점에서 그 어떤 장르보다 정치적인 담론이 가능한 영화이다.

파자브 누그로스 감독의 <어미> 또한 이런 사유를 활발하게 이어나갈 수 있게 하는 영화이다. 코미디 영화로 자국에서 큰 흥행과 인기를 얻고 있는 인도네시아 감독 '파자브 누그로스'는 자신의 첫 호러 영화인 <어미>를 자신의 틀을 깨기 위한 도전이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귀신을 무서워해서 코미디 영화를 찍어왔다고 말한 그에게 호러 영화란 적어도 그 현장을 겪어내는 것조차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으리라.

그런데도 파자브 누그로스는 꽤 성공적인 첫 호러 영화를 만들어냈다. <어미>는 임산부와 핏줄, 그리고 운명에 대한 호러 영화의 전형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음에도, 인도네시아 문화의 특수한 정체성과 맞물려 나름의 독특한 감상을 안긴다. 넓은 들판을 갖고 있는 영화의 중심적인 로케이션과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동물들의 존재가 그런 인상의 실마리가 된다. 이렇게 영화의 곳곳에 숨겨진 디테일들을 따라가 가정을 이어나가다 보면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또 다른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소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엔딩의 반전은 이 영화를 단순한 판타지 호러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파자브 누그로스 감독의 의지가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 장면을 보게 된 순간 당신은 이 영화를 세계 곳곳에서 몇 번이나 반복되는 여성의 서사로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여성을 어머니라는 신화로 포장한다는 점에서 이 시선이 무조건 옳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필자는 그가 이 영화를 판타지에서 끝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호러 영화의 엔딩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어미> 속 공포의 무의식은 결국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김민세

첫 번째 호러 영화인 <어미>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찾아주셨습니다. 관객들과 만난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파자브 누그로스

흥행 위주의 상업 영화들을 자주 작업해오다가 처음으로 장르적인 호러 영화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는데 부천영화제까지 초청받아 굉장히 흥분되고 기쁩니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운명과 과학 중 무엇을 믿느냐'고 개인적으로 질문한 관객이 있었는데, 그 질문에 대한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결말의 해석이 달라질 것이기에 흥미로운 질문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김민세

최근 몇 년 간 인도네시아에서 코미디 작품들로 좋은 평가를 받아오셨습니다. 한국 관객들에게 이전에 작업하셨던 작품들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 부탁드립니다.

파자브 누그로스

인도네시아에서 주로 나이가 어린 청소년들에 초점을 둔 코미디 영화를 만들었고, 큰 흥행을 거두었습니다. 그때는 고용된 스튜디오의 제안에 따라 흥행 위주의 영화를 만들었어야 했기에 이번 영화는 저에게 상상치도 못한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코미디 영화를 찍는 이유 중 하나가 귀신을 무서워해서거든요. 이전에 호러 코미디 장르의 영화를 찍은 적이 있었는데 묘지 로케이션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모니터를 놓고 모니터링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무섭지 않게 스태프들을 제 주변에 꼭 있게 했고요.

김민세

호러 영화에 도전하게 되기까지 큰 결심을 하셨을 것 같은데요. 코미디로 대중들에게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호러 영화를 찍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파자브 누그로스

코미디는 관객들을 웃게 하지만 호러는 관객들에게 미스테리하고 트라우마적인 경험을 선사합니다. 이전 코미디 작업을 하면서 갖고 있던 윤리적인 의식이나 스스로 잣대와 규칙을 깨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었어요. 인도네시아에서 유명한 조코 안와르 감독의 호러 영화와 스릴러 영화들을 보면서 언젠가는 저런 영화를 찍고 싶다는 생각이 있기도 했고요. 조코 안와르 감독은 <모두스 아노말리>(2012)라는 영화로 큰 주목을 받은 이후로 점점 더 파격적인 영화를 제작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가고 있는데 그런 모습이 저에게 자극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피 튀기고 잔인한 영화를 제작하다 보니까 2주 동안 잠을 못 자고 심리상담을 받는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김민세

임신한 인물과 핏줄에 대한 이야기는 호러 영화에서 많이 다뤄진 이야기입니다. 호러 서사의 전형에서 <어미>만의 색다른 지점을 만들기 위해 각본적으로 그리고 연출적으로 어떠한 노력이 있으셨나요.

파자브 누그로스

이 영화를 위해서 일본 공포영화들이나 아리 에스더 감독의 <미드소마>(2019) 같은 영화들을 챙겨봤습니다. 그래서 일본 문화와 인도네시아 문화를 포함한 아시아 전통문화들이 영화의 기반에 깔리게 되었습니다. 아시아 전통 문화에는 길일이라는 개념이 있어서 언제 결혼할지, 언제 이사를 할지, 모든 일을 할 때마다 그런 전통이 적용됩니다. 그런데 태어나는 순간은 선택을 못 하는 거죠. 특히 이슬람 문화가 대중적인 인도네시아에서는 1년에 한 번 무함마드가 죽은 날을 저주 받은 날로 여깁니다. 그것은 인도네시아와 이슬람 문화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에 그 부분을 영화에 녹여내려고 노력했습니다.

김민세

산토소 가족이 살족 있는 집의 공간적인 특성이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특히 집 바깥에 굉장히 넓은 들판이 있는데, 로케이션 헌팅 과정에서 어떤 지점이 고려되었는지 궁금합니다.

