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th BIFAN] '노이즈' 프레임 속 걸음의 흔적
[26th BIFAN] '노이즈' 프레임 속 걸음의 흔적
  • 변해빈
  • 승인 2022.07.20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가 흘린 핏자국을 따라 낙담하며 묵묵히"

0. 길

<노이즈>를 말하기 위해 오프닝 시퀀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길에 관해서다. 차량 몇 대가 차도선에서 내려 해안가 마을로 유입되는 것으로 보아 영화의 공간인 시시카리는 들어오기도 떠나가기에도 수고로움이 예상되는 곳이다. 카메라는 동일한 한 대의 자동차가 지나치는 거리를 극진히 좇아가고 넓은 화각이 어우러져 로드뷰라 칭할만하다. 그 자동차에는 두 남자가 타고 있는데, 목적지에 이르러 잠시 헤매더니 나중을 기약하고서 어디론가 다시 이동한다.

그런데 별안간 뒷좌석의 남자가 운전대를 잡은 상대를 죽이고 자동차는 완전히 정차한다. 이때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는 주어지지 않았으나, 보기 드물게 자연의 시간성이 오롯이 흐르는 외딴 마을의 로드뷰와 그 길 위에 발 들인 두 남자는 섣부르게 예상했던 대로 마을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제 무얼 해야 할까. 영화가 보여준 대로 시시카리의 길을 따라 부단히 걸음을 옮겨야 한다.

 

1. 흔적

<노이즈>의 화면을 구성하는 형식(극단적 롱 샷, 롱 테이크, 딥 포커스, 부감) 자체는 시공간의 동시성이나 감정이입의 능동성을 추구하는 영화에서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구획된 프레임에는 어떤 인물의 몸짓, 모종의 정념이 걸리는 게 아니라, 인물들이 존재하는 '여기'와 '그곳'으로서의 로드가 포착된다.

케이타(후지와라 타츠야)와 준(마츠야마 켄이치)이 원경에서 프레임 중앙으로 들어온다. 그들은 무인 판매소에서 무전취식 중인 외지인(코미사카)을 발견하고 추궁하자 상대는 자리를 뜬다. 이어 꺼림칙한 느낌에 그들은 그의 뒤통수에 시선을 두고 어느 쪽으로 갔는지 확인한다. 카메라는 보란 듯이 양 갈래로 흩어지는 두 그룹의 행적을 길의 형상으로 가시화한다. 이렇게 <노이즈>의 구획된 프레임은 내외부에 누가 들어오고 누가 빠져나가는가, 혹은 누가 영영 떠나지 못하거나 누가 발붙일 틈 없이 숨 가쁘게 떠나야만 하는가, 에 관한 걸음의 흔적을 보여준다.

 

ⓒ Kamrupa Creations

2. 침투와 관성

영화 속 인물들은 프레임으로서 시시카리의 시공간에 애써서 침투하거나 관성적으로 머문다. 짧게 전술한 코미사카(와타나베 다이치)는 교도소 출소 후 교화와 자립을 도우려는 켄지를 죽여 프레임 한가운데 주검을 밀어 넣는다. 허허벌판을 가로지른 켄지의 자동차는 형사가 도착할 때까지 그곳에 그대로 보존된다. 케이타의 현관에서 헛걸음했던 코미사카 역시 그의 마당에서 비닐하우스로, 다시 비닐하우스 내부 흙 아래를 비집으며 침투한다. 영화 끝에 발견된 코미사카의 신체는 그가 마지막으로 살아있던 공간으로 회귀해 죽어서 발견된다. 촌장과 마을 어른의 우발적 죽음이 있던 시퀀스에서 인물들은 줄줄이 우연한 계기로 현장을 목격하고선 자의든 타의든 범행 장소에 발 묶인 채 죽거나 죽이거나, 범죄를 은닉하는 계획에 가담한다.

인물들의 침투와 관성적인 걸음은 프레임의 공간인 마을 공동체가 작동하는 원리와 동형적이다.

