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스퀘어' 성역(聖域)을 벗어난 현대 교양인의 초상
'더 스퀘어' 성역(聖域)을 벗어난 현대 교양인의 초상
  • 이지영
  • 승인 2022.07.01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예술(이라고 믿는 것)은 무엇인가?"

"더 스퀘어는 신뢰와 배려의 성역으로 이 안에선 모두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있다."

 

위의 선언은, 2017년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에게 첫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영화 <더 스퀘어(2017)>[1]에 등장하는 동명의 미술 작품 '더 스퀘어'의 현판에 적혀 있는 작품 설명으로, 여러 인물들의 입을 통해 몇 차례 반복하여 언급된다. 이 안에 들어온 누구든, 도움을 요청했을 때 그에 대한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종의 사회심리학적인 실험장인 이 정방형의 공간은 영화 내내 텅 비어 있다. 광장에서나 미술관 안에 설치되어 있을 때도 '신뢰와 배려, 그리고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수행되는 성스러운 기적이 일어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에 '더 스퀘어'란 인간과 인간의 상호작용이 일어날 수 없는 진공의 영역, 아마도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실제 사회는 이상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광장에서 적선을 부탁하는 걸인들은 대부분 투명 인간처럼 무시당한다. 잔돈을 구걸하던 약자가 거만하고 거슬리는 태도를 취할 때, 특권층의 선의는 한순간에 적의로 바뀐다. 때로는 상류층 사람이 걸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도 있다. 이렇게 돌연변이로 가득한 바로크적인 인간 군상은 '더 스퀘어'의 고전적인 이상향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1. 불신과 위계로 쌓아 올린 3차원의 '더 스퀘어'

주인공 '크리스티안'(클레스 방)은 스웨덴 현대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다. 영화의 도입부는 그의 직업에 대한 가벼운 농담으로 시작한다. 크리스티안이 과거에 기고한 글에 대해 미국 기자 '앤(엘리자베스 모스)'이 질문하자, 숙취 때문인지 순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크리스티안의 난처한 얼굴과, 이어지는 선문답 같은 답변은 그야말로 현대의 개념 미술에 대한 풍자로 읽힌다. 그러나 앤이 질문했던 '장소'와 '비장소', '전시'와 '비전시', 그리고 '전시가능성'과 '공공성'의 탐구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개념들이다. 영화는 전시되지 않는 이면에서 벌어지는 사회 현상들, 그리고 전시 공간을 침투하고 전복하는 인간 본연의 본성도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크리스티안은 가짜로 도움을 청하는 소매치기 일당에게 핸드폰과 지갑을 도둑맞은 것을 계기로, 안락함의 밖에 있는 카오스적인 세상과 원치 않는 관계를 맺게 된다. 부하 직원의 아이디어에서 착안하여, 그는 빈민가의 건물로 가서 핸드폰과 지갑을 돌려 달라는 협박 편지를 건물 전체에 뿌린다. 초반에는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을 치는 듯 작당 모의를 즐겼던 크리스티안은, 실제로 당사자성을 지니고 타자들의 세계에 들어섰을 때 목숨의 위협이라도 받는 듯 다급하게 행동한다. 그가 보낸 초대장에 대한 답장처럼, 외부 세계의 반격이 돌아온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 부모에게 억울하게 도둑으로 오인 받아서 사과받고자 하는 이민자 가정의 소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티안은 (철저히 자기 뜻에서) 터무니없게 자신의 일상을 침범하는 상대편을 냉정하게 내친다.

 

환한 미술관의 조명 아래 전시된 '더 스퀘어'가 납작하게 평면적인 수평의 공간이었다면, 현실 세계는 어두컴컴하게 불 꺼진 층계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수직적인 3차원의 공간이다. 즉, 보이지 않는 위계가 있는 공간이다. 두 세계에서 상반된 삶을 살고 있는 '크리스티안'들의 아파트는 현실적인 버전의 '더 스퀘어'를 상징한다. 이곳에서는 타인에 대한 불신과 배려 없음(크리스티안이 협박 편지를 뿌리는 행위), 그리고 비열함과 무관심(소년의 정당한 요구를 무시하고 그를 밀쳐버리는 행위, 소년이 도움을 청하지만 이웃 누구도 도와주지 않음)이 팽배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어떠한 성역도,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 불신 사회 혹은 카오스에 대한 눈가림일 뿐인가?