파자브 누그로스

말씀하신 것과 같이 산토소 가족의 집을 보면 울타리가 없습니다. 울란을 가두기 위해 자물쇠를 잠그지도 않고요. 대신 울란이 집에서 섣불리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그 장소가 도심과 주택가에서 고립된 숲속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택시를 부르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고요. 그렇지만 사실 정말 죽음 앞에 있다면 충분히 나갈 수 있는 곳이란 말이죠. 이렇게 개방된 인상을 주는 로케이션을 통해서 울란을 탈출할 수 없게 하는 물리적인 장애물을 강조하기보다, 탈출을 할 수 있음에도 자신을 속박하는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산토소 가족의 집을 헌팅할 때는 1980년대에 지었을 법한 구조를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들이 좋은 집에서 살고 부자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이유가 과거에 벌었던 돈 덕분이라는 설정을 드러내고 싶었어요.

김민세

그렇기에 <어미>는 계급에 관해 정치적으로 해석할 여지도 보입니다. 울란의 집과 산토소의 집에서 볼 수 있듯이 빈자와 부자의 공간적 특성이 명확하게 구분되고 있죠. 그래서 산토소 가족의 집은 단순히 고립된 기이한 장소가 아니라, 빈자가 쉽게 진입할 수 없는 상류층의 공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울란이 택시를 부를 돈이 없어 탈출이 미뤄지는 것도 재미있는 지점이고요. 이 영화가 특정 부분에서 인도네시아의 계급에 관해 다루고 있다고 봐도 될까요.

파자브 누그로스

부자가 계속 부자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계속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먹어치우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정치적인 메시지 또한 영화에 담아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예를 들어 일반 택시조차 탈 수 없는 울란에 비해 산토소 가족의 아들은 공항에서부터 굉장히 비싼 택시를 타고 집에 오죠. 그리고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가난한 사람들의 아이들을 죽이는 의식으로 산토소 가족의 아들을 살리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김민세

쥐, 호랑이, 나비, 꿈속에서 기이한 모습으로 형상화되는 사슴 등. 영화 내에서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합니다. 저는 이 동물들이 개별적인 상징으로도 읽힐 수도 있지만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하나의 알레고리인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이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파자브 누그로스

저는 동물들을 통해 하나의 약육강식의 세계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부자는 호랑이라고 할 수 있고 또 그 부자들은 사슴을 사냥하고 이런 먹이사슬의 구도를 만들고 싶었던 겁니다. 반면 가난한 울란의 집에서는 빈자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쥐가 계속 등장하죠. '악어의 굴에서 나오니 호랑이 굴이더라'라는 인도네시아 속담이 있습니다. 임신한 울란을 두고 떠난 남자친구는 악어이고 산토소 가족은 호랑이인 셈인 거죠. 이렇게 약육강식과 먹이사슬 구조를 통해 빈부의 관계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김민세

산토소 가족의 아들 베르가스가 등장하는 부분을 기점으로 영화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기 시작합니다. 베르가스가 울란을 도와줄 것인가에 대한 또 다른 층위의 서스펜스가 발생하죠. 베르가스의 캐릭터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파자브 누그로스

베르가스는 산토소 집안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들판의 큰 나무에도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한 방의 문 앞에도 이름이 적혀 있는 등, 등장 이전에도 중요한 인물로 암시하려 했습니다. 근데 베르가스를 꼭 울란을 구하러 온 캐릭터처럼 만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이 영화는 어떻게 보면 대도시에서 남성의 의존 없이 아이를 키우는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니까요. 그래서 울란을 떠나는 남자친구와 그녀에게 새로 찾아온 또 다른 남자 베르가스를 병치시키려고 하기는 했지만 그를 울란을 돕기 위해 나타난 남성 캐릭터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김민세

낙태, 미혼모 같은 다양한 사회 이슈들을 영화에 가져오셨습니다. 그런 것들을 호러 영화라는 하나의 정체성 안에서 어떻게 녹여내려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파자브 누그로스

낙태와 미혼모 등의 문제와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은 아이를 낳는 것을 부모의 선택이라고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저는 뱃속에 있는 아이가 자신의 출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뱃속에 있는 아이 스스로 태어나겠다는 의지가 울란의 꿈으로 형상화되고요. 많은 사람들이 낙태를 시도하고 누군가는 미혼모가 되지만 그것은 아이의 선택이라는 하나의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굉장히 아이러니한 이 사실을 영화에 녹여내려 하였고, 호러 영화 이면에 있는 이런 사회 이슈들을 읽어내는 것이 이 영화를 더 재밌게 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민세

결말 부분의 반전이 다소 갑작스럽게도 느껴지지만 동시에 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감독님께서는 결말의 반전이 관객에게 어떻게 닿길 바라셨나요.

파자브 누그로스

결국 말하고 싶었던 것은 부모는 뭐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로서 아이를 위해 하는 행동은 누가 욕할 수 있는 것도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베르가스를 살리기 위한 산토소 가족의 행동으로 죽을 뻔한 울란도 결국은 똑같이 아이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김민세

그렇게 보니까 영화를 통해 봐왔던 울란의 서사가 결국은 산토소 가족의 역사와 동일할 것 같기도 해서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결국은 산토소 가족이 했던 일들을 울란이 계속 이어 나가는 것이죠.

파자브 누그로스

맞습니다. 그것이 인생이니까요.

김민세

감독님께는 큰 도전이셨던 <어미>가 부천영화제 관객들과 만나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앞으로 어떤 행보를 기대하고 계시나요.

파자브 누그로스

다음 영화도 호러 영화가 될 것 같습니다. <어미>를 첫 호러 영화로 완성하고 난 뒤 색다른 짜릿함을 느꼈습니다. 이번 영화와는 다른 스케일과 다른 이슈를 다루려고 합니다. 저에게는 새로운 집처럼 느껴지는 부천 영화제에 다시 찾아뵐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인터뷰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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