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영원을 추구하는 소멸 혹은 '다음'의 기약에 관하여
[Critique] 영원을 추구하는 소멸 혹은 '다음'의 기약에 관하여
  • 변해빈
  • 승인 2022.07.28 1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금술의 접근을 토대로 '영화를 본다는 것'의 무한한 여정"

입구

대런 아러노프스키의 <마더!>와 로어칸 피네건의 <비바리움>은 각각 2017년과 2019년의 무의식 속에 잠들어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현재의 시간 위로 침입했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과거의 기억 너머로 되돌아갔고 2017년과 2019년과는 다른 형태로 변용된 채다. 그로테스크 미학과 사이키델릭한 환각이 매혹적이던 두 편의 영화에 과거에는 없던 악몽의 위해가 덧입혀졌다. 미학적이고 매혹적인 잔상으로 인식되는 것은 실재와 허구, 장르적인 융합, 이미지와 사운드의 혼종, 플래시백(과거)과 플래시포워드(미래)의 기법이 뒤섞어 나타나는 복합적 감각의 영향에서 비롯된다. 악몽으로의 위해는 영화를 체험한다는 것, 곧 타아(他我)의 기억의 파편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미래로 흐르는 것 같지만, 실은 과거의 시간성에서 출발해 다시 과거를 향해 순환되는 여정이 영속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여정에는 일상의 체험과 감각이 융합되고 혼종된다. 이렇게 영화와 영화적인 체험은 일종의 연금술(鍊金術)적인 사건이다. 연금술은 상이한 성질의 물질들이 결합과 융합, 혼종되며 새로운 물질로 탄생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태곳적인 우주의 원리다. 물질들의 변환은 끊임없이 순환되는 신비를 자아내면서도 그 과정과 근원에 대한 기억을 품고 있어 영원회귀된다. 이 글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감각을 오가며 <마더!>와 <비바리움>의 시공간을 공회전해보자.

 

영화 <마더!> ⓒ 롯데엔터테인먼트

탄생과 파멸: 다카포 리듬과 몸의 여로

매혹됨의 여운을 누려보는 것도, 악몽의 위해에 빠져보는 것도 <마더!>와 <비바리움>이 그리는 다카포 리듬 위에서 가능해진다. 두 영화는 시작과 끝의 구분이 '무용한 세계'다. 또 연대기적인 시간 구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영원성의 시간이 흐르는 세계다. 예고 없이 불길에 휩싸인 <마더!>의 오프닝, 소사(燒死)되어 가는 어느 여인이 흘린 눈물의 기세는 영화의 마지막까지 소실되지 않고 버틴다. 엔딩에서 다시 한 여인(마더)은 화염 속에 놓여있고, 가차 없는 불길을 걷어내는 눈물 한 방울도 어김없이 반복된다. <비바리움>에서 젬마(이모겐 푸츠)와 톰(제시 아이젠버그)이 죽어야 끝나는 결말은 유사-복제인간인 마틴(들)이 아이로 탄생해 노인이 되어 죽음을 맞이하고 다시 새로운 생명, 곧 마틴(들)을 길러내는 여로의 시작점이자 끝으로 작동한다. 여기서 <마더!>와 <비바리움>의 시작과 끝의 접합부에는 어떤 몸이 위치한다. 현대 의학의 발달과 죽음에 대한 양가적 인식의 변화로 인간의 죽음과 탄생은 더 이상 집이라는 공간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으나, <마더!>와 <비바리움>의 몸들은 필연적으로 시원적인 공간으로서의 집 내부에 머문다.

먼저 <마더!>의 경우, '그'(하비에르 바르뎀)의 집 내부에서 불에 타 그을린 잿더미가 걷히는 그래픽 효과 다음으로, 마더(제니퍼 로렌스)가 잠에서 깨어나는 첫 등장 장면이 배치된다. 잠에서 깨어나는 행위는 깊은 무의식에 빠진 심혼이 죽음에 이르지 않고, 다시 삶으로 회귀하는 통로라는 점에서 마더가 복원하고 재생시킨 집의 원환적인 여정과 동형적이다. 이 영화에서 집은 오프닝과 엔딩을 매개하던 여인들의 반복적인 소사와 '깨어남'을 비롯해 탄생과 파멸이 과잉 집적된 공간이다. 시인인 '그'의 고독한 사색의 공간이던 집은 어느 이방인 형제가 벌인 살인사건 현장이 되었다가 순식간에 추모의 공간이 된다. 애도하는 자들은 과거 존재를 현재에서 복기하며 영혼의 부활을 이야기한다. 또한, 집은 수많은 이들의 영혼을 구원한 '그'의 시가 탄생한 공간이면서 광신도들의 이념 충돌이 학살과 전쟁으로 증폭되어 인간성의 파멸을 목도하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집은 마더의 아이가 태어나는 성스러운 생명의 근원지였다가 살육과 폭력, 카니발리즘의 금기가 허용되는 축제와 제의의 공간으로, 종국에는 모성의 실패가 새로운 터전의 재생을 위한 통로로 변환되는 곳이기도 하다.

