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이 없는 무형의 '실종'
결말이 없는 무형의 '실종'
  • 이현동
  • 승인 2022.06.2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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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 보일 때 경험하는 절멸의 순간"

카탸아마 신조는 자신이 '일본 유일의 봉준호 제자'라며 자랑스러운 태도를 밝히는 만큼 봉준호 영화의 연출부로 일하면서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실종>(2021)의 구성은 <살인의 추억>(2003)의 모티브가 시대상을 반영했던 것과 유사하게 조응한다. 이를테면 영화에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구성되는 연쇄 살인마 야마우치 테루미(시미즈 히로야)는 세 건의 살인사건 범인들을 조합해 만든 인물이며, 이것은 영화의 짙은 장르적 성격을 전체적으로 스케치한다.

 

ⓒ 디스테이션

<실종>은 두 가지의 가능성을 지닌다. 유형(有炯)의 희망이 무형(無刑)으로서의 절망으로 변주하는 과정과 결말의 경계에서 잠재적인 형태로 위치한다. 영화에서 이를 다룰 때 실종의 동기가 범죄로 이어지는 것이니만큼 일정 부분 장르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주제라는 점을 고려할 때, 제작자들의 고민은 결국 스타일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 일반적일 테다. 이 영화는 세 명의 시선으로 시점이 플래쉬백(flashback)을 통해 분산되면서도 결코 캐릭터, 서사의 성질이 합일되지 않는 가변적인 형태로 목도된다는 점에서 진기하다.

여기서 <실종>의 강점은 자칫 산만하게 전개될 수 있는 스타일과 이야기를 어느 순간에도 환기하지 않고 끝까지 묵직하게 견인한다는 것이다.

<올드보이>(2003)에서 오대수(최민식)가 장도리로 수많은 이들을 난도질하는 파멸적이고 절도 있는 롱 테이크 씬과는 별개로 서서히 줌 인(zoom in)되는 <실종>의 첫 장면에서 망치를 들고 서 있는 남자의 몸짓과 표정은 무척이나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허공을 향한 우둔한 망치질은 영화에서 공기처럼 편만하게 가동되는 무한한 왕복성, 그것은 장차 영화의 마지막 쇼트와 직결되는 왕복적인 지평이라는 점을 명시한다. 곧바로 이어지는 쇼트로 급박하게 어디론가 뛰어가는 아이를 조명하는 디졸브(dissolve)는 즉각적으로 각각의 인물들의 성질을 경계 짓는다. 이 영화의 정체성을 상호적으로 교호하고 있는 이 초반 숏은 온전하게 마찰되지 않는 가족, 곧 윤리적인 반향을 예고한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자기 딸인 카에데(이토 아오이)에게 "눈을 감으면 나쁜 것만 떠오른다"고 말하는 사토시(사토 지로)는 침대가 겨우 들어설 수 있는 협소한 공간 안에서 홈쇼핑 광고가 방영되는 티비를 무심하게 응시한다. 소비가 어려운 생활에서 유일하게 그가 눈을 뜰 수 있는 공간은 물질적인 허영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그가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상기할 수 있는 무형의 공간은, 이 영화의 딜레마로 밀착된 자본이란 거대한 물성 앞에 환영처럼 둥둥 떠다닌다. 곧바로 무형화된 사토시의 실종은 연쇄살인마의 존재를 다시금 소환하면서 공간을 복기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카에데는 아빠가 운영하는 탁구장에 떨어져 있는 하얀 양말을 관찰하고, 집에 흩어져 있는 사물들이 클로즈업은 캐릭터의 굴절된 감정과 공간에 내제된 주제에 관한 단서를 제공한다.

 

ⓒ 디스테이션

사토시가 연쇄 살인마를 언급한 이후 두 번째로 등장하는 야마우치 테루미의 수배전단지가 줌 인될 때, 동시에 부각되는 건 흥미롭게도 그 옆에 카에데가 부착한 사토시의 실종전단지다. 카메라 앵글이 겨냥하는 건 둘의 관계성속에 무던하게 침식된 동일성이다. 이러한 동일성은 지속해서 카에데가 얼마나 어른들을 향한 신뢰가 부족한지를 보여준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앞만 보자"는 수녀의 조언에 침을 뱉는 카에데는 어른들이 가진 허위의식을 비판하며, 심지어 아버지에 대한 의심도 수거하지 못한다. 주로 테루미는 육욕(肉慾)을, 사토시는 물욕(物慾)을 그리고 카에데는 이 둘을 교정하는 역할로 기능을 하는데, 이들을 모두 뚫고 주제의 밀도를 강화하는 인물은 최초에 자살을 의뢰했던 찌르레기(모리타 미사토)라는 존재이다. 