영화의 대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파티에서 돌아와 턱시도를 입은 채 쓰레기장을 뒤지는 크리스티안의 모습은 정신적인 궁지에 몰린 그의 현주소 혹은 도덕적인 파산 상태를 은유하는 동시에 이 인물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속죄를 표방한다. 영화 전반부에 등장하는 깨끗하고 질서정연한 미술관 내부와, 후반부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카오스 상태의 쓰레기장은 극명한 시각적 대비를 이룬다. 전자가 상류층의 위선과 허위를 드러내는 무대였던 반면, 쏟아지는 비 아래서 오물을 뒤집어써 가며 소년의 연락처를 다시 찾아내려 하는 시퀀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숭고미를 품고 있다. 혹은 그러한 숭고한 결말에 대한 패러디로 볼 수도 있다.(이는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크리스티안의 뒤늦은 속죄를 최종적으로 마무리할 사죄의 대상이 증발해버리자, 그의 얼굴에는 후회인지 안도감인지 모를 표정이 감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러한 기성세대의 모습을 후세대, 즉 크리스티안의 두 딸이 가감 없이 목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 야생과 문명이 뒤섞이는 순간

앞 파트에서는, 전시되지 않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사회심리학 실험을 지켜보았다. 이제 전시되고 연출된 공간 안으로 인간의 야생적인 본능이 난입하여 그 의미를 전복하는 반대의 실험도 등장한다.

파티장에서 우연히 하룻밤의 관계를 맺은 후, 앤은 크리스티안에게 '불편한' 질문들을 다른 곳도 아닌 미술관에서 속사포처럼 남발한다. 자신과 성관계를 맺은 이유가 무엇인지, 이런 관계를 자주 맺는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여자를 유혹하는 게 아닌지 직설적으로 묻는 그녀의 두 번째 '인터뷰'는 첫 번째 인터뷰보다도 크리스티안을 더 오리무중의 상태로 몰아간다. 뒤로 보이는 엉성하게 쌓아 올린 의자 작품은 마치 붕괴하기 일보 직전인 주인공의 사회적 위신과 도덕성을 상징하는 듯하다.

 

이처럼 인간적인 본능과 사회적 코드의 대치 상태는 다른 장면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변주한다. 앤의 방에 있던 침팬지보다도 더 원시적인 모습을 한 행위 예술가 올렉(테리 노터리)이 예술계 상류층 파티에 난입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혹성탈출> 시리즈의 '로켓'과 <어벤저스>의 '그루트'를 모션 캡쳐로 연기한 테리 노터리가 실제로 예술계 인사들 앞에서 퍼포먼스를 펼친 이 시퀀스의 핵심은, 이 '원숭이'가 전체를 대상으로 야만적인 행동을 했을 때 어디까지 예술로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하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떠오르는 망설임의 표정에 있다.

공동체가 암묵적으로 동의해야 하는 사회적 코드가 이들의 손발을 옴짝달싹 못 하게 묶는 장면은 또 한편의 신랄한 풍자극이다.

초반에 교양인들은 자신들 스스로 예술가란 권위를 부여한 유인원에게 아무런 대항도 못 한다. 그리고 한 명씩 무력하게 파티장으로부터 퇴장한다. 참다못한 누군가가 침묵을 깨고 그를 공격했을 때, 야만적인 집단 폭행과 적개심 어린 외침("죽여라!")이 기다렸다는 듯 터져 나온다. 이처럼 원초적인 대상은 스크린의 프레임 안에 안전하게 갇혀 있을 때만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전시될 수 있다. 그가 통제 불능이 되어 공동체의 안위를 침해하는 순간, 즉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바뀐다. 이때 야생성과 (집단이 은폐하고 있던) 야만성은 한 몸이 된다.

 

3. 현대 예술계 그리고 교양인의 초상

전작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2014)이 간결하고도 효과적인 구도와 화법으로 가부장, 혹은 남성성에 대한 통렬한 풍자극을 보여주었다면, <더 스퀘어>는 현대 예술계의 양면성을 속속들이 고발하며, 문화인 혹은 교양인들이 처한 자가당착의 상황을 블랙 코미디로 그려낸다. 자가당착의 상황은 크게 아래 두 가지 원인으로부터 발생한다.

