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호수'라는 스크린이 투사하는 이야기
[interview] '호수'라는 스크린이 투사하는 이야기
  • 이지영
  • 승인 2022.06.18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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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 <애프터워터> 다네 콤렌 감독
ⓒ Flaneur Films

 

나 이제 일어나 가리라, 이니스프리로 가리라

거기 진흙과 욋가지로 작은 오두막을 짓고

아홉 고랑 콩밭 일구며 꿀벌통 하나 두고

벌들 잉잉대는 숲에서 홀로 살리라

거기서 천천히 내려오는 평화를 누리리라

안개 아련히 피어나는 아침부터 귀뚜라미 우는 저녁까지

한밤엔 온통 반짝이는 별빛, 한낮엔 보랏빛 꽃들의 향연

저녁엔 홍방울새 날개 소리 가득한 그곳

나 이제 일어나 가리라, 밤이나 낮이나 항상

호숫가에 철썩이는 물결의 낮은 소리 들리나니

한길 위에 서 있을 때나 회색 포도 위에 서 있을 때면

내 가슴 깊숙이 그 물결 소리 들리네

- 윌리엄 B. 예이츠, '이니스프리 호수 섬'(The Lake Isle of Innisfree)

 

자연과의 경계 없이 흐르는 과거 혹은 미래의 풍경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매기(힐러리 스웽크)'에게 들려주는 예이츠의 시를 기억하는 관객들이 있을 것이다. 런던에서도 고향 아일랜드의 이니스프리 호수 섬을 그리워하던 19세기 시인의 마음은,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울림을 준다. 이처럼 자연과 문명이 분리된 일상을 떠나, 텅 빈 휴식이 존재하고 모든 것이 천천히 움직이고 흐르는 호수로 되돌아가고 싶은 다네 콤렌 감독의 마음은 그의 전주 시네마 프로젝트 작품 <애프터워터>에 반영되어 있다.

콤렌의 실험적인 카메라가 포착한 대상은 '호수'이다. 이 영화의 발단은 브라질리아의 '빌라 아마우리(Vila Amaury)'라는 도시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빌라 아마우리는 브라질리아의 건설 노동자들이 건설 폐기물로 만들었다가 호수가 생기면서 수몰되어 사라진 도시이다. 이 도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감독은 G. 허친슨이란 호소학(湖沼學, limnology) 학자를 알게 되었고, 호수와 물, 유동성을 주제로 시나리오를 작성하게 된다.

 

1986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출생. 영화 연출과 현대 미술을 전공했다. 그의 단편영화들은 칸영화제를 포함한 다양한 영화제에서 상영되고 수상했다. <꿈의 문장 Fantasy Sentences>(2017)으로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특별언급상을 받았다. ⓒ 전주국제영화제

호수는 바다나 수영장과 같은 다른 '물'과는 구분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호수는 바다처럼 거칠고 동적이지도 않고, 수영장처럼 화학 제품과 인간의 부산물로 가득하지도 않다. 이 자연물은 유독 고요하고, 에드거 앨런 포가 공포스럽게 표현했을 만큼 알 수 없이 깊은 심연을 가지고 있다.

호수의 잔잔한 표면은 거울상처럼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반영한다. 거시적으로 본다면 인간이 지어 올리고 허물었던 유구한 문명의 역사는 찰나의 이미지상으로 호수를 스쳐 지나가고, 호수는 이를 관조하며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감독의 카메라는 호수의 수면 아래를 탐사하듯 촬영하기도 하지만, 주로 흐르는 물의 표면에서 오랫동안 머무른다. 가까이 있는 듯, 손 닿을 수 없는 시공간의 이야기를 상상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호수의 표면은 영화 스크린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전주에서 두 번째 장편 <애프터워터>로 5년 만에 다시 관객들을 만난 다네 콤렌 감독을 인터뷰하고 왔다.

 

이지영

첫 번째 장편 이후 2번째 장편을 찍기까지 5년의 세월이 있었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다네 콤렌

단편 영화를 하나 찍었고, 프로젝트도 몇 개 진행했습니다. 지금은 다음 장편 작품을 준비 중이고, 2편의 단편도 같이 계획 중인데요. 팬데믹이 아니었다면 좀 더 빨리 진행이 되었을 텐데, 아무래도 팬데믹의 영향인지 기간이 좀 더 길어진 것 같습니다.

