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 도터' 여성에게 가장 숭고한 욕동
'로스트 도터' 여성에게 가장 숭고한 욕동
  • 이현동
  • 승인 2022.07.25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보편의 여성 서사를 영민하고 치밀하게"

메기 질렌할의 첫 작품인 <로스트 도터>(2021)는 휴양지로 유명한 그리스 스페체스 섬을 배경으로 잠시 일을 멈추고 여행을 떠나는 비교문학 교수인 레다(올리비아 콜먼)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의 제목 '로스트 도터'를 직역한다면 잃어버린 딸이라는 의미로 레다의 정체성인 엄마 혹은 여성의 삶을 조명한다. 이는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보편의 서사이면서 무한히 축적된 기억의 서사를 드러낸다.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잃어버린 사랑』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현재와 과거의 두 종류의 타임라인이 끊임없이 서로 교류하면서 기억의 정체를 탐문한다. 특히, 이를 극렬하게 묘사하는 '플래쉬백'은 감정을 형상화하는 데 최적화된 도구로 영화의 리듬을 구성한다.

 

ⓒ 그린나래미디어, 영화특별시SMC

기억의 플래쉬백

기억이란 무엇인가.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그의 저서 『물질과 기억』에서 "기억은 우리의 과거 전체와 함께 자기 자신의 가능한 한 많은 부분을 현재적 행동으로 삽입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고 말한다.

<로스트 도터>에서 퍼즐처럼 퇴적된 레다의 기억은, 현재를 이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속하여 시간을 왕복한다. 이때 플래쉬백은 기억을 폭로하는 모종의 기폭장치로 작동한다. 서사를 운송하는 플래쉬백은 과거 레다와 딸의 상호 관계를 통해 점차 구체화되고 증폭된다. 감정의 카오스가 전시되는 이 영화의 최초의 프레임은, 형체를 식별할 수 없을 만큼 흐릿한 레다의 얼굴을 급박하게 클로즈업한다. 흑암이 가득한 공간을 메우는 사운드는 바람에 떠밀려오는 물의 비명과 같이 그녀에게 도달한다. 그녀가 착용하고 있는 순백색 블라우스와 스커트는 상징적인 제스처로 흑색의 공간과 대비됨과 동시에,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 몸은 어떤 힘에 포박당한 채 그대로 곤두박질친다.

그리고 이어지는 시퀀스에서 휴가를 떠나는 그녀에게서 시간의 질서는 플래쉬백 그 전체로 융합된다. 이를 보면 <로스트 도터>는 오프닝과 엔딩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현재를 추동하기 위해 과거로부터 구획된 세계다. 관객은 오로지 플래쉬백을 통해 서사를 견인하는 단서들을 획득할 수 있을 뿐이다. 휴양지에서 레다는 우발적으로 조우한 니나와 그녀의 딸 엘레나의 모습을 통해 과거를 복기한다. 최초로 레다가 자신의 젊은 시절을 최초로 복권하는 순간이 젊음을 상징하는 니나의 관능적인 육체와 엘라나와의 놀이장면이라는 지점에서 영화는 여성의 '성적 욕망'과 '모성애'라는 두 가지 주제를 제시한다.

<로스트 도터>는 수시로 서사의 맥락 가운데 플래쉬백 된다. 예를 들어 엘레나가 실종되었을 때 딸의 이름을 부르짖는 음성이 레다의 딸인 비앙카로 교차되거나, 레다가 숨겨놓은 엘레나의 인형이 딸들과의 추억으로 변용되며, 딸들이 어렸을 때 힘들게 했냐는 컬리(다그마라 도민치크)의 말에 ‘기억이 안 난다’는 레다의 응답과는 별개로 딸이 엄마를 향해 손찌검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등의 이질감은 영민하게도 영화의 서스펜스를 서정적으로 부각한다. 또한 레다의 기억은 수사적으로 도치(倒置)를 거듭하면서 완성된다. 현재-과거, 과거-현재라는 시간의 왕복은 점차 개별화되고 탈각되는데, 이는 감독이 의도하는 데쿠파주가 무엇보다 시간의 종속된 형태임을 암시한다.

 

ⓒ 그린나래미디어, 영화특별시SMC

과거 레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플래쉬백은 히치하이커와의 조우다. 이 만남을 직후로 급격하게 변화하는 레다의 모성애는 반대로 성적 욕망을 분출하는 계기로 변환된다. "우린 어쩔 수 없이 바보 같은 짓을 많이 한다"는 여자 하이커의 말은 레다에게 그들의 불륜을 정당화하는 말로 들리지 않는다. 레다의 눈빛은 오히려 그들을 동경하듯 바라볼 때, 출몰하는 다음 플래쉬백은 레다의 생식기를 포커스 한다. 이때 남편과의 관계없이 이뤄지는 자위행위는 차츰 그녀에게 당면한 욕망을 저지하지 못한다. 번역가로 섭외를 받은 (과거) 레다의 불륜은 쉽게 판별되거나 번역되지 않는 언어처럼 충동적으로 접촉한다. 그러나 성적인 결합이 이어지는 외적 공간에서도 그녀는 딸을 향한 애정을 버리지 않는다. 남편으로부터 발각된 불온한 관계에서 레다는 결국 가족을 떠나는 것을 선택한다.

