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다' 동물의 몸이라는 영화적 장소
'군다' 동물의 몸이라는 영화적 장소
  • 김민세
  • 승인 2022.07.26 11: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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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세계의 시선이 될 수 있는가"

영화 연출의 가장 기본적 단위라고 할 수 있는 쇼트(shot)의 문법은 어쩔 수 없이 '인간 중심적'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화는 서사와 손을 잡아 온 '극영화'이고, 그 서사를 이끄는 것은 인간이 제일 잘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의 몸, 얼굴, 또는 입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화 쇼트의 문법은 인간의 몸을 어디부터 어디까지 담을 것인가, 어느 각도로 어느 위치에서 담을 것인가, 어떻게 등장시키고 어떻게 퇴장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에 따라 정의된다. 그 모든 정의의 중심은 인간의 몸이다. 그리고 이것은 쇼트뿐만 아니라 사운드, 연기, 대사, 서사, 영화연구, 비평 등 영화를 이루는 모든 요소에 해당되는 것임이 당연하다.

그래서 '영화에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선언은 '개별 영화만의 새로운 문법을 만들겠다'는 말의 동어 반복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부재로 응시의 새로운 대상이 될 동식물, 자연물, 사물 더 나아가 개념이나 관념은 세계 내에서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이 다르고, 인간의 힘으로 온전히 통제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빅토르 코사코프스키의 <군다>는 이런 선언을 전제로 하는 영화다. 돼지와 닭, 소라는 동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영화는, 그것들의 몸과 소리에서 어떠한 새로운 영화적 순간을 발견해낼 수 있을지 탐구한다.

 

ⓒ 영화사 진진

다큐멘터리 영화인 <군다>에서 일차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부재'이다. 사람의 부재와 색채의 부재. 그리고 대사의 부재와 내레이션의 부재. 전자는 시각적 요소의 부재이고, 후자는 청각적 요소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이 부재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 이것을 단순히 사실에 가까워지기 위한 또 다른 리얼리즘의 방법론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 질문 앞에서 두 가지 가정을 해보려 한다.

첫 번째, 우리가 이 부재에서 읽어내야 하는 것은 영화가 러닝타임 내내 지워내려 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들어서기 직전까지, 어쩌면 살면서 평생 무언가를 지각하던 우리의 방식. 또는 수많은 영화를 봐오고 만들어 오던 방식. 인간의 몸과 색채라는 이미지, 사람의 말과 인공의 소리. <군다>의 시간은 그것들을 지워내기 위한 시간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배경으로써 존재했던 것들이 주인공의 자리를 대체한다. 동물의 몸과 동물의 언어. 우리는 그것들의 몸을 다양한 각도로 마주하면서, 약육강식의 생태계 이전에 유희의 시간을 보내는 그것들의 움직임과 몸짓들을 보면서, 그리고 생전 들어본 적도 없을 다양한 돼지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그것들의 몸과 소리가 영화 언어가 되어 영화를 구성하는 순간을 경험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적으로 길게 펼쳐지는 동물들의 시간과 함께하면서 그것들의 일상을 편안하게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몸과 소리는 무엇을 말하는지, 어떻게 그것들의 존재가 영화가 되고 있는지 끊임없이 질문하며 이 영화를 봐야 한다.

두 번째, 이 부재는 오히려 <군다>를 다큐멘터리 영화 그 너머로 읽을 수 있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를 보고 있다 보면, 이 영화를 극영화라고 칭할 수 없는 그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을뿐더러 다큐멘터리라고 불러야만 하는 이유도 딱히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먼저 색깔의 부재는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을 사실적으로 담아내겠다는 것의 포기 선언과 다름없다. 반면 이를 대체하는 흑백의 영상미는 그것들의 이미지를 일종의 고유한 역사 또는 서사로 만들고 있는 것만 같다. 또 내레이션의 부재는 사실을 바라보고 기술하는 관찰자의 시선을 제거하면서 관찰자와 대상 사이의 위계를 지워낸다. 이것은 즉슨 각각의 쇼트들에서 볼 수 있는 대상이, 그리고 쇼트들이 내포하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이 특정한 관계 안에서 서로 맞물리며 작동하고 서사를 뒷받침하는 요소로도 읽힐 수 있다는 뜻이다.