이지영

감독님은 G. 허친슨의 '호소학'과 호수에 대한 텍스트들을 깊게 연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호소학이라는 학문이 다른 문학이나 예술 텍스트와는 다른 관점이나 시선을 선사해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또 영화 언어 혹은 영상 언어로 소통할 수 있는 지점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다네 콤렌

허친슨은 호소학을 처음 주창한 사람입니다. 그의 텍스트 안에서 과학과 예술 언어가 간극이 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허친슨이 인용하는 글이나 시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 전주국제영화제

특히 저는 그가 호수를 바라보는 방식의 자유로움에 매료되었습니다. 호수에 대해 쓴 텍스트 자체가 굉장히 유려하고 자유롭게 적혀 있었고, 책에 등장하는 사진이나 이미지들이 영화의 기본적인 프레임을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호수가 가지고 있는 물질적 속성을 적어 놓은 글들이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매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도 영화로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영화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지영

호수라는 자연을 대상으로 찍게 되신 계기와, 호수 외에도 앞으로 영화로 찍고 싶은 자연 대상은 없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다네 콤렌

저는 자연과 문명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들은 사람과 자연을 구분하여 사고하기 마련이고, 결국 우리가 다 같은 자연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브라질리아에서 수몰된 마을을 조사하고 있었는데, 이때 호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호수가 저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다음 작품은, 같은 자연 풍경에 대한 영화이지만 좀 더 다른 접근으로, 장르로 치면 호러 영화로 만들려고 합니다. 주인공이 스스로 인간이 아님을 인식하게 되고, 남자이지만 생리를 하는 등, 자신이 남성이 아니라는 것을 점차 인식하게 되는 영화입니다.

이지영

무척 흥미로운 영화가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 또 어떤 자연 대상이 감독님을 찾아올지 기대됩니다.

 

ⓒ Flaneur Films

이지영

인간에서 비인간으로, 성별이 지워진다는 설정을 들으니 떠오르는 질문이 있는데요. 첫 번째 파트에서 호숫가의 두 사람이 있다가, 낯선 사람이 와서 세 사람이 되는 것의 의미를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들은 점차 무성(non-sexual)의 존재가 되어 가는 것 같기도, 세 사람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온전한 하나의 결합체가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다네 콤렌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커플 모드'를 깨고 그로부터 탈피하고 싶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 안에 새로운 타자가 들어서면서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들 사이의 부드러움, 친밀감, 밀착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이지영

앞서 말씀하셨듯이, 수몰된 도시, 브라질리아의 '빌라 아마우리(Vila Amaury)'에 대한 감독님의 인터뷰를 읽었습니다. 수몰된 도시에 대한 이야기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 이로 인한 슬픔과 상실을 연상하게도 합니다. 한국에서도 단양시 충주댐 건설로 인해 한 지역이 수몰된 아픔이 있었고, 전 세계적으로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들이 많은데요. 이것은 거시적인 역사, 특히 상실의 슬픔과 관련된 것인가요?

다네 콤렌

호수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면서 만난 지역 주민들이 수몰된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저는 그 이야기들을 수집하였습니다. 과거의 일화들을 사람들이 여전히 기억해주고, 후대로도 전승되기 때문에 저는 그것이 슬프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지영

호수에 대한 영화인 만큼 로케이션이 중요했을 것 같은데, 어떤 방식으로 누구와 함께 탐사하셨나요? 촬영지를 선정하실 때 중요하게 보신 기준이 있었나요?

다네 콤렌

이 영화는 '라고 데 사나브리아(Lago de Sanabria)'라는 호수에 대한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고, 이소설을 영화를 위해 다시 각색했습니다. 그래서 방문하지 않고도 이 호수에서 찍기로 하였습니다. 촬영 3일 전부터 차를 빌려서 로케이션을 답사하러 다녔습니다.

로케이션으로 선택한 이유는, 호수에 대한 연구소나, 더 이상 발전을 하지 않는 핵 발전소 등, 미래와 과거가 서로 교차하는 곳에 호수가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호수를 둘러싼 장소에서 과거와 미래, 이 시간의 교차성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감독인 제가 로케이션을 결정하면, 촬영감독님(DOP)과 함께 호수 주변을 계속 돌아다니면서 촬영할 씬들을 같이 정했습니다. 이렇게 진행한 것은 예산이 타이트했던 이유도 있었습니다.

