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함께 걷는다는 것
영화와 함께 걷는다는 것
  • 김민세
  • 승인 2022.06.2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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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여 년 전, 영화는 질주하는 열차의 형태(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로 우리에게 도착했다. 동시에 시작했다. 그 이후 백여 년 동안 멈추지 않고 영화는 달려왔다. 3년째로 접어드는 코로나19 팬데믹 사태가 유례없는 위기를 낳는 듯했으나, 또 다른 가능성을 위한 과도기일 뿐, 영화는 스스로 형태를 바꾸면서까지 언제나 우리에게 도달했다. 그래서인지 과거와 동시대를 부단히 오가며 영화를 보는 행위는 멀찍이서 풍광을 감상하는 것보다는 눈앞에 당도한 거대한 움직임의 일시적인 잔상들을 쫓는 것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그 찰나의 응시로는 열차 전부를 감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밀려오는 자괴감은 모든 씨네필들에게 익숙한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았을 때. 영화는 거대한 운동뿐만 아니라 미약한 걸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담을 수 있는 매체이기도 하다. 영화 안에서 인물이 걷고 있을 때, 그 걸음과 영화가 함께 할 때, 그리고 영화사라는 거시적 흐름 안에서 자신만의 리듬으로 걷는 영화들을 볼 때면 왠지 모를 벅참을 온몸으로 느끼곤 한다. 영화가 내 눈앞에서 나타나고 사라지길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나와 함께 걷고 있다는 믿음. 그런 허무맹랑할 수도 있는 믿음을 기어이 주고 마는 영화들이 있다. 물론, 많은 영화에서 인물들은 종종 또는 자주, 혹은 끊임없이 걷는다. 그럼에도 그런 영화들 사이에서 '반짝이는 걸음'의 순간을 선물하는 특별한 영화들이 있기에 그 영화들이 주었던 위로를 되새기며 쓰고자 한다.

당신이 이 영화들과 함께 걷길 바란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과 함께 걸을 영화를 찾길 바란다.

 

 

<웬디와 루시Wendy And Lucy> 켈리 라이카트Kelly Reichardt | 2008

ⓒ Field Guide Films

<웬디와 루시>는 로드 무비의 형식을 대하는 라이카트의 방법론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그녀는 이런 질문을 전제로 두고 시작한다. 어떻게 이동의 순간을 담아낼 것인가, 어떻게 멈춤의 순간을 만들어낼 것인가. 인디애나부터 알래스카까지, 일자리를 얻기 위한 주인공 웬디의 이동. 자동차가 고장 나 발이 묶인 포틀랜드에서의 멈춤. 영화 내에서 지속해서 등장하는 화물열차 소리는 일종의 풍경이 되어 웬디를 에워싸듯이 포위한다. 이러한 전제 안에서 웬디는 어떻게 운동하는가. 돈도 없고, 갈 곳도 없어 떠도는 웬디를 보고 길거리의 경비원이 비슷한 맥락의 질문을 던진다. "사는 곳 없이는 주소도 없고 일자리 없이는 취직도 없죠" 이제 웬디는 무엇으로 존재를 증명하는가.

걸음이라는 대답. 잃어버린 반려견 루시를 찾기 위해 숲속을 거닐고, 강도를 당할 뻔한 위기를 피하고 불안에 차 걷는다. 발이 묶인 걸음이라는 역설 안에서 그저 하염없이 걷는다. 짙은 페이소스의 걸음들을 지켜보다가 불현듯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웬디가 루시에게 나무 막대기를 던져주며 걸었던 때. 때로는 자신만의 리듬으로, 때로는 루시의 리듬에 맞추어. 그리고 그 걸음을 천천히 트래킹 하는 카메라. 그때의 활력이 있기에 마지막에 와서 다시 걸음을 시작하더라도 한없이 무력해진다. 그럼에도 <웬디와 루시>를 다시금 떠올릴 때면 웬디와 루시가 함께 하는 걸음이 가장 먼저 떠올라 흐뭇해지곤 한다.

