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th BIFAN] '젠틀' 절규하는 심호흡
[26th BIFAN] '젠틀' 절규하는 심호흡
  • 이현동
  • 승인 2022.07.15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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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질의 변용과 파국 되는 몸"

 

"감각 능력은 인간이 물질세계를 상대하는 노동에 나서서 자신의 감각적 체질을 바꿔감에 따라서 진화한다." 테리 이글턴 『유물론』(2018)

물질세계의 구조와 동시에 생성되는 기능적인 요청은 결국 인간을 특정한 요인에 따라 복종하게 만들거나 자연스러운 종속을 유도한다. 그것이 대부분은 공동체의 '권력'으로부터 특권화될 수 있다면, 영화라는 매체는 끊임없이 이를 저항하고 해체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하는 '몸'이란 개인과 공동체의 권력을 공고화하는 강력한 힘이다. 무엇보다 운동이란 노동은 감각뿐만 아니라 신체적 체질을 바꿔가면서 노동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소모를 거듭한다. 영화 <젠틀>(2022)은 여성 보디빌더의 몸과 사회라는 두 영역을 마찰시키면서, 물질세계에 발생하는 비극을 묵도하는 작품이다. 특히, 이 영화는 단순히 여성의 몸을 남성이 지닌 육체미로 치환하거나 무분별하게 대립하게 만드는 고전적인 클리셰를 답습하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특정인으로부터 또 다른 몸의 변용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젠틀>의 결론은 카오스적이면서도 또렷하다. 이 영화의 물질세계를 연장하는 기원이 되는 두 종류인 '물성'과 남녀 사이의 '애정'이란 주제를 산발적으로 배열하는 단점을 지니면서도, 이를 상쇄하는 주인공 에디나의 연기가 도리어 주제와 정서를 내밀하게 표출해내면서 메시지를 단단하게 만든다. 영화의 대부분은 두 장면의 프레임으로 중첩된다. 몸을 만들기 위한 운동과 식단관리의 연속, 기계적인 이 패턴 속에 묘사되는 에디나는 보디빌더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근육들처럼 경직된 상태로 존재한다. 근육의 형태를 권능으로 인식하는 삶의 형국에서 영화는 무엇을 발화하는 것일까. 그것은 표면이 아닌 내면의 성질인 정서적일 테다.

 

 ⓒ FocusFox Studio

신체적 체질에서 정서적 체질로

보디빌더의 음영은 여성일수록 더욱 짙다.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비인기 종목인 여성 보디빌더들은 심지어 포르노를 찍을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이어 나간다고 한다. 이런 사회 배경은 영화에서도 동일하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에디나(Eszter Csonka)는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로 선발되었음에도 개인적인 명예, 또는 조금이라도 경제 상황이 나아질 수 있을 만큼의 상금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대회가 끝나고 피자를 먹기 위해 두 달을 기다린 그녀에게 다시금 찾아오는 말은 당장 내일부터 체중조절을 시작해야 한다는 트레이너이자 애인인 아담(György Turós)의 코칭이다. 아담은 에디나의 세계대회 출전과 함께 우승의 확률을 높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약물을 투여할 것을 권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한다'는 파트너인 아담의 조언과는 별개로 그들에게 약물을 살 수 있는 경제적인 여력은 전연 존재하지 않는다. 두 남녀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신체를 활용하려 한다. 아담은 남성 스트립쇼 오디션을 보기도 하지만, 어설픈 표정과 미동도 하지 않는 제스처로 인하여 결국 탈락한다.

