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무너지고 깨어지는 사랑의 풍경
'헤어질 결심' 무너지고 깨어지는 사랑의 풍경
  • 이지영
  • 승인 2022.07.13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개 속의 연인들"
ⓒ CJ ENM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이 정훈희의 1967년 노래 '안개'에서 착안했다고 직접 밝힌 것처럼, 안개가 상징하는 모호성이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된 동력이다. 모호성은 다양한 원인으로부터 나온다. 멜로와 필름 느와르라는 장르의 혼종에서, 말의 중의적인 표현에서, 서로 다른 언어의 장벽에서, 혼자 되뇌인 독백이 시차를 두고 연인에게 전달되기까지의 길고 짧은 틈에서 탄생한다. 연속된 격차의 미로들, 기대와 불안이 공존하는 안개 속으로 영화의 서사가 꼿꼿하게 걸어 들어간 이유는, 스마트 기기의 도래라는 동시대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고전 멜로의 전성기인 5-60년대에 관객들에게 선사했던 순일한 감정의 파도를 만들어 내기 위함이었으리라.

서래(탕웨이)와 해준(박해일)이 각자의 집에서 몰입해서 보는 사극 드라마 속 연인들처럼, 고전 멜로의 연인들은 신분이나 종교의 차이 혹은 전쟁과 같이 가시적이고 분명한 이유로 서로 헤어지고 재회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멜로의 서사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장애물은 현대 사회에서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은폐되어 있는데, (예컨대 중산층 가정의 가장이자 모범적인 형사인 해준과, 중국에서 온 밀입국자 출신의 서래의 신분 차이) <아가씨>(2016), <리틀 드러머 걸>(2018)과 같이 박찬욱 감독의 최근 작품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이 보이지 않는 신분 차를 극복하기 위해 중요한 결단을 내리기도 한다.

또 한편 고도로 발달한 통신 수단 덕분에, 연인들은 실시간으로 접속할 수 있는 과잉-연결의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상대의 진심을 의심하며 사랑으로부터 미끄러진다. 스마트 기기를 가진 연인들은 어떤 시대보다도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로 인해 불면에 빠지고, 하루에도 수없이 낙담하고 희망고문 당하고 좌절하기를 반복한다. 멀리서 쌍안경을 들고 서래의 일상을 관찰하는 '해준'은 그 외형에서 히치콕의 <이창>(1954) 속 남자 주인공 '제프'를 연상하지만, 그녀의 쓸쓸하고 결핍된 일상이나 미망인 된 슬픔을 걱정하고 신경 쓰면서 시각, 청각, 후각 등 모든 상상의 감각을 총동원하여 상대방의 공간에 은연중에 잠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줄리엣의 테라스를 넘어 들어간 '21세기 버전 로미오'에 가깝다.

 

ⓒ CJ ENM

검은 스크린에 기록된 사랑의 언어

극 속에 등장하는 스마트 기기의 스크린들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자, 타인을 향해 열린 창으로, 관객들의 일상 안에 깊숙이 침투한 원초적인 유머 섞인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불면을 앓는 해준이 새벽에 아무런 의미 없는 세차를 하다 서래와 문자를 주고받는 화면은, 사랑이 시작될 때 최종적으로 전달받은 메시지 이면에 있던 모든 숨겨지고 휘발되는 과정을 반영한다. 상대가 메시지를 입력 중인 몇 초간을 숨죽이며 기다리는 순간, 발화하려다 실패한 말들, 매끄러운 화면에 반사되는 사랑에 빠진 자의 얼빠진 표정까지도.

이를 무심히 지켜보는 것은 누군가의 살아있는 시선이 아니라 무생물의 검은 스크린의 표면, 즉 현대인이 가장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창이자 거울이다.

두 연인 사이의 언어 장벽은 '탕웨이'라는 한국 영화사에서 앞으로 더 중요한 입지를 가질, 탁월하고 섬세한 감정 표현과 압도적인 아우라를 가진 배우를 캐스팅하기 위해 영화가 내린 해법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언어라는 문제는 <헤어질 결심>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해도 무방하다. 서래를 향한 해준의 배려는 "(더) 쉬운 말로 해드려"라는 말처럼, 언어와 관련된 신사적인 배려에서부터 시작된다. "마침내" 해준이 한 번 더 자기 입으로 반복하듯 서래가 말하는 낯설고도 적확한, 그리고 아름다운 단어들은 이 발화를 듣는 모든 이에게 흔하지 않은 언어적인 체험을 스크린에서 선사한다. 그것은 또한 한국어 화자들에게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라고도 부를 수 있는 감정이다.