찌르레기의 자살 실패와 그 이후에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은 테루미와 사토시의 욕망을 확장한다. 찌르레기가 둘을 지칭하는 육욕과 물욕이 동시에 폭발하기 위한 도화선으로 작동할 때, <실종>은 확장된 내부의 어둠을 목격하게 한다.

테루미에게 죽지 않고 다시 일어선 찌르레기가 사토시에게 죽여달라 부탁할 때, 불치병에 걸려 죽은 그의 아내의 얼굴이 찌르레기와 오버랩 되는 장면은 유형화되지 않고 무형화된 혹은 될 실종, 그 자체의 허무를 연쇄하는 데에 주목한다. 우리는 찌르레기의 죽음에서 사건의 종결이 아닌 다시 한번 지시되는 물욕의 욕망을 본다. 카에데는 테루미가 도주할 때 놓고 간 아버지의 핸드폰에서 발견한 범죄의 흔적을 쫓기 위해 자살의 대상이 되기를 자처한다. 여기서 그녀는 아버지의 유형화된 존재와 마주한다. 곧이어 마치 실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관찰되는 마지막 장면은 이 모든 서사와 이미지를 결집하여 한 폭의 중첩된 이미지로 배열된다.

 

ⓒ 디스테이션

탁구의 운동성

카타야마 신조는 가장 애착이 가는 장면 중에 마지막 쇼트인 사토시와 카에데가 오랜 시간동안 랠리를 주고받는 장면을 꼽았다. <실종>의 모든 주제와 서사를 집약하고 응축하는 이 장면은, 탁구를 구성하는 공의 운동성과 윤리 혹은 도덕이라는 선악의 경계를 통해 주제는 시각적으로 발화한다. 처음에 공은 추락하지 않고 왕복한다. 경계를 지칭하는 네트를 차츰 줌 인(zoom in)할 때, 우리는 낯설지 않은 감각에 동요된다. 사토시와 테루미, 이 두 인물이 함께 게시판에 부착되었을 때, 줌 인이 상징하듯, 그 두 명이 병렬된 존재를 공유하고 있음을 지시한다고 보았을 때, 네트는 불안정한 관계 그리고 다시금 왕복되는 범행의 기호로 배치되는 것이다.

지속해서 왕복되고 있는 '이 운동성'을 과감하게 끊어내는 건, 사토시가 자신의 앞에 유형의 존재로 서 있는 자기 딸의 존재를 자각할 때이다. 범행의 대상이 딸인지를 눈치챌 때, 즉 아버지의 욕망의 유형이 퇴락하는 순간에 유형은 무형으로 변용된다. 이어서 형체 없이 소리로만 탁구를 치는 딸과 아버지의 손짓에서 비롯되는 무형의 운동성은 이제는 유형이 실종된 상태에서 진행된다.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까지 이탈되지 않는 이 프레임에서 우린 어떠한 결말도 예상할 수 없다. 오로지 무형의 실종만 남아 계속해서 네트를 왕복한다. 사이렌 소리만 울릴 뿐, 결말로 지시되는 이미지는 없다. 이러한 <실종>의 마지막 경계의 이미지는 유독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과도 유사한 면이 있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선(線)'의 경계를 탐구의 대상으로 한 봉준호의 <기생충>에서 무형의 선은 공간뿐만 아니라 대사에서도 직접적으로 그어진다. 박사장(이선균)은 문광(이정은)이 잘하지만 무엇보다 선을 지킬 줄 아는 게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이 선의 정체는 무엇일까. 은둔 생활로 마무리되는 기택(송강호)의 존재에서도 마찬가지로 무형이 된 그의 끝을 알 수 없다. 소리로만 관측되던 <실종>의 이미지, 그리고 <기생충>의 모스 부호의 이미지는 교묘하게도 이어질 시대를 규정하는 결말로 정박하는 것이라면 인간의 실존은 무형의 경계를 오고 가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 디스테이션

실종
Missing
감독
가타야마 신조
Shinzo Katayama

 

출연
사토 지로
Sato Jiro
이토 아오이Aoi Ito
시미즈 히로야Hiroya Shimizu
미사토 모리타Misato morita

 

수입 엔케이컨텐츠
배급 디스테이션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23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022.06.15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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