 

첫째로, 영화는 도입부에서 주인공 스스로 말했듯,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토대 없이 스스로 존립할 수 없는 예술계의 숙명에서 기인한다. 당연하게도 예술은 어느 시대에나 사회 경제적인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여왔다. 현대 예술은 사회 최상위층의 후원을 받기 위해 동시대의 여러 담론들을 끌어와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동시에, 사회 참여적이고 공적인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 이런 고고한 담론 뒤에는 언제나 물질적이고 금전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둘째로, 현대 예술계는 일반 대중을 전시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언론과 마케팅의 언어를 습득하고 구사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는다. 미디어에 범람하는 자극적이고 시사적인 현안들과 경쟁하기 위해, 미술관의 홍보대행사는 더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영상 메시지를 만들어낸다. 그 결과는 미학적이고 윤리적인 실패였으며 후원자와 대중 양측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게 된다.

이렇게 자신도 모르게 벌어진 대형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크리스티안은 자신에게 책임을 묻는 상사 앞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들어 홍보영상을 옹호하고, 공식 석상에서는 사회적 책임을 들어 아까의 표현의 자유를 부정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자기방어의 수단 외에 그가 진정으로 믿는 신념은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박하게 평가하자면 그의 행동은 원리 원칙을 수시로 바꿔가며 변화무쌍한 주변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소시민의 생존법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좀 더 본질적인 질문, 예술 혹은 우리가 예술이라고 믿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영화의 중반부에는 유명 예술가와의 대담 도중에, 틱 장애를 가진 사람의 산발적이고 거친 욕설이 끼어드는 씬이 있다. 이때 진행자가 애써 화제를 돌려, 아래층에 있는 전시를 어떻게 봤는지 질문한다. 순간 그는 "쓰레기!"라고 외친다. 그 즉시 예술가도 실소를 터뜨린다. 예술가 자신도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는 '저 예술은 쓰레기다'라는 대담한 발언은 교양인 사회 안에서 누구도 함부로 발설하지 못한 금기시된 문장이다.

이는 청소부가 실수로 작품의 모양을 바꿔버린 '위급 상황'과 같은 맥락으로 이어진다. 보고를 받자마자, 보험 회사를 부르지 말고 아무도 모르게 원래 모양으로 되돌려 놓자는 크리스티안의 대처 방식은, 예술이 품은 내재적인 가치를 자신도 믿지 못함을 방증한다. 아무런 맥락이 없다면 청소해도 이상하지 않을 자갈 더미와, 값비싼 예술 작품을 가르는 것은 어쩌면 예술가의 의도를 인정해주는 사회적 합의 혹은 그것을 믿는 개개인의 신념일 것이다.

눈사태처럼 커지는 연쇄적인 도덕적인 딜레마 앞에서 문화인, 혹은 교양인이라는 신화는 허물어지고, 우리는 그들의 초라한 민낯을 바라본다. 특히 영화는 결정적인 순간에 사회적으로 학습된 도덕성이나 신념보다 본능이 우위를 점하는 순간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다. <더 스퀘어>는 전작 <포스 마쥬어 : 화이트 베케이션>보다 한층 확장된 층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서사들을 다룬다. 그 각각의 층위들 사이에서 다성 음악과도 같은 화음을 이뤄낸 감독은, 이토록 우습고도 애잔한 현대 교양인의 자화상을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1] 영화는 <더 스퀘어>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미술 작품은 '더 스퀘어'로 표기.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더 스퀘어
The Square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
Ruben Ostlund

 

출연
클라에스 방
Claes Bang
엘리자베스 모스Elisabeth Moss
도미닉 웨스트Dominic West
테리 노터리Terry Notary
크리스토퍼 레소Christopher Laesso
엘리한드로 에두아르Elijandro Edouard
린다 앤보그Linda Anborg

 

수입 찬란
배급 아이 엠(eye m)
제작연도 2017
상영시간 151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18.08.02

이지영
이지영
《코아르》 영화전문기자.
 평이한 문장이지만 사색을 담은 글을 씁니다. 투박하고 건조한 문장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글을 통해, 삶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실의 일면에 다가가기를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