앞서 언급한 스마트 기기는 거의 전지전능하여, 모국어의 차이로 불통할 수밖에 없는 연인의 중요한 가교로서도 기능한다. 서래는 한국어의 한계를 느낄 때마다 스마트폰에 모국어인 중국어로 말한다. 그 말은 다시 인공지능을 통해 불완전하게 해석되고, 감정이 배제된 사무적인 성우의 목소리로 해준에게 들린다. 분절된 의미와 비언어적 요소들까지 순차적으로 조합하고, 남은 빈자리는 서로의 마음으로 채워가며 소통에 이르는 장면은 어쩐지 애틋하고 문학적이다. 이러한 다이얼로그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음성에서 텍스트로, 마치 연애편지처럼 기록되어 상대에게 들려지는 동시에 읽혀진다. 때로, 몰래 잠입한 형사는 피의자가 혼자 되뇌인 말을 녹취하고, 사후에 번역의 과정을 한 번 더 거친다. 이는 연인이 보내지 않고 찢어버린 편지 조각을 맞추어 그녀의 진심을 파악하는 유일한 단서로 기능한다. 물론 잘못 끼워 맞춘 편지는 '저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나에게 가져다주세요'라는 잘못된 문장으로 오도하지만 말이다.

이렇듯 언어 소통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사실 해준은 애초에 의도가 섞인 말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오직 눈으로 보이는 증거를 믿는다. 남편의 죽은 모습을 묘사하는 '말씀'보다 사진을 직접 보겠다는 서래 앞에서 조금은 안도하는 모습에서 단편적으로 알 수 있다. 증거를 인멸하면서도 명분은 당신을 편히 잠들게 해주겠다는 미심쩍은 말, 거짓말 탐지기 앞에서 평온한 얼굴로 자백을 하는 그녀의 텅 빈 발언은, 서래를 향한 마음이 커지는 만큼이나 피의자로서의 의혹을 가중시킨다. 해준이 믿는 것은 마치 그 끝이 낭떠러지라도 자신이 몸소 재현하고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돌아갈 수도 없고 부인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진실이다. 구소산 정상에서 바라본 아득한 고도는 서래에게는 공포 섞인 울음을, 해준에게는 아득한 현기증을 유발한다. 나의 존재가 무너지고 깨어짐. 이것이 해준에게 갖는 의미를 서래가 알게 되면서 영화는 한 번의 변곡점을 지난다.

 

ⓒ CJ ENM

산해경 : 낙차(落差)와 조차(潮差)의 서스펜스

서래는 해준과 다시 형사-피의자 신분으로 재회하기 위해 이포를 찾는다. 이는 서래가 해준과 재회하기 위해 우연을 가장하여 만들어낸 필연이다. 이 드라마에서의 필연성은 해준의 아내 정안(이정현)이 믿고 따르는, 부부 관계에까지 적용되는 정합적인 논리나 통계적 사고, 인과 관계와는 달리, 해준의 의심과 관심을 동시에 끌고 그의 삶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는다.

두 인물이 재회하면서 부산에서와 비슷한 사건이 한 번 더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것은 거꾸로 전복된다. 해준을 조력하는 동료는 체력이 허약하고 질투와 의심이 많은 남자 형사 수완(고경표)에서, 소년티가 나고 의심이 별로 없는 여자 형사 연수(김신영)로 대체된다. 서래의 말처럼 저번 남편은 자살, 이번 남편은 타살 사건이다. 해준과 정안이 서로에게 해주었던 동료나 피의자 사건의 이야기는 알고 보니 정반대의 성별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즉 1부와 2부의 이야기는 서로 거울상처럼 뒤집어 비춘다.

거칠게 말하면 전반부가 산을 오르며 서스펜스를 쌓아 올리고 무너져 내리는 서사였다면, 이포에서 진행되는 후반부는 하산을 하고 너른 바다로 향해 붕괴를 맞는 서사다. 전반부의 심리적인 기조는 높은 고도와 낙차에서 오는 현기증과 같은 서스펜스이며, 후반부는 잉크처럼 해변을 서서히 적시다 감당할 수 없이 밀려드는 조차의 서스펜스이다.

이때 등장하는 '호미산'은 두 연인이 서로에게 쌓인 오해와 감정을 해소하고 감정을 해갈하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재회한 뒤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라고 다그치는 남자의 질문과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라고 억울한 듯 응수하는 여자의 대답은, 취조실 안에서 시선이 미묘하게 엇갈리는 쇼트들처럼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이 엇갈림이 하나로 합치되는 것은, 결정적으로 두 사람이 호미산에 올라 서래의 전남편 '기도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구소산과 비슷한 구도에서 서래가 해준을 뒤에서 끌어안는 장면이다. 이는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추면서 해준을 잠들게 하는 장면과 함께 유일하게 합치에 이르는 순간이다. '서래는 어떤 의도로 다시 찾아왔나?' '그녀는 자신의 범죄에 형사를 이용하고 어쩌면, 그를 죽일 것인가?' 이러한 의혹은, '마침내' 해소된다.

