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난 아들>은 비평하기 난감해지는 영화다. 수작 혹은 괴작 등 평가의 척도를 갖다 대기 이전에 이 영화에는 말로 설명하거나 글로써 풀어내기 어려운 묘한 에너지가 있다. 반대로 트랜스젠더 남성으로 LGBTQ에 대한 사회적인 영화를 만들어온 이이즈카 카쇼 감독에게서 특정적인 영화적 태도를 발견해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 대한 고발, 소수자 간의 연대, 인물들을 감싸 안는 사려 깊은 태도. 그러나 이것은 영화가 주는 감상에 대한 사후적인 주석이 될 뿐이지, 영화 그 자체가 갖고 있는 힘에 대한 설명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의 본질은 서사의 힘도, 이미지의 힘도, 대사의 힘도 아니다. 어렴풋이 말해보자면, <화난 아들>에는 특정한 사회적 시선과 관점이라는 도구로 영화의 단면(내용과 형식)을 들여다볼 욕구를 차단하는 듯한 순수하고도 기이한 힘이 있다.
<화난 아들>의 주요한 소재는 정체성이다. 동성애자로서의 성 정체성을 갖고 있는 동시에 일본과 필리핀 혼혈로 태어난 고교생 '준고'. 고향인 필리핀을 떠나 일본에서 홀로 그를 키우는 '레이나'. 무성애자로서의 성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아이를 키우고 싶어 하는 한 여학생. 이렇게 자신의 사회적·성적 정체성으로 인해 소수자의 입장에 선 세 인물들은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크고 작은 갈등에 마주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갈등들의 원인이 과연 그들의 정체성 때문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당연히 그들의 정체성이 사건과 인물들의 정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준고의 남자 친구 유스케의 부모는 그들의 결혼을 염려하고, 레이나는 직장 동료에게 손님의 돈을 훔쳤다는 의심을 받으며, 무성애자 여학생은 자신이 어떻게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을지 고민한다. 이런 지점에 있어서 그들이 사회적 소수자이기에 특정한 상황에 처한다는 사실은 명확해 보인다.
하지만 <화난 아들>은 그러한 사실을 갈등의 기폭제로써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준고와 유스케가 다툼을 반복하는 이유는 준고의 불투명한 진로 때문이고, 레이나가 진짜로 돈을 훔친 것인지 확실하게 단정 짓지 않으며(만약 그녀가 외국인으로서 차별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돈을 훔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확한 증거-레이나가 손님의 지갑을 쳐다보는 의심스러운 쇼트를 무효화시킬 소트-로 보여주었어야 했다), 무성애자 학생은 유스케와 준고를 포함한 3인 형태의 가족을 만들 것을 약속한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이들의 갈등이 사회적·성적 정체성에 대한 차별로 일어난 것이라는 원인, 또는 반대로 정체성에 대한 부분이 차별과 갈등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결과를 비튼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LGBTQ와 타국적이라는 소재는 사회를 고발하기 위한, 혹은 연대의 순간을 그리기 위한 것으로 소모되지 않는다.
오로지 그들의 개별 존재를 증명하는 것으로 기능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특징들을 보고 과연 이 영화가 소수자를 다루는 영화로써 바람직하게 기능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 소수자들이 겪고 있는 차별과 갈등을 최대한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후반부에 오는 카타르시스는 무언가 부족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오히려 <화난 아들>이 특별한 영화가 될 수 있는 이유가 이 지점에 있다고 볼 수는 없을까. 많은 영화들의 주된 관심사가 소수자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차별과 이를 극복하고 이뤄낸 연대에 있었다면, 이 영화가 주는 정체 모를 뭉클함의 에너지는 다른 것에서부터 기인하지 않았을까.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둘러싼 관계, 담론, 갈등들이 결국 무엇을 전제로 하고 있었는지 다시 한번 떠올려보자. 동성결혼이 불법인 일본에서의 파트너십 제도, 필리핀에 있는 가족에게 돈을 보내야 하는 것,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 친아빠를 찾는 것, 다시 가정을 꾸리는 것. 다시 말해, 결혼, 출산, 양육, 부양, 사랑 그리고 마침내 가족. 어떻게 보든 간에 <화난 아들>은 가족에 대한 영화로 귀결된다. 서로 불화를 반복하지만 그들은 결국 가족이라는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관계로 맺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무성애자 여학생과 준고, 유스케가 삼자대면하여 대안적 형태의 가족을 약속하는 장면은 소수자 간의, 또는 소수자와의 연대라는 의무감을 넘어 허를 찌르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가족의 서사를 따라와 그들이 이뤄낸 완전한 가족. 필자는 이들에게서 소수자만을 위한 대안 가족, 또는 유사 가족이 아닌 '가족 그 자체'를 보았다.
여기서 다시 돌아봐야 할 점은 소수자에 대한 영화가 시대의 보수성을 두고 관계 맺는 태도이다. 시대의 보수성 앞에서 굴복할 것인가, 현실적 대안을 내놓을 것인가, 어쩌면 가정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판타지를 그릴 것인가. 필요한 것은 희망이다.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 앞서 말한 카타르시스는 대부분 이 희망을 전제로 하고 있다. 반면 <화난 아들>은 이러한 희망의 카타르시스를 내려놓는다. 균열된 세계를 들여다보거나, 균열된 세계를 봉합하는 과정을 따라가거나, 가상의 봉합된 세계를 그리지 않는다. 영화는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 세계를 긍정한다. 그리고 그 세계는 시대의 보수성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작동한다. 영화 속 인물들이 더 나은 세계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더 나은 관계를 바라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필자는 이것을 타협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또 이만하면 괜찮다는 안도감으로 보고 싶지도 않다. <화난 아들>의 힘은 어쩌면 '확신'이다. 그리고 '확인'이다. '동시대 안에서 소수자의 서사가 가족의 서사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확신이자 확인. 취직을 해서 유스케와 가정을 꾸리겠다는 준고의 간절한 목소리가 대변하는 확신. 그리고 보수적인 유스케의 아버지가 아들을 잘 부탁한다며 준고에게 진심을 전할 때의 그 무뚝뚝한 목소리가 대변하는 확인. 그 확신과 확인의 결과물이 준고와 유스케, 여학생이 만든 '가족 그 자체'인 것이다. 이이즈카 카쇼는 가족이라는 맺음이 이들을 완성시키는 것이라 믿는다. 그가 고집스럽게도 두 번의 결혼식(레이나와 그녀의 재혼 상대 간의 결혼식, 준고와 유스케 간의 결혼식)을 보여준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닐까.
필자는 <화난 아들>이 동시대가 그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수자의 서사를 보여주고 있다고 분명 확신한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화난 아들
Angry son
감독
이이즈카 카쇼IIZUKA Kasho
출연
KIKUCHI Yosuke
YAMADA Masafumi
IIZUKA Kasho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11분
등급 15세 관람가
공개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