탄생과 파멸의 끊임없는 변환과 순환 과정에서 연금술서의 근원적인 도상인 불과 돌(원석)이 위치한 것은 영원회귀에 관한 우주적인 질서를 노골적으로 기입한 지점이다. 여기서 여인들의 소사(燒死)와 '깨어남'을 조금 더 이야기해보자. 마더에게 불은 일차원적인 복수의 물질이 아니다. 분신은 불의 악성에 자신을 포함하기 때문에 복수당하는 이의 후회와 참회의 정신마저 포용하는, 절대적인 고통과 좌절을 감내하는 행위다. 불은 그녀의 몸을 비롯해 영화 속 공간인 집이자 <마더!>의 세계를 모조리 원점으로 되돌리는 촉매제이기도 한데, 이것은 마더가 남편의 집을 새로 지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보수하는 번거로움을 이해하게 만든다. 불에 타고 남은 건축물의 골조는 인간을 화장하고 남은 뼈대와 같다. 주검을 화장하는 유일한 동물인 인간에게 불의 변형 가능성은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고 주변인(산 자)들의 삶을 재인식하여 새롭게 구성하는 성스러운 행위로 여겨졌다. 마더의 분신을 동양적인 장례 문화로 이해하기에는 괴리적인 구석이 있으나, 육신이 흑화되고 백화(백골과 심장의 투명한 결정체)의 경지에 이르는 지점은 연금술의 도상을 제외하고선 설명할 방법이 없다.

 

영화 <마더!>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비바리움>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비바리움>의 집으로 들어가 보자. 단도직입적으로 <비바리움>은 젬마(들)와 톰(들)이 집에서 물품처럼 배달된 사내아이 마틴(들)을 성인으로 기른 후 그 집에서 죽는 여로다. 구성상의 연결을 점지하듯 두 사람은 욘더 마을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력을 다하다가도, 밤이 되면 집으로 되돌려 보내지거나 미련 없이 집으로 돌아간다. 이 영화에서 집은 어떤 죽음과 죽음에서 비롯되는 삶의 순환 그 자체를 보여주기 위한 무덤으로 기능한다.(과격하게 말하자면 젬마와 톰은 죽기 위해 영화 속에 투입된 존재들이다) 집이라는 미로의 탈출구는 두 사람이 죽어서 묻히는 마당의 구덩이, 다시 말해 무덤뿐이다. 무덤은 젬마가 겪은 환각에서처럼 또 다른 '톰'이 자살한 공간인 깊고 둥근 욕조 안으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무덤은 주검의 집이기도 한데, 지상의 존재(산 자)와 천상의 존재(죽은 자)가 집결하고 연결되는 하나의 우주로 이해된다. 그러한 우주적 원리에 따라 젬마와 톰의 죽음은 마틴(들)이 욘더 바깥의 새로운 세계로 삶을 확장하는 근원지처럼 작동한다.

여기서 <비바리움>은 가역적인 영혼의 부활이나 소멸의 강제적인 유한성에 대해서 부인하지 않지만 그러한 중립 역시 우주적 원리에 의한 다카포 리듬으로 환원될 뿐임을 보여준다.

<비바리움>의 생과 소멸의 환원은 시간의 경과에 따른 생물학적인 성장과 노쇠의 이미지를 품은 몸의 양태로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굴삭에 집착하던 톰은 몸의 기능이 상쇄되어 죽음을 맞이하고 젬마의 죽음의 원인은 또렷이 밝혀지지 않으나 적어도 <마더!>에서 전폭적으로 그려지던 살인이나 자살의 형상은 아니다. 유사 복제인간인 마틴(들) 역시 마찬가지인데, 공인중개사 자리를 물려줄 때가 된 마틴(들)은 주름진 피부와 백발처럼 쇠락한 신체 기능, 정서적인 무력감까지 전형화한 노인의 몸을 띄고 있다. 젊은 마틴과 노인 마틴의 세대교체는 비닐팩에 압축되는 주검과 그것을 처리하는 직접적인 몸의 움직임으로 명확하게 가시화된다.