 

ⓒ 영화사 진진

애초에 시네마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구분하지 않은 채 시작되었고, 시네마를 향한 다양한 도전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에서 위의 사유는 큰 의미가 없는 수도 있다. 그럼에도 굳이 <군다>가 극영화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그 검증 과정을 거친 뒤 따라올 새로운 질문 때문이다.

(극) 영화는 <군다>가 될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군다>가 극영화에 포함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멈추고 <군다>를 통해 지평을 넓힐 (극)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아야 한다. 종의 방향으로 긴 인간의 몸과 달리 횡의 방향으로 긴 돼지와 소의 몸이 1.85대 1의 화면비를 빈틈없이 가득 채울 때. 홀로 집 앞을 서성이다가 멈추길 반복하는 암퇘지의 몸이 프레임에 의해 잘릴 때. 그 대안적인 풀 쇼트와 클로즈업 쇼트가 만드는 기이한 인상을 기존의 인간 중심적 영화에서 만날 수 있을까. <군다>의 프레임 안에서 작동하는 동물의 몸은 인간을 담았던 기존의 영화적 문법과 이미지를 다시금 상기시키고, 무너뜨리고, 재구성하는 영화적 장소이다. 이것은 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세계의 구축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극장에 앉아서 <군다>를 본다는 것은 새로운 지각과 응시의 가능성을, 그리고 영화가 수행하는 교육의 시간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 앞에 선다는 것이다. 세계의 시선은 <군다>의 시선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군다>의 시선으로 세계를 응시할 수 있는가.

 

ⓒ 영화사 진진

그렇지만 앞선 이야기들은 영화의 충격적인 엔딩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구축의 영화가 상실의 영화가 될 때, 우리는 <군다>를 다시 기술해야 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볼 수 있었던 것은 '검은 문'이다. 새끼를 밴 암퇘지는 그 문 언저리에 누워있다. 그리고 카메라가 문 안으로 들어가면 암퇘지의 젖을 빨고 있는 새끼 돼지들이 보인다. 새끼 돼지들은 이곳에 태어나 세계로 나가고 다시 돌아오길 반복한다. 이 영화의 유일한 장소. 모든 것이 시작되는 장소이자 그들의 고유한 하나의 소우주. 그것들을 위한 새로운 프레임. 우리는 이 검은 문에서 일어나는 구축의 순간을 반복해서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찾아오는 상실의 엔딩.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기계의 소리와 인간의 발소리가 돼지들의 소리를 압도한다. 새끼 돼지들의 몸은 컨테이너라는 기계의 몸에 가려진다. 홀로 남은 암퇘지는 한참 동안 집 앞을 서성이다 검은 문 안으로 들어간다. 영화는 모든 것이 사라질 장소가 된 검은 문의 쇼트 앞에서 눈을 감는다.

<군다>는 그 긴 시간 동안 구축해온 것들은 마지막에 와서 결국 놓아버린다. 아니, 그것보다는 현실이 그러하기에 <군다>의 구축은 필연적으로 멈출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고 말하는 편이 맞다. 이 엔딩 앞에서 질문은 다시 수정되어야 한다. '<군다>의 구축을 통해 지각한 우리의 새로운 응시가 이 영화의 엔딩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도달해야 빅토르 코사코프스키가 이 영화를 통해 말하려 했던 묵직한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의 소우주를 지켜낼 수 있는 것은 93분 동안의 일시적인 카메라가 아니라 우리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 영화사 진진

군다
Gunda
감독
빅토르 코사코프스키
Victor Kossakovsky

 

수입|배급 영화사 진진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93분
등급 전체 관람가
개봉 2022.07.14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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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 2022-07-27 22:27:59
'군다'를 보지 않았지만 비평글 자체의 완성도가 높아 글을 읽는 것 만으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 '군다' 도 너무나 보고싶게 만드는 비평이었어요. 특히 영화는 군다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