 

<초행The First Lap> 김대환Kim Daehwan | 2017

ⓒ 인디플러그

<초행>은 즉흥 연출과 즉흥 연기로만 만들어진 작품이다. 오랜 연애 생활을 해온 지영과 수현이 양가 부모를 만나며 결혼의 문제 앞에 서게 되는 며칠을 담은 이 영화는, 그저 전제로만 존재하는 이야기를 배우들의 즉흥적인 몸짓·말·표정으로 구체화시키며 현실을 밀도 있게 그려나간다.

그러나 <초행>이 특별해지는 지점은 여기에 있지 않다. 이 영화는 '망설임'으로 특별해진다. 가끔 배우들은 대사를 이어가지 못하고, 카메라는 배우들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며 긴장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것조차 배우의 연기인지, 카메라 연출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여기서 '확인할 수 없다'라고 쓰지 않은 것은, 그것이 단순히 배우와 감독의 코멘터리로 확인될 수 없기에 그러하다. 카메라를 두고 관계 맺는 배우와 감독조차 모든 선택 하나하나를 두고 망설이고 있는 것만 같은 공기가 <초행>에서는 느껴진다.

그 망설임의 태도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현실에 맞닿아 공명한다. 주차해둔 차를 찾지 못해 거리에서 헤맬 때. 현관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아 집 앞까지 올라오던 걸음을 멈출 때. 대통령 탄핵 시위로 북적이는 지하철역 안으로 걸어 들어갈 때. 걸음은 주춤하는 순간 앞에서 망설인다. 그럼에도 다시 걷고야 마는 엔딩을 보고 나면 나아진 것 하나 없지만 결국 그들을 응원하게 될 것이다. 어디로 갈지 몰라 망설이지만, 나란히 같은 방향으로. 그 걸음이 가능한 이유는 절실한 믿음밖에 없기에.

 

<도난당하는 것의 즐거움The Pleasure Of Being Robbed> 조쉬 사프디Josh Safdie | 2008

ⓒ Red Bucket Films

사프디 형제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항상 걷는다. 또는 달린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사경을 헤매며 질주한다. 사프디의 영화는 내러티브 이전에, '이동'이 먼저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도로 한쪽에서 그 너머로의 이동. 도로 한 편에서 반대편으로의 이동. 나아가 최근작인 <언컷 젬스>에서 볼 수 있던 에티오피아에서 뉴욕으로의 이동, 총알구멍에서 대우주로의 이동에 이르기까지. 이동의 속도와 규모는 점점 빠르고 커져왔지만, 결국 사프디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이동한다. 아니,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그들의 이동은 목표를 향한 방향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환상을 지켜내기 위한 몸부림에 가깝기 때문이다.

조쉬 사프디의 <도난당하는 것의 즐거움>은 따져보자면 형제의 영화에서 걷는 축에 속하는 영화다. <헤븐 노우즈 왓> 이후로 볼 수 있던 장르적 스타일은 보기 힘들고, 그저 도벽이 있는 한 여성 엘레노어의 소소한 일상이 지나갈 뿐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걷고, 가끔은 훔친 차를 운전하다가, 다시 걷는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델로니어스 몽크의 피아노 연주는 그녀의 즉흥적인 걸음을 마치 재즈의 리듬과도 같게 만든다. 그 리듬 속에서 엘레노어는 절도가 성공하는 행운의 연속을 맞게 되지만, 그 어떤 것을 훔쳐도 만족하지 못한다. 환상 비슷한 무언가에 중독된 것처럼 거닐 뿐이다. 경찰에 체포되어 풀려난 뒤에도 그녀는 절도를 멈추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흩날리는 눈 사이를 걸어가는 그녀의 옆모습을 보면서 기이한 환상의 순간을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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