그에 비해 젬마와 톰의 모성과 부성의 전형성은 신체적인 것을 탈피한다. 마더의 모성은 몸의 접촉(임신과 출산, 아이를 품에서 놓아선 안 되는 극한의 상황들)에서 비롯된 생존과 보호의 차원으로 그려진다. 그에 비해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는 욘더에서 마틴(들)은 말과 행동을 모방하고 학습하는 차원에서 젬마(들)와 톰(들)이 있어야 한다. 젬마가 마틴의 생물학적 혈육이 아니란 건 당연한 사실이고, 그녀가 엄마의 정형화된 역할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은 아이와의 정서적인 유대감을 쌓는 대화에서 드러난다. 유년기의 마틴(들)이 젬마와 톰의 언행을 습득하고 모방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기적인 접촉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지식이나 태도, 모성(여성성)과 부성(남성성)을 이분화하는 담론적인 체제, 그리고 고유한 마음의 상태나 표현까지 코드화된 언어로 모사되고 순환됨을 보여준다.

 

하이브리드와 사이키델릭: 무력하거나 경이롭거나

연금술은 상이한 물질들의 변형태를 생성하거나 혼종적인 개체의 근원을 되짚는 일이다. <비바리움>의 혼종성은 집 내부에 벌어지는 소동이 아니라 마틴(들)의 몸에서 발견된다. 마틴(들)은 인간과 동물, 기계적 속성이 융합된 혼종체다. 이들은 인간의 외형을 갖추었으나 '마치 개처럼' 동물의 생체 속도에 따라 성장하거나 늙는다. 아이의 신체와 성인의 목소리가 융합되어 있고, 곤충이나 양서류와 동물처럼 기형적으로 몸을 변형하는 데에 자유롭다. 여기에 앞서 언급했던 모사 능력이 더해져 정확하고 정밀한 기계적 속성이 융합된 안드로이드처럼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마틴(들)은 무덤이 필요 없다. 톰이 굴삭 도중 발견한 어느 백골은 무덤 속에서 부패되어 갈 그와 젬마의 미래를 예견한다. 반대로 압축 비닐팩에 안치된 마틴(들)은 작은 부피로 접혀 서랍 속에 보관된다. 정확히는 접히는 순간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사라진다.' 젬마(들)과 톰(들)이 욘더에 입주하고 죽음을 맞는 과정이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의 충족과 기계에는 없는 공포와 좌절, 절망을 비롯한 감정의 발현에 기인한다는 것을 고려하자면, 그러한 존재들로부터 마틴(들)을 양육 혹은 생산해내는 영화의 시도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 정작 마틴(들)은 공인중개사의 학습된 멘트와 행동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고, 무엇보다 그들의 인조적인 환한 미소는 젬마나 톰에겐 존재하지 않던 것이다.

<비바리움>에는 이례적으로 내레이션이 개입되는 구간이 있다. 탈출을 위해 살아생전 굴삭에 몰두하던 톰은 그 자신의 무덤을 만들어냈고, 젬마는 숱한 젬마(들)과 톰(들)을 목격하고선 다시금 집으로 복귀한다. 그러자 젬마가 묻는다. "난 대체 뭐야? 이건 뭐고? 이 안에 난 뭐지?" 이 물음은 다른 시간성에 해당하는 컷들(젬마가 죽음을 앞둔 모습과 젬마가 죽은 뒤 마틴의 모습)이 중첩되고 혼합되며 마틴과 주고받는 대화로 변주된다. 젬마는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한 채로 마틴의 대사, "아들을 길러내는 엄마"라는 말을 마주한다. 이 대사는 이 영화의 난해한 미로를 풀기에 더할 나위 없는 열쇠이고, 우리는 욘더의 기괴한 미로를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젬마는 그럴 마음이 없다. 애초에 인간성을 숙고하는 내면의 물음은 그녀가 죽기 직전임을 고려하면 다소 늦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난 네 엄마가 아니다"라는 젬마의 유언이 기어이 비집고 들어앉을 수 있다면, 육체의 소멸이 정점에 달했을 때 가장 어두운 절망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이 영원히 죽지 않는 정신적인 통로를 개척한다. 이것은 <마더!>에서 가장 강인하고 절대적인 언어, "난 그의 엄마다"의 위력과 맞먹는다. 젬마의 몸은 죽음으로 향하면서 자기 정신의 재건과 영혼을 위한 삶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마틴(들)의 '사라짐'의 차원으로 무화되는 무력한 죽음에서는 들을 수 없는 것이다.