피의자 자리에 이제는 강인하고 고결한 정신과 긴장하지 않고도 꼿꼿한 자세를 가진 독립운동가의 후손, 동시에 기구한 인생을 살아온 불쌍한 여인이 그 자리에 있다. 지상의 일과는 상관없는 듯, 산 위로 눈발이 아름답게 날리는 장면은 서래가 선대로부터 내려받은, 현실적인 도움은 하나도 못 주는 자부심과 소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짐을 상징하는 듯하다. 눈발을 닮은 유골을 흘려보내면서 그녀는 자신을 오랫동안 이 땅에 붙들고 있던 마지막 이유들에 작별 인사를 고한다.

 

마지막 의심은 파도에 휩쓸려가고

신화나 고전 멜로에서 유배를 간 연인들은 가혹한 운명의 시험대에 오르며, 연인의 증표를 기억하며 이 시련을 견딘다. <헤어질 결심>에서 드러나는 그 증표는 오직 '무너지고 깨어짐'이라는 녹음 파일이다.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라는 말은 해준이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치러야 하는 파멸을 알리는 신호이자, 그만큼 절절한 사랑의 고백으로 읽힌다. 자신을 지켜주고 이해해주는 믿음직한 남자를 만나지 못하고, 폭력적이고 기형적인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서래를 버티고 살아가게 해준 것은 해준의 붕괴 과정을 담은 풍경의 기록이다.

헤어진 연인을 다시 만나기 위해, (현남편의 협박으로 인한) 그의 완전한 파괴를 막고 붕괴 이전으로 되돌리기 위해, 서래는 다시 한번 살인 및 살인교사를 결행한다. 사랑을 위해 자기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고귀한 마음과 파란 4알의 독약으로 함축된 서슬 퍼런 살인자의 면모는 파란색과 초록색이 번갈아 보여지는 그녀의 드레스 색깔처럼 뗄 수 없이 양가적이며 매혹적이다. '헤어질 결심'은 이전의 남자들과 (끔찍한 살인을 통해) 헤어질 결심,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헤어지고 싶으나 헤어질 수 없는, 영원히 유예되어버린 마음이다.

서래가 해준을 잃음과 동시에 자신의 사랑이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듯, 해준 또한 역시 간발의 차로 서래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고, 그녀를 영영 잃어버릴 것 같다는 불안에 휩싸인다. 그가 결정적인 순간 직전에도 넣는 인공 눈물은, 흔히 신파 멜로에서 연출하는 작위적인 감정 표현에 대한 패러디로도 보인다. 하지만 이 인공적인 눈물 한 방울이, 뒤늦게 도착한 사랑의 증표의 의미를 깨우치며 스스로의 눈물로 차오르는 순간, 필름 느와르로 변용되고 눈속임했던 모든 인공적이고 의심스런 관계성은 깨어지고 무너진다. 그리고 오롯이 사랑의 감정만이 압도하면서 화면을 가득 채운다.

엔딩씬은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로 밀려오라' 라는 이정하 시인의 시구를 연상시킨다. 두 손을 선연한 피로 물들이지 않고도 끔찍한 살인자가 되어버린 여인이 마치 모래놀이를 하는 어린아이의 순수로 돌아가듯, 자신을 파멸로 이끌 구멍이를 파낸다. 바다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붕괴된 잔해를 흔적 없이 덮는다. 서래가 자멸을 택하는 이 엔딩은, 필자에게는 유독 전반부에서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었던 한 시퀀스를 떠올리게 한다. 치정 사건으로 살인을 저지른 '홍산오(박정민)'는 죽기 전에 연인에게 '네가 있어서 그래도 덜 공허했다'라는 고백을 전해달라고 하며 죽음을 자초한다.

존재론적인 공허라는 구덩이는 결국, 자신이 선택한 사랑과 열망에 못 이겨 붕괴된 자기 부산물들로 가득 채워진다. 해준이 영원히 해결하지 못할 미결 사건이자, 미완성인 사랑의 서사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고자 한 서래의 욕망은 저 어린아이처럼 이기적이고, 순수하며, 끝끝내 비극적이다.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 CJ ENM

헤어질 결심
Decision To Leave
감독
박찬욱
ChanWook Park

 

출연
탕웨이
박해일
이정현
박용우
고경표
김신영
박정민

 

제작 모호필름
배급 CJ ENM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38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2.06.29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