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밤' 죽음 앞의 두 얼굴
'초록밤' 죽음 앞의 두 얼굴
  • 김민세
  • 승인 2022.08.0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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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보는 '죽음'에 관하여"

최근 한국독립영화가 다루고 있는 '죽음에 대한 태도'가 변화하고 있다고 느낀다. 필자에게는 지난 2월 개봉한 <축복의 집>(2019)이 그러하였고,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초록밤>(2021)이 그런 생각을 이어가게 만들었다. 이는 <죄 많은 소녀>(2018), <살아남은 아이>(2018), <빛과 철>(2021)처럼 죽음, 폭력, 재난, 그리고 해소되지 못하는 애도에 관한 이 시대의 무의식과 죄책감을 이야기하던 지난 몇 년간의 영화와 다른 결이다.

우선, <축복의 집>이 주었던 강렬한 인상을 돌이켜보자면, 마치 죽음과 희생에 관한 한국사회의 구체적 사건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이전 영화들의 총체적인 이미지를 과감하게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였다. 또 사건이라는 관점으로 죽음을 바라보는 방식을 내려놓고, 남아있는 자들의 세계와 죽음은 어떻게 관계 맺는지에 한없이 가까워지려 탐구하는 듯 느껴졌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사실적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본질을 가리키려는 <축복의 집>의 이미지에는 현실 세계의 은유 또는 환유로 사유를 이어가지 못하게 하는 단단하고 팽팽한 장막 같은 것이 있었다.

<초록밤>이 <축복의 집>과 공명하는 점은 죽음의 이미지가 메타포로써 읽히는 것을 거부하고, 그 신비성을 들춰내고자 하는 태도에 있다. 영화는 사건으로써 다가왔던 죽음이 어떻게 세계의 절차가 되어 삶에 스며드는지 탐구한다. 아울러 가족의 죽음, 장례라는 관습 그 이면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두 영화의 관계는 데칼코마니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축복의 집>은 죽음의 극단으로 향하며 소름 끼치도록 냉정하고 단단한 죽음의 물성을 직시하게 하지만, <초록밤>은 삶과 죽음의 이미지를 병치시키며 의미화되고 형태화 될 수 없는 죽음의 또 다른 특성을 마주하게 한다.

특히, <초록밤>에서 드러나는 죽음의 특성은 무형의 형태로 우리에게 도달하고, 자신을 판독하려는 시도에서 매끄럽게 빠져나가면서 서늘한 그림자를 남기는 빛에 가깝다.

 

ⓒ 인디스토리
ⓒ 인디스토리

이런 가정을 내릴 수 있는 이유는 <초록밤>이 '색채를 다루는 색다른 방식' 때문이다. 어느 가족에게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두 번의 죽음, 그리고 삶 전반에 스며들어 있는 죽음들을 바라보고 있는 이 영화는 초록과 빨강이라는 대비되는 색채를 반복적으로 들이민다. 길고양이의 죽음과 함께 시작하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한밤의 거리를 비추던 초록색 빛은 다음 날 따가운 햇살 사이의 초록색 잔디가 되고, 다시 밤이 되면 가족의 집과 잠자리에 돌아온다. 반면 초록색 잔디 위에 말려지는 빨간색 고추는 지나가던 들개를 친 자동차 범퍼에 묻은 핏자국이 되고, 고춧가루와 김장 김치가 된다.

한눈에 봐도 의도적으로 과장된 듯한 <초록밤>의 색채 이미지는 생명과 공포, 삶과 죽음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색채와 그에 해당하는 메타포를 이어 나가려는 시도는 왠지 모르게 망설여지거나 미궁에 빠지게 된다. 그 개별 색채의 힘이 너무 뚜렷한 나머지 어떠한 의미로서 해석되기 이전에 표면적인 감각으로써 우리에게 닿길 바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 명확히 대비되는 두 색채와 달리, 삶과 죽음은 영화의 내러티브와 이미지적인 측면에 있어 대비되는 것이 아니라 겹쳐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의 색채는 유기적으로 맞물려 '삶 또는 죽음'이라는 명확한 상징으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사이의 교란을 통해서 '삶 그리고 죽음'이라는 모호한 경계 위에 놓인다.

 

ⓒ 인디스토리
ⓒ 인디스토리

그러므로 <초록밤>에서 색채와 메타포는 일종의 '맥거핀'이다. 이 영화의 이미지는 해석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감각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리고 그 감각되는 대상의 반대편에 감각하는 얼굴이 있다. 이 얼굴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이미지에 각각 대응하듯 등장한다.

첫 번째는 피를 흘리고 있는 들개를 마주한 얼굴이다. 가족은 시골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개를 치게 되고, 차를 잠시 멈춘 사이 엄마는 볼일을 보러 깊은 숲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쁘게 숨 쉬며 꼿꼿이 서 있는 들개를 마주하게 된다. 죽어가는 혹은 살아난 들개 앞의 얼굴. 두 번째는 고리 모양으로 매듭지어진 밧줄을 마주한 얼굴이다. 장례를 마친 가족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각자의 일을 계속한다. 경비원으로 일하는 아빠는 한밤중에 순찰하다 고양이의 목이 매달려 있던 형상과 비슷한 밧줄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아빠는 길게 늘어뜨려진 밧줄을 올려다보고, 천천히 그 고리 안에 얼굴을 집어넣은 뒤,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빼낸다. 죽음 혹은 삶 앞의 얼굴.

들개와 밧줄이라는 감각의 대상은 '삶 또는 죽음' 둘 중 하나로는 정의 내려지지 않는 유령 같은 기표이다. 삶과 죽음은 들개라는 우연을 통해 지각될 수도 있고, 자신 앞에 놓인 밧줄을 두고 목을 매다는 것 또는 그것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라는 선택을 통해 성찰될 수도 있다.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장례를 치르게 되고, 축의금에 대해 이야기하던 입으로 부조금의 액수를 계산하게 되듯이. <초록밤>에서 죽음은 이미지와 의미 사이를 정확하게 연결시키는 매개가 아니라, 그저 빛으로서의 영화를 천천히 전염시키는 그림자이자 '삶 옆의 죽음' 또는 '죽음 옆의 삶'이다. '이 영화를 초록으로 물들이겠다'라고 결심한 윤서진 감독의 말처럼.

<축복의 집>과 더불어 <초록밤>은 죽음이라는 메타포로 어떠한 의미를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두 영화가 가리키는 것은 감각을 제외한 어떠한 사유로도 이어질 수 없는 무의미로서의 죽음 그 자체이다. 두 영화가 앞선 다른 영화들보다 실험적이라고 여겨지는 이유 또한 죽음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형식적 시도가 무엇보다 두드러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두 영화로 한국 독립영화의 새로운 자장을 읽어내고, 이런 영화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지금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직 섣부르다. 그러나 필자는 <초록밤>이 <축복의 집>에 이어서 죽음에 대해 새로운 감각을 일깨워 주는 영화가 되었다고 믿는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 인디스토리

초록밤
Chorokbam
감독
윤서진
YOON Seo-jin

 

출연
이태훈
김민경
강길우
김국희
오민애
원미원
변은영

 

제작 디파이언트
배급 인디스토리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89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2.07.28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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