 

ⓒ Flaneur Films

이지영

감독님의 영화는 특히 영화관에서 보았을 때, 시각뿐 아니라 숨 쉬는 호흡이든가, 맨발로 밟는 촉각 하나하나가 잘 느껴져서 잊을 수 없는 시네마적인 경험이었는데요. 이런 감각들을 극대화하기 위해 촬영 기법적으로 어떤 노력을 기울이셨나요?

다네 콤렌

이미지를 보여주는 데 있어서 특별한 기법이 있었다기보다는 영화에는 기본적이고 촉각적이고 사운드적인 것들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필름 카메라는 우리 시선과 맞닿아 있는 반면, 핸드폰은 자연을 축소해서 전혀 다른 상을 보여주죠. 저는 영화가 눈과 귀로만 보는 게 아니라 촉각적인 매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모든 감각을 열고 세상과 협상(negotiate)을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지영

자연의 물 뿐만 아니라 사람의 체액(눈물, 땀, 침, 소변)에 대한 묘사가 나오기도 하고, "눈물을 다시 흘리고 싶다"라는 텍스트가 중간에 언급되기도 하는데요. 이 체액들은 인간의 원초적인 노동, 식욕, 배설욕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몸에서 배출되는 물과, 자연의 물이 섞이면서 일체됨을 표현하고 싶으신 것 같기도 했습니다. 이 장면들을 넣은 이유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줄 수 있으신지요?

다네 콤렌

우리의 몸도 역시 단단하지 않고 유체로 흐르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영화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 Flaneur Films

이지영

첫 번째 파트에서는 인물들이 잠을 자는 모습이나 꿈을 꾸는 모습이 자주 등장합니다. 개인적으로 꿈을 자주 꾸는 편이신가요?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다고 생각이 든 적이 있으신가요?

다네 콤렌

우리의 몸이 유체적인 것처럼 영화 또한, 현실과 꿈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도 때때로 꿈을 꾸고, 이렇게 꾸는 꿈들이 영화에 반영되기도 합니다.

이지영

초반의 내레이션으로부터 후반부로 가면 점차 언어가 사라지고 춤과 같은 느린 동작이 이어지는데요. 이것은 제 해석입니다만, 언어에서 비언어로, 춤이 상징하는 원초적 예술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동작에 이르렀는지 설명해줄 수 있으신지요? 이런 동작들은 특정 곤충이나 자연물을 모방한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다네 콤렌

먼저 이런 해석을 듣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달하고자 하는 특정한 이미지들은 있었지만, 특히 마지막 파트에 있어서는 좀 더 직관적으로 촬영을 했습니다. 리허설을 하긴 했지만, 우리가 '동지(companion)'라고 부르는 무용수분들이 즉흥적으로 움직이고 그들의 움직임을 카메라에 담는 것은 주로 촬영 감독님의 재량이었습니다.

 

ⓒ 전주국제영화제

움직임에 있어서 어떤 대상을 모방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호수에 있던 물고기의 유려한 움직임이 호수와 닮았다고 생각해서, 그로부서 많은 영감을 받기는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면대면으로 서로를 바라보면서 대화하는데, 가까이서 바라보지 않아도 소통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지영

익스트림 클로즈업과 망원으로 찍은 장면들이 인상 깊었습니다. 현미경으로 본 세포들이 소우주 같기도 하고, 세 사람을 원경으로 찍었을 때 현미경 위의 세포들 같기도 한 신기한 경험이었는데요. 이렇게 '낯설게 하기'를 만들어내는 숏들에 어떤 의도를 담으셨는지요?

다네 콤렌

저는 자연의 풍경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고 싶어서, 과학 연구를 하는 장면에서부터 아주 먼 거리에서 익스트림 롱샷으로 찍은 풍경까지 다양하게 담아보려 했습니다. 마치 회화의 역사에서, 풍경을 여러 다른 방식으로 담아내려 한 것처럼 대상을 다양한 구성으로 보려고 했습니다.

이지영

오늘 이렇게 시간을 내주시고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한국에서 남은 체류 기간을 어떻게 보낼 생각이신지요?

다네 콤렌

며칠 동안 전주에서 프로그래머들, 동료 감독들과 '홍상수 바'라는 공간에도 가보면서 즐겁게 보냈습니다. 이런 기회를 준 전주국제영화제에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틀 뒤에 출국하는데, 일정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면서 보낼 생각입니다.

[인터뷰 이지영, karenine@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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