 

영화 <비바리움>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영화 <마더!> ⓒ 롯데엔터테인먼트

앞서 마더의 몸의 여로를 연금술적 변환을 지속하는 집과 동일시하여 살펴보았다. <마더!>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을 두고 사이키델릭에 빠졌던 매혹적인 경험으로 무마해도 이상하지 않겠지만, 마더에게 주어지는 투시력만큼은 의미론적으로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마더는 '그'의 집을 복원하는 일에 헌신적이다. 남편의 무너진 세계를 재건하고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자부심을 넘어서, 그녀는 집의 상태를 감지하고 공유하는 영매의 투시력을 발휘한다. 마더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의 정념은 집의 훼손으로 가시화된다. 혹은 이방인의 침입이 주는 불길한 기운은 마더의 심장 기능 이상으로 감지된다. 심장의 통증은 잿더미로 뒤덮인 집의 환각 이미지를 동반하는데, 그녀가 폐허에서 쌓아 올린 복원과 재생의 경과(과거)를 품으면서 스스로 불태워 파괴하게 될 집의 미래를 예언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가 <마더!>의 여인들의 심장을 신격화하는 행위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혼종된 영매의 세계에 대한 이해로부터 비롯된다. 마더가 예견한 대로 집과 그녀의 몸은 불태워진다. 이후 '그'는 흑화한 여인들의 심장 속에서 투명하게 빛나는 결정체를 기쁘게 발견한다. 영원회귀의 물질인 결정체의 숭고한 성질은 여인들의 신체와 분리되어 말해질 수 없다. 마더의 경우로 여인들을 대표하자면, 생명을 잉태하는 모성의 몸이면서, 살육하거나 죽음에 맞먹는 고통을 당하는 몸이기도 하며, 자신을 살해하는 몸이기도 하다. 여인들의 몸은 죽음과 탄생의 위력이 혼종된 상태다. 마지막 분신자살 후 흑화된 몸속에서 발견된 투명한 결정체의 숭고한 아우라와 그것을 성스럽게 대하는 '그'의 태도는 불을 품는 고행을 감내한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백화의 순간에서 비롯된다. 백화된 심장은 불에 의한 완전한 소멸의 고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살육, 모성의 충만한 사랑과 무자비한 폭력, 벅찬 감동과 가혹한 악몽이라는 양극의 세계를 모두 체화한 혼종체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순수하고 투명한 희생의 원형이다. 산 자('그')가 그 결정체를 통해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게 될 미래와 구원받을 영혼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그런 고행의 기억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인들의 백화된 물질, 곧 심장만이 검은 잿더미를 걷어내 집의 풍경을 복원하고 '그'를 위한 또 다른 여인을 이야기 속에서 깨워내는 경이로움을 만들어 낸다.

 

출구

<마더!>와 <비바리움>이 어떤 죽음을 향해 잔혹하게 치달으면서도 결말에 이르러 소멸의 속악함을 덜어내고 생명의 근원에 숨결을 불어넣은 까닭은, 유한한 영화적 체험을 영원 속에 기입하려는 시도가 아닐까. 영화 속에서 혼종되고 융합되며 변화를 반복하던 대상들과 같이, 무한한 상상력을 연금술법의 토대로 삼아 새로운 인식의 기저를 끊임없이 끌어올리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글의 시작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마더!>의 불길이나 <비바리움>의 욘더 마을에 불쑥 들어가 있을지 모른다. 그때도 마더의 백화된 심장의 숭고함이나 젬마의 유언이 주는 통로가 여전히 열리게 될지는 미지수다. 그럼에도 영화라는 미로의 출구가 입구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지금처럼 고대할 것이다.

[글 변해빈, limbohb@ccoart.com]

 

ⓒ 롯데엔터테인먼트

마더!
Mother!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Darren Aronofsky

 

출연
제니퍼 로렌스
Jennifer Lawrence
하비에르 바르뎀Javier Bardem
에드 해리스Ed Harris
미셸 파이퍼Michelle Pfeiffer
브라이언 글리슨Brian Gleeson
도널 글리슨Domhnall Gleeson
크리스티나 로사토Cristina Rosato
크리스틴 위그Kristen Wiig

 

수입|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
제작연도 2017
상영시간 121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017.10.19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비바리움
Vivarium
감독
로칸 피네건Lorcan Finnegan

 

출연
이모겐 푸츠Imogen Poots
제시 아이젠버그Jesse Eisenberg
조나단 아리스Jonathan Aris
세난 제닝스Senan Jennings
이안나 하드윅케Eanna Hardwicke
올가 웨를리Olga Wehrly

 

수입 루믹스미디어
배급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제작연도 2019
상영시간 15세 관람가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0.07.16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