곧바로 이어지는 시퀀스에서 에디나는 운동을 하다가 성매매를 알선하는 마담을 발견하고, 그녀의 스튜디오에 찾아가 일을 시작하면서 에디나는 신체적 체질이 다른 방식으로 변용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에디나는 나이가 든 노쇠한 남자의 성적 욕구를 채워주기도 하고, 발 페티시를 가진 남자의 머리를 양발로 조르기도 한다. 다음으로 마담에게서 특별한 고객을 요청받은 에디나는 어둠속에 가면을 쓰고 나타난 남자를 호텔이 아닌 숲에서 조우한다. 서로 야생동물처럼 자연 속을 거닐면서 욕구를 해소하는 그 남자와 에디나는 운명처럼 이끌리고 만남이 계속 이어진다. 주로 야생에서 마주하는 둘의 만남에서 에디나는 대회 복장이나 트레이닝 복이 아닌 원피스를 입고 나올 정도로 정서적 체질도 변화한다. 하지만 에디나와 남자의 만남이 끝나는 순간이 제약이 있는 공간인 '집'이라는 점은 둘의 정서가 종국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고한다. 에디나는 그의 집에 찾아가 애타게 남자를 기다리지만, 그는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돌아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쫓아내면서 둘의 관계는 파국을 맞는다. 신체적 체질의 종말은 결국 정서적 체질과 연대하지 못한다.

 

 ⓒ FocusFox Studio
 ⓒ FocusFox Studio

하체 없는 성별

보디빌더 대기실에 존재하는 '여성' 보디빌더의 모습은 시상식을 제외하고는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각국의 보디빌더 대표 선수를 선발하는 처음 오프닝 이벤트에서 카메라 워크는 기이하게도 에디나의 육체 전부를 촬영하지 않는다. 상체를 위주로 한 포커스를 끝으로 영화의 제목인 <젠틀>이 점멸할 때 남녀의 하체가 가진 기능적인 부분이 소거된 것처럼 보인다. 이때 그녀가 젠틀(Gentle)이란 형용사로 표시된다는 점에서 영화가 초래할 탈 근대적 요소, 즉 성별과는 무관한 '몸'이라는 양식을 통해서 주제는 점차 약동한다. 영화는 끝까지 그녀의 하체를 겨냥하지 않는다. 종종 등장하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에서도 그녀의 상체만을 묘사한다. 우연히 옷을 탈의하고 있는 다른 여성 보디빌더도 상체만 목도되고, 성매매의 일에서도 남자와 에디나의 삽입은 존재하지 않으며, 영화 스틸컷에 등장하는 장면인 에디나가 남자를 껴안고 있는 쇼트에서도 마찬가지로 하체는 묘사되지 않는다.

이는 결국 여성의 '몸'이란 측면을 특별히 강조하거나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정서적인 교감으로부터 여성성을 현시한다는 점에서 기존영화의 문법을 전복한다. 에디나는 아담과 마지막 고객인 남자로부터 단순한 신체접촉과 말과 제스처를 통해서 애정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하체의 움직임을 동반한 어떤 극단적인 자극이 영화에 돌출되지 않더라도 <젠틀>은 그 자체로 충분한 연출적 의미를 부여한다.

영화의 끝에서 다시금 재확인되는 음률이 있다. 그것은 짤막하게 들려오는 에디나의 심호흡이다. <젠틀>에서 에디나의 강인한 육체와는 무관하게 심호흡은 애처롭게 들린다. 생명을 곧 잃을 것만 같이 들리는 그녀의 숨은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 것일까. 영화에서 그녀의 심호흡, 어찌 보면 통곡과 같은 음성이 직접적으로 들려지는 장면이 몇 군데에 있다. 대표적으로 3군대 정도가 되는데, 오프닝에서 무대 위를 오르기 전, 성매매를 처음 시도하고 집에 돌아올 때, 마지막으로 약물을 잔뜩 투여하고 무대 위를 오르는 장면이다. 보디빌더, 성매매라는 신체 노동으로부터 전개되는 <젠틀>은 파국의 과정을 이렇게 짧은 절규로 은폐해 놓았다는 점에서 고요하고 섬세하다. 마지막 무대에서 힘없이 포즈를 잡고 쓰러진 그녀의 신체는 결국 포커스 되지 못한 채 영화는 끝이 난다. 애초부터 그녀가 그럴 운명이었다는 것처럼.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 FocusFox Studio

젠틀
Gentle
감독
라즐로 추야László CSUJA
안나 네메스Anna NEMES

 

출연
Eszter Csonka
György Turós
Csaba Krisztik
Éva Kerekes
János Papp
Gábor Ferenczi
Máté Vörös
Ferenc Gerlóczy

 

제작 FocusFox Studio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92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공개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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