고령화로 몸살 앓는 마을 사람들은 시시카리의 특산품인 검은 무화과 홍보에 신중을 기한다. 그보다 범죄 없는 마을의 평화로움은 검은 무화과의 맛이나 효능을 능가하는 희소가치인 셈인데, 그러므로 이들은 켄지와 코미사카의 죽음이 벌어지기 전의 상태를 보존하려 안간힘 쓴다. 그 방법은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태운 운전자가 낸 사고를 눈감아 주는 일처럼, 암암리에 작동해온 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해 기존의 규율과 체제를 견고히 유지하는 것이다. <노이즈>의 인물들은 자기 욕망을 보존하려는 본성에 따라 선악의 관념을 이행하고 유지하며, 고정되고 통제된 시시카리라는 공간으로서 프레임에 스스로의 양태를 보존하는 침투와 관성의 행적을 남긴다.(본의 아니게 부패되지 않아 식별이 가능한 켄지와 코미사카의 주검은 묵인된 진실이 역겨운 요행으로는 부패되지 않음을 폭로한다)

 

ⓒ Kamrupa Creations

3. 추방과 의혹

시시카리의 길에 유입되고 머물게 만드는 힘이 '보존에 대한 추구'라면, 그러한 보존 의지를 훼손하며 분열을 감수하고 '의혹을 제기하는 눈초리'가 프레임을 가로지르는 경로를 만들어낸다. 가로지름의 운동성은 코미사카를 추적하는 형사들의 걸음이 남긴 낙담의 행적에서 나타난다. 이들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불미스러운 사건을 예측하지만, 과도하게 맞아떨어지는 단서와 증거를 부정할 여력이 없다. 빗나간 추측에 무력하게 돌아서거나 "언제까지 있을 거냐"는 마을 사람들의 분노와 타박에 도망치듯 외화면으로 추방되곤 한다. 그렇다면 형사 하타케야마(사코우 요시)가 <노이즈>의 끊임없이 추방되면서도 세 남자(케이타, 준, 모리야)에 대한 미지의 의혹을 묵묵히 지속하고 생산하는 힘은 어디서 기인하는 걸까.

형사들은 수사 과정에서 공동체 내부의 분열과 교란 작전으로 오히려 덕을 본다. 마을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동시적인 시공간, 다시 말해 특정한 프레임을 탈피해 정보를 공유하지 못한다. 현장에 보존된 코미사카의 시신으로 흉기에 지문을 남길 수는 있지만,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그의 과거 범행 패턴은 모른다. 촌장의 부하직원은 세 남자와 입을 맞추지 못하는 실수를 하고, 시신이 냉동창고에서 농원으로 옮겨졌단 정보는 모리야(카미키 류노스케)에게 도달하지 못해 일을 그르친다.

특히, 불통의 속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프레임은 모리야의 거짓 자백 촬영물이다. 이것은 영화 프레임 속의 또 다른 프레임 곧, 신의 휴대폰 화면 속 영상으로, <노이즈>의 구획된 형식을 이탈하는 구간이다.(그는 더 깊은 프레임 속으로 이중 침투했다) 그래서 기존의 패턴과 반대로 모리야의 거짓 자백 영상은 하타케야마만이 침투하고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하타케야마의 촬영물로의 유입은 무엇인가를 유지하려는 의지와 다르게, 보존 의지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부조된 통로로 가능해진다. 그것은 자살함으로써 육신의 항상성을 중단하는 행위이자, 그로 인해 모리야는 자신이 기억하는 안식처로서의 시시카리에 제대로 유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살아서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 Kamrupa Creations