다음으로 아이들을 찾아가 뱀처럼 기다란 오렌지 껍질을 베어내는 (과거) 레다의 손길이 현재로 돌아가 인형의 입 밖으로 길게 삐져나오는 지렁이로 변용될 때, <로스트 도터>의 화법은 암묵적으로 특정한 이미지로 총체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초의 플래쉬백과 수미상관을 이루는 마지막 시퀀스에서의 귤껍질은 뱀처럼 끊어지지 않는 삶의 띠를 형상화한다. 이 시퀀스에서 과거로부터 추출된 현재가 레다의 자유와 모성애를 동시에 확보하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레다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고 평온한 상태로 안착한다. 연락이 되지 않았던 레다에게 딸들의 걱정과는 관계없이 전화 통화를 하며 "살아있다"는 음성과 언제인지 모르게 손에 놓여 진 귤은 '끊어지면 안 된다'며 어린 딸들에게 말하는 과거의 플래쉬백과 접합한다. 여성의 삶의 연장, 여자인 딸들도 마찬가지로 이 귤은 상징적으로 연결된 삶의 끈이다. 그 순간 여성의 목소리만이 공간을 점거한다. 곧이어 더 넓은 시야로부터 그녀를 목격하도록 감응하는 줌 아웃되는 부감 쇼트에서 종결되는 쇼트는 결말을 총괄하며 안정감을 선사한다.

 

ⓒ 그린나래미디어, 영화특별시SMC

주변부의 이미지들

레다의 불안한 정서는 주변부에서 돌출되는 사물과 관계를 통해 예견되거나 구체화된다. 숙소에 배치되어 있는 과일이 상해 있거나 언제인지 모르게 침입하여 베개에 올라와 지저귀는 매미소리, 솔방울의 추락 등은 이를 반영하는 오브제다. 휴양지에서 피서를 나온 아이들과 가족 무리의 시끌벅적한 소리는 레다의 시간과 공간을 박탈하고, 50년대 할리우드 멜로드라마를 상영하는 비어 가든에 앉아 영화를 감상하고 있던 레다는 부지불식간 침범하는 10대 소년으로부터 조롱당하고, 의자 좌석을 뒤집는 등의 행패를 부린다.

반면 위와 같은 무차별적인 개입에서도 숙소의 관리인인 라일(에드 해리스)은 레다에게 있어서 여성성을 간직할 수 있는 대상으로 머무르기도 한다. 레다는 라일에 어깨에 기대기도 하고, 레트로 음악에 맞춰 함께 춤을 추기도 한다. 하지만 <로스트 도터>에서 대부분 남자들은 여자만큼 깊은 유대를 형성하지 못할뿐더러 주변부로 밀려난다. 라일도 마찬가지다. 주변부의 이미지로 밀려난 남자는 긍정적으로 비춰지지 않는다. 그녀를 방해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부의 남자는 결국 그녀가 자유하기 위한 과정에서 소모되는 이미지인 셈이다. 비치하우스를 관리하는 청년 윌(폴 메스칼)와의 최초의 유대관계도 그의 터무니없는 요청에 깨어져 버리고 밀려난다.

후반부에 레다가 숨겨놓은 엘레나의 인형을 니나에게 돌려주는 과정에서 얻은 생채기는 필연적으로 겪어야만 하는 수난을 기술한다. 그녀가 집으로 회귀할 때 어둠은 마치 인형이 간직하고 있었던 흑색의 물처럼 채색된다. 심연의 길을 건너갈 때 레다의 세계는 비로소 빛의 세계로 환기된다. 이때 영화의 모든 몽타주의 목적은 잃어버린 딸을 찾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신을 찾기 위한 과정으로 전진한다는 지점에서 반향의 서사를 지닌다.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 그린나래미디어, 영화특별시SMC

로스트 도터
The Lost Daughter
감독
매기 질렌할
Maggie Gyllenhaal

 

출연
올리비아 콜맨Olivia Colman
다코타 존슨Dakota Johnson
제시 버클리Jessie Buckley
폴 메스칼Paul Mescal
피터 사스가드Peter Sarsgaard
에드 해리스Ed Harris

 

수입 그린나래미디어
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영화특별시SMC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22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2.07.14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