통로를 개척하는 힘은 하타케야마의 지극한 본성과도 연관된다. 그는 "누구나 그렇게(아무렇지 않게 거짓말하는 존재) 될 수 있다"라는 의혹을 동력으로 자기 안의 믿음을 끝없이 가로지르는 자다. 분열하는 신념을 감수하는 자의 행보에는 피의 얼룩이 남아 있다. 돌이켜보면 케이타, 준, 모리야는 이상하리만치 핏자국으로부터 자유로운데,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주검을 처치하는 입장에 놓이거나 닦아 내면 그만인 것이었다. 특히 모리야 자살 후 케이타, 준의 기구한 처지에 대한 연민이 조금도 남지 않게 되었는데, 신의 자살 현장에서 그의 생사를 확인했던 하타케야마의 손바닥 위에는 두 남자에게는 없는, 지워지지 않은 피의 기억이 얼룩져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시시카리의 구획된 공간은 마을 사람들이 머무는 3차원의 공간이 아니라 평면화된 지도로 보이기도 한다. 형사들의 수사 네트워크 도면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타케야마가 부단히 낙담하며 걸어온 기억 속 공간 이미지를 이어 붙인 로드맵. 오프닝 시퀀스에서 외부 유입 차량의 로드뷰는 하타케야마의 로드 무비로서의 허행과 방랑을 위한 것일지 모른다. 이 로드 사이를 흐르는 멎지 않은 피의 유수는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합리화를 굳히거나 위선을 부리거나, 또는 가증스러운 안도감을 누릴 때, 여전히 그 죽음 곁을 공회전해야 한다는 회억의 통로로 작동한다. 하타케야마의 마지막 행선지가 어떤 죽음의 시작과 맞닿는 또 다른 죽음(묘비 앞의 추모)으로 회귀될 때, 그는 프레임 바깥으로 추방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준을 향한 의혹을 다시금 품는다.

그런 의심의 눈초리가 영화 속에서 감춰졌던 준의 프레임을 잊지 않고 폭로한다. 후미에 드러나는 결정적인 교란의 원인은 프레임의 철저한 형식 안에는 없다. 그것은 시간성을 탈주(플래시백)하여 뒤늦게 우리를 찾아온다. 무언가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거나 동시간대 반응을 분할된 컷으로 ‘다시’ 봐야 한다. 고정된 범주를 벗어나는 확연한 앵글의 이동이 도리어 프레임에서 배제된 존재를 포확해 진실을 드러낸다. 로드 무비로써 <노이즈>의 로드를 거닐기 위해선 시선의 자율성과 방대한 정보를 집요하게 좇는 극진한 주의력이 아니라, 잠복의 가능성에 의혹을 품어보는 투시력을 요한다.

 

4. 기도하며 걷는 길

준이 시시카리에 머물기를 택한 쪽이라면 케이타는 시시카리를 떠나야만 한다. 한때 마을의 구세주였다가 이제는 마을에 발들일 수 없게 된 남자. 신임 경찰 한 명이 전부인 마을에 교도소가 있을 리 만무하니 케이타는 유일하게 죽지 않고 살아서 마을을 빠져나간 자다. 케이타의 마지막 걸음에는 눈물과 총성이 동행한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밀려오는 후회나 참회의 순간을 감당하게 되는 걸까. 그 눈물은 마을에 남아 수렵 중인 준의 총성을 숨죽이게 하진 못하는 것 같다. 대신 오프닝에서 마을의 유입을 도왔던 딸 에리나의 내레이션이 케이타의 마지막 걸음과 함께한다. 어른들의 혼동이 침투하거나, 즐거운 기억의 작은 조각하나 추방되지 않은 아이의 문장이 천공을 울리는 총성을 잠재운다. 끝을 알 수 없는 길 위를 어떤 걸음으로 걷게 될지 아득하지만, 에리나의 즐거운 문장이 기도문이 되어 미끄러지는 걸음을 붙잡을 것만 같다.

[글 변해빈, limbohb@ccoart.com]

 

ⓒ Kamrupa Creations

노이즈
Noise
감독
히로키 류이치HIROKI Ryuichi

 

출연

Tatsuya Fujiwara
Ken'ichi Matsuyama
Ryûnosuke Kamiki
Akira Emoto
Ayumi Ito
Haru Kuroki
Masatoshi Nagase
Nahana
Susumu Terajima
Kimiko Yo

 

제작 Kamrupa Creations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28분
등급 15세 관람가
공개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